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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아산 UBF 특강_4강 메시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말씀 / 요한복음 6:1~15
요절 / 요한복음 6: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먼저 주 하나님께 드리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신 것이니 마땅히 드리고... 지금까지 세 번 특강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함께 먹이자! 특강 4 강입니다. 받아 먹으려 하는 자보다 먹이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먹이려고 자기 것을 내놓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 드릴 만큼만 나이스하게 살짝 드리려는 사람은 영적인 비밀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 마음에 동참하여 가진 것을 다 가지고 나오는 사람이 크게 쓰임 받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다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병이 들어 아픈 사람들, 아픈 사람들의 가족들, 치료와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셔서 거기에 앉으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람들 중에 두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에 같이 앉히셨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를 섬기고 인도할 자세를 가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앉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지는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는 사람은 번번히 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해결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문제만 등장하면 당황하며,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가, 바라는 자세를 갖습니다. 우리는 평소 나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영광 받는 것, 내가 주목받는 것, 내가 당장 해야 할 문제에만 관심 갖고 살지 않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MZ세대는 자기 좋아하는 것만 하려 한다고 분석이 대단히 많이 나옵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면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가 주목 받고 자기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목자의 눈, 목자의 심정, 목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날이 저문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성경에서 눈을 들어 이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굳이 보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특별한 관점이 있었음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마가복음 6장 34절에 예수님의 관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불쌍한 것은 로마 속국 생활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정치 문제 외에 사람들이 가난하고 경제가 어렵다고 불쌍히 보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긴 이유는 목자 없는 양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불쌍한 것은 목자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 없는 과부가 최고의 약자가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 없는 고아가 불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많은 백성들이 목자가 없어서 불쌍하다고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를 어떤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양들을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한 양을 귀하게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좋은 초장과 물가로 양들을 잘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목자의 특징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입니다.
목자가 양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모르면 문제입니다. 목자가 양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자기중심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 양들은 힘듭니다. 목자가 게을러 양이 배고프고 양이 목마른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문제는 큽니다. 가장 심각한 목자는 양들을 통하여 자기유익을 구하는 목자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쓸 줄 아는 목자, 양들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목자가 좋은 목자, 참 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시대 백성들에게 목자가 없었습니다.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질문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님께서는 불쌍한 무리를 앞에 두시고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 질문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방황하는 무리들을 앞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기대를 가지고 질문하셨습니다. 빈들에서 많은 사람을 먹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산에 앉히시고 제자들에게 이 사람을 먹일지에 대하여 질문하시는 것은 제자들을 시대의 목자로 키우고자 하시는 위대한 뜻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난감한 상황에서 어떻게 시대를 먹일 것인가? 제자들이 양들의 문제 해결 의지가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빌립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계산이 정확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머리는 있는데, 하트가 없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객관적으로 정의 할 뿐 문제를 해결하고자 끌어안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잘 피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자체로 서술해버리고 문제 해결에 전혀 자신을 참여시키지 않습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만 합니다. 수습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부담을 피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대답은 예수님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대답입니다. 예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의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한 알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홀로 있는 모습입니다. 열정도 없고 희생도 없고 헌신도 없으며 그리하여 체험도 열매도 없는 인생결말을 얻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뜻밖에 안드레가 나왔습니다. 안드레는 어떤 아이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다고 하면서 그 오병이어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따져보기에도 그것이 너무 보잘 것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안드레의 보잘 것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안드레가 가지고 나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가 가지고 나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하찮다 하지 않으시고 받으셨습니다. ‘축사하셨다’는 것은 감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가 믿음으로 나온 것이 기쁘셨습니다. 안드레는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들을 먹이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라고 하셨으므로 이 과제는 예수님께서 풀어주실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먹이겠느냐’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돌려보내지 않고, 어떻게든 먹이시고자 방향 잡으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뜻을 알았고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뜻에 참여하고자 두드리고 구하고 찾았습니다. 안드레가 가지고 나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는 예수님의 뜻에 동참하는 안드레의 진심과 예수님께서 먹이실 것을 기대하며 나온 안드레의 믿음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지만, 그 오병이어에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도와 믿음이 담겨져 있었으므로 마음이 기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와 양에서는 미흡해 보였지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안드레와 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함께 가지는 제자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무리들을 인색하게 먹이지 않으시고 풍성하게 원대로 먹이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기에 ‘안 됩니다’ 대답한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오병이어를 찾아서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여, 주여 부르면서 주를 위하여 찾지 않고 두드리지 않고 드리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우리 마음의 원하는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 예수님 마음을 본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합니다. 주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많은 사람을 의에 돌아오게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별과 같이 빛나게 하십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십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날 먹고 난 음식을 다 거두어보니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우리의 인생, 우리 양들의 인생을 먹이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먹이실 때 풍성히 먹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먹고 배부르니 세속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경제문제,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보장으로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호와 사람들의 요구를 뒤로 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기 위하여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지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허기를 채우고 위장을 만족케 하는 양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참 떡,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은 음식이나 돈으로써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떡으로 예수님의 몸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생명의 떡으로 먹고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을 온 세상에 나누어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의 떡 예수님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배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낙심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절망이 없고 멸망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온 세상에 전하고 나누어주어 모든 사람들이 배부르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심정을 갖고 동참하면 예수님께서 일하실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자 자기가 가진 오병이어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먹이실 때, 우리와 같이 먹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믿음과 진심으로 나오는 사람을 통하여 시대의 배고픈 무리들을 먹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여 양들을 불쌍히 여기고 무엇이라도 먹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양들을 배불리 먹이고자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풍성한 삶이 되게 하십니다. 영적으로 깨어나게 하시고 영혼이 은혜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 삶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우리 지방 센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적으로 부족한 학생들, 능력이나 장래준비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고자 한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부족함과 연약함이 뚜렷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고자 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것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개인 뿐 아니라 나라도 그러합니다. 1972년 한국 UBF 학생들이 “오그라진 손을 펴서 주는 사람이 되자” 외치며 방글라데시 홍수를 위하여 모금을 하였는데, 그 당시 방글라데시가 한국보다 더 경제력이 큰 나라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따라 주고자 하고 복음을 전하여 영육간에 먹이고자 하였을 때, 지금 우리나라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한 나라 영향력이 큰 나라가 되게 하셨는지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백성들을 먹이고자 할 때, 일률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때는 밥을 먹일 수 있지만, 가장 부지런히 먹여줄 것은 중보기도를 열심히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가운데, 성경을 한 줄이라도 감동력 있게 전해주는 것도 잘 먹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기 문제를 넘어서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먹이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지속적으로 먹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 마음을 모르고 예수님께서 일하실 것을 모르고 가만히 계산만 하고 있을 것인가?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여 가진 것을 내놓으며 주의 사람들을 먹일 것인가? 두 가지 길이 우리 앞에 놓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되었든지 자신이 가진 시간, 젊음, 소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먹이시고자 하는 뜻을 따라 나올 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뜻에 참여하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뜻을 따라 먹이는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먹이시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을 위하여 가진 것을 찾고 드리고 기도하는 이 시대의 목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먹이고 주고 드리는 삶을 사는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것을 깊이 체험하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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