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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행기
일시: 1월 27일 (수)- 30일(토)
코스: 인천공항- 하노이 공항- 하롱베이(1박)- 하롱베이 관광(띠똡섬 등)(2박)- 옌트- 하노이 시내(3박)- 노이바이 공항-인천공항
1. 첫날
무려 일 년여의 기다림 끝에 실현된 해외여행을 가는 전날! 그 떨리는 감격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건만 달랑 두 시간만에 잠이 깬 뒤에 오만 가지 즐거운 상상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새벽 네 시 반에 깨서 다섯 시 이십 분 공항으로 가는 차를 타야 한다는 강박증이 더욱 잠에서 멀어지게 한다. 벌써 열 여덟 번째 해외 여행이건만 이렇게 설레는 여행은 처음인 것 같다. 그 중 네 번은 단체 여행이었지만 직장 또는 연수 단체의 여행이었는데 이 번에는 마음과 뜻이 통하는 친구들과의 여행이었기에 더욱 설레는 것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하노이와 하롱베이는 2008년 1월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여행이었다. 그 곳과의 각별한 인연까지 느껴진다.
인생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가 여행지를 출발하기 위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버스를 타고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공항대합실에서 수속을 밟을 때의 행복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과 설렘으로 충만한 감정은 수많은 여행객 속에 나도 끼여 있다는 행복감과 합쳐져 비행기가 이륙할 때나 기내식을 먹고 있거나, 영화를 볼 때 불쑥불쑥 올라와 마음을 우쭐우쭐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윽고 다섯 시간 긴 비행 끝에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한 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수많은 낯선 이들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공항 밖으로 나올 때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드디어 익숙한 곳과 결별을 의미하는 낯선 말소리들, 옷차림들, 차량들, 날씨들이 내가 사는 땅과 아주 먼 곳에 드디어 왔음을 실감케 한다.
첫 숙박지인 하롱베이는 하노이에서도 네 시간을 더 가야 하는 곳이다. 30인승 버스에는 우리 아홉 명 외에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가이드 윤차장과 ‘남’이란 이름의 현지 가이드, 운전수, 한국인 견습 가이드 네 사람이 함께 했다. 반갑지 않은 비를 맞으며 하롱베이 무엉틴 호텔로 향한다. 가이드로부터 베트남 말 4 문장(신짜오,신 꺼먼, 신가이, 엠어이)을 배웠는데, 여행 내내 이 말로 소통이 가능했다. 가는 길 중간에서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첫 점심식사를 하였다. 하노이를 대표하는 분짜정식이란다. 정식이라 해서 밥을 생각했건만 ‘국수’주의자들인 베트남인들에겐 정식도 밥이 아니라 국수였다. 쌀국수를 의미하는 ‘포’와 비슷한 국수인데 숯불로 구운 돼지고기를 국수에 싸서 먹는 음식이었다. 우리들 입맛에 잘 맞는 음식이어서 첫 식사를 그런대로 잘 했다 .누룽지 냄새가 나는 월남소주(넵머이)를 여기서 처음 먹어 봤는데 맛이 괜찮아서 여행 기간 내내 이 술이 우리 모임의 공식술이 되었다. 음식점 종업원들은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곁에서 서빙을 하다 구대표가 팁을 주자 그 식당 종업원들이 전부 돌아가며 나타나서 “사장님”이라 부르며 서빙을 자처하자 우리 구대표는 서부의 건맨들이 허리춤에서 총을 뽑듯 “옛다. 너도 받아라.”하며 연신 지갑을 뽑아 팁을 쏘았다. 무려 열 명 가까이 팁을 맞아 그 식당 종업원들이 다 초토화되었다. 어떤 친구는 두 방을 맞기도 했었고. 하긴 이건 앞으로 벌어진 구대표의 팁 난사의 전초전에 불과한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엇다.
하롱베이 가는 길의 풍경은 예전과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엿다. 길도 외길 그대로이고 특유의 길쭉한 이층, 삼층 형태의 베트남 가옥들도 그대로였다. 간혹 방목하던 소들이 집으로 돌아가느라 차도를 지나가는 모습이 가끔 보이고 열대 지방 답게 여기는 밭의 색깔이 우리와 달리 아직 푸른 모습이란 점이다. 오리를 키우는 논 중간에 공동묘지로 보이는 곳에 여러 석물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도 그대로이다. 소도시에는 휴대전화 매장, 쌀국수집, 가라오케집 등 허름한 가게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고, 관공서나 외국인 회사로 보이는 좀 큰 건물들도 줄줄이 보인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닌지 하노이에서 볼 수 있는 오토바이의 홍수는 여기서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롱베이에 도착해서 맨 먼저 한 일이 전신 마사지를 받으러 간 일이다.두 시간 동안 베트남 콩까이로부터 맛사지를 받는 일이라 이색적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팬티만 입고 콩까이가 시키는 포즈로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여독을 푸는 시간이다. 콩까이들은 나이가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고 귀여운 외모의 콩까이들이었다. 만나자마자 최고의 찬사에 해당하는 ‘신가이(예뻐요)’를 연발하며 몸을 맡겼는데 내 파트너는 부산에서 이 년간 미용실에 있던 아이라 유일하게 한국어를 제법 한다. 이 아이를 통해 주로 의사소통하면서 마사지를 받는데 마사지 솜씨는 기대에 차지는 않았지만 의사소통이 좀 되다 보니 재미있게 마사지를 받을 수있었다. 특히 집안의 장자인 구대표는 막내동생이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한 게 늘 포한이 된 채 소천하신 어머님 소원을 대신 풀어드리고 싶은 효심이 발동해서인지 여기에서 막내 동생의 짝을 찾아주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하는 의욕을 보였다. 그러다보니 그녀에게 여러 가지 묻기도 하고 약속하기도 하며 대화의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더욱 즐거운 분위기 속에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다.
유쾌한 마사지 후에는 월남 삼겹살을 맛보는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역시 한국인 식당이다. 해외에서 돈 벌 기회를 찾고자 하는 한국인들이 베트남에 많이 진출해서 여행사, 식당, 마사지숍, 기념품매장 등을 운영하는 것 같다.한국인들의 베트남 여행도 베트남에 사는 교포 한국인들의 네트워크에 따라 죽 진행되는 것 같다. 삼겹살이 기름이 적어 맛이 담박하고, 갓 따온 듯한 싱싱한 상추와 어울려 먹을 만했고 게다가 엠어이를 부르면 무한리필이 가능하다 보니 넵머이라 부르는 누룽지맛 소주와 함께 다들 즐겁게 취토록 마셨다. 구대표의 건배사는 알다시피 유명한 “잔대oo"다. 이젠 바뀔 때가 됐다 싶었는데 정말 이번에는 새로운 건배사를 장착해 왔다.(지난 가을 여행때 함께 했다면 그때 선보였을지 모르겠다.) 먼저 구대표가 구수한 유행가 가락에 맞춰 ”목을↑ 축-이자↓.“라고 선창하면 우리 모두 일제히 ”목을↑ 축-이자↓.“라고 제창하는 것인데 .무지하게 재미가 있다 보니 숱하게 반복하면서 모두 술오리가 되어 갔다.나 역시 중차대한 이빨 공사 중이었건만 그것도 다 잊고 내가 물오린지 술오린지도 모르게 술의 바다 속으로 점점 잠겨들어갔다.
바다 앞에 위치한 무엉틴 호텔은 하롱베이에서 두 번째로 좋다는 명성답게 객실은 작지만 깨끗하고 편안하게 쉴 만한 호텔이었다. 회장님방에서 한국에서 준비한 소주와 컵라면을 안주 삼아 올해 회갑을 맞은 양주, 영철, 길남 친구를 축하하고 기념품을 주었다.이제 친구들 모두 육십 줄에 들었다. 육순을 맞이한 친구들도 있고, 회갑을 맞이한 친구, 이제 진갑인 친구, 심지어 회갑,진갑 다 지나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진입한 것이다. 옛말에 육십부터는 남의 나이를 산다 했으니 육십도 못 살고 죽은 수많은 인생을 대신해 산다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다. 이렇게 우리들의 위대한 여행의 하루가 지나갔다.
2.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이틀째, 이번 여행의 주연인 하룡베이를 배를 타고 구경가는 날이다. 제주도와 더불어 세계 7대 자연경관에 뽑힌 "하롱베이"는 용이 내려온 해안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2,00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수많은 CF속에 등장하여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언젠가 가고 말테야 라는 불을 질렀다는 섬을 우린 목전에서 구경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첫날에도 비가 오더니 오늘은 비가 더 심해졌다.비가 많이 오면 배가 출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니 더욱 심쿵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믿는 친구들 부처님 믿는 친구들 모두 간절히 기도했건만 얄궂은 날씨가 헤살 놓는데 어찌 하랴! 한가족처럼 보이는 베트남인 5인이 운항하는 조그만 목선을 타고 우린 비 때문에 1층에 앉아 수많은 무인도가 도열한 하롱만으로 서서히 나아간다.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으로된 중국의 장가계,구체구,구이린 같은곳에서 목도한 기기묘묘한 산들의 모습을 여기서는 파도가 치지 않는 물 위에서 본다는 점이다. 간혹 작은 목선이 당도하여 물건을 사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승선 기념으로 차려 나온 열대과일을 안주 삼아 우리가 준비한 소주를 마셧다. 배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배 안에 있으면서 사진을 찍고 담소를 하다가 “키스바위”같은 곳을 일려 주면 배 뒤편에 나가 사진을 찍고 했지만 안개로 뒤덮여 있어서 수평선 끝에 놓인 아스란한 풍경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컸다. 그러다 이어 주문한 다금바리 회가 나오니 또 목을 축일 수밖에 없고,.사방은 내리는 비로 계속 차창을 적시니 우리는 수족관 속 갇힌 물고기같이 계속 입술 운동을 하며 “목을 축이자”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회를 다 먹고 하룡베에에서 제일 큰 동굴을 갔다 오니 이번에는 그럴싸한 해선식이 떡 하니 차려져 나온다. 홍어매운탕, 게튀김, 게찜, 갑오징어숙회, 등 그러니 이번에는 3차 대전하듯 또 “넷머이” 주문해 마신다. 그런데 이리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다는 거다. 아마 물 위에서 먹으니 그런 가 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안주가 되어 술을 먹어도 물을 먹은 듯 기분은 좋아지지만 술은 취하지 않았다. 특히 평소 한두 잔에 얼굴이 불콰해지는 꽉총무가 음주를 주도할 정도로 오늘을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제트보트를 타다 물을 뒤집어 쓴 생쥐가 되어 보기도 하였고, 카약킹도 타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 하롱베이 명물인 원숭이도 보았고, 띠똡섬에 도착하여 전망대까지 걸어가서 하롱베이 전경을 보기도 했다.물론 안개가 좀 끼어 해남 땅끝에서 보듯 다도해의 모습을 다 볼 수 없었지만 하롱베이의 진수를 조금은 느낄 만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배를 돌려 한 시간 반 정도 되돌아가야 할 시간에는 이수회의 엔터테이너인 이교수 주도 하에 즐거운 여흥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교수가 앙콜로 두 번이나 부른 “장미여관, 봉숙이”는 오늘의 압권이 아닐 수 없었다. 드럼통같은 큰 통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굵은 성량에 호소력이 가득 담긴 목소리, 유머러스한 가사가 어울어져 뱃속에 모든 한국인 월남인들을 기쁨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어 박수갈채를 받았다. 우린 앞으로 공식 사회자와 엔터테이너로 이교수를 믿습니더! 많이 활약해 주이소. 담에도 장미여관 꼭 가입시데이. 그 외에도 박대표,신대표의 구수한 노래에 유마거사, 황회장과 구대표의 멋진 노래까지 어울어져서 배가 항구에 닿을 때까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야 봉숙아
말라고 집에 드갈라고 꿀발라스 났드나
나도 함 묵어보자
아까는 집에 안 간다고
데낄라 시키돌라케서 시키났드만
집에 간다 말이고
못 드간다 못 간단 말이다
이 술 우짜고 집에 간단 말이고
못 드간다 못 간단 말이다
묵고 가든지 니가 내고 가든지
야 봉숙아
택시는 말라 잡을라고
오빠 술 다 깨면
집에다 태아줄게 태아줄게
저기서 술만 깨고 가자
딱 30분만 셔따 가자
아줌마 저희 술만 깨고 갈게요
못 드간다 못 간단 말이다
이 술 우짜고 집에 간단 말이고
못 드간다 못 간단 말이다
묵고 가든지 니가 내고 가든지
못 드간다 못 간단 말이다
이 술 우짜고 집에 간단 말이고
못 간단 말이다
묵고 가든지 니가 내고 가든지
사랑을 찾아서 사람을 찾아서
오늘도 헤매고 있잖아
사랑을 찾아서 사람을 찾아서
오늘도 헤매고 있잖아-장미여관, 봉숙이
호텔에 도착해서 잠시 쉰 뒤에 수상인형극을 보러 갔다. 나는 한 번 본 거라 기대를 하지 않아 그런지 잠이 쏟아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처음 본 친구들은 기대보다 볼 만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농민들의 전통적인 설화나 일상을 인형으로 만들어서 오랜 전부터 공연되던 것을 개발해서 이젠 하노이에 이어 여기서도 구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녁 식사는 맛있는 김치찌개로 서울에서 먹는 것만큼 맛있게 잘 나오다 보니 또 넷머이와 함께 반주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저녁 음주 후에 허름한 하롱베이 야시장에 나가 주로 목각, 빗, 등 기념품을 파는 곳에 들어 물건값을 깎는 재미를 느껴 보았다. 수퍼에 들어 맥주를 한 캔씩 사서 한방에 모여 마지막 종례를 한 뒤에 하롱베이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3.
하롱베이를 떠나는 날 무엉틴 호텔에서 아침을 먹었다. 호텔 뷔페식으로 첫날과 메뉴 차이가 거의 없다. 가짓수가 별로 많지 않지만 음식은 우리 입맛에 잘 맞는 편이었다.음식이 입에 안 맞아 고생하는 친구들이 없었다. 호텔이 좋아서 아침 식시도 이만하면 좋은 편이었다. 비는 좀 그친 듯하다. 베트남 불교의 중심사원이자 자연풍광이 좋은 옌트로 출발했다. 세 명이 왕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로 오늘날까지 명절 때 수많은 신도들이 찾아온다는 산사인데,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면 중턱쯤에 화안사라는 절까지만 갔다. 부처님의 몸의 일부를 묻은 탑으로 유명하다.비가 와서 안개가 끼어 자연풍광을 볼 수 없었다. 산사를 관람하고 곧 바로 내려와서 하노이를 향해 가다 중간 지점에 들러 베트남 특산품인 노리와 게르마늄, 다람쥐 커피를 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매장에 들러 베트남 특산품을 사고 거기서 노리가 들어간 보쌈과 신선한 야채를 곁들여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였다. 게르마늄 파는 가게에서 혈관 현미경으로 혈관상태를 확인해 주었는데 예상 외로 양주가 1위, 민상이가 2위, 민홍이 3위...내가 9위로 꼴찌를 해서 충격을 받았다. 친구들은 등산을 많이 하니까 내가 1위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결과가 나오자 모두 놀랐다. 나 역시 놀랐다. 부모님이 모두 혈관 질환으로 길게 고생하시다 돌아가셨기에 선천적으로 혈관 상태는 안 좋은 것은 예상했으나 몇 년 간 등산을 하며 좋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른 친구들의 것과 달리 혈전도 많고, 혈관이 꼬여 있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선천적 질환인 불면증으로 고생하다 보니 운동을 해도 혈관상태가 나아지지 않은 모양이다. 더 철저하게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은 셈이다. 이러다 등산하다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위기를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참 찝찝한 경험이다.그래서 공항에서 노이 한통을 샀다.
오후에 하노이에 도착했더니 중앙선도 없는 도로마다 양방향의 오토바이 행렬이 차와 뒤엉켜 홍수를 이루었다. 우리 같으면 이런 도로에서 어떻게 차를 운전할 수 있을까? 시내로 진입할수록, 퇴근시간이 가까이 올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다들 오토바이를 끌고 나온 것 같다. 헬맷쓴 사람들의 모습이 데모대와 진압하는 백골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 말했듯이 6.25동란 때 피난행렬도 이렇게 않았을 거라는 말이 거의 과장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실감이 난다. 우리는 스트리트카에 옮겨 타고 남대문 시장 같은 시장 거리를 직접 돌아다녀 봤다. 경적소리는 많이 울리고 매연이 자욱하지만 교통문제 때문에 서로 멈추고 싸우는 사람들은 없었다. 서로서로 눈치껏 알아서 잘도 오고간다.
호치민이 누워있다는 건물이 보이는 공산주의 국가마다 어김없이 있는 넓은 광장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호치민 집무실이 있던 곳에 가서 호치민이 평소에 거하던 건물과 공원들을 돌아보았다. 하노이에서 유일하게 조용하고 공기가 상쾌한 곳이 여기가 아닌 가 싶다. 호치민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진정한 영웅으로 숭배되는지는 그가 평소에 거했다는 집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산 분이다. 우리 나라 정치인들이 본받을 만한 점이 많은 분이다.많은 연리지 같은 진귀한 나무들도 보았다. 이어서 50 이상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인 베트남의 소수민족박물관을 둘러보고 그들의 대표적인 주거지를 옮겨놓은 곳을 직접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저녁 식사로 제육볶음과 만두찌개를 먹으며 또 한 잔 기울이고 그랜드 호텔로 갔다. 이 호텔은 하노이 신시가지에 위치한 한국의 참빛 그룹이 만든 호텔로 오성급 호텔로서 하롱베이 무엉틴 호텔보다 더 좋은 호텔이다. 호텔 근처로 나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맥주집에 들어 생맥주를 한 잔씩 하고 호텔주변을 둘러보고 들어왔다.
4.
귀국날은 특별한 일정이 없이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08:30분에 출발하여 라텍스 매장을 둘러본 뒤에 공항으로 갔다. 한 시간 정도 연착이 되는 바람에 한국시간 20시쯤 지하철로 귀가하여 21:40분쯤 집에 도착하였다.
해외여행을 한다고 일 년간 돈을 걷긴 했지만 과연 해외여행이 가능하리라 생각을 못했다. 왜냐하면 10사람이 하는 일이 다 다르다 보니 한 날 한 시에 열 사람이 모여 여행한다는 것은 사실 성사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9명이 동참하는 여행이 일 년만에 실행되었다. 이는 회장단의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회장과 총무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사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이를 경험 삼아 보다 과감하게 계획하고 힘차게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이런 요구에 모두 부응한 친구들의 마음과 정성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행은 삶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다.
실제 베트남에 가 보니 우리와 두 시간 차이가 난다. 우리가 그들보다 두 시간 빠르게 살고 있었다. 나 역시 누구보다 두 시간 빠르게 사는 삷을 지향해 왔다. 베트남 사람들처럼 24시간 중 두 시간 정도는 더 느리게 살려는 삶의 태도를 이번에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좀 더 여유있는 삶, 성찰하는 삶, 양보다 질을 생각하는 삶, 겉보다 속이 더 알찬 삶...이런 것들을 지향하는 두 시간 느리 삶을 생각했다.
베트남에는 우리보다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상점에서, 식당에서, 마사지 가게에서, 거리에서, 공사장에서, 배에서도 많은 곳에서 흙수저의 인생들을 봤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흙수저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자신의 분수에 맞게 작은 일자리라도 찾아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과거 그 비루한 삶 속에서 흙수저라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기에 이젠 어엿한 세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오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던 친구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통해 내 모습을 다시 살펴보는 계기도 되었다. 이것 저것 재지 않고 해야할 일이라면 솔직 담백하게 내 지르는, 곡선보다 직선에 가까운 구대표, 말을 아끼면서도 조언이 필요할 때마다 개입해서 올바른 코칭도 하면서도 단합이 필요한 시간엔 자신의 엔터테이너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애서 분위기도 띄우는 이교수. 온갖 궂은 일이란 일은 주렁주렁 다 매달고도 누구와도 트러블없이 대화로 추진해 가는 곽총무, 나설 때와 따라줄 때를 잘 분간해서 나설 때는 과감히 앞장서고 따라줄 땐 말없이 협조하는 박대표, 항상 둥글둥글 수용하고, 분위기에 잘 맞추며, 솔직담백한 유마거사, 예리한 판단력으로 판세 흐름을 잘 읽고 뛰어난 언변으로 정리를 잘하는 양주님, 생각이 분명하면서도 대세를 인정하며 관용적 태도를 보이는 신대표, 항상 생각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서 전체 흐름을 리딩하는 황회장 이들 모두가 신체적으로도 건강하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건전하게 삶을 영위하다 보니 이번 단체 여행에서도 퇴페적이고 불미스런 일 없이 건전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참 자긍심 넘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제2, 제3의 여행이 계속되어 즐거움을 함께하는 친구들이 되길 소망한다.
첫댓글 역시 문장가의 글은 항상 읽어도 재미있고 충분한 내용으로 생동감 있어 좋아~
황셈의 글솜씨를 쭉 보면 좋을것 같아유~수고했슴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한 베트남여행은 향후 우리들의 여행의 시발점이 되리라 생각함다.
과찬의 말씀이유. 곽총무의 노고로 말미암아 이수회 모임이 해외에까지 뻗어갈 수 있었네. 이걸 계기로 우리 나이 80까지 더더욱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