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정필도 목사를 추모하며 _ 글. 정정숙 박사
어제 저녁에 부산에 살고있는 표영학목사가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정필도 원로목사님께서 조금 전 (16시 34분)에 천국 입성하셨습니다. 5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입니다. 집회나가셨다가 코로나 감염이 폐렴으로 번지셔서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옛 친구를 먼저 보내며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내가 정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66년 이른 봄입니다. 아직도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총신대학교 사당동 캠퍼스는 황량하기만 했습니다. 건축하다가 돈이 없어서 중단된 상태였고, 사당동의 학교 건물은 창틀은 있으나 창문이 없고 비닐로 바람을 막는 정도였습니다. 건물 바닥도 마무리 공사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이었습니다. 피란민 수용소 같은 건물 한 채만 달랑있었습니다.
지금은 총신대학교로 가는 길이 ‘사당로 ‘가 되어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지만, 그때는 소나무가 우거진 산속의 오솔길 이었고, 학교 앞은 파밭과 마늘밭 등의 채마밭이었습니다.
시내버스도 숭실대학교 정문 앞의 상도동 로터리가 종점이었고, 비가 많이 올 때는 차도 양옆에 있는 도랑물이 넘쳐서 장승백이와 상도터널 직전의 이화약국으로 올라가는 길과 숭실대학교로 들어오는 상도로의 삼거리까지만 버스가 운행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숭실대학교 로터리를 지나서 솔밭이 우거진 오솔길로 이어진 고갯길은 험산준령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대낮에도 혼자 다니기가 무서워서 등하교 시간 마다 여럿이 모여서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며 그 길을 넘어 다녔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헐떡고개’라고 불렀습니다. 배는 고프고 길은 험하니 숨을 몰아쉬면서 헐떡거리고 넘어 다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늘의 학생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옛 이야기이지만 우리 세대들에게는 가슴시린 추억의 길이 되었습니다.
헌신의 꿈을 안고 모여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를 외치며 추위와 배고픔을 이겼습니다.
학생들의 연령층도 다양했습니다. 오늘의 M.Div. 과정인 신과에는 정원이 20명이었습니다. 지금 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는 김정웅이 제일 어렸고, 한 살 위로 미국의 김수명, 천국간 김태규 그리고 정정숙이 있으며, 한 살 위로 정필도 등이 있고, 조금 위로 미국의 김삼도, 신영구, 예종탁, 원사연,이정호, 이종윤, 신성종 등이 있고, 그 위로 오영호, 최성구, 이병윤, 장성춘 등등의 인재들이었습니다. 여학생은 총신에서 처음으로 M.Div.과정의 여학생을 받기 시작하여 정정숙이 제일 어렸고, 그 위에 약사출신의 김경자, 간호사 출신의 안춘진이 입학을 했습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등의 어학과목을 제외하고는 대학 예과를 졸업한 본과와 현장에서 사역하는 전수과 학생들 모두 80여명이 함께 수업을 하다보니 교실의 앞자리에 앉기 위해서 새벽부터 등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통해서 신과, 본과, 전수과의 순서로, 그것도 가나다 순서로 자리 배정을 하다보니 정필도와 나는 늘 옆자리에 같이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담한 키에 열정이 넘치는 신학생이었습니다.
우리 학생들의 성향은 주로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기도에 집중하는 신령파, 공부에 매달리는 학구파, 그리고 편안히 놀며 학교에 다니는 여유파였는데 정필도는 신령파였고 나는 학구파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3년을 보냈습니다. 그때 정필도는 별명이 ‘당회장 전도사’였습니다. 목사가 없는 동대문의 한 교회에서 설교하고 목회하였습니다. 그는 경기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화려한 학력보다 산기도에 집중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설교연습’시간이었습니다. 담당교수는 명신홍 목사였습니다. 우리는 지도 교수의 호명에 따라서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였는데 지금도 정필도의 그 설교를 기억합니다. ‘기드온 3백명 용사’를 주제로 설교를 하면서 사명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외첬습니다.
이렇게 3년을 공부하면서 정필도는 산기도 간다고 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다음날 학교에 와서 내게 ‘정선생 어제 노트빌려줘“하면서 노트를 빌려가고, 때로는 ”리포트 다썼지? 한번 보자“하기도 하곤 했습니다.
3년의 신학교육을 받은 우리는 졸업후 각기 흩어졌습니다. 정필도는 군목을 거쳐 목회에 그 열정을 쏟았고, 나는 학문의 길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서울에 집회를 하러 오면 “별일 없지? 건강하냐?”고 이따금씩 문안 전화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2022년 1월 초에 <총신문학>제10집에 나에 대한 ‘특집’이 실렸기에 정필도 목사에게 한권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1월 중순경에 그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총신문학>에 실린 ‘특집’도 읽고 내가 쓴 수필도 두 편 모두 읽었다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리 두 사람 모두 참 열심히 살았네”라면서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했습니다. 평생동안 그와 나눈 대화 중 가장 긴 대화였습니다. 그의 사역 이야기, 사모 이야기, 자녀들과 손주들 이야기, 건강 이야기 등으로 ‘늙은 두 정 씨’가 수다를 떨었습니다. 서로 ‘건강하자’고 다짐을 하며, 코로나가 지나가면 ‘맛있는 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이것이 마지막 통화였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열정의 사람이었으며, 헌신의 모델이었습니다. 한 평생 오직 교회를 섬기며 한 길로만 걸었습니다.
20대에 만난 친구들이 머리가 희여진 80대에 와서 옛 추억에 잠겼었는데, 이제 친구를 먼저 보내고 하나님의 섭리 앞에 조용히 순종할 따름입니다. ‘친구여, 먼저 가서 편히 안식하고 계시오. 나도 뒤따라 가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