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과 그의 손자 요셉
이삭이 늙어 백팔십의 나이에 죽으니 아들 에서와 야곱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룹니다.(창35:27-29)
이삭이 나이 육십에 이 쌍둥이 형제를 낳았으므로(창26:26) 이 때 에서와 야곱의 나이는 백이십 세가 됩니다.
그러면 이 때 이삭의 손자인 요셉은 과연 몇 살이었을까요?
요셉이 나이 삼십에 총리가 된 후 칠 년의 풍년이 지나고 칠 년의 흉년 중 이 년이 지난 때에 부모 형제를 만나니까 이는 서른아홉 살 때의 이야기인데 이 때 요셉의 인도로 바로 왕을 만나는 야곱은 바로 왕에게 자기 나이가 백삼십이라고 말합니다.(창47:9)
그래서 따져보니 야곱은 아흔 한 살에 아들 요셉을 보았으며 애굽에서 요셉을 만나기 십년 전 이삭이 죽었을 때 요셉의 나이는 스물아홉이 됩니다.
스물아홉 살 때 요셉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 일 년 전이니 요셉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입니다. 열일곱 살에 형제들로부터 버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간 지 십이 년 뒤에 요셉의 할아버지 이삭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때 감옥에 갇혀있던 요셉에게는 할아버지 이삭이 돌아가셨는지 전혀 알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다보니 어쩌면 요셉은 할아버지 이삭과 함께 살며 지낸 적이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 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할아버지 야곱과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창세기를 찬찬히 살피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따라 외할아버지 라반의 집 밧단아람을 떠나 세겜을 거쳐 벧엘을 지나 할아버지의 땅 헤브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그 때부터 애굽으로 팔리기 전 열일곱 살까지 얼마 동안 요셉은 할아버지인 이삭과 함께 지낸 것입니다. 요셉뿐만 아니라 야곱의 열두 아들 모두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장례식 때에 요셉을 제외한 야곱의 열한 아들들 모두는 청장년의 나이들로 아버지 그리고 큰 아버지 에서와 함께 자리를 해서 문상객들을 만나는 등 유족의 역할을 잘 감당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삭의 말년을 머리에 그려봅니다.
야곱이 형을 속인 일로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 밧단아람으로 피신한 때는 그의 나이 칠십이 좀 넘었을 때입니다. 이십여 년이 지난 후에 열두 손자와 손녀 디나 그리고 세 며느리 즉 레아와 실바, 그리고 빌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들 야곱을 맞이한 이삭의 감회는 어땠을까요.
이 때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의 생사여부를 확인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십여 년 전 아들 야곱이 집을 떠날 때 이삭이 야곱에게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순종한 그 아들 야곱이 며느리들과 손자들을 데리고 돌아왔으니 그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예들아 할아버지시다. 인사드려라.
아버지 이 아이가 큰아들 르우벤, 그 옆이 둘째 시므온입니다..........”
이런 식으로 차례대로 열두 손자들의 절을 받는 이삭의 기쁨을 상상해봅시다.
“.........이 아이가 열한 번째 요셉입니다. 혹 소식을 아시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제 어미 라헬은 막내 베냐민을 낳고 죽는 바람에 베들레헴 길에서 장사를 치렀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야곱이 이삭에게 한식구한식구 소개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작은아들이 집을 떠난 후로부터 그 이십여 년 동안에 어느 정도는 야곱의 소식을 알고 있지는 않았겠습니까.
아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가나안과 밧단아람간에 사람의 왕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8절이 그 해답입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곡함의 상수리)이라 불렀더라.’
드보라가 누굽니까?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입니다. 리브가가 이삭과 혼인하기 위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쪽으로 떠날 때 동행한 여인입니다.(창24:59) 그리고 아무런 이야기도 없다가 야곱의 귀향 중 동행하던 한 여인 즉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에 슬퍼하는 야곱 일행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어찌된 사연일까요.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야곱이 집을 떠난 뒤에 리브가가 유모 드보라를 오빠 라반의 집으로 보내어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야곱과 그의 가정을 돌보게 했기에 가능한 이야깁니다. 물론 유모를 보내기 전 리브가는 남편 이삭과는 의논해서 그리했으리라 봅니다.
창세기 28장 45절에서 리브가가 아들 야곱을 외삼촌 집으로 피하라 하면서 형의 분노가 풀리면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부르겠다고 했을 때 리브가가 보내려 생각했던 사람도 십중팔구 드보라였을 것입니다. 리브가의 처녀시절에 같이 지내던 밧단아람으로 돌아온 드보라는 믿음도 좋고 리브가에게는 물론 야곱의 가족에게도 매우 헌신적이어서 야곱의 모든 가족에게 큰 사랑과 존경을 받던 여인으로 그래서 그 여인의 죽음을 온 식구가 슬퍼하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밧단아람과 가나안 사이는 여자 혼자 다니기 어려운 길입니다. 외삼촌 집으로 피신해가는 야곱은 어쩔 수 없이 홀로 그 길을 지났지만 아삭의 신부 감을 찾으려 그 길을 다녀온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은 열 마리의 낙타에 짐을 싣고 여러 명의 동행자들을 거느렸던 길입니다.(창24:54)
리브가는 유모를 보낼 때 물론 다른 사람을 동행시켜서 보냈을 것이고 돌아온 그 일행을 통해 궁금했던 아들 야곱의 소식도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아주 잦은 왕래는 없었겠지만 밧단아람과 가나안 사이에 소식이 간간히 오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는 이삭의 구체적인 당부 역시 라반에게 혼기의 딸이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 추측해보면 밧단아람과 가나안 사이의 소식은 그 이전에도 오갔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하여튼 이삭은 아주 늦게 아들 야곱의 식구들과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이 돌아온 후 네 여인의 소생인 열두 손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형제사이의 갈등, 그리고 특히 요셉을 편애하는 아들 야곱의 모습도 보았을 것이고 큰손자 르우벤이 그의 작은어머니 빌하 사이에서 벌인 부정한 일에 대해서는 몰랐을지 몰라도 세겜에서 저지른 손자들의 끔찍한 살인 사건은 혹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손자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며 그래서 슬퍼하는 아들 야곱의 모습도 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여호와의 약속에 대해 들어왔고 그리고 살아오면서도 여호와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수없이 경험한 이삭, 그래서 여호와의 자손에 대한 축복을 굳게 믿고 있는 이삭도 손자 요셉의 실종사건은 어떻게 받아드렸을까 한 번 묵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요셉이 본 할아버지 이삭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요셉은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에도 평소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또는 할머니의 유모 드보라에게로부터 아버지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할아버지와 그리고 할머니 리브가의 이야기를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를 만난 후 똑똑하고 어린 요셉은 분명히 할아버지 이삭으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증조부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외할아버지 집 근처에서 살 때 외할아버지 라반이나 외삼촌들이 아버지 야곱을 미워하는 모습,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사이에서 어머니와의 미묘한 관계, 배다른 형들 사이에서의 미운 털 취급받기 등을 겪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외가 집으로부터의 야반도주, 큰 아버지 에서를 만날 때 긴장됐던 하루하루, 그리고 세겜에서 누나인 디나 때문에 생긴 사건 등 결코 평범하지 아니한 어린 시절을 겪었습니다. 특히 어린 나이에 어머니 라헬의 죽음이 준 상처는 요셉에게 매우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우여곡절의 사춘기시절 후반에 만난 할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영향을 분명히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요셉이 꿈 많은 순수한 소년으로 성장하는 데는 할아버지 이삭의 영향력이 크게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노에로 팔린 후 보디발의 집에서 그리고 보디발의 감옥에서는 물론 총리가 된 후에도 요셉은 자주 고향의 아버지 야곱의 생각을 하였을 것이고 또한 할아버지 이삭의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온 형제들에게 요셉이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구절이 나옵니다만 총리가 요셉인 줄을 모르는 형제들과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 할 때 아마도 분명히 요셉은 할아버지 이삭에 관해서도 질문을 했으리라 봅니다. 당신들 아버지의 아버지 즉 당신들의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느냐는 식의 질문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이삭이 십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이때에 확인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이런 식의 상상을 해보는 것으로 우리는 성경을 다시 읽어보게 되고 또 다른 깊은 묵상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도 부모님으로부터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로 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고 교훈도 얻습니다. 훌륭한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손자에게 분명히 좋은 영향력을 미칩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여의고 성장하는데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대부분 가정이 한둘 정도의 귀한 자식들로 자식들이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와는 세대차가 너무 커서 조금 나이가 들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멀리한다고들 합니다. 부모들도 그런 자식들의 태도에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고리타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자식 사이에서 거리를 두려고 하는 모양인데 이는 결코 성경적이 아닙니다. 나이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가르침과 사랑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어른들을 공경하고 그분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가르치는 내용은 아버지 솔로몬 시절의 나이든 대신들의 의견 대신 자기 친구들의 의견을 들음으로 인해서 나라를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지게 한 이스라엘의 왕 르호보암의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삭과 요셉 사이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나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의 이야기를 생각도 해 보고 내 손자와 나 사이 아니면 내 자식들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이가 과연 성경적인지 아닌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