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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찬의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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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의 상징 스크랩 보제존자(普濟尊者) 시(諡) 禪覺(禪覺)의 탑명(塔銘)병서
일세기 추천 0 조회 26 14.04.05 01: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보제존자(普濟尊者) 시(諡) 선각(禪覺)의 탑명(塔銘)

 

<이 글은 신륵사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왕사(懶翁王師) 석종비(石鐘碑)에 새겨진 글을 변역한 것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정치가이며 최고의 문장가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이 글을 짓고 동고(東皐)권중화(權仲和)께서 비문의 글씨와 전액(篆額)을 썼다. 보제존자(普濟尊者) 석종비는 보물 제229호로 되어있는데 나옹왕사와 목은이색선생(牧隱李穡先生)은 예양(禮讓)과 충절(忠節)의 古場인 경북 영덕출신이다.>

 

  현릉(玄陵 공민왕)이 재위(在位)하신 지 20년째 되는 경술년(庚戌年 1370) 가을 9월 10일에 스님을 불러서 서울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달 16일에 스님이 우거(寓居)하고 있는 광명사(廣明寺)에 양종(兩宗) 오교(五敎)에 속한 여러 산(諸山)의 납자(衲子)들을 대거 불러 모으고는, 각자 자득(自得)한 경지가 어떠한지 시험 하면서 이를 공부선(工夫選)이라고 이름 하였는데, 이때 임금도 친히 행차하여 관람하였다.

 스님이 분향(焚香)을 마치고 나서 법좌(法座)에 올라 말하기를 “과거와 현재의 상투적인 격식을 타파하고, 범부와 성인의 자취를 모조리 쓸어버린 뒤에, 납자의 명근(命根)을 끊어 버리고 중생의 의망(疑網)을 털어 버려야만, 조종(操縱)하는 권한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서 기틀에 따라 거리낌 없이 변통(變通)할 수 있을 것이다. 삼세(三世)의 제불(諸佛)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들이 행한 그 법도가 사실은 하나이니, 여기에 모인 여러 납자들은 꾸밈없이 사실대로 대답해 주기 바란다.”하였다.  

 이에 납자(衲子)들이 차례로 들어가서 대면(對面)하게 되었는데, 몸을 굽히고 땀을 뻘뻘 흘리기만 할 뿐, 모두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중에 어떤 이는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체득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어떤 이는 너무도 광적(狂的)이 된 나머지 말에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예외 없이 1구(句)에 막혀서 뒤로 물러서곤 하였다.  

 그래서 임금도 관람하다가 언짢게 여기는 듯한 기색을 보였는데, 환암 혼수 선사(幻菴 混脩 禪師)가 뒤에 이르러서는 스님이 3구(句)와 3관(關)에 대해서 모두 차례로 점검을 할 수 있었다. 이 대회를 마치고 나서 스님은 회암사(檜巖寺)로 돌아갔다. 

 신해년(辛亥年 1371, 공민왕20) 8월 26일에 공부상서(功部尙書) 장자온(張子溫)을 보내 교서(敎書)와 함께 직인(職印)을 내리고 법복(法服)과 발우(鉢盂) 一體를 갖추게 하였으며,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하였다. 그리고 송광사(松廣寺)가 동방의 제일도량(第一道場)이라 하여, 스님을 그곳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372, 공민왕21) 가을에 스님이 지공(指空)의 이른바 삼산(三山)과 양수(兩水)에 대한 기별(記別)을 우연히 떠올리고는 회암사로 석장(錫杖)을 옮기려고 생각하였는데, 때마침 부름을 받고 이 사찰의 법회(法會)에 참석하게 되었으므로, 상에게 요청하여 이곳에 머물게 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에 스님이 말하기를“이곳은 대개 선사(先師)인 지공 스님께서 지시한 대로 중건한 곳인데 병화(兵火)로 소실(燒失)되고 말았으니, 어찌 감히 그 뜻을 이어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대중과 상의하여 건물을 증축하여 더욱 넓히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공사가 모두 완료되자, 병진년(丙辰年) 1376, 우왕2) 4월에 낙성(落成)을 축하하는 법회를 크게 열었다.  

 그런데 대간(臺諫)이 탄핵하여 논하기를 "회암사는 경읍(京邑)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사녀(士女)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왕래하느라 더러는 생업(生業)을 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를 엄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므로, 상이 분부를 내려 스님의 거처를 영남 밀양(密陽)의 영원사(塋源寺 )로 머리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빨리 떠나도록 독촉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그때 마침 스님의 병이 제발하게 되어 가마를 타고서 사찰의 대문(大門)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못가에 이르렀을 때 스님이 직접 가마꾼에게 길을 일러 주며 열반문(涅槃門)으로 나가게 하였는데, 이를 목격한 대중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목 놓아 통곡하자, 스님이 이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부디 노력하고 노력해서 나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의 여행길은 마땅히 여흥(驪興)에 서 끝날 것이다.”하였다.

 한강(漢江)에 이르렀을 때 스님이 호송 관원인 탁첨(卓詹)에게 “나의 병세가 위중하니 뱃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지 7일 만에 여흥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스님이 탁첨에게 “조금 머물면서 병에 차도가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므로, 탁첨이 마지못해 그 付託을 들어주면서 신륵사(神勒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5월 15일에 탁첨이 다시 출발을 급히 재촉하자, 스님이 말하기를 “그것은 없지 않은 일이다. 이제 내가 떠날 것이다.”하고는 이날 진시(辰時)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는데 그때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산마루에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에 화장(火葬)을 하고 나서 유골(遺骨)을 수습할 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 사방 수백 보(步)의 땅을 적셨다. 사리(舍利) 155과(顆)를 얻었는데, 기도를 하고는 이를 다시 분류해서 558과를 얻었다. 이 밖에 사중(四衆)이 재(灰)속에서 찾아내어 각자 비장(秘藏)한 사리가 또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뒤로 신령스러운 광채가 사흘 동안이나 비치다가 사라졌다 한다. 승려 달여(達如)가 꿈속에서 보니 화장한 곳의 누대(樓臺) 아래에 용(龍)이 서려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말(馬)과 흡사했다고 한다. 

 또 유골을 실은 배가 회암사로 돌아올 적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강물이 불어나 있었는데, 이 보두가 여강(驪江)의 용이 도와준 덕분이라고 하였다.

 8월15일에 회암사 북쪽 언덕에다 부도(浮屠)를 세웠다. 그리고 정골(頂骨)의 사리를 신륵사에 안치 하였으니 이는 스님이 세상을 떠난 곳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요, 그 위를 석종(石鐘)으로 덮어 보호 하였으니 이는 감히 손을 대지 못하도록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스님에게 선각(禪覺)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는 한편, 신(臣) 이색(李穡)에게 비문(碑文)의 글을 짓도록 하고, 신(臣) 권중화(權仲和)에게 비문의 글씨와 전액(篆額)을 쓰도록 명하였다.

 내가 삼가 살펴보건대, 스님의 휘(諱)는 혜근(惠勤)이요, 호는 나옹(懶翁)이며, 초명(初名)은 元惠)이다. 향년 57세이고 법랍(法臘)은 38세이며, 영해부(寧海府)출신으로서 속성(俗姓)은 아씨(牙氏)이다. 부친 휘(諱)는 서구(瑞具) 선관서 영(膳官署 令)이요, 모친 정씨(鄭氏)는 영산군(靈山郡)사람이다. 정씨의 꿈속에 황금색 송골매가 날아와서 머리를 부리로 찍더니 홀연히 알을 떨어뜨렸는데, 오색찬란한 그 알이 자신의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이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여 연우(延祐) 경신년(庚申年 1320, 충숙와7) 정월 15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이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 이웃집에 살던 벗이 죽었는데, 여러 부로(父老)들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가는 곳이 어디인지 무른다고 하였다. 이에 마을이 너무도 아프고 슬픈 나머지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으로 달려가서 요연(了然)스님에게 몸을 의탁하고 삭발(削髮)하였다. 이때 요연 스님이 “너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를 하였으나?” 하고 묻자, 스님이 대답하기를 “삼계(三界)의 고통에서 해탈하여 뭇 중생들을 이롭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하고는, 앞길을 열어 보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요연 스님이 또 묻기를 “여기에 온 너라는 물건은 어떤 물건이나?” 하였는데, 수님이 대답하기를“ 이 물건이 말도 할 줄 알고, 들을 줄도 알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마는, 어떻게 닦아서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요연 스님이 말하기를 “나 역시 노와 마찬가지로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다른 곳으로 가서 찾아보면 스승님이 계실 것이다.”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甲申年 1344, 충목왕 즉위년)에 회암사(檜巖寺)에 와서 밤낮으로 홀로 앉아 정진(精進)하던 중에 홀연히 깨달음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에 중국으로 스승을 찾아 떠날 결심을 하고는, 무자년(戊子年 1348, 충목왕4) 3월에 연경(蓮京)에 도착하여 지공(指空)을 친견(親見)하였는데, 묻고 대답하는 사이에 서로들 계합(契合)하는 바가 있었다.

 지정 10년 경인년(庚寅年 1350, 충정왕2) 정월초하루에 지공이 대중을 모아 놓고 법어(法語)를 내렸을 때 제대로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는데, 스님이 대중 앞으로 나와서 몇 마디 말을 토해낸 뒤에 세 번 절하고 나왔다. 지공(指空)은 서천(西天)의 108대(代) 조사(祖師)가 되는 분이다. 그해 봄에 남쪽으로 강절(江浙) 지방을 유력(遊歷)하고 나서, 가을 8월에 평산처림선사(平山處林禪師)를 친견하였다. 

 평산이 그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 보았느냐고 묻자, 서천의 시공이 날마다 일천 검(劍)을 쓰고 있더라고 대답하였는데, 평산이 다시“지공의 일천 검은 우선 놔두고 너의 검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자, 스님이 좌구(坐具)를 가지고 평산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에 평산이 선에 엎어지면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자, 스님이 “나의 칼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하고는, 평산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평산이 설암조흠(雪巖朝欽)으로부터 전해 받은 급암종신(及菴宗信 )의 법의(法衣)와 불자(佛子)를 스님에게 주어 인가(認可)하는 뜻을 표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351, 충정왕3)에 봄에 보타락가산(寶陀洛迦山)에 가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예배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352)에 복룡산(伏龍山)에 가서 천암(千巖)을 천견하니, 천암이 마침 강호(江湖)에 모여든 천여 명의 납자(衲子)를 대상으로 입실(入室있는 자들을 뽑고 있었다. 천암이 스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스님이 대답을 하니, 천암이“부모님이 낳아 주기 이전에는 어디에 있다가 왔느냐?” 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이“오늘이 바로 4월 초이틀입니다.”하니 천암이 인가를 하였다. 이해에 북쪽으로 돌아가서 지공(指空)을 제차 친견하니, 지공이 법의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전해 주었다. 이에 연대(燕代)의 산천을 두루 여력(遊歷)하였는데 유유자적하는 그 모습이 그야말로 하나의 한도인(閑道人 )으로서, 명성이 자자하게 퍼져 마침내는 궁중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을미년(乙未年 1355, 공민왕4) 가을에 성지(聖旨)를 맏들고 대도(大都) 연경(燕京)의 광제사(廣濟寺)에 머물렀다. 병신년 10월 보름날에 개당 법회(開堂法會)를 열자, 황제(皇帝)가 원사(院使)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를 보내 금란가사(金?袈裟)와 폐백(幣帛)을 하사하였고, 황태자(皇太子)도 금란 가사와 상아불자(象牙佛子)를 선물하였댜. 스님이 가사(袈裟)를 받도는 대중에게 묻기를 “담연(湛然)히 텅 비고 고요해서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인데, 이 찬란한 가사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하였는데,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자 수님이 천천히 말하기를“구중궁궐 안의 부처님 입에서 나왔느리라.”하였다. 

 그리고는 분향(焚香)하고 황제의 복을 축원한 다음에 법좌(法座)에 올라 주장자(?杖子) 가로잡고서 몇 마디 말을 하고는 바로 내려왔다. 무술년(戊戌年 1358, 공민왕7) 봄에 지공과 작별하면서 수기(授記)를 받고 동방으로 돌아올 적에, 가다 쉬다 하면서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설법을 해 주었다. 경자년(庚子年 1360)에 오대산(五代山)에 들어가서 마물렀다. 신축년(辛丑年 1361) 겨울에 임금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 스님을 서우로 맞아들인 뒤에, 심요(心要)에 대한 설법을 청하였다. 임금은 스님에게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精佛子)를 하사하였고, 공주(公主 공민왕의 비(妃)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마노불자(瑪瑙佛子)를 바쳤으며, 태후(太后)는 직접 보시(布施)를 베풀었다. 임금이 스님에게 신광사(神光寺)에 있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스님이 사양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도 불법(佛法)에서 뒤로 물러나 있겠소.”하였으므로, 스님이 어쩔 수 없이 곧장 신광사로 떠났다. 

 11월에 홍건적(紅巾賊)이 경기(京畿)지방을 유린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승려들도 겁에 질린 나머지 피신할 것을 청하였으나, 스님은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지키고 있는데, 적들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태연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승려들이 더욱 급하게 피신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날 밤 스님이 꿈을 꾸니 얼굴에 검은 사마귀가 있는 신인(神人)이 의관을 갖추고 절을 하면서 고하기를 ”대중이 흩어지면 도적들이 반드시 이 사찰을 없애 버릴 것이니, 스님은 뜻을 굳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토지신(土地神)을 안치한 자리에 가서 그 초상화를 보니 꿈속에 본 바로 그 얼굴이었는데, 과연 도적이 그 사찰에는 이르지 않았다.  

 계유년(癸卯年 1363, 공민왕12)에 스님이 구월산(九月)으로 들어가니, 임금이 3월에 대궐에 나아가서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한 경과, 비로소 허락을 받고 숙원(宿願)을 이루어 용문(龍門)과 원적(元寂) 등 여러 산사(山寺)에 노닐었다. 병오년(丙午年 1366)에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다. 정미년(丁未年 1367) 가을에는 청평사(淸平寺)에 머물렀다. 그해 겨울에 예보암(猊寶巖)이 지공(指空)의 가사(袈裟)와 손수 쓴 편지를 스님에게 전해 주면서 지공의 유언(遺言)이라고 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369, 공민왕18)에 다시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갔다. 경술년(庚戌年 1370) 봄에 사도(司徒) 달예(達叡)가 지공의 영골(靈骨)을 받들고 와서 회암사(檜巖寺)에 안치하였으므로, 스님이 스승의 유골에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상의 부름에 응하여 광명사(廣明寺)에서 하안거(河岸居)를 마쳤으며, 가을 총에 회암사로 돌아왔다가 9월에 언급한 공부선(功夫選)을 거행하였다. 

 스님은 자신의 거실을 강월헌(江月軒)이라고 이름 하였다. 평소에 세속의 문자를 익힌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시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면 붓을 잡고 곧장 써 내려갔는데, 별로 정신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심원(深遠)한 흥치가 우러나오곤 하였다. 만년에는 또 묵화(墨畵)를 그리기를 좋아하였는데, 스님의 산수화(山水畵)는 유도권(劉道權) 원(元 나라의 화가)의 화풍(畵風)과 비슷한 점이 있다. 아! 도(道를) 이미 통한 분이시니, 다재다능(多才多能)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에 내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탑명(塔銘)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참으로 선각 스님으로 말하면

기린의 불처럼 희유(稀有)하신 분

우리 임금님의 스승이시오

길 잃은 중생들의 지도자였네

많은 납자들이 종주(宗主)로 받들면서

물이 골짜기 쏟아지듯 모여들었지만

제대로 아는 이 몇이나 되었을까

스님이 이룩한 우뚝한 그 경지를

태어날 대부터 범상하지 않았는데

용신이 또 마지막 길을 보호하며

마침내 편안한 안식처를 들게 했네

더구나 사리야 더 말할 게 있나

신비스러운 기적을 보여 줬는걸

끝없이 흐르는 여강(驪江)물속에

교교히 비치는 강월헌 밝은 달빛

이것을 공이라 할지 색이라 할지

위아래가 서로 통해 환히 빛나도다

아득하여라 드높은 그 풍도여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로다.

 

참고문헌: 가정(稼亭)? 목은(牧隱)양선생(兩先生)의 영덕(盈德:寧海) 관련 문장(文章)

역은이 이완섭(李完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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