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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해외역사문화탐방(중국 상해, 무석, 소주) 메모내용 및 인물 역사적 사건을 정리했습니다.
2013년 유네스코 해외 역사 문화 탐방(중국 상해, 무석, 소주)
메모 내용
1. 상해푸동(黃浦江(황포강) 동쪽을 의미하는 포동의 중국식 발음)공항에서 상해시가지까지 40분이 소요됨. 33세 정미란가이드님, 운전사 황스부. 황포강을 중심으로 동쪽이 포동(신시가지), 포서(구시가지)로 나뉘어져 있음. 상해는 경제무역도시이며, 서울의 11배, 인구는 2000만임.
1-1. 중국의 운전수에게는 쓰부(師父)라는 칭호를 붙여 준다고 한다. 우리 버스 기사님은 황쓰부(아주 친절하심)였다.
쓰부라고 붙여준 것은 단순히 운전만 해서는 안되고 3년과정을 거쳐 정비까지도 확실히 할 수 있어야 하기에 붙여진 칭호라고 한다. 그 점에서는 우리나라 드라이버는 운전밖에는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에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2, 중국의 인구는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당시 5억이었는데, 20년후 10억이되었고, 현재는 13억 그러나 등록되지 않는 인구까지 합하면 15억을 예상한다. 중국인도 확실히 중국인구를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2-1. 북경, 상해, 심천, 광주(광동성) 4개 도시는 한국의 서울과 같은 물가 나 생활수준이다고 한다.
3. 상해는 아열대 기후로서 여름에는 40도까지 오르며 겨울 평균기온이 0도이다. 때문에 습도가 높아 빨래를 밖에 걸어놓은 아파트나 집이 많음
4.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한족이 92%이고 나머지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좡족, 만주족, 회족, 묘족이 인구가 많은 순서이면 조선족은 13번째로 200만 정도이다. 현재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곳은 옛 만주지역인 동북3성(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이다. 조선족의 이주사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5. 중국은 고가도로가 발달되었으며 중국의 보통집들은 3층 집이 많고 1층은 비어두며, 2층은 거실이고 3층이 침실이다.
6. 중국은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하는데 상해에서는 둘째를 출산할려면 한국 돈으로 1000만원 정도 벌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함.
6-1. 중국의 산아정책은 한족은 1명이며, 소수민족은 2명까지 가능하고, 4개 직할시는 1명이며 시골에서는 첫딸을 놓고 5년이 경과하면 또 한명 출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7. 사람인(人)자가 세 개 있는 한자는 衆(중)자이다.
7-1. 중국의 한자는 로서 1955년 이후부터 사용되었으며 약 2000여자가 있다고 함.
8. 상해에는 180억(한국돈)되는 102평 아파트가 있다고 함. 빈부차이를 대변하는 사례라고 생각됨(1元(위엔)은 20원(우리가 환전할 때는 18원이 조금 넘었다))
9. 북경에서 상해까지 고속열차(動車)는 5시간이 걸린다고 함.(요금은 한국돈으로 12만원)
10. 중국자동차는 주로 외국회사와 합작또는 합자하여 만들어지고 있다고 함.
11. 중국에서 땅은 국가 소유이며, 건물은 개인 소유가 가능하나 70년 임대형태라고 함.
12.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일(1949.10.1)은 국경일로 7일간 쉰다고 하며, 신정도 12,31~1.2까지 쉰다고 함.
13. 상해 오토바이는 전기 충전식으로 공해방지를 위한 것이다고 함.(자전거도 전기 충전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았음)
14, 2010년 상해엑스포 입장객 중 90%가 자국민이었으며, 폭스바겐(독일브랜드) 2200대가 영업용으로 선택됨.
15. 중국에서의 한류는 드라마가 영향이 컸고 그 중에서 대장금 인기가 가장 높았다고 함.
16. 江蘇省의 제1의 도시는 蘇州(소주, 중국명 수조우)이며 제2의 도시는 無錫(무석, 중국명 우시)이라고 함.
17. 상해에서 항주까지는 2시간 반 정도 소요되면 송성가무가 유명하다고 함.
18. 상해에서 계림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함.
19. 중국의 표준말은 보통화로 하며, 朝上好(아침인사 쟈오(3성) 샹(1성) 하오(3성))이고,
辛苦了(수고했다. 신쿠로), 明天見(내일 보자. 밍티엔치엔)
20. 상해 아침식사는 면과 죽(쌀), 콩물이 일반적이다.
21. 보통 학교는 07시 30분 등교하며, 07시 40분에 1교시가 시작된다.
22. 호구는 연변에 두고 상해에 살지만 상해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상해시민과 결혼하거나, -6년 거주해야 됨
23. 東方美人(동방미인차, 우롱차(발효)의 일종으로, 위장, 손발 냉증), 苦甘露(고감로차, 기침, 천식, 소염)普珥(보이(일명 원숭이차), 완전발효차로, 카페인 전혀 없고, 변비, 혈압, 당뇨, 지방분해에 탁월한 효험), 실온에 보관, 1등급 네모, 2등급 원 모양임, 6등급까지 있음.
24.피서(비슈) 돈을 상징, 입은 크고 항문은 없고 엉덩이는 무거워 따라서 돈과 권력을 상징한다고 함.(삼국성 앞에 놓여진 상징적 동물)
25. 양자강(중국명 長江)을 기준으로 남쪽을 남방 북쪽을 북방이라하며 남방에 미인이 많고 특히 항주지방에 많다고 함.
26. 택시기본요금은 지역에 따라 다르나 14元으로 한화 280원 정도임.
27. 중국은 구정(음1,1)에 춘절만화라는 텔레비전 프로(밤 08:00~12:00)가 있는데 연예인 등용문이라고 함.(작년에 슈퍼주니어 한경이 출연했다고 함)
28. 소주 명대의 정원의 건물 재료는 남목이라는 나무로 500년에 30미터 자란다고 하며 황족의 관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함.
29. 중국의 고속도로는 승용차는 제한속도는 모두 120키로라고 함.
30. 중국은 1자녀만 낳아야 하기 때문에 유산이 심해 국제인권문제가 되고 있다고 함.
31. 한국관광회사 중 보물섬, 노란풍선, red cap 같은 관광회사는 싼 상품으로 실제 현지에 와서 옵션이 있어 소비자가 상당액을 부담해야 한다고 함. 주의를 요함.
32. 중국의 5.1(노동절) 9일간 연휴, 10.1(건국기념일) 7일간 연휴은 중국 관광을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함.
33. 중국의 고속전철(동차)는 현재 15,000키로 미터가 깔려 있으며, 2004년 처음 만들어 졌을 때는 시속 250키로였으며 현재는 350키로까지 속도를 낼 수 있으나 안전상 330키로 까지 내고 있다고 함.
34. 중국은 교사(초등학교) 정년이 여자는 55세, 남자는 60세이며 대학교수는 65세다고 함.
34-1. 중국의 교육제도도 한국과 같은 6.3.3.4제이며 중3년(9년간)까지가 의무교육이고
한명의 아이가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나올려면 한국돈으로 2500만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35. 중국의 학교 겨울방학은 남방은 2월에 하며 3주 정도이며, 2.20일 정도 개학하며(여름방학은 7월초~8월말),북방은 12월 말부터 2월 말까지다고 함.(7월말~8월말)
<다음은 탐방기간 중 나온 용어나 인물 역사적 사실을 정리해 본 것임>
1.중국의 공식명칭은 이며 1949년 10월 1일 천안문에서 (모택동): 마오쩌뚱이 선포함
주1) 중화인민공화국(중국어 간체: 中华人民共和国, 정체: 中華人民共和國, 병음: Zhōnghuá Rénmín Gònghéguó)은 동아시아에 있는 공화국이다. 세계 최대의 인구와 넓은 국토 때문에 그 영토를 중국 대륙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몽골과 함께 동아시아를 이루고 있다. 1949년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이 건국하였고, 지금까지 국정을 독점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건국 이후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을 거친 뒤, 덩샤오핑(鄧小平)의 지도로 개혁개방을 시행하면서 2010년 일본을 추월하고 국내 총생산 2위를 기록했다.
1949년 마오쩌둥의 승리가 세계 제2의 공산국가를 탄생시킨다.
주2)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의 티엔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공식 선언했다. 곧 건국을 기념하는 거대한 포스터들이 등장했다. 미소를 띤 마오가 왼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근대적인 비행기들이 날아다니며, 흠잡을 데 없는 옷차림의 남녀와 어린이들이 축하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현실은 보다 냉정했다. 중국은 20년 동안의 격렬한 투쟁으로 무릎을 꿇은 상태였으며, 그들의 적-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패배하지 않고 타이완 섬으로 물러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10월 1일은 그저 임의적인 축하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중국 공산당을 창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 28년 만에 마오는 공산주의 중국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마오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모스크바의 전문가들은 농민들이 프티부르주아이며 반동분자 세력에 가깝다고 세뇌시켜 왔기 때문이다. 만약 마오가 게릴라군의 지도자로서 재능이 덜 풍부했다면 중국 공산주의는 아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었다. 국민당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산주의를 박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본에 대항하여 잠시 손을 잡기는 했지만, 일본이 항복한 뒤 내전이 재개되었다. 심지어 1949년 10월 이후에 중국의 일부 지역은 국민당 지지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소련과 영국이 신생국가의 존재를 최초로 인정하였다. 국민당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지만, 타이완 내에만 머무르게 된다.
2. 60년 중반에 시작된 모택동의 문화대혁명과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문화대혁명>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이었으며 그 힘을 빌어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과도한 중공업 정책을 펼쳐 정책 국민경제가 좌초되는 실패를 가져왔고 민생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정책의 일부를 채용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류사오치 劉少奇(유소기)와 덩샤오핑 鄧小平(등소평)이 새로운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전국을 휩쓸어 중국은 일시에 경직된 사회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실각되거나 숙청되었고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는 공식적 평가와 함께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급속히 소멸되었다.
마오쩌뚱(모택동): 1893년 12월 26일 (중국) -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중국의 “가난한 사람을 살렸다”
자 룬즈[潤之]. 후난성[湖南省] 샹탄현[湘潭縣] 사오산[韶山]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3세까지 《논어》와 《사서(四書)》 등을 읽었다. 16세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책을 읽다가 1909년 둥산[東山]고등소학에 들어갔다. 그 뒤 창사[長沙]의 샹샹[湘鄕]중학으로 옮겼고, 동맹회 《민립보(民立報)》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그 신문에 실린 반청론(反淸論)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 공부나 외국 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를 만났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이던 1917년 그는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는데, 회원은 대부분이 제1사범학교 학생들이었고, 이 학회는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되었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도왔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 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수업을 청강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 학생 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4 운동 발발 후 후난 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금지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0년 겨울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楊閏慧]와 결혼하였고, 1921년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 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陜西省] 옌안[延安]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대장정, 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抗日) 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 《신단계론(新段階論)》(1938), 《신민주주의론》(1940) 등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 보고를 통해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그는 국민당과 1946~1948년의 내전에서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우고 국가 주석 및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년 반우파(反右派) 투쟁 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 운동은 실패하였고 수천만 명의 인민들이 굶어 죽는 사태로 치달았다. 마오쩌둥의 권위가 추락하여 1959년 4월 국가 주석을 사임하게 되었고, 류사치오가 당주석이 되어 자작농을 부활시키려 했다.
1964년 4월 펑더화이가 실각한 후 린바오[林彪]가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마오쩌둥을 숭배하고 찬양하였다. 그는 군부에서《마오쩌둥 어록[毛澤東語錄]》을 간행했으며 마오쩌둥의 사상을 홍보하는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마오쩌둥은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을 통해 ‘마오쩌둥 사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홍위병을 앞세운 문화대혁명을 통해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실력자들을 물리치고 다시 권력을 잡았다.
1968년 10월 마오쩌둥은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실각시켰고, 1969년 마오쩌둥과 린뱌오[林彪]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反)마오쩌둥 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 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천안문 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이자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생애에서는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인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달성한 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개혁 정책인 대약진 운동은 실패로 끝난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1981년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중국 정부에서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내란이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덩샤오핑(鄧小平): 1904년 8월 22일 (중국) - 1997년 2월 19일
덩사오핑이 중국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13개 연해안 도시에 대한 문호를 개방
쓰촨성[四川省] 출생. 1918년 프랑스로 유학, 1921~19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후 모스크바의 중산(中山)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7년 광시[廣西]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
1933년 반주류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고, 장정(長征)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한편 류사오치[劉少奇]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으로부터 반모주자파(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쩌둥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에 의하여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죽고 화궈펑[華國鋒]이 저우언라이 계열의 노간부인 예젠잉[葉劍英], 특무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복직되었다.
그후 화궈펑과 5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의 집권 후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1989년 6월 톈안먼[天安門]사건으로 그의 정치적 거취가 불안해 보였으나 위기를 수습하고,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1997년 2월 19일 사망했다.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
1978년을 전후한 30여년 전의 중국의 모습은 경제적으로는 아직 농촌인구가 80%를 차지하는 낙후된 산업인구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좌파적 파괴행위에 대한 지도부 및 인민의 공통된 혐오감으로 인해 과거의 정책노선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사회적으로 문화대혁명 시기 농촌으로 하방(下放)되었던 청년인구가 다시 도시지역으로 돌아옴에 따라 고용창출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이 중국은 더 이상 과거의 정책노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책노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연유로 새로운 노선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의 형성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등소평의 실용주의와 실험적 방법이 결합하여 1978년을 기점으로 등장한 것이 중국 경제개혁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개방정책이다.
중국의 총체적 난국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결의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인민 생활수준의 향상을 위해 ① 중국경제를 개방하여 외국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고, ② 지방정부와 기업의 생산과 투자의사결정권한을 확대(분권하)하며, ③ 기업과 개인차원에서의 화폐 및 물질적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경제정책방안을 제시하였다(오승렬, 2001). 위와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중국은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특히 경제적 성과에 대해서는 1979년~2008년 동안 연평균 10%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기록하며 중국의 성과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개혁·개방이 하나의 경제발전 모델로 연구될 정도로 성과를 거두었다.
서태후 [西太后, 1835.11.29~1908.11.15]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며, 동치제의 생모인 자희황태후. 동치제와 광서제의 섭정을 지냈고 광서제가 입헌파 캉유웨이와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무술정변을 일으켰다. 말년에는 신정을 실시했으나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함풍제의 사후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공친왕(恭親王)과 공모하여 쿠데타로 반대파를 일소하고 모후(母后)로서 동태후(東太后: 함풍제의 황후로 慈安皇太后라고도 한다)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1875년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3세의 아들을 옹립,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켜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국정의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1898년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에 접근, 신정을 실시[戊戌變法]하여 입헌군주제를 위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켰다. 의화단(義和團)의 반(反)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하여 열강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였으나,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西安: 陝西省]으로 피신하였다.
모든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베이징[北京] 귀환 후에는 입헌 준비, 실업(實業), 교육의 진흥 등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배외정책에서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청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 하루 뒤에 죽었다.
<서태후가 섭정(1861~1908(57년간))한 시기에 중국 국내․ 외 주요사건으로는>
-제1차 아편 전쟁(참고자료, 서태후 섭정시기는 아니나 연관성이 있기에 탑재):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은 중국의 아편 단속을 빌미로 하여 영국이 일으킨 전쟁이다.
전쟁 발발 무렵 영국과 중국 사이에는 중국 신발의 인기로 인해 불공정한 무역이 계속되었다. 이미 우수한 옷감 제조 기술을 보유한 중국은 영국산 방직물을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 상인들은 아편 무역을 통한 이윤 창출을 고안해냈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중국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아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청나라는 임칙서를 내서워 강력한 아편 단속 정책을 펼치고,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쫓아냈다. 아편에 중독 된 중국인으로 인해 '동방의 병든 남자'라는 뜻의 '동아병부'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고 중국인은 동아병부라는 말을 싫어하게 되었다.
청나라의 아편 단속에 반발한 영국은 무역항을 확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영국 측은 남경조약(난징조약) 체결과 홍콩의 할양, 광둥 이외의 다섯 항구를 추가 개항하도록 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결국, 아편전쟁은 두 국가간의 무역의 격차 때문에 생긴 것이다.
-南京條約(난징조약):
상해(상하이)가 조계지 된 이유
*조계지 정의: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영국과 청(淸)
제1차중영전쟁(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조약이며 장닝조약[江寧條約]이라고도 한다. 청나라 임칙서가 아편무역을 금지시키고 영국상인들의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우자 영국은 함대를 이끌고 양자강 하구를 봉쇄하면서 침략하였다. 무능한 청나라 군대는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6백만불의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하였고 양쪽 군대가 모두 철수한다는 광동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중국민들의 반발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영국군 사상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를 빌미로 영국군은 1842년 6월 상하이를 점령하고 난징으로 진격했다. 청나라는 영국과 굴욕적인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당시 난징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號)상에서 청나라 전권대사 기영(耆英) ·이리포(伊里布)와 영국 전권대사 H.포틴저(1789~1856)가 난징조약에 조인하였다. 13조로 되어 있고, 1843년 6월 홍콩에서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② 광저우[廣州] ·샤먼[廈門:Amoy]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5항(港)을 개항한다.
③ 개항장에 영사(領事)를 설치한다.
④ 전비배상금(戰費賠償金)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⑤ 행상(行商) 즉,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⑥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⑦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 등이었다.
영국은 이 조약을 더욱 구체화하여 1843년 7월, 5항 통상장정(通商章程)을, 10월에 호문채(虎門寨) 추가조약을 체결하여, 영사의 재판권 인정과 수출입품의 세율 협정 및 개항장에 있어서의 조계(租界)설치 ·최혜국대우(最惠國待遇) ·조관(條款) 등의 특권을 획득하였다. 이들의 조약을 기본으로 하여 1844년에는 미국이 청나라와 망하(望廈)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도 청나라와 황포(黃埔)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 똑같은 여러 특권을 획득하였다. 난징조약을 비롯하여 이에 이어지는 그 뒤의 여러 조약은 근대 중국이 국제관계에서 부담하게 된 불평등조약의 단서가 되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 ·정치 ·문화 ·영토면에서의 중국 침략에 길을 열어준 결과가 되었다. 이후 중국은 점차 유럽 및 일본 등 자본주의 세계의 종속적인 시장으로서 재편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난징조약체결을 기점으로 해서 중국은 그동안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중화사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근대화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다.
<조게지(租界地는 무엇인가? (우리가 본 외탄의 풍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불평등조약이 체결된 결과로 빚어진 것으로서 중국 ·한국에서는 조계, 일본에서는 거류지라는 이름으로 일컬어 졌다.
아편전쟁 이후 1845년에 영국이 상하이[上海]에 둔 것이 최초이다. 이후 톈진[天津] ·한커우[漢口]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등 각 개항장에 두었다. 특히 청일전쟁(1894~1895) 이후에는 격증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8개국의 조계가 무려 28개나 되었다. 조계 내의 행정권은 외국에 속하고 치외법권도 인정되어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여 해관(海關)의 관리권과 함께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적 침략의 기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중국의 국권회복운동으로 조계는 점차 폐지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완전히 중국에 반환되었다.
한국에 조계가 처음 설정된 것은 1877년 1월 30일 부산항조계조약(釜山港租界條約)에 의해서이며, 이어 청나라를 위시하여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가 각기 수호통상조약 체결과 동시에 인천 ·진남포 ·군산 ·마산 ·성진 등지에 설정하였다. 여기에는 전관조계(專管租界)와 공동조계로 크게 나누는데, 전관조계는 1개국가만이 거주하며 상행위를 하는 곳이며, 공동조계는 여러 나라 국민들이 공동으로 거주하며 상행위를 하는 곳을 말한다. 이러한 조계의 설정은 국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경제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경우와 군사적 정치적 목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본이 한국에 설정한 것은 공동조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침략과 식민을 위한 것이었다.
중국의 조계지는 청나라말 열강 등의 중국 진출로 인하여 중국이 타국에 임대하여준 지역을 말한다.
*중국 내 조계지 현황1911년 각 국별로 조계지 현황을 보면 아래와 같다.
* 국가별 조계지 현황
영국: 7곳 - 톈진, 한커우, 광저우, 저우장, 샤먼, 전장, 홍콩신계구
프랑스: 4곳- 상하이, 톈진, 한커우, 광저우
일본: 9곳 - 충칭, 수저우, 항저우, 한커우, 톈진, 상하이, 푸저우, 샤먼, 샤시
독일: 2곳 - 톈진, 한커우
오스트리아: 2곳 - 톈진, 한커우
이탈리아: 1곳 - 톈진
헝가리: 1곳 - 톈진
벨기에: 1곳 - 톈진
위 도시 중 일본의 푸저우, 샤먼, 샤시는 건설되지 못했다. 이것을 도시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 도시별 조계지 현황
상하이 영국조계,미국 조계(후에 영국과 병합하고 공동조계),프랑스 조계,일본 조계(비공식)
톈진 영국,프랑스,미국,독일,오스트리아,벨기에,러시아,이탈리아, 일본
한커우(漢口)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일본 조계
광저우 영국,프랑스 조계
전장(鎭江) 영국 조계
지우장(九江) 영국 조계
샤먼(厦門) 영국 조계,공동 조계
항저우 일본 조계
수저우 일본 조계
충칭 일본 조계
공동 조계는 4곳이며 다음과 같다:
상하이 공동조계(영국과 미국)
샤먼 공동조계
옌타이 공동조계
우후(芜湖) 공동조계
<상해교통대학에서 만난 인물>
1. 강택민(전)주석
강택민(江澤民: 쟝쩌민, 1926. 8. 17~)은 강소성(江蘇省) 양주시(揚州市) 출신으로 2003년 현재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1943년부터 지하당이 이끄는 학생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46년 4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47년 상해 교통대학(上海 交通大學) 전기기계과를 졸업하였다. 상해가 해방된 후 상해 익민식품 1공장(益民食品一廠) 부기사, 토목과 과장 겸 동력소(動力車間) 주임, 공장의 당 지부 서기, 제1부공장장, 상해 비누공장 제1부공장장, 1기부(一機部) 상해 제2설계 분국(分局) 전기전문과 과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모스크바 스탈린 자동차공장에서 연수, 1956년 장춘(長春) 제1자동차 제조공장 동력처 부처장, 부수석 동력기사, 동력지사 공장 공장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이후 1기부(一機部) 상해 전기과학 연구소 부소장, 1기부 무한(武漢) 열공업 기계연구소 소장, 당위원회 서기 대리, 동력지사 공장장, 1기부 외사국(外事局) 부국장과 국장을 역임하였다.
1980년 이후에는 국가 수출입 관리위원회, 국가 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 겸 비서장, 당지도부 성원을 역임하였다. 1982년 이후에는 전자공업부 제1 부부장, 당지도부 부서기, 당지도부 서기를 역임하였다. 1985년 이후에는 상해시 시장,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 부서기, 서기를 역임하였다.
1982년 9월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87년 11월 중국공산당 13기 1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에 당선되었다. 1989년 6월 중국공산당 13기 4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당선되었다. 1989년 11월 중국공산당 중국공산당 13기 5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1990년 3월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14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상임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1993년 3월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1997년 9월 중국공산당 15기 1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상임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1998년 3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2002년 11월 중국공산당 16기 1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만 유임하고, 중앙정치국 위원직과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에서 물러났다.
2003년 3월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만 유임하고 국가 주석직에서는 물러났다.
2. 錢學森(전학삼) 첸쉐썬
1911년 중국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다. 1934년 상하이[上海]의 자오퉁대학[交通大學]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칭화대학[靑華大學]의 미국 국비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칭화대학 공기동력학 교수 왕스줘[王士倬]의 지도로 난징[南京]의 항공공장과 난창[南昌]의 항공학원에서 전공을 결정하고 193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36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9년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로켓팀에서 로켓 고체연료와 구조변형 등을 연구하였으며, 1941년에는 풍동(風洞) 연구제작에 참여하였다.
1943년 독일이 대규모 로켓발사기지를 세운다는 첩보를 입수한 미국은 황급히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 탄도·재료·제트·구조의 4개 분야로 이루어진 제트추진실험실을 세웠는데, 그는 제트연구 분야의 책임자를 맡아 로켓제트추진 분야의 전문가로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듬해 겨울에는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 국방부 과학고문직을 수행하였고, 종전 후에는 독일 미사일 설비조사대 책임자를 지냈다.
1950년 신중국이 성립된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미사일·원자력 또는 무기설계 교육을 받은 고급 물리학자 등 우수한 인재 유출을 막으려는 미국의 방침에 따라 억류되었다가 1955년 미·중 양국의 교민 반환협상이 타결되어 6·25전쟁 때 중국의 포로가 된 미국 조종사와 교환되어 그해 10월 8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첸웨이창[錢偉長]·궈융화이[郭永懷]와 주도하여 중국과학원 역학연구소(力學硏究所)를 설립하고 소장이 되었으며, 중국 최초의 로켓미사일 연구제작기구를 세우고 원장을 겸임하였다.
이후 1957년 중국과학원 원사(院士)가 되었고, 1958년 중국과학기술대학 근대역학과 주임이 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59년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었고, 1960년 국방부 제5연구원 부원장, 1961년 중국자동화학회 초대 이사장, 1965년 제7기계공업부 부부장, 1970년 국방과학기술위원회 부주임, 1980년 중국과학기술협회 제1기 전국위원회 부주석과 1986년 제3기 전국위원회 주석 등을 지냈으며, 1994년 중국공정원(中國工程院) 원사가 되었다.
1960년 근거리지대지미사일 '둥펑[東風] 1호' 발사, 1964년 원자폭탄 실험, 1967년 수소폭탄 실험을 지휘하고, 1965년 인공위성 제작에 착수하여 1970년 4월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둥펑훙[東方紅] 1호' 발사에 성공하는 등 중국의 미사일과 핵무기 및 우주 개발에 초석을 다졌다. 중국이 건국 60년의 최대 업적으로 내세우는 이른바 '양탄일성(兩彈一星;원자폭탄·수소폭탄과 인공위성)'의 일등공신으로서 1991년 국무원과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중국 과학자의 최고 영예인 '국가걸출공헌과학자'상을 받은 데 이어 1999년 양탄일성공훈포장을 받았다.
이밖에 미국과 수교한 1979년 캘리포니아공과대학으로 '우수동문상'을 받았고, 2006년 '중국 우주항공사업 50년 최고영예상'을 받았다. 중국에서 '우주 개발의 아버지'와 '로켓왕'으로 추앙받는 인물로서 '소행성 3763'에 그의 이름이 명명되었으며, 2008년에는 관영 중앙전시대(CCTV)가 선정한 '중국을 감동시킨 10대 인물'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2008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로저 첸[錢永健]은 그의 5촌 조카로서 과학자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저서로는 《물리역학강의 物理力學講義》(1962), 《우주항행개론 星際航行槪論》(1966), 《기체동력학 제방정식 氣體動力學諸方程》(1966), 《공정제어론 工程控制論》(1980), 《인체과학과 현대과학기술론 論人體体科學與現代科技》(1998), 《첸쉐썬문집 錢學森文集》(1991) 등이 있다.
3. 孫文
쑨원[孫文], 1866.11.12 ~ 1925.3.12
자는 일선(逸仙)이고, 호는 중산(中山)이다.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국부(國父)'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현재의 中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14세 때 하와이에서 일하고 있는 형 쑨메이[孫眉]에게로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新敎系)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전통과 신문화의 갈등으로 고향에서 쫓겨났다. 홍콩으로 이주하여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와 홍콩[香港]의 서의서원(西醫書院: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저우 등에서 개업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스량[鄭士良]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의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反淸運動)에 가담했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領地)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 뒤 화교(華僑)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변발을 자르고 양복차림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의 의학교 때 스승 J.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 도텐[宮崎滔天]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康有爲]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제2차 거병(후이저우[惠州]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東京]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反淸)무장봉기를 되풀이하였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大總統)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청나라가 아직도 건재했기 때문에 이를 타도하기 위해 베이징을 정복할 북벌군을 조직해야만 했다.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넘겨 주었다. 당시 타협은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공화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하였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어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를 개조하여 국민당을 설립하였고 위안스카이에 대항하였지만 무력에 밀려 폐퇴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쑹자오런[宋敎仁]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護法運動)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反帝) ·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자 중화혁명당의 대중성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장병을 양성하고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1925년 3월 12일 베이징[北京]에서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南京] 교외의 중산릉[中山陵]에 묻혔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과 영국의 사회학설(H.조지의 單稅論 등)을 받아들여 중국 현실에 적응시킨 것이었다. 만년에는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미연에 막으려는 ‘자본절제’와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견해를 표명하여, 제국주의 단계의 후진국 혁명이론으로써 특권과 독점을 반대하는 삼민주의로 크게 발전시켰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손문의 三民主義>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孫文, 1866~1925)이 제창한 중국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이다. 쑨원이 삼민주의 사상 체계를 구상한 것은 1895년 광저우[廣州]에서의 봉기가 실패한 뒤 영국으로 망명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공표된 것은 1905년 일본에서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를 결성했을 때이다. 쑨원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東京]에서 반청(反淸) 무장 투쟁을 벌이기 위해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하였다. 동맹회는 창립 선언에서 ‘만주족 축출(韃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고,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의 삼민주의는 유럽의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여 중국의 민족적 독립과 정치적 민주 제도, 경제적 평등의 요구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곧 당시의 민족주의는 멸만흥한(滅滿興漢), 곧 만주족의 청(淸)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민권주의는 유럽식의 공화정의 확립, 민생주의는 지주의 불로 소득을 억제하는 것을 과제로 했다. 쑨원에게는 이 3가지가 통일된 목표였지만, 실제로 동맹회는 민족주의에 중점을 두었고, 민생주의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 1919년의 5.4 운동 등을 거치면서 쑨원의 삼민주의도 내용을 보완하며 발전하였다. 특히 1924년 1월에 이루어진 국공합작은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다. 민족주의는 국내 여러 민족의 평등과 함께 반제국주의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민권주의는 전민정치(全民政治)를 구현하기 위해 국민의 정부 통제권인 선거권, 파면권, 창제권(創製權, 유리한 법률을 시행토록 하는 것), 복결권(複決權, 불리한 법률을 폐지 또는 개정토록 하는 것) 등의 4대 민권을 실현하자는 것으로 나아갔다. 민생주의는 독점자본의 억제와 대기업의 국영화 등을 포함한 자본절제(資本節制)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한 토지 해방의 내용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쑨원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제시하였다. 이 시기의 삼민주의를 동맹회 시기의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신(新)삼민주의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1927년 4월 국공합작이 분열된 뒤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난징[南京] 국민정부는 삼민주의에 반공적 내용을 부여하는 보수적이며 유교적인 해석을 덧붙이려 하였다. 하지만 1936년 12월에 일어난 시안[西安]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중국 공산당의 주장으로 삼민주의는 다시 연합전선의 강령이 되었다.
삼민주의와 관련한 중국 공산당의 태도는 1940년에 발표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신민주주의론》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 글에서 마오쩌둥은 삼민주의를 쑨원이 남긴 위대한 공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후진타오[胡錦濤] 정부는 2003년부터 “권력은 인민을 위해 사용하고(權爲民所用), 감정은 인민과 연결되고(情爲民所繫), 이익은 인민을 위해 추구한다(利爲民所謀)”는 신삼민주의를 제창하며 삼민주의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 쑨원은 1924년 1월부터 8월까지 삼민주의에 대한 내용을 강연하였는데, 1925년 그가 죽은 뒤에 이 강연 내용은 《삼민주의》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따라서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의 기본 정신과 주요 내용은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만난 白凡 金九>
1876.7.11 ~ 1949.6.26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였으나 구(九)로 개명,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안악으로 돌아가던 길에 치하포(鴟河浦)에 머무르다가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가 조선인으로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강에 버렸다. 김구는 고향으로 돌아가 머무르고 있다가 해주 감영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인천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형으로 1915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우익 진영을 대표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윤봉길의사>
1908.6.21~1932.12.19
19세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의사는 의열투쟁에 뜻을 모으고 한인애국단에 가입, 김구와 함께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한다.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독립운동 지원과 임시정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의사는 25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1908. 6. 21~1932. 12. 19)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의사는 당시 민족잡지인 [개벽]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 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의사의 나이는 19세였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농민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히 계몽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개혁을 실시하여 갔다. 주된 사업은 농가부업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爲親稧), 수암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의사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계몽, 농촌개혁 운동은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지만, 이러한 운동은 결국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개량과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929년 12월 16일자 일기에 의사는 “함흥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 라고 적어 넣기도 했다. 이는 의사가 막연하나마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다
계몽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의사는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드디어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의사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이 바로 의사였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간 일한 것만 보아도 그 인격의 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1931년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소원하던 조국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백범 선생과 의사는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에 접하게 된다. 얼마나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의사였다. 의사와 백범 선생은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
1931년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 오른쪽은 선언문 사본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결행하다
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상해 병공창(兵工廠)의 주임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그 아침의 모습이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시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 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자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게미츠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 하고,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의거 직후 홍구 공원의 모습
1932년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피체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 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는데, 이 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의사는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유언은 의사가 참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띄우는 당부일지도 모른다.
의거 직후 일 군경에게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 거사 직후인 1932년 4월 30일 North China Daily에 실렸다.
<윤봉길 의사의 명언>: 사람은 죽어서 명언을 남긴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장부가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나만 나혼자만 잘 먹고 잘 살다 죽을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와 내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선택했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 윤봉길 의사 유서 中 -
사람은 왜 사느냐
理想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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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로부터 들은 내용과 질문했던 내용.. 그리고 중국(상해, 무석, 소주)탐방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정리하면서 몇 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생소해진 내용도 있어 메모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유네스코 학생들은 메모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메모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습성을 키웠으면 좋을 것 같고, 탐방 기간 중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과 연관지어 공부하면 금번 유네스코 해외 역사 문화 탐방 기억이 잊어지지 않는 생생한 산 역사 교육이 되리라 생각이 됩니다.
어제를 통하여 오늘을 알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자각운동은 유네스코의 새물결운동 실천강령에서 첫 번째 나오는 강령입니다. 이러한 자각운동은 올바른 역사적 인식에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는 열쇠라고 생각됩니다.
2013.1.21
사우회 김인곤 선생님
추신) 중국 조선족 이주사와 동북공정에 대한 것은 우리 청소년들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인 것 같아 인용 탑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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