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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사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에게 방주를 지어 물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설계도대로 약 120년간을 방주를 짓게 됩니다. 노아는 방주를 통하여 물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나 속으로는 걱정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과연 언제쯤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인지, 언제까지 방주에서 생활해야 하는지를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물이 점점 감하여져서 노아는 방주로부터 나와도 되는 것인지의 여부를 알고자 두 마리의 짐승을 사용하게 되는데 첫째는 까마귀요, 둘째는 비둘기입니다. 여기서 까마귀와 비둘기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두 종류 모습의 성도들을 뜻합니다. 곧 까마귀 같은 성도요, 또 하나는 비들기 같은 성도인 것입니다.
1.까마귀는 방주 밖에서 머물기를 좋아하고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비둘기는 방주 밖에서 있을 곳을 얻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창세기 8:7을 보면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한 이유가 무었이겠습니까? 물을 먹고 죽어서 썩어가고 있는 사람이나 짐승들이 사체들을 뜯어먹느라고 방주에 돌아갈 생각도 않고 계속 날아 왕래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방주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까마귀 같은 성도는 어떤 성도입니까? 예수믿고 교회에는 지금 나오지만 교회에 나오는 것보다는 예수믿는 것보다는 세상것에 미련이 더 많고 세상 것이 더 좋아서 교회를 떠나가고 주님을 떠나가고 세상에서 방황하고 헤메이다가 결국에는 교회에 돌아오지 않고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 성도를 말합니다.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한 교회의 창립 인원 중 제주도 출신의 외과의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예배당을 세우고, 교회를 위해 많은 충성을 했습니다. 그 후 이 사람은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병원이 잘되어 많은 돈을 벌었고, 자식들도 큰 복을 받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많은 복을 받았던 그가 이제는 하나님 대신에 자식과 재물이 우상이 되고, 기업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난날의 신앙생활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내가 고독할 때는 교회도 나갔고 예수도 믿었지만 지금 나는 하나도 아쉬운 것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루는 두 아들이 의사인 아버지에게 스포츠카를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아이들은 아무런 도덕적 표준도 없이 그 자동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한번은 두 아들이 그 스포츠카를 타고 자기 집 앞으로 쏜살같이 지나다가 아름드리 큰 나무를 들이 받았습니다. 작은 아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맏아들은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까마귀같은 성도가 어떤 성도입니까? 지금은 예수믿고 구원을 받아 교회를 잘 나오지마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지마는 그래도 세상것에 미련이 더 많고 세상 것이 더 좋아서 세상에서 방황하고 헤메이면서 교회에 돌아오지 않고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 성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래도 구원을 받은 사람은 곧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강권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까마귀같은 성도라도 한번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백성으로 삼아놓으시면은 강권적인 방법을 사용하시드라면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해서 그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석"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고아로 자랐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던 그는 선교사의 배려로 일본에 건너가 대학원까지 마칠수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 명치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문학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그는 학교 졸업후 부산에서 사업을 하였습니다. 크게 성공을 하였습니다. 사업이 잘되어 물질이 쌓이자 그는 마음이 완악해져 교회에 가는 것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이후부터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고 무능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계속 방탕한 생활을 하며 쾌락과 유흥에 젖어 살았습니다. 이따금씩 "네가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 매를 맞는다"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고 점점 더 방탕한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탕한 삶은 결국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번창하던 사업체가 부도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집을 잃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빚쟁이들이 무섭게 몰려와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는 겨우 가족들을 친척에게 맡기고 삼류여관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그는 결국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독성이 강한 쥐약을 한병 사서 부산 구덕산으로 올라가 슬픈노래를 몇곡 부르고 그 쥐약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쥐약이 얼마나 독했던지 그는 채마시지도 못하고 꼬꾸라져 바닥에 딩글었습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상태로 몇일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정신이 희미한 상태에서 "우석아, 우석아."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몽롱한 상태에서 겨우 눈을 떠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구름이 보이고 바위가 보이고 나무가 보였습니다. 그는 "아하, 내가 지옥에 왔구나, 그런데 지옥도 세상과 비슷하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야가 갑자기 밝아지더니 예수님께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참하게 누워있는 그를 향해 조용히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난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6-7).
그는 물었습니다. "주여, 그러면 제가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만일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전에 나를 잘 믿고 따랐으므로 너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려고 한다. 이제 너는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산을 내려왔습니다. 쥐약을 먹은 그가 살아난 것은 참으로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서대신동을 내려오다 처음으로 눈에 뛴 교회를 찾았는데 그 교회가 순복음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로 들어가 혼자 철야를 하며 통회자복을 하였습니다. 새벽이 되어 그 교회 목사님이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러 왔다가 예배후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님께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부여에 조그만 농촌교회가 있으니 그 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며 신학을 공부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길로 그는 그 목사님이 마련해 준 차비를 가지고 부여로 내려가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비둘기 같은 성도는 어떠한 성도를 의미합니까?
창세기 8:8-9을 보면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이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비둘기는 악하고 더러워진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 속에서 자기가 있을 곳을 찾지 아니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본문에 노아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인다는 것은 곧 성도를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손길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살펴봅시다. 과연 나는 까마귀 같은 성도입니까, 아니면 비둘기 같은 성도입니까? 그래서 무언가 세상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세상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헤매며 방황하며 떠도는 불안정한 인생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등지고 오직 하나님한테서만 만족을 느끼며 그 품을 사모하며 그품안에 기쁨으로 거하는 복된 인생입니까?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 만족과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모든 복됨들이 그 분 안에서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가봐도 만족할 수 없고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주 앞으로 돌아옵니다.
찬95장 나의 기쁨
1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 일세
2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어느 꽃다운 동산에 양의 무리와 늘 함께 가셔서 기쁨을 함께 하실까
3 길도없이 거친 넓은 들에서 갈 길 못찾아 애쓰며 이리 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하도다
4 주의 자비롭고 화평한 얼굴 모든 천사도 반기며 주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에 천지가 화답하도다
5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여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 아멘.
2. 까마귀는 은혜를 갚지를 못했지만 비둘기는 은혜를 갚았습니다.
까마귀는 노아를 통하여 방주에서 일년동안이나 보호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노아가 이제 창을 열고 까마귀 한 마리를 날려 보냅니다. 물이 어느 정도 말랐으면 까마귀가 나뭇잎 하나라도 입에 물고 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날아다니며 썩어가는 시체나 파먹고 질퍽질퍽한 땅에 있으면서도 노아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까마귀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노아의 마음이 얼마나 공허했겠습니까? 그러기에 까마귀는 은혜를 모르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물론 까마귀는 생리적으로 썩은 것을 좋아하고 질퍽질퍽한 땅에서도 잘 살기 때문에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겠지만, 여기에서는 영적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학자들이 까마귀는 은혜를 모르는 존재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깨끗한 새인 비둘기는 먹을 것도 없고 앉을 곳도 없으니 지쳐서 돌아옵니다. 노아가 비둘기를 보고 “아이구! 돌아왔구나.”하며 반가워합니다. 일주일 후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더니 새로 돋은 감람 잎사귀 하나를 물고 옵니다. 은혜를 갚을줄 모르는 까마귀와는 달리 노아가 날려 보낸 비둘기는 감사하게도 새로 돋은 감람 잎사귀 하나를 물고 다시 돌아옵니다. 노아의 궁금증이 비둘기가 돌아옴으로써 풀렸습니다. “아이고! 아직도 물이 마르지 않았나 보구나.”그렇지만 노아는 비둘기가 물고 온 푸른 잎사귀를 보고 힘을 얻습니다. 그래도“산천초목이 살아 있구나!”얼마나 희망찹니까? 일주일 후 또 비둘기를 보냅니다. 이제는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깨끗한 곳이 있어 거기에 깃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이렇게 노아에게 입은 은혜를 감사할 줄 알고 노아의 기대에 맞추는 일, 곧 좋은 소식을 알려 주는 놀라운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비둘기처럼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고,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과 기쁨과 희망과 도움을 줄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103:1-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 성도의 매력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주님의 생명으로 생명을 얻었으면 나도 생명을 걸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고 주님께 감사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와 복만 받고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 은혜를 보답하지 않는 사람은 까마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다윗의 매력은 은혜를 기억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아침 저녁으로 예배하고, 성전을 짓기 위해 자기 전 재산을 다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혜를 아는 다윗을 얼마나 축복해 주셨는지, 역대상 29장 28절에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은혜를 아는 자가 잘 됩니다. 은혜를 배신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자는 나중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한 교회의 창립 인원 중 제주도 출신의 외과의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예배당을 세우고, 교회를 위해 많은 충성을 했습니다. 그 후 이 사람은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병원이 잘되어 많은 돈을 벌었고, 자식들도 큰 복을 받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많은 복을 받았던 그가 이제는 하나님 대신에 자식과 재물이 우상이 되고, 기업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난날의 신앙생활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내가 고독할 때는 교회도 나갔고 예수도 믿었지만 지금 나는 하나도 아쉬운 것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루는 두 아들이 의사인 아버지에게 스포츠카를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아이들은 아무런 도덕적 표준도 없이 그 자동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한번은 두 아들이 그 스포츠카를 타고 자기 집 앞으로 쏜살같이 지나다가 아름드리 큰 나무를 들이 받았습니다. 작은 아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맏아들은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길을 지나가는데 어떤 슬픈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노예거래가 이루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모자가 노예였는데 그중에 아들 노예를 좋은 값으로 새 주인에게 넘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 모자는 서로 껴 앉고 울면서 서로 떨어 질 줄을 몰라 했습니다. 지금 헤어지면 죽을 때까지 다시는 못 만나기 때문에 노예 어머니는 자기 주인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으니 제발 아들과같이 있게만 해 달라고 간청을 해 보지만 그 주인은 노예 어머니의 간청을 아량곳하지 않은채 거래는 성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노예 모자간에 드디어 헤어지게 됩니다. 두 모자는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게된 선교사는 도저히 양심에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자신이 다른데 쓸려고 준비해 두었던 돈을 다 털어 이 두 모자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노예문서를 찢은뒤 자유인으로 풀어주었습니다. 이 두모자에게는 같이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자유인으로 놓아 주다니 이들에게는 그 은혜가 너무나 말로 다할 수 없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에게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선교사는 거절하지만 이들은 끝내 선교사 뒤를 따라와서 선교사님과 가까이 있게 만 해달라고 간청하는 터에 함께 살게 됩니다. 이들 두모자는 전의 주인을 섬기는 것보다 더 열심이 선교사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힘들지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은 노예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지만 이제는 감사함으로 자신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이 엄청나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새로운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낮 죽도록 충성을 다했지만 즐거웠습니다. 온 마음과 몸과 힘을 다하여 새 주인인 선교사를 섬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성도들도 바로 이처럼 죄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되어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자리에서 그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해서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까마귀는 자신만을 위해서 일을 하였지만 비둘기는 창 밖으로 나가서 노아를 위해서 일을 하였습니다. 비둘기는 까마귀처럼 창 밖으로 나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이는 것이 자기 할 일이 아니요, 노아가 자기에게 맡겨준 일을 비둘기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늘 창문을 여시고 이 세상에 내어 보내셨는데 까마귀처럼 이 세상의 썩어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것들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보내신 뜻을 저버린 채 살아 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여자의 일생"이라는 작품을 쓴 작가 '모파상'이라는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이사람은 신학교를 퇴학맞은 학생입니다. 그가 신학교에서 방황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후에 신앙과 결별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가 주인된 인생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 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후에 그는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해서 10년만에 유명한 작가가 되고 돈을 많이 벌기 시작합니다. 지중해에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파리에는 호화아파트를 가지고 쉴새없이 아내와 애인을 바꾸며 살았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군중들은 그를 흠모했고, 그의 은행에는 쓰고도 남는 여유분의 돈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는 안질병과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잠을 자지 못합니다. 1892년 1월1일 밝아온 새해. 그렇지만 이 한해를 살아야할 아무런 이유를 갖지 못한 모파상은 자기가 항상 사용했던 칼로 자기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합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이 파탄난 그는 정신병동에서 몇달동안 알수없는 말을 하며 허공을 향해서 절규하다가 그의 나이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칩니다. 그이 무덤 묘비명에는 그의 말년에 쉴세없이 하던 말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못했다"
인간이 참으로 위대한 순간은 사명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사명을 깨닫는 것은 숭고한 의식입니다. 정치, 교육, 법조계, 사업, 봉사, 헌신, 모두가 다 사명의식으로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2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러 보낸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일할 때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크게 일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할 일을 찾았고, 자기 생명을 주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사명감에서 산 자들입니다.
베드로가 고기잡는 어부에서 그토록 위대한 생애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사명을 받은 부름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