장작림이 와신상담하며 힘을 크게 키우고 있을때, 오패부는 중국 최강의 사나이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직봉대전 승리후 오패부는 원세개, 단기서 이후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고 타임지 표지를 장식할 만큼 대외적인 인지도도 높아졌습니다. 군사적 실력이 커짐에 따라 오패부는 점점 정치적인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는데, 직계 군벌이 정부를 떡주무르려듯 하려는 것입니다.
오패부는 1차 직봉대전 중인 1920년 8월 1일 전국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대총통 서세창을 쫒아내고 직계가 정부를 장악하려 했지만, 당시에 건재하던 장작림의 반대 등으로 이 수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때는 직계 내부에서도 말들이 많아 실패했습니다.
이 계획 실패 후 오패부는 '무력통일' 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대체로 군벌이 통일을 부르짖으면 본질은 자기가 다 해먹겠다는 것인데, 이것도 실패합니다. 어째서 실패하느냐고 하면, 양계초 때문이었습니다.
양계초는 근현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 중 하나입니다. 강유위의 제자이면서 그보다 더 급진적인 편이죠. 이 시기 양계초는 어용 문인 같은 모습을 보였는데, 각 군벌들의 입장에서 "연성자치"의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그 뜻은 각 성이 자체적으로 헌법을 제정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이 헌법에 따라 각 성은 정부를 조직하고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자치레를 하는 각 성은 대표를 파견하여 연성회의를 조성하는데 이렇게 되면 중국인 미국이나 스위스같은 연방제 국가가 됩니다.
양계초의 이런 주장이 오패부를 방해하는 결과가 되어 무력통일론도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패부에게는 세번째 수가 있었는데, 잊혀진 인물을 다시 전면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 잊혀진 인물이란 다름 아닌 여원홍이었습니다.
중국 영화 신해혁명에 나오는 여원홍 배우와 실제 여원홍의 모습.
여원홍은 청일전쟁에 북양함대 소속으로 참전한 적이 있을만큼 세대가 깊은 북양함대의 원로입니다. 게다가 신해혁명 당시 연대장 급으로 신군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일어나며 신군이 들고 일어나 혁명당원들이 여원홍에게 하북성 군정부 도독을 맡으라고 떠민 끝에 어쩌다보니 혁명의 기수가 된 웃지 못할 사연이 있습니다. 중화민국 정부가 1912년에 수립된 이후 부총통을 맡은적이 있을 정도로 이력도 화려했습니다.
여원홍은 단기서를 언급하면서 말한적이 있습니다. 당시 대총통을 하고 있던 그는 장훈의 복벽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잡은 단기서에게 쫒겨나고, 풍국장이 대리하다가 지금의 대총통인 서세창에게 이어졌습니다.
지금 여기서 여원홍이 복귀하면 자연히 서세창도 물러나는 모양새가 됩니다. 게다가, 남경 정부 시절부터 부총통이었던 여원홍이 대총통으로 복귀하면, 쑨원이 이끄는 북벌군의 명분도 상당히 약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오패부는 그것을 노렸습니다.
1922년 5월 10일, 오패부는 천진에서 보정으로 와 즉각 국가 장래에 대한 일을 토론하는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조곤의 추종자들은 현재 직계 천하가 된것을 알고 새삼스레 말을 돌리는 것도 없이 본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총통 서세창을 쫒아버리고 조곤을 총통에 올리자고 말입니다. 오패부는 여기서 반대 의견을 내면서, 자기가 구상하고 있던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이 너무 속보이지도 않고 그럴듯 하다고 여겨 논의는 합의를 보았고, 직계 수뇌부는 이제 여원홍을 대총통으로 올리기 위해서 공작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5월 14일, 오패부는 이 제안을 모든 북방 직계 군벌들에게 비밀 전문으로 보냈습니다. 말인즉슨 의견을 듣겠다는것이지만 실상은 서로 모두 한마음을 먹고 서세창을 압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주장을 강하게 밀고나갈 인물이 필요했는데, 직계 색깔이 너무 강한 인물이면 속이 보이므로 좀 그 색깔이 엶은 인물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이 손전방(孫傳芳)이었습니다.
나중에 장작림을 귀찮게 하는 손전방. 이 사람의 최후도 드라마틱 합니다.
오패부는 손전방을 충동질해서 자기 의견에 동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손전방은 공식적으로 동조하는 전문을 발표하면서 북방의 서세창과 남방의 쑨원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패부는 여원홍의 총통직을 회복시키자고 주장하면서 사방에 전문을 보냈습니다. 내용이 이러했습니다.
─ 남북이 분열되고 법질서가 무너졌다. 통일로 가는 길은 법통을 회복하는 것이 첩경이다. 마땅히 여원홍 전임 총톡을 복위시키고 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만들고, 부총통을 선발하여야 한다. 비상 정부(쑨원 정부)가 법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발흥하고 있는데 법통이 회복되면 다른 깃발은 없어질 수 있다. 만일 소요를 일으키는 무리가 있다면 마땅히 함께 없애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쑨원이 민의를 대표한다는 구실로 일어나고 있는데, 오패부는 오히려 민의를 대표한다면서 쑨원과 서세창에게 칼날을 겨누었습니다. 이런 오패부에게 양계초는 찬성한다는 의견을 내었고, 국민당익우회, 헌정연구회, 정학계 등 여러 국회 단체들도 찬성을 했습니다. 전보를 발표해서 여론을 조작하는게 오패부의 특기인 만큼, 국민 여론도 오패부의 의견을 지지하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5월 27일, 오패부는 서세창에게 곧바로 비밀 전문을 보냈습니다. 전문 내용은 직계의 생각과 방침에 대한 통보였고, 이미 10여 개 성이 자신들의 의견을 지지하니, 좋게 퇴위를 준비하라고 압박하면서 나중에 몰랐다고 다른 말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6월 1일, 과거에 국회의원이었던 인물들이 무려 203명이나 몰려들어 회의를 했습니다. 그들 뒤에는 조곤과 오패부가 있었고, 내용은 당연히 서세창이 진정한 총통감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쯤되자 서세창도 더 이상 버티고 있기가 어렵다는걸 깨달았습니다.
서세창은 자신은 몸이 쇠약해서 물러난다고 공식 발표하며, 분노를 삭히고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잘 살아남았지만 이젠 무리였고, 천진의 사저로 들어가 은거했습니다.
피동적인 상황이 된 쑨원은 일단 오패부의 법통 회복 주장은 찬성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오패부가 원세개 통치 시절이나 단기서 통치 시절에 남방을 공격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역사적으로 보자면 오패부 역시 믿을 만한 군벌이 못된다고 욕했습니다. 즉 오패부의 뜻을 성실한 뜻으로 보기 힘들기때문에 북벌 계획을 취소시킬 수 없다는, 제법 영리하게 상황을 빠져나오는 대처였습니다.
오패부의 계획과 여론 조작이 치밀했던 탓에 대부분의 군벌, 지식층, 시민들은 지지를 보냈습니다. 다만, 절강 독군 노영상만이 좀 다른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몇몇 군인들 논리로 정해진 법률을 변경할 순 없는 일이고, 두세 명 의원 주장으로 전체 국회를 대표할순 없는 것 아닌가?"
당연히 조곤이나 오패부는 불쾌했습니다. 노영상은 나중에 이들과 또 갈등을 빚게 됩니다.
아무튼 6월 11일, 여원홍은 천진에서 북경으로 와 대총통에 취임했습니다. 그런데, 여원홍은 수하에 단 한명의 병사도 거느리지 못한 불쌍하고 외로운 신세였습니다. 군정 대권은 모두 조곤과 오패부의 수중에 있었고, 아무런 실권도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렇게 1년쯤 시간이 지나고나자, 밑도끝도 없이 건달 패거리들이 공민당 이니 이름을 드높이고 천안문 광장 앞에서 대회를 여는 한편 여원홍의 퇴진을 요구했고, 시민들이 함성을 지르며 여원홍의 집을 포위하고 삐라를 뿌려댔습니다. 그 뒤에 누가 있는지야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면 모두 알 일입니다.
여원홍은 못 견디고 북경을 떠나 천진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진역에서 직예 성장 왕승빈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에게 체포당합니다. 여원홍은 대총통 지인을 내주고 사직서를 쓰고 나서야 이 암울했던 가짜 대총통 신세를 면하고 집에 들어가서 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여론 조작이 펼쳐졌고, 각종 뇌물이 의원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5,000원에서 1만원을 받은 의원들은 모두 한결같이 조곤을 대총통으로 만들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이번 일은 조금 이상하다는것을 모두 눈치챘고, 의원들을 돼지 같은 놈들이라고 욕했지만 이미 중원 천지가 오패부의 천하라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조곤은 마침내 대총통에 취임했고, 직예 군벌이 중국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패부가 비열한 수단으로 의기양양하게 뽐낼때, 장작림은 조용히 복수의 시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줄 수 있는곳으로 손을 벌렸습니다. 그 대상은 '크리스천 장군' 풍옥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