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춤
이 수자
누구나 한 번쯤은 무대에 서서 멋진 춤을 추거나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보고 싶지 않을까? 그것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얼굴도 몸매도 재능도 없지만 꿈을 꾸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듯하다. 오페라가수의 노래 소리를 흉내내보고 이어서 꺽꺽 소리가 막히도록 발성연습을 하거나, 지르박을 멋들어지게 추어대는 사람들을 흉내 내어 우아한 몸짓으로 방안을 한 바퀴 돌아보며 내안에 재능을 가늠해보는 것은 멋쩍지만 즐거운 시도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시작은 미약한 것. 요즘엔 개인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동아리나 평생학습관 등이 늘려있어서 그곳을 통하거나 정보가 넘치는 인터넷을 통하여 독학으로 자신의 능력을 이끌어내 전문가로 혹은 오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많은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소소한 꿈이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기 위함도 아니다. 오직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예전에 춤을 추는 남자를 본적이 있었다. 밤늦어 조용한 술집, 손님이라고는 그 남자와 나 둘 뿐이었다. 어두운 저편에 작은 무대가 있었다. 건너편에 있던 청년이 일어나더니 나비처럼 팔랑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마도 현대무용을 추는듯했다. 음악을 타고 흐느적이는듯하다 가도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춤사위를 줄때는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오는 입을 막아야했다. 음악이 끝나도 이어지던 그의 춤은 그날 어둠속으로 사라졌지만 나에게는 끊임없이 희망을 가지게 하여 끊어지지 않는 동아줄이 내 손에 쥐어진 날이었다. 고독한 춤이었다. 알아주는 이도 응원하는 이도 없었지만 혼신의 힘을 뿜어내며 희미한 조명아래를 휘돌아 놀던 남자.
그 후 가끔 그 고독한 춤이 떠오르면 내 언젠가 그 춤을 추어보리라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근래 어쩌다 인연이 되어 요가와 댄스 반에 다니게 되었다. 두 가지 다 좋았다. 요가는 내 몸의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는 시간이라 무척 진지하게 몸을 살피게 되었고, 댄스는 몸이 음악을 따라 리듬을 타는 자잘한 흥분이 있었다. 운동에 오신 분 들은 40대부터 70대 여성들이 함께 하고 있다. 회원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건강을 돌보지 못해 어깨나 등이 굽거나 팔다리가 굳어가 떡가래처럼 꺾이거나 뻐덕뻐덕하다. 그저 살다보니 육신이 이렇게 되도록 모른 체 무감각하게 살아온 나날들이 돌아봐 졌다. 근육 당김이 힘들면 다리에 쥐가 나거나 엇박자가 나는 팔과 다리를 달래느라 끙끙거리며 용쓰며 서로를 보며 웃었다. 요가를 하는 날 이었다 “양쪽 다리를 천천히 당겨 올리세요. 더! 아랫배에 힘을 주고 버티세요.” 아랫배를 힘껏 당겨 넣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압을 올렸다. `아랫배 압력을 너무 넣었나!‘ 급히 괄약근을 조였다. 아이고!. . . 이러면 안 되는데, 아뿔사! 이미 공기가 새고 있었다. “빠방!”
보통 우리의 수준은 그런 정도였었다. 선생님은 우리의 그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댄스 반을 무대에 올리기로 하였다. 대부분 어설픈 몸동작에 대한 불신과 남들의 시선이 두려운 듯 무대에 오르는 것에 도리질을 하였다. 서로를 달래고 어르면서 댄스 연습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십 여 명이 넘게 시작을 하였으나 무대에 오르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숫자가 줄어갔다. 비록 7분 만에 끝나는 버스킹 행사일 지라도 왜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것일까? 안타까웠다. 인생은 한번 지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날 그 시도가 누군가에 의해 강제되어 멈추어 본 나는 안다. 이 시간이 오기 까지 50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 또 기회가 오리라는 보장은 더욱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댄스를 할 때면 나는 소녀처럼 열정에 사로 잡혔다. 팔과 다리가, 엉덩이가 흔들리는데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리듬에 빨려 들어갔다. 어린 날 엄마의 꾸중으로 멈추었던 그 춤을 지금, 이어서 추고 있는 것이리라. 이제 엄마의 나무라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의 팔과 다리는 나의 의지로 움직인다. 선생님이 나의 자세를 수십 번 집중적으로 교정을 시킬 때도 부끄러움보다 익숙해지기 위해 나를 도발하였다. 나는 춤을 추어야했다. 지난날 누군가 나의 의지를 꺾어버린 것에 대항하고, 나 스스로 주저앉은 것에 매질하여 의지로 나아 가게하기 위함이었다. 나의 춤은 고독한 춤이다. 나를 홀로 세우는 춤이다.
80년대 초 “은하철도 999”라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아이들이나 볼 만화였지만 슬프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그 영화는 당시에 엄청난 인기로 사람들 기억에 남아 있다. 은하계의 행성들이 은하철도라는 우주공간을 달리는 열차를 운행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부유한 인간들은 인간의 정신을 기계의 몸에 넣어 교체를 하면서 영생을 누리며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는다는 도시 메갈로폴리스가 있다. 가난하여 그 도시 변두리에 살고 있던 철이는 은하철도 999를 타면 무료로“기계의 몸”으로 개조해 준다는 행성이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엄마까지 잃는 우여곡절 끝에 메텔의 도움으로 은하철도999를 타게된다. 철부지 소년 철이와 메텔이 동행하면서 열차가 경유하는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마주하게 되고 함께 위기를 헤쳐 나아간다. 세상과 인간의 원초적인 고독과 번뇌를 통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직시하는 만화영화다. 작가인 마츠모토의 철학이 녹아 있어 잊혀 지지 않는 대사들이 많았다.
주인공 철이의 대사는 멈칫거리는 선택의 순간에 명확한 답을 안겨준다. “자신이 영생을 산다면 대충대충 살 것이다.”라는 메텔의 말에 “살아 있다는 것은 한정된 시간을 사는 것이다. 시간은 꿈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해 꿈도 시간도 배신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답한다. 철이는 또 말을 했다. “ 인생은 짧지만 아름다운거라고요.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요. 당신한테도 당신만의 인생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왜 자신을 위해서 살려고 하지 않죠? 당신의 미래는 당신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에요. 당신 자신만을 위해 살라고요.”
우리는 꿈을 꾸었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행하여야 하지만 현실은 걸림돌로 가득하다. 그중에 가장 큰 걸림돌은 내 안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