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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南山]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62(265.2)m 이며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 중앙에 있으면서 102만 9300㎡(약31만1천4백 평) 산지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서울에서 가장 넓은 도심공원으로 조선 태조(太祖) 때부터 쌓은 한양 도성 성벽이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본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종남산(終南山), 인경산(仁慶山, 引慶山), 열경산(列慶山), 마뫼 등으로도 불리었으며, 한양이 조선의 도읍(都邑)으로 정해지면서 도성(都城)의 남쪽에 위치하는 산이라 남산이라고 불렀다.
남산의 다른 이름 목멱(木覓)은 남산을 이두 식으로 표기한 또 다른 이름 ‘마뫼’의 한자식 표기이다. 목(木)은 ‘마’, 멱(覓)은 ‘뫼’로 마는 ‘앞’, 뫼는 ‘산’의 우리말이다. 따라서 마뫼는 ‘앞산’이라는 말이며 목멱산(木覓山)의 산은 역전앞의 ‘앞’처럼 중복된 ‘앞산산’이 된다. (박갑천-재미있는 어원 이야기)
앞산이 남산이 된 이유는 남녘 남(南)자를 옛날에는 ‘앞’을 가리키는 곳에도 적었고, 눈에 보이는 산이 대부분 앞산이다 보니, 우리나라 산 이름 가운데는 앞산을 한자로 쓴 남산이 많다.
또한 고구려는 곰을 공목(功木)으로 적고 ‘고마’라고 읽었고, 신라는 일곱을 약목(若木) 이라 표기하고 ‘나마’라고 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 이래 '마' 발음을 목(木)으로 적었다고 한다. 목(木)은 우리말을 표기할 때 음이 ‘목’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김수경, ‘고구려, 백제, 신라 언어 연구’)
옛 사람들이 남산을 목멱(木覓)으로 쓰고 ‘마뫼’로 읽은 것은 남의 문자인 한자로 언어생활을 하면서 궁리해 낸 방편이었다. 이제 남산을 한자어 ‘목멱산’이라 하지 말고 우리말 ‘마뫼’라 불러야 될 것 같다.
조선 태조가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정하였을 때 남산은 풍수지리설상으로 안산(案山) 겸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다. 북쪽의 백악산(白惡山 = 북악산),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함께 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이를 사산(四山)이라고 했으며, 사산참군이라는 무관직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 이 산들은 왕도의 위곽(圍郭)을 이루어 능선을 따라 한양 도성(都城)이 축성되었다, 이후 군영(軍營)인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의 분영이 남산 자락에 위치했다,
조선전기에는 부산포 왜관으로 내항한 일인들이 상경하여 머무는 동평관이 남산 인근에 있었고 임진왜란 때는 북쪽 산허리에 왜군들이 왜장대(倭將臺)라는 성채를 쌓기도 했다.
남산은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수목이 어우러져 경치가 뛰어나 예로부터 여러 선비들이 거처했고 그들이 지은 누각이 곳곳에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게 하여 ‘애국가’에 소나무들이 철갑을 두른 듯하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소나무가 울창하였으나 일본인들이 우리의 정신을 빼앗기 위하여 소나무를 베어내고 아카시아 등의 잡목을 심어 산의 경관을 많이 해쳤다. 8·15광복 이후에는 서울의 발달과 무질서한 개발로 인해 확장되는 시가지 교통 장애를 덜기위해 남산 순환도로와 1,2,3호 터널이 뚫려 자연이 많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개발제한구역을 설치하고 녹화사업에 노력하여 도심부(都心部)임에도 수림이 잘 보호되어 꿩을 비롯한 각종 산새, 다람쥐 등 산짐승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동, 서, 북쪽의 사면 일대에는 야생화화원과 팔도소나무단지, 자연 학습장을 조성하여 학생들의 자연 학습과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으로 사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며 서울 시민 휴식처를 제공한다.
남대문, 퇴계로3가, 장충공원, 이태원동(梨泰院洞), 후암동(厚岩洞) 등 여러 곳으로부터 산꼭대기에 이르는 산책로와 서울시 전망을 조망하는 조망대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서울 시가지를 볼 수 있고, 5개의 화구를 가진 봉수대(烽燧臺), 높이 236.7m 서울N타워(방송 송신탑1975)과 팔각정이 있다.
동쪽 사면에는 남산골 한옥마을, 동국대학교, 국립극장(1973), 한국자유총연맹, 장충단공원, / 서쪽 사면에는 1970년 어린이회관으로 건립한 18층 건물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 안중근(安重根)의사기념관(1970)과 동상, 백범광장(白凡廣場)과 김구(金九)의 동상(1969), 이시영 선생 동상, / 남쪽 사면에는 남산도서관(1965), 용산도서관, 이황(李滉), 황희(黃喜), 정약용(丁若鏞) 동상, 소월시비(素月詩碑) / 북쪽 사면에는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1962), 숭의여자대학, 리라아트고, 리라초등학교, 와룡묘(臥龍廟)등이 있다.
남산이 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1910년으로, 당시 공원 표지로 세웠던 ‘한양공원(漢陽公園)’이란 고종(高宗) 친필의 석비(石碑)가 지금도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산 중턱에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이라 이름 지었고 공원에는 경성신사(京城神社)를 만들었다. 1925년에 조선신궁(朝鮮神宮: 옛 남산식물원 자리)을 만들면서 남산 꼭대기에 위치하던 국사당을 헐어 인왕산으로 옮겨버렸다. 광복 후 일제의 신사는 철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건립되었고(조선신궁터), 1959년 남산 정상에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 우남정을 건립했다가 1960년 4.19혁명 때 철폐되었다. 우남정 자리에 1968년 11월 11일 현 팔각정을 다시 건립하였다.
1968년에는 남산식물원, 1971년 소동물원(小動物園)이 설치 되었다, 1990년대 초에 시작한 남산 제 모습 가꾸기 사업 일환으로 2006년에 철거 되었다.
0, 남산 봉수대(烽燧臺)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통신 제도의 하나인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전달되는 중앙 봉수대로 설치하여 갑오개혁 다음 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명칭은 현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木覓山) 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 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하여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4호로 지정했다.
전국 각지와 연결되는 남산의 봉수 중 제1은 양주 아차산(峨嵯山, 현 광진구)에 응하는데, 이는 경기도·강원도·함경도와 연결되었으며, 제2는 광주 천천령(穿川嶺)에 응하여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와 연결되었고, 제3은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에 응하여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와 연결되었다.
제4와 5는 제1,2,3이 육로로 이어지는 데 반하여 해로로 이어지는 봉수 로였고, 제4는 무악 서쪽 봉우리에 응하여 경기, 황해, 평안도 해안 지방과 연결되었으며, 제5는 양천현(현재 강서구) 개화산(開花山)에 응하여 경기, 충청, 전라도 해안 지방과 연결되었다.
신호는 횃불이나 연기의 수를 조정하여 위급함의 정도를 나타냈는데, 한 번 드는 것을 일거(一炬)라 하여 평상시에는 일거(一炬), 해상이나 국경 부근에 적이 나타나면 이거(二炬), 변경이나 해안 가까이에 적이 나타나면 삼거(三炬), 적이 국경을 침범하거나 병선과 접전을 하면 사거(四炬), 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을 침범한 적과 접전을 하면 오거(五炬)를 올리도록 하였다.
또한 안개, 비, 바람 등으로 기후가 나빠 봉수가 불가능해지면 포성(砲聲)과 각성(角聲)으로 인근의 주민과 수비군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각 봉수대의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리기도 했다.
0, N 서울타워
서울 전역은 물론, 맑은 날은 멀리 개성 송악산(松嶽山)과 인천항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높이 236.7m의 송신탑인 이 전망대는 1969년 12월 동양방송, 동아방송, 문화방송 등 3개의 민영방송국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종합전파탑과 함께 관광전망대의 건설을 허가받아 한국 기술과 장비로 착공하여 6년간의 공사 끝에 1975년 8월 완공하였다.
준공 3개월 뒤 체신부가 인수하여 보안상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다가, 1980년 10월 15일 처음에는 일반에게 3층까지만 공개되어 관광명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2000년 뉴스 전문 텔레비전 방송국 YTN에서 인수하고, 2005년 4월 YTN이 CJ와 서울타워 리노베이션 계약을 맺고 전면 개설공사를 하여 2005년 12월 N서울타워(정식 이름은 “YTN 서울타워”)로 개장하였다.
0, 서울의 도성
태조가 1396년(태조5년) 정월부터 각도의 약 12만 명(서울인구 5만 명 정도)의 백성을 동원하여 2차 공사를 거쳐 9월 까지 총길이 59,500척(1척: 1자 30,3cm,약 18km)을 쌓았으며, 규모가 큰 숭례문은 1398년(태조7년)에 준공 했다.
1구간 600척씩 백악 동쪽 1구간을 시작으로 각 구간마다 천자문 글자 순서대로 표기하여 천(天)자를 시작으로 하여 낙산, 목멱산, 인왕산, 백악 서쪽 조(자)까지 총97구간으로 나누어 지역별 담당 구역을 두고, 공사의 실명 책임을 지우기 위해 구간책임자와 감독관의 성명, 군명, 자호를 성벽 각자성석(刻字城石)에 새겼다.
태조 연간 공사는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기초석이 장대하고 성벽이 수직 형이며 돌과 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메우는 등 축성 방법이 조잡 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으로 낮고 평탄한 곳은 토성으로 축조 하였다.
그 뒤 세종 4년에 보수하면서 토성의 대부분을 석성으로 개축 하였으며 비교적 둥그렇고 한 변이 30~40cm되는 자연석으로 쌓았고, 숙종 30년 한 변이 60cm정도(두자)되는 네모반듯한 돌로 보수했다.
목멱산 구간은 경상도 사람(49,897명)들이 담당한 동소문(혜화문)에서 숭례문까지 ‘래(來)~진(珍)’ 자까지 41개구간 24,600척 중 일부이다. 현재의 모습은 1977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성곽과 여장(女墻)을 복원한 모습이며, 특히 남산의 동쪽 능선을 따라 조성된 나무 계단길 옆에는 태조 때 성벽이 600년 역사를 자랑하며 길게 이어져 있다.
도성에는 동서남북에 네 대문과 그 사이에 네 사소문을 내어 여덟 개의 문이 있었다. 사대문의 이름은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오상(五常) - 인, 의, 예, 지, 신,(仁義禮智信) 한 글자씩을 붙여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 했다. 사소문의 이름은 동소문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은 광희문(光熙門), 서소문은 창의문(彰義門)으로 별칭으로 자하문(紫霞門)이라 한다.
0, 국립극장
1950년 4월 29일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에서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설립되었다, 6·25전쟁 당시 대구(문화극장)로 이전하였다가 1957년 6월 1일 다시 서울(구 명동예술극장)로 이관하여 1973년 10월 17일 장충동 현자리에 개관하였다.
국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창극단, 국립국악관현악단, 등 4개 전속단체를 거느리고 있다. 대극장 해오름극장(1,563석), 소극장 달오름극장, 공연 성격에 따라 무대가 바뀌는 별오름극장, 원형 야외무대인 KB하늘극장으로 이루어졌다.
0, 장충단공원(獎忠壇公園)
남산 동쪽 봉우리 종남산(終南山)기슭 아래의 동북쪽 일대는 예로부터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경치 좋은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 계곡에는 조선 영조 중엽 이래,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어영청(御營廳)의 분영 남소영(南小營)이 있었으며, 지금의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과 성벽이 서로 엇갈리는 곳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1900년(광무 4) 고종의 명의로 을미사변(乙未事變1895년 8월 20일) 때 순직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등 많은 장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장충단이라는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초혼단(招魂壇)을 세워 해마다 춘 ·추로 제사를 지내다 1908년(융희 2)폐지되었다. 그 자리가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이며 사당은 한국전쟁 중 파괴되고 1969년 순종의 친필로 장충단에 세워졌던 ‘奬忠壇’비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1919년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박문사라는 절을 세우고,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연못, 놀이터, 산책로 등을 조성하여 ‘장충단공원’으로 이름 짓고 상해사변 때 전사한 일본 군인들의 동상을 세우는 등 일본 색을 짙게 하였으나 광복 후 일제의 잔재는 모두 철거되었다.
정부 수립 후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로 철거하게 된 수표교(水標橋), 분수대(1968년), 이준(李儁)열사(1964년), 사명대사(四溟大師1968년), 유관순, 김용환 선생, 동상 등을 비롯하여,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만해 한용운 시비, 공원 경내에는 여러 가지 시설이 들어섰다.
또, 1962년 이후로 장충체육관, 자유센터, 신라호텔,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호텔’ (BANYAN TREE CLUB &SPA SEOUL, 구 타워호텔), 등이 들어섰으며 도시계획법상에 근린 공원내에 들어갈 수 있는 시설로 되어 있는 국립극장등도 들어섰다. 이상의 시설 이외에도 석호정(石虎亭전통활터), 어린이야구장, 테니스장, 등의 체육시설도 있어 장충단 일대가 지녔던 옛날의 정취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이때마다 공원면적은 축소되어 처음 공원이 될 때 면적 약 54만 6000㎢ 이었던 공원이 1984년에는 면적이 29만 7000㎡로 축소되었다. 이 때문에 서울시와 건설부는 장충단공원을 독립된 근린공원으로 존속시킬 경우 더 많은 시설들이 들어갈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1984년 근린공원인 장충단공원 전역을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 합병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구역은 장충단공원이라는 예전의 이름 그대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