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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예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인수
備前燒硏究
A STUDY OF BIZEN CERAMICS
李 仁 鎭*
Lee, In-Chin*
柳 志 榮**
Yoo, Ji-Young**
I. 서 론
1. 연구 목적
도자기가 예술의 분야, 즉 도예로 발전하기 전에는 일상의 생활 용기였다. 모든 문화와 예술이 역사와 함께 하듯 고(古) 도자기도 그 시대의
생활양식이 반영되어 있어, 도자기를 이해하는 것은, 그 도자기가 생산되었던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비젠(備前)도기는 한반도에서 유입된 스에키(須惠器)를 모체로,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부터 일본의 비젠지방에서 탄생된 도자기로서,
일본의 육고요(六古窯) 중 시가라키(信樂), 단바(丹波)도기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도자기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비젠 지방의 스에키의 제작 기술과 특성이 일본인들의 다도(茶道)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음식문화의 발전으로 인해 다양한 생활잡기와 차 도구를 생산하며, 번성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모모야마 시대로 중국의 도자를 모방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본식의 도자를 생산한 시기로서 지금의 비젠도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16세기말, 17세기 초에는 임진왜란 때 건너간 조선도공들에 의해 자기
제작 기술이 유입되어, 이마리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자기 생산이
활발해진다. 시대적 기호가, 자기를 선호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어, 비젠도기는 서서히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며, 에도(江戶) 시대에는 활발한
생산활동을 되찾기 위해 색채비젠과 시로(白)비젠 등 다양한 발색의 도기와 장식물의 개발과 가마구조, 소성의 변화 등을 시도하지만, 200년
이상 활동이 둔화된 시기가 계속된다.
메이지유신(明治) 이후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지만 맥이 끊어지지
않고 20세기를 맞이하게 되며, 서구화 열풍에 의해 잊고 있었던, 일본의
고유한 문화의 재평가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와, 선(禪)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모모야마 시대의 도기에 대한 일반의 선호에 힘입어,
비젠에서도 가네시게 도요를 중심으로 재도약의 기회를 맞게 된다. 현재는 약 400명 이상의 도예가들이 조직적인 활동으로 일반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물론 세계로 비젠도기의 독특함을 널리
알리고 있다.
비젠도기가 천년 이전의 기법을 고수하고 발전되어 현재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면서, 도자사의 한 영역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현대의 첨단사회와는 거리가 있는 원시성이 강한 도기라는 점이, 일본인들의 미감(美感)과 잘 어울렸기 때문 일 것이라 생각된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역사와 사회적 분위기에 호응하며 변화해 가는 비젠도기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의 선진적인 도자사와 전통에 대한 소중함, 도자문화의 발달 가능성과 한국의 전통도자의 위치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연구방법
본 연구의 목적은, 신라 토기를 모체로 발전 변화하여 일본 고유의 기법으로 전승된 비젠도기의 모습을 통해 한 일 양국 간의 문화 전승 변형의 모습을 찾아보고, 현 시점에서의 한국 도자의 긍정적인 미래를 모색해 보는 것이다.
연구 방법은 문헌 및 조사연구에 따른다. 첫째, 문헌연구방법으로는
도예사적 관점에서의 자료 수집을 통해 비젠도기의 발전 과정과 기법을 알리는데 초점을 둘 것이며, 둘째, 조사연구방법으로는 1986년∼1988년까지의 비젠의 후지와라 유 공방에서의 연수와 가마터 방문, 미술관 관람 등을 통한 자료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본 론
1. 비젠도기의 변천
가. 비젠도기의 母體 - 스에키
일본의 고대토기는 조몽식이라는 붉은색 사토질 토기인 하지키와 고분(古墳)시대 이후에 약 800℃ 전후의 온도에서 소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갈색의 토기가 있었다. 이것에 비해 스에키는 5세기경 한반도에서
전해진 신기술로, 산기슭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가마를 축조하고, 내화도가 높은 점토를 선별하여 물레를 사용하여 제작되었으며, 길이 10m
정도의 단실의 반 지하식 가마에서 1000℃정도의 환원염으로 소성되었다. 고온 소성에 의해 경질(硬質)이며, 환원염으로 인해 회흑색(灰黑色)을 나타낸다. 또한 재가 기물에 내려앉아 마치 재유가 흘러내리는 듯한
현상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더욱 실험적인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 혁신적인 소성방법은 급속도로 일본 전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각
지방에서 스에키의 가마가 축조되었다. 주 생산지는 오카야마 갱오쿠군일대로 나가후네죠 오쿠죠와우시마도죠로, 이곳에서 제작된 스에키의 대부분은 조정에의 공납품이었으며, 저장용으로 항아리·병·조리용인 스리바치(摺鉢)와 제기의례용품, 기와 등이 만들어졌고, 평저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헤이안(平安, 794-1192)시대 말기가 되어, 조정의 권위가 상실되어 스에키의 공납이 단절되고, 가볍고, 튼튼한 목재를 이용한 관과 접시와 칠공예품이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스에키의 생산이 감소하게 된다. 쇠퇴기를 맞이한 도공들은 당시 불교의 명산지로 세력을 떨친, 구마야마 사원의 경제적인 뒷받침으로, 원토(原土)와 소성재료를 얻기 위해 인베(伊部)부근으로 이동하게 된다. 인베 주변의 후로우산·이오우산 일대에서 반지하식의 아나가마가 축조되어 사원의 기와와 스에키를 모방한
제기용품 등이 소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의 요장(窯場)은 인베부근의 산기슭에까지 확장되었고,
가마의 구조에는 변화가 없지만 완(碗), 접시, 발, 항아리, 옹기(甕) 등 일반 서민의 생활용기가 소성되었다. 또한, 가마쿠라 시기의 제품들은 대부분 환원염 소성이었으며, 기술도 스에키의 제작방법을 따르고 있었는데, 우발적인 산화염으로 소성된, 적갈색 도기의 발견으로 비젠 도자의 태동을 예고하고 있다.
나. 비젠도기의 탄생
가마쿠라 말기(鎌倉, 1192-1333)에는 농업의 발달로 인한 제품의 수요증대가 이루어짐에 따라 소성재료와 양질의 점토를 찾아 구마야마 (해발 400m 이상)의 고지대로 이동하고 있다.
이 시기의 구이비가 계곡의 가마는 길이 12m, 최대 폭 1.4m로 확인되고
있고, 가마의 경사도가 심해지고, 소성온도가 높아졌으며 전체적으로
가마의 규모가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생산품은 항아리, 스리바치, 옹기, 세 종류로 한정되었으며 형태의 변화를 살펴보면, 항아리에 둥근 전이 나타나며, 어깨부분은 빗에 의한 직선문과 물결문이 2, 3단으로 새겨진 것이 발견된다. 헤이안 시대의 항아리의 직선문은 한 선으로 새겨진 것에 비해, 가마쿠라 시대에는 빗 모양의 도구에 의한 문양이 새겨지게 되어 시대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외에 대표적 생산품으로 명성이 알려진 스리바치는 그릇의 안쪽 면의 빗살문양이 바깥쪽을 향해 새겨져 있으며, 넓이가 넓어지고 전이 두꺼워 진다.
대체로 기벽이 얇아졌으며 강한 산화염 소성으로 적갈색의 비율이 높아진 상태이지만, 태토는 아직 산흙으로 제작되어 모래 등이 포함된 굵은 입자의 상태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생산품들은 도로와 강을 통해 서일본 각지로 수출되어 현재 후쿠시마와 오키나와에서도 도편이 발견되고 있다. 가마쿠라 후기 正安元年(1299)에 완성된 『一遍上人繪 』에
그려진 후쿠오카 시장의 장면에 비젠도기의 항아리, 옹기를 판매하는
점포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판로와 형태 등을 예측할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 비해 무로마치(1573-1603)시대는 상업경제체제의 안정기로, 고지대에서 있었던 가마는 증대되는 수요와 요업의 발달로
1937∼1938년에 발굴된 가마는 길이 42m, 폭 2.5∼3m 경사도 15℃정도로 규모가 커진 것을 알 수 있으며, 대량의 적갈색의 스
리바치, 옹기, 항아리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가마쿠라 후기부터 무로마치 전기까지의 그릇의 종류는 항아리, 스리바치, 옹기로 변화가 없지만
대·중·소의 각종 크기로 제작되어 기형이 풍부해진다. 일반적으로
항아리에는 어깨 부분에 빗에 의한 파상문시문 되며 耳(양귀), 三耳,
四耳 등 귀가 달린 항아리가 나타난다. 옹기는 전 부분이 둥근 형태로
튼튼하게 제작되었으며, 스리바치 또한 사용하기 편리한 형태로 견고하게 제작되었다. 이 시대의 제품은 대량 생산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거친 점토를 이용하여 빠르게 성형되었으며 산화염소성에 의해 적갈색, 다갈색을 나타낸다. 경영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 이동이 용이하고
생활에 편리한 도로와 항만부근인 인베 근처로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도자 발전에 기여하게 되는 다도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의 다도는 중국제의 값비싼 차도구를 내보이며
부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분위기였는데 무라다 쥬코우(邨田珠光, 1423∼1502)에 의해 정숙하고 간소한 분위기를 추구하는 와비차가 창시된다.
쥬코우의 미의식은 간소한 형태, 시골풍의 소재, 불완전한 양식의 천목다완 등 유약의 완벽한 기술을 자랑하는 중국도기와 함께 마음을 끄는 색과 질감을 가진 비젠, 시가라키도기가 함께 사용된다. 그 후 제자들에 의한 와비차도의 보급과 대중의 유행은 도자발전의 전성기를 예고하게 된다.
이 당시의 차도구는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상당히 고가였기 때문에
15세기부터는 일반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생산이 시작된다. 비젠에서는 초기에 일용잡기로 제작된 스리바치 다네쯔보가 미즈사시로 사용되었는데, 후에는 주문에 의해 생산되며 또한 수요가 크게 늘어 모모야마 시대의 뛰어난 차도비젠의 개화로 이어지게 된다.
다. 큰가마(大窯)의 성립과 생산체재의 확립
모모야마(桃山, 1573-1603)시기는 정치적으로 중국 명(明)과의 관계악화로 도자의 수입이 감소되었으나 다도의 유행으로 인해 요업의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비젠도기는 무로마치시대 말기까지의 인베부근의 반 지하식, 중(中) 규모의 가마가 폐지되고 남대요(南大窯), 북대요(北大窯), 서대요(西大窯)의 거대한 3대 가마가 축조되었다. 구조는 아나가마로 차이가 없으나, 규모는 길이 50m 이상 폭 4.5m로, 거대해지며
경사도 15°정도의 반지상식 오름 가마이다. 소성기간은 30∼50일 정도였으며 이 가마들은 오오아에(大饗), 가네시게(金重), 키무라(木村),
테라미(寺見) , 동구우(頓), 모리(森) 등이 가마모토(窯元) 체재를 형성하여 대규모의 생산체제의 막을 열게 된다. 이때부터 기물의 어깨나 바닥에 가마 이름을 넣기 시작했는데 한 가마에서 여러 도공의 작품이 소성
되기 때문에 쉽게 구별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3대 가마에서는 소성효율을 높이기 위해 접시를 여러 장 포개어 소성하거나 기물의 안쪽에 작은 기물을 넣는 방법 등 재임방법에 대한 궁리와 능률적인 물레 성형을 위해 히요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생산 품목은 주로 항아리(그림 1), 스리바치(그림 2), 옹기(그림 4)의 세 종류이지만, 미즈사시(水指:물항아리)(그림 5), 하나이레(花生:화병)(그림 7), 완(그림 8), 차이레(茶入:차통) 등의 차 도구와 독구리(德利, 주병)(그림 3),
접시, 발, 손잡이 달린발, 등이 생산되어 형태면에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다.
한편, 이시기의 다도의 경향을 살펴보면, 전반기 다도의 지도자는 (千利休) 센노리큐(1522∼1591)로 와비의 차도를 계승해 가면서 새로운 다도를 시도하게 된다. 그것은 개성미를 최대의 매력으로 여기는 것으로
유일무이(唯一無二)의 조형감을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풍조는 모모야마 말기의 후루타 오리베(1544∼1615,)로 이어지게 도며, 비젠의 차도구에도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비젠의 도공들은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고의로 형태를 변형시키거나 작업 도구의 흔적을 남기는 등 즉흥적이고 독창적인 움직임에 의해 차도구를 제작하게 된다.
소성 방법에서도, 종래의 산화염소성에 의한 적갈색과 재가 녹아 흐르는 자연유에서 상기리, 히다스키(火 ), 아오도자(靑燒), 보타모치(牡舟餠) 등의 요변을 창출하게 된다. 이렇게 변화 할 수 있었던 것은, 비젠도기가 생산체제 등의 변화를 거쳐 안정기에 접어들어 있었기 때문에 시대적 유행에 적극적으로 대처 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발전이 가능하여
역사상 최대의 호황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여진다.
라. 관리·통제의 시기
에도(江戶) 초기에는 원칙적으로 무로마치(室町)시대 말기에 개축된 3대가마에서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하게 되지만, 임진왜란 때 건너간 조선도공들에 의해 이마리(伊万里)를 기점으로 아리타(有田), 세토(瀨戶)
등 일본 각지에서 시유도자기 가마와 대량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요장(窯場)이 탄생, 발전하기 때문에 비젠도기의 수요가 감소하게 된다.
이 때문에 오카야마현(岡山縣)에서는 비젠도기를 특산품으로 제정하여 반관요적 통제를 하게 된다. 호우에이 9(實永, 1712)년 비젠번주 이케다 고우세이(池田光政)는 뛰어난 기술자를 어세공인『御細工人』으로 선정하여 녹봉을 내렸으며, 연료와 점토를 무상으로 지급하였다.
후에 교우호우 10(享保, 1725)년부터 일부를 부담시켰다. 그러나 반관요적 요장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규제를 받게 된다. 겐로쿠 4(元祿,
1691)년에는 전통 기법의 도구사용이 금지되고, 도공의 자율적인 제작
활동도 금지된다. 또한 제품의 종류, 제작기법 뿐만 아니라, 가격, 판매방법까지 통제 관리되어 비젠의 도공들은 작업 의욕을 상실하게 되어
양적, 질적으로 하락하고 침체기를 맞게 된다.
다도에 있어서도 즉흥성이 강한 개성적인 분위기에서, 고보리 앵슈(小堀遠州)(1577-1647)의 여성적이며 형식적인 다도로 변화하여, 변형이
적고 얇게 제작되며 단정한 형태들이 주류를 이루어 비젠의 차도구 생산은 불황을 맞게 된다. 그러나 차도구의 생산이 감소되었다고는 하나
비젠도기의 주 생산품인 항아리, 스리바치, 옹기 등이 대량생산되어 비젠에 커다란 영향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시대의 흐름이 자기를 선호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비젠에서도 인베데(伊部手)라 불리는 곱게 수비한 점토로 제작된 작품의 표면에 철분이 다량 함유된 황토이장을 덧칠하여 소성하여, 마치 유약으로 시유한
듯한 흑갈색, 자주색, 황갈색 등의 광택있는 제품
이 생산되기 시작한다.
에도 중기에는 본격적인 자기 생산에 대응하기 위해 향로(그림 11), 오키모노(置物)(그림 12) 등의 세공물(細工物)이 제작되기 시작하며, 정교한 세공을 위해 인베데가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손으로 제작되고 후에는 초벌된 형틀에 의한 성형으로 전환된다.
오카야마현에서도 색채자기의 시대적 선호도와 세공품의 장려를 위하여 어용화가로 카리노, 하세가와 양가를 임명하여 비젠도기에 하회(下繪)를 그리도록 하였다. 이는 시즈타니학교의 기와를 제작한 시즈타니도기에 실시되었으며, 채색비젠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백색질의
소지에 얇게 투명유를 시유한 시로비젠(白備前)과 오키모노, 인형주병,
각주병 등이 제작되었으며, 오키모노의 변형을 막기 위해 갑발을 사용하여 소성하였다. 그러나 종래의 비젠도기와 동일한 가격으로 판매되어 경제성이 맞지 않아 결국 폐쇄된다.
후기에는 자기의 대량 생산으로 극도의 부진을 면치 못한 3대가마의
가마모토는 덴보우 3(天保, 1832)년 경제적이며 효율적인 규모가 작은
가마를 축조하게 된다. 이것은 조선에서 도입된 연방식 오름가마를 모방한 길이 16m, 폭 4m, 5개의 방이 있는 가마로, 소성기간이 7, 8일간으로 단축되어 연료가 절약되며, 오오가마(大窯)가 년 1, 2회 소성되었던
것에 비해 소성 횟수도 늘어 주문제작에 빠르게 대처하게 된다. 노동력과 경비가 절약되어 융통가마(融通窯)라고도 불리워 진다. 이 곳에서는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의 보령주(保令酒) 병으로 사용된 각진 주병을
주로 제작하고, 정량 항아리, 고비젠의 차기류 등과 주문판매 품으로 신사(神社)의 사자상이 제작되었다.
마. 비젠도기의 쇠퇴기 (明治 - 大正시대)
메이지 유신 이후의 급격한 서양문물의 도입은 서양문화 지상주의 풍조로 이어져 일본전통문화 전반에 침체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비젠 역시 번(藩)의 지원을 상실하고 수요 역시 급격하게 감소하여 3대
가마는 폐쇄되고 도공들은 상인, 농부로 전업하기 시작한다.
고인베신전록(古伊部神 錄)이 창간된 가에이 2(嘉永, 1849)년에 공방이 46軒이었던 것이 메이지 18년에 36軒으로 감소되는 것으로 보아 위기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막부 말기에 축조된 천보가마는 메이지 시대에도 소성을 계속하며, 메이지 6년 새로운 공동가마로 메이지가마가
축조된다. 같은 해 고도사타사부로(後藤貞三郞) 등에 의해 고비젠의 부활을 목적으로 도기개선소(陶器改選所)가 설립되지만, 경영의 파탄으로 도산하여 다른 기업에 흡수된다.
메이지 18년에는 가네시게 리사부로(金重利三郞)가 인베상회(伊部商會)를 설립하여, 대량생산을 위한 공업화를 위해 도코나메에서 기술을
전수 받아 토관제작을 시작한다. 이 토관들은 당시 일본의 농업, 공업,
교통 등의 근대화에 편승하여 커다란 호응을 받았으며, 메이지 29년에는 비젠도기 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내화 벽돌을 생산하여 메이지 시대의 주 생산물로 자리잡게 된다.
한편, 비젠도기는 소량의 일상잡기와 오키모노를 제작하였으며, 색채자기를 모방하여 소성된 도기에 연유(鉛釉)로 상회를 입혀 저온 소성을
하는 에비젠이 탄생하였으며 이 방법으로 제작된 물잔 등은 토산품으로 각광받았다고 한다.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우(大正, 1912-26)시대에는 비젠도기의 재생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다이쇼우 2(大正, 1913)년 미무라 도게이(三村陶景)가 도기학교(陶器學校)를 창설하여 기술지도에 주력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수행 중이던 도공들이 다시 인베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
리고 격식과 작법(作法)을 중요시하던 에도시기의 다도에 비해 메이지,
다이쇼우시대의 다도는 자유롭게 차를 마시는 센차(煎茶)로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사민(四民) 평등의 시대적 분위기와 어울려 서민들에게 널리 유행하였기 때문에 인베에서도 센차기의 제작이 성행하여 조금씩
활로의 분위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의 대표작가로는 세공품에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는 히미도라쿠(永見陶樂), 히다비세이지(日幡正直), 가네시게 도요(金重陶陽) 등이
있으며, 다화기(茶花器)에 특출한 히사키승하치(久木才二), 각진 독구리(德利)전문인 타나카 사토미(田中里三) 등이 있다.
바. 제2의 번성기 (昭和 - 現代)
모모야마 시대의 창의적인 생산활동이 에도시대의 관요적 형식과 자기의 생산,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화 열풍으로 인해 비젠도기는 기교적인 세공품을 주로 하는 장인적인 생산으로 이어져 소화(昭和)초기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에도시대에 접어들어 일본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다도(茶道). 화도(花道)가 유행하게 되고,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 제창된 민예부흥운동 등의 사회적 분위기의 형성은 일본 고도자(古陶磁)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관심으로 인해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도자의 균형 잡힌 단아한 미감이 도자기의 이상적인 규범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점토의 질감과 즉흥적인 불균형을 모모야마의 독자적인 미감으로 재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젠뿐만 아니라 시가라키(信樂), 시노(志野), 오리베(織部), 카라츠(唐津), 하기(萩) 등의 모모야마 시기의 차도구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분위기를 계기로 비젠도기가 다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소화초기에 가네시게 도요(金重陶陽)에 의해 비젠에서도 모모야마
풍의 재현을 느낄 수 있는데, 후지와라 케이, 야마모토 도수, 후지와라
유 등 많은 비젠 작가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비젠도기의 대표적인 인간문화재 네명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다음 장에서 그들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사. 備 前 人間國寶 - 4 人
(1) 金重陶陽 - 가네시게 도요 ( 1896-1976 )
메이지 29(明治, 1896)년, 오카야마현 비젠시 인베(伊部)에서 모모야마(桃山)시대부터 이어지는 비젠 여섯성의 한 분가에 해당되는 가네시게가 가네시게 모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세에 인베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부터 꽃, 새, 동물 등의 세공물 제작이 뛰어난 부친으로부터 세공물의 제작을 배우게 된다. 일찍부터 도자기의 제작을 시작했기
때문에 22,23세 경에는 인베를 대표하는 세공사의 한 사람이 된다. 또한
전통기법인 채색비젠, 아오비젠 등의 소성기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복원에 정진하였다.
세공물은 에도 초기에 자기의 출현과 함께 판매부진의 모모야마 풍의
석기질의 비젠도기를 대신하여 등장한 것으로 초기에는 비젠의 점토에
화장토를 칠해 시유도기를 흉내내는 수준이었지만 에도 중기가 되면
초벌구이의 형태 위에 채색을 한 채색비젠, 백토로 성형한 후 시유하거나 무시유로 소성한 백비젠, 환원염을 이용한 아오비젠 등 여러 가지 방법이 궁리되어 작품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에도(江戶) 후기와
메이지 이후에도 계속된다. 메이지 말기부터 소화 초기에 걸쳐, 일본은
국력증강기의 분위기였다. 이것은 문화면에서도 일본 고유의 전통 문화 재평가가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된다.
회화, 조각, 건축, 정원 등과 함께, 신흥부유층이 즐긴 다도에 사용된
그릇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모모야마 시대의 다도의 도자기들이었다.
도요는 소화 5년(1930)경 30세의 후반기에 비젠의 세공물에 대한 장래성에 의문을 품고 물레성형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이것은 시대적인 물결을 타고 점토질이 강한 모모야마 시대의 차도구의 제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는 모모야마 시대의 비젠도기를 관람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명품을 접하기 위해
수집가, 콜렉션 등을 방문하게 된다.
또한 사용하기 편하고 독특한 차도기(다도구)를 제작하기 위해 셍게류
가마모토(千峯流窯元)에 입문해 다도를 배우기 시작한다. 도요는 양질의 점토야말로 모모야마 시대의 차도기를 재현하는 제일의 요소라고
생각하여 탐사는 물론, 발로 밟고 불순물을 일일이 손으로 제거하고
2,3년 이상 묵혀 사용하였다.
제작도 손으로 돌리는 전통적인 물레를 고집하였는데 이것은 작품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한다. 그리고 가마의 구조, 소성방법 등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고 요변을 만들기 위해 작품 위에 장작을 놓아두거나 목탄을
넣기도 하고 접시 사이에 짚을 넣고 포개어 소성하는 방법 등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가마쿠라(鎌倉, 1192-1333)시대에 가마의 개선이 자기의 강도는 증가시켰으나 철함유의 흙이 환원조절의 미숙으로 검게 변하고 산화가 심한 곳은 붉게 변했다. 도요는 이러한 비젠자기의 저급함에 대해 언급하고 그 질을 높이기 위해 개선점을 찾았다.
가마에 불조절 장치의 사용이 동반되어 소성 중에 환원과 산화의 조절과 불의 강약에 변화를 주어 자신만의 기법을 찾았으며, 부드러운 소나무 재를 이용하여 단단하고 우아한 비젠 도기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도요는 작가들과의 교류관계에도 폭이 넓었다. 그 중에서도 소화
27(1952)년 기타오오지 로산징(北大路魯山人)과 이사무노구치의 방문은 그 당시 비젠에 없었던 새로운 그릇의 세계와 조형적 작풍의 폭넓은
창작방식을 일깨우게 한다. 로산징 제작방법은 점토를 도판 형태로 제작한 후 칼로 자르고 가장자리를 세워 발이나 접시 등을 제작하였다. 이후 도요가 처음으로 이 방법에 따라 비젠도기 작품 대부분을 제작하게
되며 비젠도기의 전통기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노구치는 돌, 브론즈를 소재로 하는 추상 조각가였지만, 조몽토기와
하니와(埴輪)
에 흥미를 갖고 비젠의 표면 질감에 호감을 느껴 로산징과 함께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정밀한 도면에 기초한 석고형틀을 이용하여 기본형을 제작한 후 헤라와 칼을 사용하여 다듬고 완성시키는 방법을 썼다. 이러한 새로운 창작 방식은 비젠의 다른 작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소화 31(1956)년에 중요무형 문화재(인간국보)로 인정된 후 모모야마
풍의 비젠도기의 완성을 향해 정진하게 되지만, 소화 42(1967)년에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비젠도기 육성의 기초를 만든 공적으로 "비젠 중흥의 시조"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2) 藤原啓 - 후지와라 케이 ( 1899-1983 )
메이지 31(1899)년 오카야마(岡山)에서 후지와라 이사부로 (藤原伊三郎)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장년이
되도록 청년파 시인으로 활동했으나 40세에 도예가로 전향하여 도예에
시혼을 담아 넣는데 성공한 도예가라 할 수 있다.
그는 다이쇼 8(大正 1919)년 도쿄로 상경하여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이 시기에 시집 『저녁의 슬픔(夕の哀)』을 출판하고 종교와
사상운동에도 관심을 갖는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경제가 어려워지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소화 12(1937)년 38세의 나이로 낙향한다.
그 다음해 국문학자 마사무네 야츠오(正宗敦夫)의 권유와 미무라바이케이 (三村梅景)에 의해 비젠의 점토를 접하게 된다. 젊었을 때의 문학에 대한 좌절은 비젠 점토에 의해 심신의 안정과 도자기에 대한 제작에의 관심으로 바뀐다.
케이와 자신보다 3세 위인 도요와의 만남은 소화 16년부터 시작되는데, 도요는 이 당시 비젠 도기 작가 중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이후 케이는 도요로부터 비젠도기의 기술 전반에 걸친 지식을
배우게 된다. 특히 가마재임 소성 등의 기술적 지식은 도요 자신이 모모야마비젠의 재현을 목표로 하여 고심한 끝에 체득한 것으로 당시에는
귀중한 지식이었다. ‘불의 성격을 알아라. 어떤 식으로 재임을 해도 불은 가장 통하기 쉬는 길을 찾는다’, ‘빨리 소성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귀여운 아이를 키우는 생각으로 조급하고 성급하지 않게 천천히 소성한다’ 등의 도요의 조언 또한 시종 잊지 않았다.
소화 23년(1948) 49세에 정부로부터 마루기작가(丸技)의 자격을 받는다. 케이가 문학에 뜻을 버리고 40세에 도예라는 미지의 분야에 관심을
갖고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그 기술 체득이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었다. 당시 자격을 받은 사람은 비젠에서 도요, 도수, 케이 3인 뿐이었다. 이 자격인정은 케이에게는 비젠도기의 기술 자격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뒤늦은 도전에서 느끼는 비젠도기의
기술적 콤플렉스를 자신감으로 바뀌게 하는 귀중한 것이었다. 소화 26년 전통적인 공예기술의 보호를 목적으로 무형문화재 제도가 실시되어
비젠도기의 기술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소화31(1956)년에는 도요가
기술보유자로 인정되는데, 이 지정은 케이를 포함한 비젠 작가들에게
중앙에로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1929년부터 개최된 일본전통공예전 1회에는 비젠에서 도요 혼자 참여하지만, 2회부터는 케이가 참가하기 시작하여, 그 후부터는 매년 출품을 계속하게 된다.
도요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으로 보유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공예회에 도요의 추천에 의해 정회원이 되어 명실공히 비젠을 대표하는 전통계 도예작가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소화37(1962)년에는 프라하국제도예전에서 금상을 수상하고 1970년
71세에 비젠도기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된다. 1976년 「고비젠과 후지와라케이 유 부자전」을 프랑스, 스위스, 그 다음해에는 프랑스, 벨기에의 각 도시에서 개최하였다.
케이의 초기 작품경향은 기술적인 면에서 모모야마시대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점 간소화되어 소박하고 호방한 가마쿠라 시대의 작품에 매료되어 기교를 뛰어넘는 순수하고 근대적인 조형감각으로 발전한다.
케이는 가마쿠라(鎌倉), 무로마치의 기형에서 나타나는 소박하고 힘찬 형태를 추구하였는데, 인생의 하반기부터 도예가로 전향하여 정점에 달한 작가로 인생의 전반기에 경험하고 습득한 문화예술에 대한 폭넓은 교양이 작품에 반영된다.
도예평론가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는 "케이라는 인간 바로 그대로가 표현되어 있다. 소박하며 순수하고 까다롭지 않다. 직정경행(
直情徑行), 즉 참선(參禪)에서 말하는 직심(直心)을 실천함이 보이는 그것이 매력으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친금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후지와라 케이의 인간이며, 작품이며, 특징이며,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케이 자신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처음엔 나도 모모야마(桃山)시대의 영향을 받았었지만 그 칼자국 많이 낸 귀달린 모양의, 소위 기교를 부리는 것이 싫어지고 간소하며 소박하고 호방한 가마쿠라(鎌倉)시대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통통한 시골처녀와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3) 山本 陶秀 - 야마모토 도수 (1906-1994)
1906년 오카야마현 비젠시 인베에서 야마모토 켄지로(山本源次浪)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 15세에 당시 인베에서 최대의 가마모토(窯元)기비도 (黃薇堂)의 견습생이 된다. 1923년 관동대지진에 의한 불황의 영향으로 도케이도(桃蹊堂)로 장소를 옮겨, 세공물과 화기(花器) 등을 제작하며 도공으로 활약한다. 1933년 독립하게 되어 그 시기의 현의
비젠도기에 대한 장려에 힘입어 센차(煎茶)도구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게 되며, 물레가 능숙하여 센차도구 등의 제품을 제작하면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938년 동료 스즈키 고오사이(金令木異哉)의 권유로 교토의
구스베 야이찌(楠部 )(1897-1984)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여, 그의
공방에서 유약과 세공물 제작을 배우게 된다.
비젠의 역사를 풀어보면, 역경기에는 필연적으로 유약을 사용하거나
자기의 특징에 도전하게 되는데, 도수의 심정 저변에도 그러한 것들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점토의 질감보다는 금속기의 날카로움이 보여질 정도의 선명함이 보여지며 1939년 중국서국구갱연합공예전(中國西國九連合藝展)에서 식염청(食 靑)의 화병이 우수상을 수상하게 된다. 1943년에는 국립교토요업제작소의 도안부장 미즈쪼와사부로(水町和三郞)의 발상으로 남방에 수출을 목적으로 비젠 히다스키를 응용하여 식기를 제작하게 된다. 전쟁 중 국위선양의 국가주의와 모든 분야에서 전통에 대한 관심으로 전통을 계승하고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관점의 미(美)를 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비젠요선양회가 결상된다. 회보 <비젠도기> 창간호에 가네시게 도요, 이시이후노, 이세자키요잔과 함께 신진작가로 도수를 신비젠을 대표하는 4인으로 거론되었다. '재래의 비젠도기에 드물게 보이는 색채의 밝음은 현대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색상이다'라고 도수의 기술적 달성을 평가하고 있다.
1948년 도수는 후지와라 케이와 함께 아루기의 작가로 인정된다. 제2차대전의 패전 후 일본은 경제적ㆍ문화적 침체기로 접어들게 된다. 전
국민이 기아 상태로 빠져들어 먹을 음식이 선결과제로 도자에 대한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비젠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시기로 각종 형태의 제품을 생산하려는 시도에 의해 유약을 입히거나 칠을 입힌 도기들까지 제작하게 된다. 1951년 가네시게 도요의 초청으로 방문한 로산징,
이사무노구치 등의 방문과 제작 활동은 비젠도자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스럽고, 요리에 어울리는 도자의 창조적인 발상은 도수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철학자인 다니가와 데츠미(谷川徹三)씨는 "형태상으로 종래의 비젠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태가 많다"라고 말했으며 전통도자에 대한
연구와 새로운 것에 대한 열의와 창작 활동을 인정받아 1954년 오카야마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1959년 브루셀만국박람회에 출품한
히다스키의 큰 발이 금상을 수상한다.
비젠도자 연구자인 카즈라도 모사브로(桂又三郞)는 차인 고보리 앵슈(小堀遠州)를 예로 들며 도수야말로 무로마치 시대의 인베데의 품격과
정념을 가진 작가라고 극찬을 했다. 앵슈는 에도시대 초기의 차인으로
각 곳의 성을 건축하고 정원을 설계한 일급 문화인으로 앵슈류 차도의
시조이다. 차인에 따라 좋아하는 형태를 각 도요지에서 주문 생산하게
되는데, 시가라키, 사가현의 가마에서도 앵슈의 지도에 따라 생산하였다. 비젠에서도 깨끗하고 품격 있는 앵슈의 호감을 반영하여, 점토를 수비하고 얇게 성형한 후, 화장토로 분장하고 정성 들여 마무리한 인베데(伊部手)라 불리는 작품이 상당수 구워졌다. 원래 인베데는 무로마치
후기에 나타나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은 중국 당의 도자를 모방하고 청동기를 본떠 제작하였고, 모모야마 시기에 와비차 시대로 바뀌면서 데포로메된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그러나 인베데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에도 초기에 다시 성행하게 된다.
1987년 도수가 일본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을 때 미술 평론가 스즈키겐지(鈴木健二)는 "기능없이는 조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자조형의 근본에 물레성형의 기술이 있으며, 그 숙련된 솜씨에 의해 본격적인 도자의 예도(芸道)가 성립되는 것이다. 야마모토 도수의 물레솜씨가 비젠에서 손꼽히는 솜씨라는 평을 얻은 것은 오래 전이다." 이것은 '물레의 명인' 도수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 들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4) 藤原 雄 - 후지와라 유 (1932 - 2001)
1932년 오카야마현 비젠시 호나미에서 후지와라 케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5년 메이지(明治)대학 문학과를 졸업한다. 자신이 "내가 도자기를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라고 술회할 정도인데, 이것은 일본이 패망한 후였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부친의 주변에 모여
편안하게 도자기에만 전념하는 느긋한 모습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졸업 후 출판사에 다니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부친이 병으로 쓰러지자 병간호를 위해 비젠으로 돌아온다. 잠깐 동안 부친의 조수역을
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그 동안 알지 못했던 비젠도기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얻게 된다.
1963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의 『국제도예전』에 초대출품하여
대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 캐나다, 멕시코, 스페인의
대학 등으로부터 초대받아 비젠도기에 대한 강의를 하고, 특히 미국과
캐나다에서 국외개인전을 여는 등 비젠도기를 국제적으로 알리는데 노력하게 된다. 유의 작품경향은 모모야마 시대의 헤라에 의한 선이 그려지고 자유스럽게 일그러진 형태보다는 가마쿠라 시대의 문양이 적고
단순하고 힘찬 형태를 선호하는데, 이것은 부친 케이의 단순, 명쾌, 호방을 기본이념으로 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1976년 프랑스 정부 초대의 「고 비젠과 후지와라 케이 유 부자전」을
열고 이후 스위스, 벨기에에서도 개최하여 비젠도기를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로 세계에 알리며, 세계 속에서의 비젠도기의 특성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임과 더불어 비젠도기의 미래를 위한 필수 요소들을 자유롭게 섭취하는 유연성을 얻게 된다. 1988년에는 한국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어 한국의 토기를 시발점으로 하여 일본특유의 도기로까지 발전한 비젠도기를 선보인다.
유는 도자기 중에서 항아리를 제일 좋아했는데 "단
지는 약간 부풀리거나 조금만 입을 오므리거나 하는 것만으로도 유유자적함이나 풍요감, 혹은 천진난만함이라든가, 외로움 같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오브제에 대한 관심도 높아,
도벽의 제작에도 상당한 열의를 보이고 있다. 도벽은 물레로 성형한 형태와 판작으로 형태를 제작한 부분 부분을 조합하는 형식으로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의 탑"과 明星대학의“ 明星에서 세계로”의 작품이 있다.
1996년 비젠도기를 일본 국내는 물론 세계에 알리고 비젠도자 발전의
노력을 인정받아 62세의 젊은 나이로 중요 무형문화재로 인정된다. 이후, 뇌출혈에 의해 신체의 부자유 때문에 작품활동은 정체기를 맞는다.
유 자신은 " 몸이 불편하여 외출은 자유롭지 않지만, 작품활동은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힘이 있는 순간까지 내면의 모든 힘을 발산할 것이다."라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선천적으로 눈이 나쁜 유는 어려서부터 남보다 상당히 노력하는 자세로 모든 일에 전념하였으며, 주변에서도 “노력형"이라고 할 만큼의 열의가 대단했다. 이러한 요인이 힘차고 당당한 작품을 제작하게 하고 "항아리의 유"로서 이름을 떨치게
한다.
아. 현대 일본 비젠의 動向
현대에 접어들어 일본도자는 전통도자와 현대도자로 분리되지만 커다란 바탕이 되는 것이 실용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도자라 할 것이다.
지금 비젠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 대부분이 실용도기를 생산하며
요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극소수의 작가들만이 오브제적인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이들 또한 용도를 내포하고 있는 형태를 제작하고 있으며, 순수 조각적 오브제를 제작하고 있는 작가의 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이다. 대체로 대학에서 배운 작가들에 의해 조형적인 형태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긴 수련의 기간을 거친 순
수한 도공들에게 자극제가 되어 새로운 영역으로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차도구, 식기뿐만 아니라 도벽과 환경조각으로까지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현재 일본은 경기가 침체되어 있는 상황으로 도자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상품에 대한 수요가 감소된 상태로 비젠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도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실용적이며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하며 계속 노력하고 있는 소수의 작가들은 커다란 영향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전통의 전승에 대한 중요성과 아울러 작가의 시대적 시야가 넓어야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추구하며 계속 작업을 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 비젠도기의 제작과정
가. 점토조합
비젠도기에 사용되는 점토는 산흙(山土), 히요세라 불리는 논흙(田土),
흑토(黑土) 등 세 종류로 분류된다.
지형적으로 비젠시 인베(備前市伊部) 산 기슭에는 석영암질의 암석이
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원래의 위치에서 풍화된 점토를 산흙이라 하고,
비바람에 의해 운반되어 2차적으로 퇴적된 점토를 논바닥흙, 그리고 논바닥흙보다 유기물이 다량 포함된 상태로 오쿠군 나가후네죠 이소노가미(이)부근에 퇴적된 점토를 흑토(이소노가미토)라고 한다.
이들 중 제작에 사용되는 점토의 70∼80%를 점유하는 논바닥흙은 인베에서 비젠시의 가가토(香登)에 걸쳐 논바닥의 1.5m∼4m 부근에 10∼90㎝ 정도의 폭으로 퇴적되어 분포하고 있다. 이 원토를 채굴하여 2, 3년간 노천에 방치한 후에 수비하여 불순물을 제거한 후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다시 장기간 보관하여 충분히 숙성시킨 후에 사용한다.
수비의 과정에 따라, 입자가 굵은 상태의 점토는 큰 기물 성형에 사용하고 곱게 수비된 점토는 작은 기물과 오키모노 등의 성형에 사용되고
있다.
흑토는 낮은 습지대에 분포하기 때문에 논바닥흙보다 맑은 유기물질이 내포되어 있어 가소성과 점착성이 풍부하지만 소성후의 발색과 내화도의 문제 때문에 단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토는 농한기인 겨울에 채굴되는데 채집된 점토는 수비과정을 거친 후 초벌 된
사발에 넣어 적당히 물기를 제거한 후에 사용된다. 이 점토들의 조합은
작품에 따라 작자들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혼합하게 되는데 보통 논바닥 흙 70∼80 %에 산흙과 흑토를 20∼30%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혼합된 점토는 응달의 창고에서 장기간 숙성 후에 성형에 이용되고 있다.
필자가 경험해 본 비젠의 점토는 화도 1230℃이상의 온도에는 견디지
못
하고, 마치 백자토의 촉감을 주기 때문에 어느정도 숙련되지 않으면 성형이 어려울 정도의 고운 점토이다. 현재는 양질의 점토는 상당량이 채굴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양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지금는 타지역에서 이와 비슷한 성질의 점토를 구입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브제적인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작가들은 비젠점토만을 사용하지 않고 형태의 크기와 제작의 난이도에 따라 샤모트질이 포함된 점토를 따로 구입하여 소량의 비젠점토와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점토의 준비는 "데시이리"( 子入 )라는 방식에 의해 들어온
제자가 하게 되는데, 선생과 같이 동거동락하며 보통 5∼10년 이상을
점토의 준비, 성형, 가마재임, 가마소성 등에 대한 방법을 공부한다. 선생에게서 배울 수 있는 모든 생활방식과 작업에 관한 일들을 배우고 독립하게 된다. 이러한 수련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혼란기를 거치지 않고
쉽게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나. 성형기법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물레 성형이지만, 중세의 항아리, 스리바치, 옹기와 그 후의 대형 제품들은 코일을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성형한 후에
물레를 사용하거나 헤라를 사용하여 표면을 다듬는다.
비젠의 물레는 원래는 지면과 동일한 높이의 옹기식 물레로 도공은 지면에 앉고 히데시라는 여자아이가 작가와 호흡을 맞추며 손으로 돌렸다고 한다. 현재는 보편적으로 전기식 기계물레를 사용하고 있다.
성형방법은 비젠점토의 성질 때문에 형태와 크기에 맞게 공모양의 흙덩어리를 만들어 하나씩 물레 위에 놓고 성형한 후 바로 들어내게 된다.
양질의 점토일수록 입자가 고와서 수축과 소성과정에서 쉽게 파손되기
때문에 한 작품씩 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에도 초기에 제작되기 시작한 가타츠쿠리(形作 )라는 형틀제작 방법이 있다. 초벌구이된 틀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석고로 제작하고
있다. 그 외에도 손으로 두드려 접시를 제작하거나 점토판으로 조합하는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다.
비젠도기는 수축률이 약 18%정도이고,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성형,
건조 후 바로 소성으로 이어지고 성형이 바로 완성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상당량의 수련과정을 요구한다.
다. 가마재임
비젠도기에서는 점토의 채집, 배합, 성형, 축요(築窯)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가마재임과 소성방법이라 할 수 있다.
비젠의 가마(그림 26)는 아나가마(穴窯), 오오가마(大窯), 오름(노보리)가마(登窯) 세 종류가 있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오름가마이지만 고비젠풍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아나가마, 오오가마를 축조하는 작가들도 소수 존재한다.
오름 가마는 각각의 봉통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각종 내화판과 지주,
갑발을 사용하여 몇 단으로 쌓아 올려 재임을 하게 된다. 작품과 가마도구가 고온에서 접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태운 왕겨나 알루미나 가루를
사용하여 재임을 하게 되는데, 대소를 합해 약 1000점을 재임할 수 있다.
가마 내부에 작품을 놓는 위치, 쌓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요변을 얻게 되는데, 간략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도(장작을 태우는 첫째
칸)에 놓여지는 작품은 재가 날리기 때문에 재가 녹아 내리거나 열기와
함께 기벽에 붙어 변화를 일으키는 작품을 얻게 된다. 두 번째 칸(一香)과 마지막 칸(煙道)에서는 인위적으로 숯을 넣음으로서 상기리, 보타모찌, 히다스키 등을 얻게 된다. 또한 작품 위에 또 다른 작품을 덮어 씌어
재임함으로서 직접 화염이 닿는 부분과 닿지 않는 부분에서 요변이 나타나며, 작품을 짚으로 감고, 큰항아리나 갑발에 넣어 소성함으로서 히다스키라는 붉은 선을 얻어 낼 수 있다. 그밖에 여러 가지가 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의 가마에, 어느 곳에 놓고, 어떤 소성 방법으로 소성해야 비젠 특유의 특징들이 나타나는지는 장기간의 연구와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재임 전에 이미, 경험으로 가마내부의 온도차, 재가 가장 많이 날리는
방향과 집중되는 곳, 불길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곳과 화염이 돌지 않는 곳 등에 대한 충분한 예측에 의
해 기물의 두께, 형태를 파악하여 가마 재임을 하게 된다. 독특한 점은 내화판을 사용한 재임방법 이외에도 가마 벽쪽에 작품을 비스듬히 세워 자연스럽게 휘는 작품을 얻기도 하고 장작을 투여하는 곳에 눕혀서 소성하여 독특한 발색을 얻기도 한다.
라. 가마소성
이렇게 재임된 작품들은 계획적인 방법에 의해 소성이 이루어진다. 가마의 입구는 장작을 넣는 곳만 남기고 전부 밀폐시킨다. 그 후 가마 주변으로 소금을 놓고 오미키(御神酒)라는 술을 가마에 봉헌하고, 가마의
신과 선조들에게 성공을 빌며 불을 지핀다. 연료는 원칙적으로 소나무장작을 사용하지만, 현재에는 종류가 다른 나무나 중유 (重油)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7일에서 12일간 소성하게 되는데 첫 날 소성방법은 아부리(焙 )라고 하며 장작을 2, 3개 정도를 태우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작의 수도 점점 늘어나게 되며 보통 4, 5일간 계속된다.
이때의 온도는 보통 700∼800°정도로, 가마 안쪽이 밝은 오렌지 빛으로 되면 윗쪽 장작 넣는 구멍으로 장작을 통째로 소성실 안쪽으로 던져
넣게 된다. 이것을 나가타키라 하며, 이때 역시 2시간에 장작 1개씩을
늘려가며 조정하게 된다.
최후로 세메라 하여 대량의 소나무 장작을 넣게 된다. 이때의 소성실의 온도는 약 1200℃ 전후로 이틀 정도 계속 유지시킴으로써 기물에 재를 입히고 화염으로 색채의 변화를 유도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적당한
온도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첫 번째 칸의 소성을 마치고 두 번째 칸으로
올라가게 된다. 양옆의 창 구멍으로 가느다란 장작을 투여하기 시작하는데 처음에 2, 3개로 시작하여 점점 개수를 늘려 조정하게 된다. 보통
12시간 정도 지나면 기물 위의 재가 적당히 녹았다고 판단될 때 끝내고
다음 칸으로 올라간다.
소성이 끝날 무렵 상기리(棧切)를 얻기 위해 숯을 투여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가마의 소성이 전부 끝나도 댐퍼를 약 3시간 후에 막게 된다. 이
방식이 보통 7, 8일간의 소성방법이며, 초반에 가스버너를 사용하여 온도를 올리고 700∼800°C부터 장작을 사용하는 곳도 있으며 소성방법은 위와 동일하며 소성기간이 12일 정도 소요된다.
지금까지 소개한
방법이 대략적인 소성 방법이다. 그러나 점토의 준비와 성형, 가마재임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가능하지만, 일단 재임이 끝나고 밀봉한 후에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기 때문에 가마 주변에 소금을 놓아두거나, 불을 지피는 첫날도 길일을 선택하여 바닷물이 차 오르는 시기를 기다렸다가 점화를 하게 된다. 이것은 기가 충만해지는 시기를 선택하여 작품이 파손되는 것을 막고 좋은 작품아 나와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또한 가마 소성 중에는 다리가 넷인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고 있으며 미신적 요소가 강하지만, 작품소성을 신에게 비는 마음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되며, 가마의 밀봉시기도 대체적으로 간조의 시기가 끝나고 바닷물이 차 오르는 것을 기다렸다가 밀봉하려고 애쓰고 있는 등
비젠에서만 볼 수 있는 풍습이 아닐까 한다.
마. 가마에서 꺼내기
소성을 끝낸 후 약 7∼10일 정도 가마를 식힌 후에 가마문을 열고 기물을 꺼내게 된다. 가마에서 나오는 작품의 상태는 요변의 경우 재 속에
묻혀 있고 유약을 입히지 않고 소성하기 때문에 기물의 표면이 거칠어
한 점 한 점 사포로 정성 들여 손질을 한다. 요변의 꽃병 등은 미세한 실금이 가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물을 담아 파손 여부를 확인한다.
그리고 같은 크기의 동일한 형태라도 발색의 좋고 나쁨에 따라 선별하여 가격을 책정하기 때문에 실제로 상품(上品)의 작품은 2∼3%에 불과하다.
현재 인베의 작가들은 점토의 준비와 성형, 재임 등의 전 과정을 작가의 손으로 행하고 있으며, 점토의 가격과 소나무 장작의 가격 등의 경제적 여건 때문에 1년에 1∼2회 소성을 하고 있다. 실제 장작의 소모량을
줄이기 위해 소성기간을 단축하거나 중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작가들은 지금까지 수 십여의 가마 소성을 경험하였지만 한번도 같은
색과 같은 분위기의 작품을 보
지 못했다고 본다. 소성 방법은 어느 정도 정해진 틀이 있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기후와 계절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 듯 미묘한 발색의 차이를 드러내 천차만별의 작품이 가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상품(上品)의 작품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기 때문에 가마소성의 어려움과 가마 문을 여는 작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 비젠도기에 표현된 요변
가. 고마(古麻)
소성이 시작되면서부터 재가 날라 자연스럽게 기물에 부착되기 시작한다. 고온의 상태가 되면 장작의 수가 수 십봉에 달하기 때문에 이때
가장 많은 재가 부착되어, 이것이 화염의 열기와 점토의 소결 상태에 따라 얇게 앉은 부분은 빨리 녹아 연두색조의 노란빛을 띠며, 재가 두껍게
입혀진 부분은 검은 색에 가까운 발색을 하게 된다. 이 현상은 첫째 칸의 앞쪽 부분에서 나타나며 불통에 가까울수록 변화는 더욱 심하다. 그리고 불통과 거리가 있고 불길이 모이는 곳, 비밀 칸이라는 곳에서는 온도가 재를 녹이는 정도로 높지 않고, 고온을 계속 유지하기 때문에 불길이 바람처럼 지나가 문양을 만들어 낸다. 대체로 녹색기와 갈색조의 색이 적절하게 조화된 색조를 띄게 된다. 일명 "가세고마"라 불려진다. 재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가마 소성의 방법을 연구하며,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심려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림 27)
나. 상기리(棧切)
작품의 일부가 가마 내부에서 소나무재에 덮혀, 그 부분만 환원염소성이 되어 회청색의 발색을 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장작을 넣는 부분에
눕혀서 재임을 한 기물에서 발견되지만, 현재는 소성이 끝나기 직전에
기물 위쪽으로 숯을 쏟아 부어 인위적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다. 히다스키(火 )
'히다스키' 란 '히'는 불을 의미하고 '다스키'는 일본 여성들이 일할 때
기모노를 묶는데 사용한 줄을 말한다. 가마 내부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기물을 포개어 재임하거나, 작은 항아리, 주병 등을 큰
기물의 내부에 넣고 소성할 경우 고온에서 기물과 기물이 접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규석 성분이 많은 짚을 기물의 사이사이에 넣어 소성하였다. 이때 짚의 알카리 성분과 점토의 철분이 화합하여 붉은 선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히다스키라 한다. 오름 가마에서는 화염이 닿지
않고 산화염 소성이 되는 부분에서 발색하며, 현재에는 전기 가마나 가스 가마의 산화염 소성으로도 발색이 된다.(그림 31 그림 32) 또한 토코나메의 아사이 라큐젠은 비젠의 히다스키 방법으로 해초를 사용하여
실험했다.(그림 30)
라. 보타모찌(牡丹餠)
가마 재임 시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위해 큰 접시 안쪽 면에 작은 작품을 놓고 소성할 경우, 작품이 놓인 부분에 재가 얹혀지지 않고 화염이
닿지 않는 부분으로 되어 발색이 달라지게 된다.
이것이 둥근 떡(보타모찌:牡丹餠)를 놓은 것처럼 보여 "보타모찌"라
불리워졌다. 우연적으로 발생하였으나, 현재는 고의로 작품과 점토판을 만들어 올려놓아 둥근 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림 33)
마. 아오비젠(靑備前)
재에 묻힌 기물 중에서 환원염 상태로 소성된 경우에 나타난다. 현재에는 식염청이라 하여 소성이 끝나기 직전에 창 구멍으로 소금을 투여하고 가마를 밀폐시키면, 소금의 작용으로 인해 광택이 있는 청색으로
나타나게 된다. 오름 가마에서도 갑발을 사용하여 기물을 넣고 밀폐시켜 소성을 하여도 발색하는 경우도 있다. (그림 35)
바. 후세도기(伏世燒)
항아리나, 주병에 깊은 발을 덮어 씌워 소성하면, 화염이 직접 닿지 않는 부분은 환원 소성되어 흑갈색 등으로 발색되지만 화염이 닿는 부분은 재가 입혀지거나 적갈색으로 발색되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색채가
동일한 기물에 나타나게 된다.(그림 36)
사. 슬 럼 핑
슬럼핑이란 단지의 일부가 휘고 모양이 변형된 것을 의미한다. 이 슬럼핑 현상은 서양 자기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도공들에게 미학적으로 바람직한 것을 찾고 슬럼핑을 얻기 위한 작업은 도공으로서 그의 철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슬럼핑은 세 가지 원인 중에서 하나에서
나올 것이다. 재료의 이해 부족, 작업 능력의 부족, 가마의 가열 방법에
대한 이해 부족. 비젠의 '가네시게 도요' 슬럼핑 도기는 그 중에서도 잘못 가열해서 우연히 나온 것이라고 한다.(그림 37)
III. 결 론
비젠의 오름가마(登窯)는 한반도에서 전해진 가마축조 기술을 바탕으로 축조되었지만,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고 발전시켜 독자적인 특징의 가마로 되었다. 한 가마에서 이러한 여러 종류의 기법들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들이 점토와 불, 가마를 독특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과, 가마의 구조를 조금씩 변화시키며,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비젠 도기의 역사적 흐름과 특징들을 비젠 도기가 오늘날 1000여 년의 전통적 기법을 고수하며 아리타, 이마리 등과 함께 도자사의 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일본인들의 전통에 대한 애착과 시대적 요구에 부흥하며 노력한 도공들의 열의 그리고 일본의 다도와 음식문화의 사회적 분위기가 이루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비젠의 작가들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제품을 제작하기 위해 활발한
교류와 연구에 열의를 보이며, 비젠 동우회 등의 조직을 결성하여 10월
둘째주 토, 일요일 비젠도기 축제를 개최하여 실용적인 도기로 사용될
수 있도록 일반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해, 한국 도자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다. 한국은
도자 발전의 기초가 되는 도자의 선진적 전통과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의 확보, 지리적 여건 등 여러 가지 우수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수입된 서양의 조각적 도자의 영역에 인재들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동안 주춤했던 도자사가 뜻있는 선배들의 노력에 의해 복원되고 발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금만 전통도자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이러한 분위기가 역으로 전통도자를 발전시킬 수 있는 커다란 역동력을 갖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현대인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여 대처
한다면 새로운 도자의 영역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분위기의 형성은 가까운 시기에 더욱 질 높은 도자 문화를 싹트게 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日本年表>
江戶
慶長 게이쵸(1596-1615)
元和 겐나(1615-1624)
寬永 간에이(1624-1644)
正保 쇼우호우(1644-1648)
慶安 게이안(1648-1652)
承應 죠우오우(1652-1655)
明曆 메이레키 (1655-1658)
万治 만지(1658-1661)
寬文 간분(1661-1673)
延寶 엔보우(1673-1681)
天和 덴나(1681-1684)
貞享 죠우쿄우(1684-1688)
元祿 겐로쿠(1688-1704)
寶永 호우에이(1704-1711)
正德 쇼우토쿠(1711-1716)
享保 교우호우(1716-1736)
元文 겐분(1736-1741)
寬保 간보우(1741-1744)
延享 엔교우(1744-1748)
寬延 간엔(1748-1751)
寶曆 호우레키(1751-1764)
明和 메이와(1764-1772)
安永 안에이(1772-1781)
天明 덴메이(1781-1789)
寬政 간세이(1789-1801)
享和 교우와(1801-1804)
文化 분카(1804-1818)
文政 분세이(1818-1830)
天保 덴보우(1830-1844)
弘化 고우카(1844-1848)
嘉永 가에이(1848-1854)
安政 안세이(1854-1860)
万延 만엔(1860-1861)
文久 분큐우(1861-1864)
元治 겐지(1864-1865)
慶應 게이오우(1865-1868)
近代
明治 메이지 (1868-1912)
大正 타이쇼우 (1912-1926)
昭和 쇼우와 (1926-1989)
平成 헤이세이 (1989-현재)
<寫眞目錄>
1.
波文大壺
室町前期 15世紀
高49.7cm 口徑20.5cm 胴徑39.0cm
오까야마(岡山)현립박물관
2
指鑛
(水の子岩海撮がり)
室町前期 15世紀
高12.0cm 徑32.2×30.5cm
오카야마(岡山)현립박물관
3
蒸德利
桃山時代 16-17世紀
高27.5cm 口徑7.5cm 胴徑22.Scm
岡山·藤原啓記念館
4
大甕
桃山時代 16世紀
高95.5cm 口徑54.0cm 胴徑74.0cm
5
矢 口水指
桃山時代 16世紀
高17.5cm 口徑17.4cm
備前水指を代表する名作
6. 備前耳付氷指 錦龍田川 通高22.2cm 車京國立博物館
7.
耳付8花生 銘太郎庵
桃山時代 16-17世紀
高25.6cm 徑10.6×13.7cm
8.
茶碗 銘只今
桃山時代 16-17世紀
高9.5cm 徑 15.2×12.5cm
岡山後樂園
9.
形茶入
桃山時代 16-17世紀
高10·3cm 口徑2.5cm 胴徑6.5cm
神慈秀明
10.
松竹梅猫 重籍 元和7年 (1621)銘
江戶時代 17世紀
高21.8cm 徑11.7×13.0cm
岡山·초 書店
11.
伏せ龍香炘 靑備前
江戶時代 18-19世紀
高120.0cm
東京·新宿美術館
12.
備前 飛衝子置物
昭和2(1927)
高27.5cm 徑31.3cm
13.
備前 砧管耳花入
昭和27(1952)
高24.7cm 徑10.4cm
14.
備前 緋 花器
昭和25(1950)
高31.3cm 徑12.3cm
15.
備前 長
昭和26(1951)
高14.0cm 徑58.5cm
16. 長首花器 高38.0 徑23.2 cm
17. 花入 高24.8 徑11.0 cm
18. 緋 茶 高8.5 徑13.0 cm
19. 福耳窯花入 昭和34年 高27 徑16.8
20. 口金色花入 昭和48年 高20.8 徑13.8
21. 沓茶 昭和60年 高7.2 徑13.2
22. 梅花口花器 高31.8 徑36.1 cm
23. 座花器 高28.2 徑24.2 cm
24. 座窯 花入 高28.2 徑11.8 cm
25. 茶入 高7.9 徑7.6 cm
26. 비젠(備前) 가마 (BIZEN’S KILN DOG)
27. 대호(大壺) 高30.9 徑32.1 cm
28.
手桶花入
昭17(1942) 高37.2cm
29.
備前 目掛花入
昭和10(1937) 高16.3cm 徑9.1cm
30. 備前緋 德利 高30.2cm
31. 備前緋 血 銘鳳栖
32. 備前緋 波文壺 高40.1cm
33. 大平鉢 昭和60年
34.
手鉢
桃山時代 17世紀
高7.8cm 徑20.0×24.5cm
35.
德利
桃山時代 16世紀
高19.5cm 口徑4.0cm 胴徑10.8cm
36.
四耳葉ホ壹
桃山-江戶初期 16-17世紀
高38.0cm 口徑14.7cm 胴徑37.0cm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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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道와 日本의 美』한림신서일본학총서, 야나기 무네요시 , 1996.
『金重陶陽 -生誕100年記念』, 富地暢夫, , 오카야마(岡山)현립박물관,
平成 8年 1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