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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명상의 세계적 흐름과 지도자를 찾아]
조은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한국에서 명상(瞑想)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할 때 우리는 흔히 “서구에서도” 명상과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말을 덧붙이곤 한다. 신문기사나 학술논문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현재 서구 불교에 대한 정확한 진단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구 불교에서는 이전과 비교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시작과 역사적 흐름
서유럽 사회에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정보가 알려진 것은 이미 17세기의 일이지만, 불교가 실제로 존재감을 가지고 미국 대륙에 상륙하게 된 것은 185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중국 사찰이 세워지면서부터다. 철도 건설 등의 일자리를 찾아 미국에 온 중국인들이 본국의 신앙을 이어간 것이다.
그 후 1950년, 6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의 불교가 주류 사회에 퍼지게 된다. 이들은 주로 교육 수준이 높은 백인들로, 책을 통해 불교를 처음 접했다. 그들은 불교가 깨달음을 얻는 종교이며, 그곳으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기도나 의례 같은 아시아 불교의 다양한 수행법 중) 명상(瞑想)을 대표적 수행법으로 삼는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1950년대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소위 비트 세대라 불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불교가 꽃피우게 된다.
당시 미국 제도권 사회의 종교와 정치에 대한 반감과 맞물려 외래 종교인 불교에 관심을 돌린 것이다. 스즈키(1870~1966), 앨런 와츠(Alan Watts 1915~1973), 잭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1926~1997) 등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학자들은 이들의 불교를 백인불교(White Buddhism) 또는 개종불교(Convert Buddhism)라고 부르고, 앞서 말한 아시아인들의 불교를 민족불교(Ethnic Buddhism)로 불러 구분했다. 나아가 이러한 현상 전체를 ‘미국 불교(American Buddhism)’라고 부르면서, 학자들은 불교가 서구 사회 속에서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현상에 주목했다.
개인적 경험
필자는 2010년에 서구의 불교에 대한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도 간간이 인용되고 있다. 인류학자나 종교학자도 아닌 내가 그런 주제의 글을 쓰게 된 것은 당시 나의 삶과 관계가 있다. 1977년 대학에 자연계로 입학한 후 불교철학을 전공하겠다고 대학원을 철학과로 진학한 나에게, ‘불교’란 천 년을 넘긴 고전어로 쓰인 문헌 속에 꼭꼭 감춰진 심오한 비전(祕傳)과도 같은 것이었다.
책 속에 얼굴을 파묻고 어렵게 석사학위 논문을 원효에 대한 주제로 마친 후, 나는 박사 과정 중에 인도불교철학으로 공부의 시각을 넓혀보겠다고 마음먹고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버클리 대학의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각종 고대 언어로 쓰인 불교 문헌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교 밖을 나가면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세계의 종교와 각종 불교 전통의 현장이 그곳에 있었다. 길에 늘어앉아 있는 히피들과 공을 두드리며 ‘하리 크리슈나’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로, 멀리 뒷산에는 마니차(摩尼차)와 울긋불긋한 깃발이 펄럭이는 티베트불교 닝마파 사람이 보였다. 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스리랑카와 태국, 일본 사찰이 있었고, 각종 색깔의 법복을 입은 스님들이 서구 학문을 배우러, 또는 포교를 위해 버클리 캠퍼스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 후 박사 학위를 마치고 미국 대학에서 불교사상을 가르치다가 2004년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자연스럽게 양쪽 문화의 불교를 비교하고 관찰하게 되었다. 미국 불교의 국외자 입장에서 신기하고도 특이한 현상들을 틈틈이 적어 모아둔 관찰 노트에서 앞의 그 논문이 나왔다. 이후 틈틈이 서구 불교계의 수행 트랜드에 대한 관심도 이어갔다.
그리고 2023년 정년퇴직 후 바로 미국 대학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어 출국하게 되었다. 미국 동부의 한 대학에서 1년간 체류하는 동안, 인류학자를 방불케 하는 관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미국 내 불교 지도자들과 학자들을 인터뷰하고 사찰을 방문했다. (예일에서 만난 존경하는 선배 교수님이신 인류학자 김경수 선생님께서는 내가 인류학자로서 아주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15년 후의 관찰
2023~2024년 2년간 미국 불교를 관찰하면서 두 가지 잠정적 결론을 얻게 되었다.
첫째, 불교가 미국에 전해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일반사회 속에 불교 교의의 기본이나 명상 전통에 대한 지식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불교 전래 초기에 보였던 인구 증가 추세와 비교하면 현재 시점에서는 사찰 수나 신자 수에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1979년 달라이라마께서 처음 미국을 방문하시고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신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 당시 미국 사회에서 느낄 수 있던, 넓은 사회적 계층을 아우르는 불교에 대한 호감이나 흥분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이런 생각은 인구 통계에 기반한 판단은 아니다. 다만, 15년 전 위의 논문에서 말했던 “서구에 불교가 알려지게 된 지 약 150년, 서구 사회가 불교를 수용하는 문명사적 의의가 높다. 인구학적으로만 보더라도 20년 전까지 몇만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불교 인구가 현재 300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될 정도이며, 미국 사회와 문화 속에 드러나고 있는 불교의 영향은 괄목할 만하다.”고 했던 주장은 다시 검토할 필요가 생겼다.
그 이유를 찾아본다면, 1960년대 미국 불교 확산의 주역이었던 히피 세대가 노령화 되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기에 도달했고, 따라서 지도자나 신자들의 수와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의 1세대 불자들은 스승을 찾아 인도로 떠나기도 하고 깨달음의 체험을 찾아 만행(卍行)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불교에 참여하던 사람들이었다.
반면 요즘 세대는 예전처럼 불교에 진지하지 않다고 한다. 또 사회적으로 종교에 대한 소신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분위기이기에 불교를 홍보하거나 전파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트럼프 정권 집권 이후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기독교 복음주의의 영향이 크다고도 한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아시아 이민 2, 3세대 사이에 미국의 주류 종교(즉, 기독교)와 문화적 경향을 따르고자 하는 성향이 한층 높아졌다고도 한다.
한편, 불교계 내부 신자들의 관심 영역에서 이전과 많은 변화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목적보다는 사회적 · 개인적 윤리의 문제, 세상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자비의 증진, 또는 이타적 실천 등의 주제에 더 큰 괌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들의 관심에서 질적 변화, 또는 ‘성숙’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질적 성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변화를 일으킨 동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두 번째 점은, 미국 내에서 불교가 둔화되고 있는 데 반해 유럽 지역, 특히 스페인과 남미 지역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부터 다룰 유럽이나 남미 지역의 명상 센터나 명상 지도자들을 살펴보면서 더욱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다시 정리해 보면, 서구불교에 지난 15년간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 불교의 둔화에 반해 유럽 지역 특히 스페인과 남미 등 스페인어 권 내에서의 불교 성장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불교계의 규모에 있어서 그리고 에너지와 활동의 측면에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미국이 여전히 주도적이고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편, 양적 성장이 주춤한 가운데 불교에 대한 이해가 보편화되고 보다 널리 확산되고 있음을 느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소수를 위한 종교라는 관점에서 개인의 내면적 성장을 돕는 오래된 지혜 전통이라는 이해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불교계 내에서는 새로운 불교 해석과 방법론을 계속 시도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이러한 변화와 대응의 양성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겠다.
앞으로싀 방향, 글로벌한 시각
다음 호부터는 각론으로 들어가, 유럽, 미국, 캐나다, 중남미, 호주. 뉴질랜드 등지의 명상 지도자, 그리고 네팔과 인도의 명상센터나 지도자들을 소개하겠다. 또한 요즘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명상 프로그램 앱도 살펴보고자 한다. 가르침의 특징과 아울러 그 지역 불교와의 관련에 대해서도 다루도록 할 예정이다. 그 첫 번째로 티베트불교의 족첸에 기반한 명상 그룹인 ‘Simply Being’을 이끌고 있는 영국의 제임스 로(James Low)에 대해 살펴보겠다. <끝>
*조은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불교철학 전공,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 미국 버클리대학 박사,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 역임, 현재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 석좌교수. 저술로 ‘Language and Meaning’, ‘불교와 근대, 여성의 발견’, ‘마음과 철학’, ‘21세기의 동양철학’,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원효에 있어서 진리의 존재론적 지위’, ‘불교의 경전 주해 전통과 그 방법론적 특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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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명상지도자 제임스 로우의
[불이법(不二法)과 공(空)을 통한 족첸 수행법]
조은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이번 호에는 영국의 명상지도자 제임스 로우(James Low)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분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샘 해리스(Sam Harris)가 운영하는 유료 명상앱인 ‘웨이킹 업(Waking Up)’을 통해서였다. 처음 강의를 들었을 때 불교에서 추구하는 마음의 세계 또는 깨달음에 대해 현대 일반 언어를 사용하여 치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고 그의 말에 단번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 후 ‘Simply Being’(순수한 현존,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라는 이름의 웹사이트를 알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지금까지 행한 엄청난 양의 강의 녹음과 녹취록이 들어 있었다. 그 사이트의 안내문에는 “붓다달마(佛法-불법)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심화하고 복잡한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란다.”고 써 있었다.
줌(Zoom) 만남, 명상앱, 집중수행, 저술과 강연을 통한 가르침
몇 년간 인테넷 줌(Zoom)과 녹음으로 공부하다가 2024년에는 한번 만나보기롤 결심했다. 스페인에서 열리는 집중수행에 참가하려고 신청했는데, 바르셀로나 프로그램은 참여치 못하고 멀리 시골 베시아니의 어느 기독교 수도원에서 열린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약 70명의 사람들은 반 정도는 스페인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유럽의 각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뛰어난 실력의 통역가 두 명이 돌아가면서 한마디 한마디의 영어와 스페인어로 순차 통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 리드미컬한 통역 속에서 청중들은 앞에 들었던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전체적으로 아주 편안한 분위기였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모두 같이 “아~”를 소리로 염(念)하면서 화이트A 관상(觀想 Visualize)하는 수행을 한다.
제임스 로우가 하는 명상법은 티베트 불교 전통에 기원하는 족첸(Dzogchen) 명상이다. 대승불교의 공(空)과 불이(不二) 사상에 기반하는 일종의 선법(禪法)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 로우의 과거 이력은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이 인도와 티베트의 불교를 어떻게 접했는지에 대해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국내에서는 티베트 불교의 람림 수행이나 쫑카파의 『보리도차제광론』 속에 나타난 수행법을 중심으로 한 연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이것이 현대 서구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간소하게 응용되어 사용되는지의 일단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인도에서 길을 찾다
제임스 로우는 1948년 생이다. 어는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불교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자신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글래스고에서 자럈으며 에딘버러 대학에서 사회인류학과 인도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어느 날 [영국에 와 있던 티베트의 림포체] 초감 트룽파에 대한 말을 듣고 그를 만나러 스코틀랜드 국경에 있는 존스톤 하우스를 찾아갔다. 트룽파는 그전에 만났던 누구와도 달랐다. 강력하고 어떤 틀에도 묶이지 않는 분이었다. 나는 대학에 가기 전에 이미 히치하이킹으로 인도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인도인은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지만, 서양이나 다른 국가들에서 보지 못한 특별함이 있었다. 나는 점점 더 힌두교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인도에 살기로 결심하고 그곳으로 갔다.
인도의 서벵골 산티니케탄(Santiniketan)에 있는 비스바 바리티(Visva Bharati) 대학교에서 티베트어 문화 철학 등을 공부하던 중 태베트에서 피난와 인도 티베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님마파 라마로서 족첸(Dzogchen) 수행을 지도하는 치메드 릭진 라마(Chimed Rigdzin Lama, 줄여서 C.R. Lama라고 부름)를 만나게 된다. 그 스승의 집에서 십 년간 거주하면서 집안일도 돕고 시봉을 하면서 티베트 닝마파의 경전들과 수행법(sadhana)에 관한 책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어떻게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그 공부의 과정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경험으로 알 수 있듯이, 접촉하는 순간 사라집니다.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에 닿자마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우리가 젊고 매우 활력이 넘칠 때는 모든 종류의 경험을 하지만, 점차 경험을 쫓는 것은 매우 지칠 뿐이고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내면으로 들어가서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족첸의 대가이신 제 근본스승 C.R. 라마를 만나 운이 좋았습니다. 족첸은 티베트 불교의 한 전통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직접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마음의 내용에 집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것이 얼마나 덧없고 붙잡을 수 없는지 봅니다. 물론 처음에는 마음에 일어나는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들에 끌려 여기저기 날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점차 저는 갈고리들이 있는 자리에서 차분히 머무르는 법을 배웠고 더 이상 코에 고리가 꿰인 소처럼 이끌리지 않을 때 강력한 내면의 습관과 패턴 앞에서 차분히 머물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으로 여겼던 것은 오직 내가 그렇게 받아들일 때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오고 가게 내버려두면 이러한 일어남은 나도 아니고, 나의 정체성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방대한 잠재적 반응의 일부이며 오로지 우리가 거기에 참여할 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 자신에 대해 더욱 편안해질수록, 저는 제 스승과 가르침의 계보에 대한 믿음이 더 커졌습니다. 마음에서 태어나지 않은 본성에 피난처를 찾을 수 있게 되면서 제 생각을 붙잡을 필요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생각, 감정, 느낌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생각은 실재적이고 유효한 무엇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바다에서 나와 다시 바다로 들어가는 파도처럼 녹아 계속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바라보는 자를 찾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누가 바라보는 자인지 보려고 합니다. 자각 자체를 자각하는 미묘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자각 그 자체라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수행의 초점입니다.”
1976년에 스승 C.R. 라마는 제임스 로우에게 이제 세상에 나아가 사람들을 가리키라고 했다.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서양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이었다. 10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와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심리치료 분야 공부를 시작하였다. 석사와 박사 학위를 마치고 교수가 되었고 오랫동안 심리치료 분야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또 영국 국민건강서비스(NHS)의 심리치료 분과에서 최고 책임자로 일하다가 은퇴하였다. 이제는 개인적으로 심리치료 컨설턴트를 하면서 명상지도에 전념하고 있다.
『라닥의 수행자들』(The Yogins of Ladakh: A Pilgrimage Among the Hermits of the Buddhist Himalayas)은 1997년에 발간되었는데, 브리스톨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존 크룩(John Crook)이 제임스 로우와 1977년과 1986년에 인도 라닥의 오지에 가서 동굴 등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실제 면담하고 쓴 아주 희귀한 책이다.
제임스 로우 명상법의 특징
심리치료사면서 불교명상을 가르치는 그의 경력이 현대적인 불교 지도자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는 재치 있는 영국인 특유의 유며를 가지고 있어 강연 중에는 청중들의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의 강연은 보통 어머니나 가족 관계와 같은 일상적 주제로 시작하지만 문학, 철학,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흥미진진한 강연을 만들어 낸다.
그는 불교 용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공(空)이나 무아(無我), 족첸 수행법 등에 대해 현대의 지식인이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로 설명한다. 그는 체격이 장대한데 사람들은 그가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것을 보면서 내면적인 따뜻함과 자비심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이전에 티베트 닝마파의 비전(祕典)들을 영어로 번역한 것 외에 자신의 가르침을 담은 20여 권의 책을 출판했다. 주요 저서로는 ‘Simply Being’, ‘Being Right Here’, ‘The Mirror of Clear Meaning’, ‘Collecter Works of C.R, Lama’, ‘Sparks’, ‘Finding Freedom’, ‘Buddha shows the way’. 등이 있다. 이 책들은 에스토니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포프투갈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지금도 유럽 각국을 돌면서 집중수행을 가르치고 있다. 필자가 작년에 참가했던 집중수행은 그의 저술들이 스체인어로 번역되어 출간됨에 따라 조직된 것으로 보였다. 영국뿐만 아니라 스랑스, 독일, 폴란드 그리고 최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집중수행을 열고 있다. 집중수행은 열흘씩 함께 숙식하면서 하루 10시간 이상의 강의를 듣고 명상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개념화 본질화의 해체
그의 기본명제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모든 사람은 원래부터 청정하다(primordial purity of the mind). 우리는 그것을 모를 뿐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깨끗하게 할 것이 없다(there is nothing to purity). 그는 이러한 내용을 설득력 있게 펼치기 위해 공(空)과 불이(不二 non-dualty)를 소재로 사용한다. 족첸은 동아시아의 선불교(禪佛敎)와 매우 유사한데, 불이성(不二性)에 대한 가르침도 관심을 끈다. 최근 유럽 명상 지도자 중에 불이(不二 non-duality)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그가 영국의 에머슨 칼리지에서 행한 강연은 여러 곳에 언급될 정도로 유명하다. 개인의 주관에 대한 편견이 내면화되고, 자아관이 고착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무아(無我)와 공(空)을 통해 그것을 해체하는 과정으로 인도한다.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면, 자아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 등은 개념화와 본질화(essentialization)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것을 해체하는 것이 수행의 기본이 된다. 개념화된 관계는 허상이다. ‘친구’나 ‘적’같은 개념은 단지 개념화에 불과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나 차별은 상황적이고 주관적인 의견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극도로 잔혹한 행동을 하는 사람조차도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을 포착하는 방식이 결코 그 사람 전체가 아님을 보여준다. 투사(projection)·편견에 대하여, “나는 당신이 싫다”고 느낄 때, “당신은 정말로 싫어할 만한 나쁜 사람:이라고 확고하게 받아들이는 편견과 투사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타인을 ‘그대로’ 알 수 없으며, 접근 가능한 것은 오직 ‘나에게 비치는 당신(you for me)’일 뿐이다. 관계는 무리 자신의 ‘거품(bubble)’ 속에 갇혀 있으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뿐이다.
어떤 사람이 ”초보자에게는 매우 어려운 수행처럼 보입니다. 시각화나 만트라 또는 호흡같은 다른 수행법도 사용하나요?“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삶의 어떤 사건도 이러한 방법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잔은 프랑스 남부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오랫동안 그렸습니다. 그는 그것을 반복해서 바라보았습니다. 매번 바라볼 때마다 그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그 언덕은 오직 그 이름과 그것에 ‘대한’ 개념들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언덕이 스스로 드러내도록 허용될 때, 매 관찰은 그것의 무한한 잠재력을 새롭게 보여줍니다.
개방성[空]은 개념(槪念)을 환영할 수 있지만 개념(槪念)은 개방성[空]을 환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직접 보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세잔이 새로운 눈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 붓, 물감, 혼합 등의 기본 기술도 부차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명상(瞑想)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본적 능력, 고요한 집중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콧날의 호흡 감각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 미묘한 감각에 가져다 놓고 그것과 함께 머무릅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산만해질 때마다, 주의를 집중해 그 덧없는 감각으로 부드럽게 되돌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방식에는 깨달음이나 해탈 같은 ‘이제 나는 해탈했어!“ 또는 ’ 오, 이제 나는 붓다야!‘라고 말할 수 있는 종착점이 있나요?”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스스로라고 여기는 모든 것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의 근본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현전, 우리의 자각, 단순히 여기 있음의 에너지가 잠재력의 발현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 있음은 경험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다르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고요함은 무대와 같고, 삶의 움직임은 무대 위에 일어나는 모든 다양한 공연과 같습니다. 이 둘은 분리할 수 없으며, 그들의 불가분성(不可分性)을 아는 것이 지혜와 자비의 기반입니다. 지혜로 우리는 모든 내재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마음을 봅니다.”
그는 족첸에 대해 대승불교의 일부이며 공성(空性)의 지혜와 타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허용하는 자비, 존재의 연결성, 참여의 흐름을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불교적 개념이나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불교의 핵심적 교리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끝>
*조은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불교철학 전공,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 미국 버클리대학 박사,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 역임, 현재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 석좌교수. 저술로 ‘Language and Meaning’, ‘불교와 근대, 여성의 발견’, ‘마음과 철학’, ‘21세기의 동양철학’,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원효에 있어서 진리의 존재론적 지위’, ‘불교의 경전 주해 전통과 그 방법론적 특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