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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만 나뒹구는, 타클라마칸 사막>
1) ‘서역남로(西域南路)’의 성쇠(盛衰), 호탄(和田)
앞서 우리는 이미 혜초사문이 중국령 서역의 첫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서 중국 군대가 많이 집결한 곳이라는 쿠차국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확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다음 행선지는 당연히 ‘서역북로(西域北路)’를 따라가서 까오창과 옌지 쪽으로 가야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런데『왕오천축국전』에는 쿠차 다음으로, 의외의 지명인 호탄이 문득 튀어나온다. 호탄이라면 서역남로 상에 있는 곳임으로 혜초의 진행방향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이다. 그러므로 혜초가 호탄에 들렸다는 기록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본문을 읽고 그 다음에 이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안서를 떠나 남쪽으로 호탄국(和闐國)까지 2천 리를 가면 역시 중국 군대가 지키고 있다. 절도 많고 (중략) 여기서부터 동쪽은 모두 당나라의 땅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개원(開元) 15년(727) 11월 상순에 안서에 이르렀는데…….」 위 구절을 보면 혜초는 분명 ‘개원 15년 11월’에 안서에 도착했는데, 왜 거기서 중원으로 바로 나가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호탄이란 곳으로 뒤 돌아 갔을까? 혹 현존본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아니면 혜초는 호탄에는 직접 가지 않고 단지 주워들은 정보만 나열한 것, 그러니까 호탄은 그저 이른바 ‘전문국(傳聞國)’에 속하는 것일까? 또 한 가지 더, 혜초는「안서를 떠나 남쪽으로 호탄국까지 2천리를 가면…….」이라 했다가 다시, 「개원(開元) 15년(727) 11월 상순에 안서에 이르렀는데…….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또한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쯤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누락부분이 너무 많은, 마지막 부분의『왕오천축국전』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 한 구절, 한 지명을 쫓아서 지금까지 5만 리를 왔는데, 이제 그것을 믿을 수없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심각한 상실감이 뒤 따르는 것이지만, 그래도 대하 ‘로드 다큐멘터리’의 회향(廻向을) 위해서는 이제부터는 현존본을 떠나서 독자적으로 그의 뒤를 밟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헤초왕오천축국순례도-목판화 김다정작 낙타를 타고.... 돈황 명사산과 월아천 돈황 천불동
만리장성의 끝인 가욕관 성루
그럼 현존본의 행로처럼, 서역북로에서 남로로 곧 바로 갈 수는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가 눈앞에 닥친 관심사로 떠오른다. 사실 이 문제는 나를 포함해서 모든 중앙아시아 마니아들의 공통된 숙제이기도 했다. 이 의문을 푸는 열쇠는 단지 한 가지, 그 길을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그 2천리 길’을 따라 가보기로 하였는데, 지도를 놓고 다각도로 추정해본 결과 그 루트는 엔지[焉耆], 즉 현재의 쿠어러[庫爾勒]라는<1> 곳에서 서역남로상의 루어창[若羌]으로 바로 횡단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들어오면 나갈 수 없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 가운데를 북에서 남으로 횡단하는 루트였다. 그 길은 소대병력 수준의 대규모 탐험대나 도전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근대에 들어서는 중앙아시아 오지 탐험에 평생을 바친 스웨덴의 스벤 헤딘(Sven Hedin)이나<2> 뚠황 천불동의 제17번 석굴을 연 영국의 스타인(Aurel Stain)<3> 등이 도전했었지만, 그들 역시 참담한 고생과 많은 희생을 치를 정도의 험로였다. 그러니까 세월이 흘러 여건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이 물 한두 통과 비상식량 몇 봉지만 들고서, 그것도 혼자 몸으로 도전하기에는 무모한 일이었다. 그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지만 평소 순례자의 수호천사의 가피력을 믿어왔기 때문에 방법을 알아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렇게까지 무리하게 그 길을 꼭 돌파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혜초의 호탄행의 의문을 풀기위한 것이 물론 주된 이유였지만 또한 5세기 초의 구법승인 동진(東晋)의 법현(法顯)도 지나갔던 유서 깊은 길이었고 더구나 루어창 근처에는 전설적인 고대도시 누란(樓蘭)의 유적이 있었기 때문에 겸사겸사 모험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틀에 딱 한번만 있다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고 “옴 마니 벤메 훔”을 염하며 막막한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그 버스는 승객은 몇 명밖에 없고 온갖 짐만 가득한 화물차에 가까운 고물버스였다. 역시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길이야 직선상으로 나 있으니까 운전수가 핸들을 돌릴 필요조차 없었지만 툭하면 길 가운데 차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군데군데 모래가 쌓여있는 바람에 모든 사람이 덤벼들어 모래를 치우기도 하였고 고물차가 툭하면 고장을 일으켜 그것을 고칠 때까지 땡볕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였다. 거기다 때때로 부는 세찬 바람에 눈을 뜰 수가 없어 차 밖으로도 나갈 수조차 없어 고스란히 찜통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모래뿐이고 들리는 것은 귀신소리 같은 바람의 울부짖음뿐이었다. 그래, 그것은 먼 옛날 이 길을 지나갔던, 법현사문의 말 그대로였다. 그는 정확히 이 지점쯤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막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로는 나는 새들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직 죽은 사람의 유골만이 갈 길을 가리키는 지표가 되어 준다.」<4>
또한 현장법사도, 「온통 모래뿐인데 바람 따라 모이고 흩어진다. 발자국이 남지 않아 길을 잃는 수가 많다. 그래서 그곳을 왕래함에 있어서는 유해(遺骸)를 목표물로 삼는다.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사람 짐승 할 것 없이 눈을 뜨지 못하며 때로는 노랫소리가 들리고 때로는 울부짖는 소리도 듣게 되는데 그것을 듣는 사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 가끔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모두가 악귀의 소행이다.」<5>
두 구법승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바람 부는 대 사막에 서있다 보면‘막막(漠漠)’이란 단어가 절로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사막을 두 개 겹쳐놓은 이 글자의 뜻이야 뭐,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지만, 얼마 전 우연히 사전을 찾다가 이 단어가 ‘마음이 아주 편한 상태’라는 또 다른 뜻이 있는 것을 보고 혼자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런 상황과 연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뉘앙스지만, 정말로 막막한 사막에 서면 머리가 텅 비어지며 마음이 아주 편해지는 기분이 든다는 것은, 나처럼 사막에 자주 들어가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티끌 같은 사바세계에서의 우리 일상에서도 이 막막함은 가끔 느낄 수 있는 기분이다. 우선 우리의 현실과 이상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도 그렇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괴리감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상념들이 분출구를 찾지 못하고 뇌리 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용서와 화해로 승화되어 정말로 사막에 서게 되면 저절로 그 응어리가 빠져나가는 상태, 뭐, 그런 것이리라……. 그렇기에 차라리 그런 상황이 불안하지 않고 편안해지는 것이리라…….
사막 가운데에서 하룻밤을 앉아서 꼬박 새운 승객 10여 명은 결국 도저히 고쳐질 것 같지 않은 고물버스만을 사막에 남겨두고, 통행량이 전혀 없는 도로인지라 하루를 기다린 끝에 다음 차편으로 그 바람지옥을 탈출하여 구사일생으로 루어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생해서 도착한 루어창이란 곳은 이국적 냄새가 전혀 없는 중국의 평범한 지방도시에 불과하여 하루도 머물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모든 차편이 끊어진 뒤라, 하루를 대충 쉬고 다음 날 서역남로를 타고 뒤로, 즉 서쪽의 호탄으로 향하였다. 호탄은 일명 호전(胡田), 우전(于闐), 쿠사타나 등으로 알려진, 한나라 때부터의 서역남로의 최대의 오아시스 도시로서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중개무역의 중심지였다.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거대한 쿤륜[崑崙]산맥이 티베트와 경계를 지으며 뻗어내려 만년설의 녹은 물을 풍부하게 공급해주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안고 있어서 기후가 온화하기에 예로부터 과일, 곡물, 비단, 카펫이 많이 생산되어 실크로드 도시 중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의 흑옥(黑玉)과 취옥(翠玉)은 멀리 로마에까지 이름을 날릴 정도로 유명하였다. 귀로에 남로를 이용한 현장법사도 이곳의 넉넉함이 눈에 띠었는지 기록하기를,
「쿠사타나국[호탄]은 주위가 4천 리이다. 모래와 돌이 태반이지만 흙이 있는 곳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있어서 온갖 과일이 산출된다. 모직물과 옥이 많이 난다. 기후는 온화하지만 회오리바람이 일어 흙먼지를 날린다. 사람들은 예의범절이 있고 성격은 온순하고 학문을 좋아하면서 기예가 발달했다. 대개 부유한 편이며 음악을 존중하고 가무를 즐긴다.」
자, 여기서 다시 혜초의 행로를 한 번 더 정리해 보자. 전통적인 타클라마칸의 실크로드는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양분된다. 뚠황에서 양관(陽關)을 빠져나와 바로 서쪽으로 루어창[若羌], 키에모[且末], 니야[尼耶], 체러[策勒] 그리고 호탄을 거처 예청[葉城]을<6> 지나 총령진이나 카슈가르로 나가는 길을 ‘서역남로’라 하는데 주로 한(漢)대에 많이 이용되었던 것에 반해 뚠황에서 옥문관(玉門關)을 나가 누란을 경유해서 쿠어러, 쿠차, 아커스, 카슈카르로 나가는 ‘북로1길’이나 옥문관에서 하미, 투루판, 쿠어러, 쿠차로 나가는 ‘북로2길’은 주로 당나라 때 많이 이용되었던 길이였다. 그러니까 초기 구법승인 법현, 혜생 등은 호탄을 거치는 남로를 이용하였고 나머지 구법승들은 북로를 주로 이용하였다. 다만 현장만은 갈 때는 북로를, 올 때는 남로를 택했다. 그러나 혜초의 경우 누구보다 색다른 경우에 속하는데, 만약 그가 호탄을 직접 방문했었다면, 그는 남, 북로를 동시에 넘나들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북로를 이용해서 거의 서역을 통과한 지점에서 되돌아가서 남로를 다시 택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경우인 것이다. 파미르 고원을 넘기 전에 호국(胡國)에서의, 그런‘튀는 행동’은 이미 앞장에서 이야기 한바 있으리라……. 호탄은 대사막 안에 가장 깊숙하게 자리 잡은 탓으로 비교적 중국화, 현대화가 덜 진행되어서 그런대로 신강지방 특유의 이국적인 정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고생고생 무리하게 온 보람도 있었다. 비록 카슈가르만은 못하지만 일요시장도 규모가 크고 인상적이었다. 물론 호탄의 바자르도 볼만하였지만, 역시 호탄 최대의 관심거리는 역시 기원전후에 번성했던 오아시스도시인 고대 정절국(精絶國)의 유적지인 니야(尼耶)였다. 20세기 초 영국의 스타인(Steien) 탐험대에 의해 3차에 걸쳐 발굴된 니야 유적지에는 수많은 고대 실크로드의 유물들이 모래 속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카로슈티(Kharosthi)'문자로<7> 목간(木簡)문서였는데, 그 숫자가 8백여 개에 달해 현재는 학자들에 의해 거의 해독이 되어 당시 서역의 면모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
2) 모래바람만 가득한 누란(樓蘭)왕국 호탄에서 서역남로를 따라오면서 혜초는 다음의 구절을 마지막으로, 영원한 침묵에 들어갔다. 자, 그럼 여기서 우리도 아쉽지만, 『왕오천축국전』마지막 구절을 읽어야만 하겠다.
「또 안서에서 동쪽으로 가면 옌지[焉耆]에 이른다. 여기에도 중국 군대가 지키고 있다. 왕이 있는데 백성은 호족이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은데 소승이 행해진다. (글자가 빠짐) 이것이 곧 안서(安西) 사진(四鎭)의 이름들이니 첫째가 안서, 둘째가 호탄, 셋째가 카슈가르, 넷째가 옌지이다.(글자가 빠짐) 중국법을 따라서 머리에는 두건을 두르고 바지를 입는다. (이하 완전 결손)」
그러니까 옌지 다음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혜초의 필사본은 백 년 전 천불동에서 발견될 때부터, 그 다음부분이 없었던 상태였다. 물론 3권짜리 『왕오천축국전』원본이 기연에 의해 발견되면 모르지만, 그 때까지는 위 구절이 마지막 구절인 것이다.
이미 혜초가 옌지를 지나갔던 당시, 그 근처에 있었던 옛 누란왕국, 즉 선선국(鄯善國)은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그것은 한 세기 먼저 지나갔던 현장 때에도 마찬가지였던지, 그도 귀로에 서역남로를 거처 누란왕국의 경내를 지나가면서 찬란한 이름만 남기고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져간 옛 전설적인 왕국을 생각하고는 간략히 기록하였다.
「대유사(大流沙)를 건너면, 성곽은 높이 솟아 있으나 인적이 이미 끊긴 찰마다나(沮末國) 옛터를 지나 다시 천리를 가면 나바파(納縛波) 즉 누란국(樓蘭國)의 옛 터에 이른다.」 그러나 그보다 두 세기 먼저 지나갔던 법현(法顯)의 『불국기』에는 선선왕국, 즉 누란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399년 뚠황을 떠난 법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사하(大沙河)를 17일간, 1천5백리를 걸어 선선국에 도착하였다. 지형이 기묘하게 생겼으나 땅은 메마르다. 속인의 의복은 중원과 크게 다르지 않고 다만 모포는 조금 다르다. 국왕은 불법을 모시지만 4천여 승려들은 모두 소승을 공부하고 있다. 이곳에서 서쪽의 나라들은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천축의 법을 따르고 있다. 나라마다 호국말이 다르다. 출가 사문들은 모두 천축의 글과 말을 배우고 있다.」
출가한 승려가 4천 명이라는 것을 보면 5세기 초까지도 누란은 대단히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낙양가람기』를 보면 누란은 6세기 말까지는 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누란의 쇠락은 중원의 여러 왕조와 토욕혼(吐谷渾), 토번(吐蕃) 등의 지배를 받고나서 7세기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여 진다.
「토욕혼에서 서쪽으로 3천5백리를 가서 선선성(鄯善城)에 도착하였다. 자신들이 왕을 세웠으나 토욕혼국에 병합되어, 지금 성의 주인은 토욕혼 국왕의 둘째 아들 영서장군(寧西將軍)으로 삼천 부락을 거느리고 서쪽 오랑캐들을 방어하고 있다.」
위 기록은 학계에서도 별로 눈여겨보지 않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정보를 담고 있다. 기존의 양대 실크로드 이외의 또 하나의 루트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청해호(靑海湖)에서<8> 차이담 분지를 가로질러 쿤륜[崑崙]산맥을 넘어 바로 뚠황이나 서역남로 루어창으로 나오는 루트로, 이른바 ‘토번지로(吐蕃之路)’라는 가칭으로 부를 수 있는, 옛 토번제국의 군사도로를 겸한 길인데, 혜생(惠生)사문 일행은 그 길을 이용하여 하서회랑(河西回廊)이나<9> 뚠황을 거치지 않고 바로 서역남로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루트는 토번이 서역을 지배하기 위해<10> 기병들이 말을 달렸던 길이었고 전운을 부르는 봉화불이 그치지 않았던 길이었다.
옛날 변경지대에서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본국과 연락을 취하는 방법은 파발마(擺撥馬)나 전서구(傳書鳩)를<11> 띠우거나 봉화(烽火)를 올렸다. 그중 사막에서는 봉화가 가장 일반적이었다고 하는데, 적군의 침입을 알리는 방법에는 5가지가 단계가 있었다고 한다. 횃불이 한번 오르면 적군 100명 이하의 기마대가 온다는 것이고, 두 번이면 500명의 적군이 온다는 식으로 해서 5번 불길이나 연기가 오르면 5천 명 이상의 기병대가 온다는 신호였다고 한다.
기원전부터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독립적 왕국으로 번영하던 누란은 기원전후를 전후하여 한나라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왔다. 당시의 상황은『한서서역전』에 자세히 나타난다.
「선선국은 원래 누란이라 불렀다. 그곳은 장안에서 6천 리 양관에서 1천6백 리 지점에 있다. 가구수는 1,570호, 인구는 14,100명, 군인은 2,912명이다. 관리로는 선선도위(鄯善都尉)을 비롯하여…… 역장(驛長) 2명이 있다. 토지는 사막이어서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딴 나라의 경작지를 빌리고 있으며 곡식은 근방의 나라에서 수입하고 있다. 산물로는 옥이 생산되며 갈대, 버들, 백초 등이 있다. 주민들은 수초(水草)를 따라서 생활을 하며 낙타와 당나귀를 많이 사육하고 있다. 전투를 잘하는 것은 강족[羌, 티베트]과 같다.」
3) 방황하는 호수 로프노르[Lop Nor, 蒲昌海] 다시 돌아온 루어창[若羌]에서 하룻밤을 지낼 곳을 찾아 시가지를 헤매다보니 상호들이 하나 같이 누란(樓蘭), 미란(米蘭)같은 매혹적인 이름이 감초처럼 들어 있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나도 누란초대소라는 곳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늦은 저녁을 겸해 길거리 노천가게에서 양고기 꼬치구이를 안주 삼아 맥주를 병 채로 들이키며 이국적인 정취에 잠겨 들어갔다. 뭐, 호주가이라서 이기보다 중국에서는 맥주잔이라는 것이 꼭 우리 소주잔 만한데다 깨끗해 보이지도 않아서 그래서 생긴 병나발습관이었다. 그리고 중국은 맥주가 물보다 훨씬 값이 싸기에 정말 부담 없이 병째로 마시는 습관이 배게 된 것이다. 빈속에 마신 병나발 맥주라 오르는 취기에 비례하여 여흥도 무르익어 갔다. 그리하여 길거리에다 몸은 잠시 놓아두고 ‘유체이탈’의 술법으로 아득한 전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래 전에 읽은, 일생을 중앙아시아 탐험에 바친 위대한 도전가 스벤 헤딘(S Hedin)을 따라 옛 누란왕국 근처에서 지금도 방황을 계속하고 있다고 전하는 전설의 호수, ‘로프노르’로 날아갔다.
1세기부터 5세기 중반까지 누란왕국의 판도는 동쪽은 ‘로프노르’에서 서쪽은 호탄국과의 경계인 니야(尼耶)에<12> 이르는 동서 9백 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당당한 독립왕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7세기 초, 생명 줄인 물길의 변경으로 물이 고갈되어 주민전원이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극적 상황을 맞게 되었다. 서역남로의 시발점인 누란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바로 서역남로 자체가 그 기능을 다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또한 누란이 사라진다는 것은 방황하는 호수도 망각의 강 너머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누란의 쇠락과 같이 서역남로도, 로프노르도 전설만 무성하게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누란왕국의 존재와 방황하는 악마의 호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냥 믿거나 말거나 하는 원주민 노인들의 전설일 뿐이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처럼 1천5백년이란 세월의 무게만큼 모래 아래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천불동의 고문서 발견으로 중앙아시아 일대에 불어 닥친 보물찾기 열기에 편승하여 스타인(R.A Stein)과 헤딘 같은 탐험가들이 누란 유적지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스타인이 3차에 걸친 발굴로 이른바 카로스티(Kharosihi)문서라고 부르는, 목간(木簡)과 피혁에 쓰인 고문서를 발견하게 되고 이어서 몇몇 학자들의 해독에 의해 마침내『한서 서역전』과 『불국기』, 『낙양가람기』에 기록된 누란왕국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누란왕국의 관내에 해당되는 미란, 차르크릭, 니야 등지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천여 년이란 긴 잠에서 깨어 모래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 유물들의 특징은 본토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의 것과 서양의 것이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었다. 특히 미란의 절터 벽화에서 발견된 날개 달린 천사상(天使像)과<13> 꽃 비단을 두른 군상들은 지중해의 그리스와 바로 연결되는 것이었고 그 외에도 그레꼬로만(Greco-Roman)풍의 모직물과 한나라의 비단과 옥 세공품 등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그 사실은 당시 서역남로를 통한 동서양의 교류가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실질적인 증거였다.
학술적인 발굴에 주력한 스타인과 달리 또 한 사람의 중앙아시아 마니아인 스웨덴의 스벤 헤딘의 관점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방황하는 호수에 대한 원주민의 전설과 당시 몇몇 탐험가들의 가설을 뒤집고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논쟁의 발단은 중국 측 자료인 포창호(浦昌湖)와 로프노르가 동일한 것인지와 로프노르에 대한 러시아의 포르제발스키와 코즈로프 그리고 독일의 리히트호펜과 영국의 스타인 사이에 벌어진 지리학적 비정(比定)에 관한 것이었다. 로프노르(Lop Nor)는 몽고어로 ‘많은 강물이 흘러드는 호수’ 라는 뜻인데, 한나라 때는 포창호로, 또는 로푸포[羅布泊]라고 불렸지만, 그런데 그 위치가 너무나 많이 차이가 났기 때문에 마치 두개의 다른 호수로 오인된 데서 생긴 논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근처의 지형은 매우 특이하다 못해 괴기스러울 정도여서 ‘악마의 호수’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온갖 괴담을 부채질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결국 헤딘이 1934년에 20년 만에 두 번째로 다시 ‘쿰다리아’를<14> 따라 로프노르에<15> 도착함으로써 그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은 이 신비로운 호수는 1천여 년을 주기로 사막에서 신기루처럼 동서로 수백 킬로미터를 방황하는 호수라는 것이었다. 당시 헤딘이 69세의 나이였다고 하니 그의 선천적인 역마살을, 나아가 사막에 대한 집착을 짐작하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참, 스벤 헤딘의 연보를 각주<2>에 달아 놓았으니 관심 있는 마니아들은 참조하시기 바란다.
<가이드 포인트> 신강의 가장 오지인‘서역남로’의 호탄[和田]으로 가는 길은 우선 신강자치구의 주도 우루무치[烏魯木齊]로 가서 투루판[吐魯番]- 쿠어러[庫爾勒]- 루어창[若羌]을 거처 가는 방법과 우루무치- 카슈가르- 예청[葉城]을 거쳐 가는 방법이 있으나 어느 것이나 만만치 않은 길이다. 그래서 편도는 우루무치에서 호탄가는 비행기를 한 번은 이용하는 것도 좋다. 물론 옛날에는 뚠황에서 남로를 따라가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 이 길은 인적이 끊겼기에, 꼭 이 남로의 분위기를 맛보고자 한다면 청해성의 거르무[格爾木]에서 버스를 타고 쿠어러로 가는 루트[옛 吐蕃之路]가 가능하다. 그러나 필자가 이 길을 도전해 본 경험에 따르면 전혀 경제적이지 않으니 추천하고 싶은 길은 아니다. 오히려 남, 북로를 횡단하는 쿠어러와 루어창을 잇는 루트가 해볼만하다. 특별히 루란[樓蘭]과 미란[米蘭] 유적지에 관심이 있는 마니아라면 일단 루어창으로 가서 탐험단을 모집해볼 수 있지만, 만만치 않은 경비가 소요되니, 가끔 일본호사가들이 팀을 짜는 경우가 있으니까 거기 합류해도 된다.
< 각 주 > <1>- 쿠차와 까오창 사이에 있는 도시로 옛 이름이 엔지[焉耆]이다. 서역남로의 루어창으로 가는 버스가 다니기는 하지만……. <2>-Sven Anders Hedin(1865∼1952) 스웨덴 지리학자·중앙아시아 탐험가. 스톡홀름 출생. 어린시절부터 비경(秘境)탐험을 동경하여 베를린대학으로 옮기면서 스승인 F. 리히트호펜의 영향을 받아 중앙아시아 탐험을 목표로 삼았다. 1893∼97년의 제1차 탐험에서는 파미르의 고봉을 등반하고, 타림분지를 종횡으로 탐험하여 서역 고고학 붐의 실마리를 열었다. 1899∼1902년의 제2차 탐험에서는 누란(樓蘭)유적을 발굴하여 많은 고문서를 발견하였고 티베트각지를 탐험하였다. 1906∼08년은 티베트탐험에 주력하여 트랜스히말라야산맥을 발견하였다. 27∼35년에는 중국과 합작으로 서북과학고사단(西北科學考査團, Sino-Swedish Expedition)을 편성하여 로프노르의 주기적 이동상황을 확인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독일과의 외교절충을 위해 활동하였으나 그로 인해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병사하였다. <3>- 카불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적혀 있다. 『Mark Aurel Stain. -인도고고학조사국원. 학자. 탐험가. 작가.- 인도, 중국령 투르케스탄, 폐르시아, 중앙아시아. 이라크의 험난한 곳을 여행하여 지식의 경계를 열었다. -1862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04년 영국시민이 되었고 1943년 10월26일 카불에서 잠들다.』 <4>- 법현의 『불국기』 <5>-현장의 『대당서역기』 <6>- 예청은 쿤륜산맥을 넘어 티베트로 가는 갈림길목이다. <7>- 고대 북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에 걸쳐 쓰였던 문자로 B.C 5세기 무렵 브라흐미 문자를 아는 사람이 아랍문자를 차용하여 지방의 언어를 표기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페샤와르의 샤바즈가리에서 이 문자로 새겨진 아쇼카 왕의 마애비문 발견으로 B.C 3세기 무렵 이 문자가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쇼카 왕 이후에도 샤캬·쿠샨 왕조의 왕들에 의해 채용되었으나, 5세기 이후 브라흐미계(系) 문자와 교체되며 잊혀졌다. 19세기에 해독되어 불교·자이나교 등의 문헌에서 확인되었다. <8>- 일명 ‘코크노르’로 현재 중국에서 가잔 큰 담수호이다. 청해성(靑海省)에 있는데, 옛날 당나라와 토번의 주된 전쟁터였다. 현재 인근의 거르무[格爾木]에서 티베트의 라싸와 뚠황로 연결되는 버스가 있다. <9>- 북으로는 고비사막과 남으로는 기련산맥 사이에 끼어 있는 동서 8백㎞의 긴 복도 같은 지대를 말하는데, 장안에서 서역으로 가는 요충지여서 옛날부터 각축장이었다. 주천, 안서, 무위, 장액을 하서사군이라 칭한다. <10>- 토번의 서역지배는 뚠황의 70년을 비롯하여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실크로드의 변수로써 항상 큰 작용을 하였다. 졸저, 『티베트의 역사산책』에 자세하다. <11>- 통신용 비둘기를 말한다. <12>- 현장은, 「 피마천에서 동쪽으로 사막에 들어가면 니야성에 이른다. 주위가 3-4리로 큰 소택지 안에 있다. 소택지는 온도와 습도가 높아 건너가기가 곤란하며 갈대가 무성하여 길이 없는데 다만 서쪽으로 갈 수 있는 길만 통행할 수 있다. 그래서 쿠사타나는 이곳을 그 땅의 동쪽 관소(關所)로 쓰고 있다.」 <13>-그리스 어로는 안젤로스(angellos)라고 하는데,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기원(祈願)을 신에게 전하는 영적인 존재이다. 기독교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실은 그보다 먼저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에서 나타난다. 이 미란의 천사도 조로아스터와 마니교의 영향이 농후하다. 이들 천사들은 미술에서 흔히 날개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14>- ‘쿰’은 모래를, ‘다리아’는 강물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모래 강’ 이 되는 셈이다. 참, ‘노르’는 호수를 의미한다. <15>- 한(漢)나라 때는 포창호(蒲昌海) 또는 염택(鹽澤) 등으로 불렸으며 그 물이 땅 밑으로 흘러들어가 황하(黃河)을 이룬다는 전설도 있었다. 그러나 1980년 중국의 과학적 조사에 따르면 지금도 풍식작용(風蝕作用)과 염분으로 뒤덮이는 현상이 진행 중이어서 현재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 소금바다로 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부근에 핵연구시설과 실험장이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일체 금지되고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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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독하듯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