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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중국사회의 성숙
1. 송의 통일과 사대부사회
(1) 송의 건국과 문신관료체제
-당말 및 오대 사회의 변화: 지방분권적 절도사 체제 성립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질서: 당의 지배아래 있던 동아시아 국가들 독립
-황제독재체제 성립(중앙집권화): ①절도사의 권한 축소 및 문관으로 교체
②군사력의 중앙집중화 ③문치주의(과거로 관리 등용)
-왕안석의 정치 개혁(신법): 농민생활안정, 중소상인보호, 국가재정 재건, 외환근절 치중
그러나 지주층에 기반을 둔 기득권과 관료들의 반대로 인해 실패함.
-금의 침입과 남송: 금이 송을 침입하여 화북의 금과 강남의 남송으로 중국이 다시 분열됨. 이와 더불어 중국 경제와 문화의 중심 활동무대가 강남으로 확장됨.
(2) 송대 사회와 경제
-당․송 사회의 변혁: ①사대부, 서민문화 발달 ②지주․전호제 정착
-산업생산 발전
(3) 송대의 사상과 문화
-송대문화의 특색: 국수적, 서민적, 내성적
-송학(주자학)의 전개: ①유교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사대부사회를 옹호하는 사상으로 발전시킴. ②명분론을 내세운 군신간의 義를 강조하여 전제군주제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함.
-과학기술 진보: 활판인쇄, 화약, 나침반 발명
2. 원제국
(1) 원제국의 성립과 동서문화의 교류
-몽고족이 흥기하여 세계를 정복하고 원제국을 수립함.
-원의 중국통치: 몽고지상주의에 입각한 민족별 신분제도(몽고인>색목인>한인>남송인)
-원대문화의 성격: 국제적 색채, 서민문화의 발달
-동서문화교류 활발: 역참제 실시와 조선술 등 교통로의 발달로 서방과의 문물교류 성행
3. 명대의 성립과 한민족 문화의 재흥
(1) 명의 황제독재체제
-명의 건국과 통치체제
①몽고지상주의에 대한 한민족의 반항: 홍건적의 난
②중국사상 최초로 강남에서 발흥하여 중국통일 성취: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을 능가
③몽고풍 일소, 황제독재체제 확립
-영락제의 대외발전: 정화의 남해원정, 조공무역
-명조의 쇠퇴: 관료의 부패와 환관의 발호, 신종은 장거정을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실시했으나 당쟁격화, 정치적 문란, 재정 궁핍 등으로 인해 몰락함.
(2) 명대 사회와 경제
-신사층(향신)의 성립: ①지주층이면서 교양과 학식을 갖춘 지식인층 ②지방관과 긴밀한 유대를 맺으며 향촌사회에서 영향력 행사
-자본주의 맹아론: 생산력 증대, 은경제의 보급(일조편법), 상풍경제의 발달
(3) 명대 사상과 문화
-명대 문화의 특색: 한족의 주권회복과 더불어 한문화 부흥,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 및 복고주의적 경향, 서민문화의 결실, 실학의 유행과 자연과학의 발달
-양명학의 성립: 왕수인을 중심으로 지행합일설, 심즉리설, 치양지설 주장
-경제실용사상: 서양학문의 전래와 사회경제적 발전으로 실용주의적 경제사상이 유행
-서양문물의 전래: 예수회 선교사들의 진출이 두드러짐(마테오 리치)
4. 청조의 성립과 중국지배
(1) 청의 중국통치책
-만주족의 중국정복: 중국사상 최후의 정복왕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걸쳐 유례 없는 황금시대 맞음. 특히 강희제는 1688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
-청조의 중국통치: 같은 정복왕조로서 강압 일변도였던 원과는 달리 강압책과 회유책을 교묘히 변용
①강압책: 한인에게 복종의 근거로 변발과 호복 강요하고 ‘문자의 옥’을 통해 만주족 지배에 반대하는 서적에 대해서는 금서령 발표
②회유책: 중앙요직에 만주족과 한족을 반반 병용, 학자를 우대하여 많은 문화사업 실시
-백련교의 반란과 청조의 쇠퇴
(2) 청대 사회와 경제
-청대 사회와 경제: 팔기제, 지정은제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자본주의의 성장
(3) 청대 사상과 문화
-경세, 고증학의 발달: 실용주의 방향으로 학술연구가 진행됨, 실사구시의 새로운 학풍 유행. 고증학, 지리학, 음운학, 문자학, 금석학, 목록학, 천문학 등도 발전
-서민문학 발달: 「홍루몽」, 「유림외사」
-동서문화 교류 활발
4장 중국 근현대사의 전개
서양세력의 진출과 1, 2차 청․영전쟁
1. 중국의 근대: 아편전쟁을 계기로 급격하게 일기 시작한 중국 인민들의 아래로부터의 변혁요구와 국가에 의해 추진된 일련의 자강운동
2. 청과 서양의 무역관계: 광동의 성도였던 광주를 서양과 무역을 할 수 있는 항구로 지정
3. 광동무역체제: 13명의 특허상인이 무역뿐만 아니라 외교업무까지 관장했던 체제
4. 청․영간 무역의 특징과 문제점
(1) 당시 영국무역을 담당했던 인도주재 영국 동인도회사의 수입초과
(2) 무역량이 증대함으로써, 광동무역체제는 자유무역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음.
5. 아편의 상품화: 영국의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한 대체상품으로 아편을 상품화.
6. 아편전쟁의 시작과 경과: 청정부의 강경한 아편단속을 응징하기 위해 영국은 전쟁을 선포함(1839년, 제 1차 청영전쟁)
7. 남경조약체결(1842): 청영전쟁의 패배 결과
(1) 광동의 공행무역 폐지
(2) 홍콩 할양, 5개항 개항
(3) 수출입 물품에 적정관세 부과, 전비보상
(4) 호문추가조약(1843년): 영사재판관 인정, 최혜국대우 약속
8. 제 2차 청영전쟁(1856)
(1) 원인: 애로우호 사건
(2) 결과: 천진(톈진) 조약 체결(1858), 기독교 포교의 자유, 북부의 항구 개항
태평천국과 중국근대의 민중운동
1. 태평천국운동
(1) 1850-1864년 대표적인 근대 민중운동으로 사회 저변에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음.
(2) 원인
-인국가 급격히 증가한 만큼 토지나 행정조직 재정수입이 증대되지 않았음.
-아편전쟁은 광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내륙무역로에 변화를 가져와, 이곳에서 운수업에 종사하던 노동자의 실업을 야기함.
2. 중국근대의 민중운동
(1) 배상제회: 홍수전이 주동했고, 전통적인 민중종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접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비밀 결사 조직
(2) 천지회 반란: 화남지방의 대표적인 비밀결사
(3) 염집단 반란: 빈농이 중심이 되었던 반란
(4) 회족 반란, 묘족 반란: 한족지배에 대한 소수민족의 저항
(5) 반기독교 운동: 서양 기독교는 중국문화를 멸시하고,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띄게 되는데 이에 대해 반대하는 양상으로 나타남.
국가부강운동: 양무와 변법
1. 양무운동(중체서용)
(1) 의의: 서양의 우수한 군사력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초보적인 자강운동.
(2) 특징: 군사공업을 중심으로 근대의 산업화 시작
(3) 서양식 기관 설립
-총리각국사무아문: 중앙정부에 설립한 외교기구
-총세무사서: 개항장의 세관을 근대적으로 확대․발전시킨 기구(세관수입의 합리화)
(4) 결과: 근대도시들의 성장, 산업화 진전
(5) 양무운동의 장애물
-공업화가 더딘 속도로 진행: 농업과 수공업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경제체제가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
-정치적 불안과 열강의 침략
2. 변법운동(무술개혁)
(1) 제도개혁을 실시하여 주권국가건설로까지 나아가는 자강
(2) 100여 일만에 보수반대파의 쿠데타로 종결됨.
중국내의 제국주의와 의화단 운동
1. 제국주의 시대
(1) 중국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장: 중국침략형태는 ①조차지 획득, ②세력범위 분할, ③이권획득, ④관세담보 등으로 매우 다양했음.
(2) 열강의 중국분할
-일본: 대만 획득(시모노세키조약의 결과)
-러시아: 삼국간섭(러시아-프랑스-독일)을 통해 여순항과 요동반드를 25년동안 조차
-독일: 교주만과 청도를 점령
-영국: 홍콩 인근의 중국 영토를 99년 조차
-미국: 필리핀과 괌 쟁취
(3) 조계지 중국지배의 기초: 조계지란, 중국의 개항지에서 외국인의 행정, 경찰, 사법 등을 관할하는 지역.
2. 의화단 운동
(1) 반외세 민중운동-“부청멸양”, 반기독교․반제국주의적 민족운동
(2) 결과: 청정부는 열강에 굴복하여 신축조약(1901년)을 체결
(3) 의의: 제국주의의 중국과분 방지, 보수정권의 기반취약화
공화정부의 출발과 군벌정치로의 발전
1. 신정의 실시(독판정무처 설치): 새로운 지식인과 군대 양성
(1) 정부조직과 학제의 개편(독판정무처 설치), 정치결사의 허용, 신군의 성장 등 개혁시도
(2) 이권회수운동: 신사층을 중심으로 외국자본이 세운 광산, 철도 등을 자치적으로 운영하자는 운동이 전개됨.
(3) 청정부는 이권회수운동 방해
2. 손문의 반청운동
(1) 1895년 홍중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
(2) 청조타도와 공화정부의 수립 지향
(3) 중국혁명동맹회 창립: ①삼민주의: 민족, 민생, 민권주의 ②기관지 <민보> 발행 ③무장봉기를 일으켜 혁명운동 확산
3. 신해혁명과 공화제의 성립
(1) 철도국유화 문제: 청조는 철도의 국유화를 발표하고 대규모의 차관도입을 결정→이권회수운동에 역행하는 것으로 각 성에서 반대운동이 전개됨
(2) 신해혁명(1911): 사천 폭동에 이은 무창에서의 보로운동 진압을 위해 파견된 호북성 신군이 오히려 반만반란으로 선회하여 혁명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 여기에 북경의 원세개가 동조함으로써 청 왕조과 끝났으니 이를 신해혁명이라 함.
(3) 공화제의 성립: 원세개가 황제체제의 부활을 기도
(4) 군벌정치의 시작: 원세개가 죽자(1916) 그의 지휘 아래 있던 군사력이 몇 몇 부하들에 의해 분열되면서, 군인들이 정부와 지방요직을 차지.
5․4운동과 신중국의 모색
1. 신중국의 모색
(1) 경제부문의 변화: ①토착공업 발전, 새로운 계층 등장 ②공장은 경공업 중심, 미족자본에 의해 운영됨.
(2) 새로운 사회계급의 출현: 산업노동자 증가, 상공인과 전문가집단의 흥기.
(3) 구미사상의 수용
2. 5․4운동
(1) 지식인에 의한 문화혁명 (2)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에 반대 (3) 진독수: 1915년 상해에서 잡지 <신청년> 창간 (4) 호적: ‘백화문 운동’을 문화혁명을 이끔 (5) 중국공산당 창단(1921)과 중국국민당 결성에 영향을 줌.
3. 제 1차 국고합작(1924): 국민당은 ‘연소, 용공, 부조공농’이란 3대 정책으로 채택하면서 공산당원을 개인자격으로 받아들여 당을 개조.
국민정부시기의 중국
1. 국민정부의 성립: 입법, 사법, 행정의 3원과 고시원, 감찰원의 2원을 합쳐 5원으로 정부 구성.
2. 공산당과의 결별: 장개석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조직을 일거에 파괴.
3. 국민정부의 개혁정치: 재정개혁을 통한 수입 확보, 농촌부흥, 국학연구진흥.
4. 국민정부의 구조적 문제: ①정부의 재정 부족 ②통치까지도 군대에 의존 ③스스로 개혁과 사상의 폭을 극도로 제한.
5.5․30 운동(1925): 국민정부 시기의 대표적인 반제운동
6. 점증하는 일본의 침략과 중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으로 시작으로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전면적인 침략감행(중일전쟁 발발)
7. 제 2차 국공합작(1936): 서안사건이 계기가 됨.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정
1. 중국공산당은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출발하여 국민당과 합작으로 발전.
2. 농촌사회의 모순에 주목: ①지주, 소작제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계급구조 ②제국주의 상품의 진출로 빚어진 농촌 수공업의 위기 ③1930년대 전세계에 불어닥친 공황
3. 항일전 승리 이후 재개된 국․공 내전→공산당의 승리로 끝남
4.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6장 서아시아사의 전개
서아시아 고대사
1. 인류 최초의 도시문명: 수메르
(1) 우바이드 시대: B.C. 4200-3750년 사이의 작은 도시국가들
(2) 수메르 문명: 처음으로 정착한 주민들이 수메르인이었는데, 이들은 B.C. 3000년경에 대규모 치수사업을 통해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최초의 문명생활을 시작
2. 지리적 개방성과 이민족의 잦은 침입
(1)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지역에 비해 지리적으로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침입 많이 받음.
(2) 바빌로니아 왕국: 아무르인이 세웠고, 함무라비왕 때 전성기를 이룸(함무라비 법전)
3. 비옥한 초생달 지역
(1) 페니키아: 표음문자 사용, 알파벳의 기원
(2) 헤브루: 유대교 성립, 유일신 사상
4. 오리엔트의 통일
(1) 아시리아의 오리엔트 통일: B.C. 8세기 경
(2) 4국 분열 시대: 메디아(이란), 리디아(소아시아), 이집트, 신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로 분열되었는데, 이 중 신바빌로니아가 가장 강했음.
(3) 페르시아의 오리엔트 재통일
①페르시아 전쟁: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으로 페르시아가 패배
②알렉산더의 등장: 동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 마련
이슬람시대의 개막
1. 이슬람교의 성립
(1) 메카의 중요성: 오아시스 대상 교역의 중심도시로 각 부족의 우상을 모신 순례지
(2) 마호메트의 등장: 이슬람교를 성립시킴
(3) 이슬람교의 사상: ①일원론적 유일신 사상 확립 ②만민평등 ③천국의 구원과 지옥의 응징으로 나뉜다는 내세관 ④정명사상: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예속된다 ⑤육류금지 ⑥특수한 상황에서 일부다처제 허용
(4) 신앙의례: 오주육신
(5) 5대 의무: 신앙의 고백,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 자선을 위한 구빈세, 라마단 한 달에 해 있는 동안의 단식, 평생에 한번 메카 순례 등
(6) 코란과 하디스(마호메트의 언행록)가 삶의 구체적 지침이 됨
2. 정통칼리프시대와 이슬람의 확장: 칼르프란 정치와 종교를 동시에 관장하는 최고 통치자
이슬람제국의 발전기
1. 우마위야조
(1) 중앙집권적 군주제
(2) 초기: 유목생활을 근간으로 신분과 계급갈등 미비
(3) 정착생활 후: 비아랍계 개종자(마왈리)들의 차별대우
2. 이슬람 제국으로서 아바스 왕조
(1) 탈아랍화정책: 비아랍인들의 아랍화 추진, 아랍어 사용과 이스람을 믿으며 스스로 아랍인으로 자칭하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문화적 개념의 아랍인이 보편화됨(오늘날 아랍권이 형성되는 계기 마련)
(2) 문화의 교류기: ①세계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함 ②육해상 실크로드의 개척, 제지술의 도입으로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맞이함
3. 이슬람문화
(1) 이슬람문화의 특징
①융합문화: 오리엔트, 그리스와 로마, 이란 및 인도문화를 수용
②수학: 아라비아 숫자 영(0)의 개념 확립
③천문학: 경도, 위도, 자오선의 길이 측정, 지구구체설 증명
④의학: 예방의학, 외과수술 성행
⑤화학: 승화작용, 증류법 고안, 각종 실험 실시
⑥문학: 아라비안나이트(이슬람의 융합문명을 보여주는 계기)
⑦미술: 아라베스크(장식무늬)가 발달
(2) 이슬람문화의 세계사적 의의: 유럽의 문화발달에 기여, 동서문화 교류에 공헌하여 르네상스와 근대과학의 진보에 결정적 기여
4. 투르크 이슬람시대의 개막과 아바스조의 멸망
(1) 셀주크 투르크의 등장
①‘술탄’ 칭호 사용
②분열되었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이슬람세계 재통일
(2) 십자군 전쟁유발
(3) 아바스제국의 멸망과 투르크인 시대 개막: 이슬람 시대의 실질적이고 공식적인 종말 의미
오스만제국시대
1. 오스만조의 성립과 콘스탄티노플 정복: 콘스탄티노플 점령(1453)으로 유럽의 중세 종식, 근대로 접어들게 됨.
2. 오스만제국의 발전과 문화
(1) 예니체리제도: 근위보병부대로 술탄에게만 책임을 지는 강력한 권한 행사
(2) 밀레트제도: 다양한 이질 집단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도입
(3) 토지와 조세제도
①히라지: 비모슬렘들의 소유토지에서 징수(생산량의 10-20%)
②외시리: 모슬렘들의 토지세: 세율-생산량의 10% 정도
③무카타제도: 국가가 직접 토지를 소유하여 그 수익을 국고에 귀속
(4) 법체제: 이슬람법인 샤리아, 세속법인 카눈
3.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개혁운동
(1) 1699년 카를로비치 조약으로 오스만은 유럽에 대한 영향력 상실
(2) 탄지마트 대개혁
①오스만 제국의 서구화 운동, 신헌법 제정
②종교와 민족을 초월한 생명과 재산보호, 공개재판, 군현제 실시
(3) 크림전쟁(1853-1856): 오스만 영내의 그리스정교도를 보호한다는 명분
4. 이란과 아랍의 근대화 운동
(1) 이란의 사파비왕조: 이란의 전통문화 회복에 기여
(2) 카자르왕조의 근대화
(3) 아라비아의 와하비운동: 코란의 순수한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적 열정에서 출발
(4) 이집트 ‘마호메트 알리’ 총독의 자치 독립
오스만제국의 와해와 서아시아의 독립
(1)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와 청년투르크당
①술탄 압둘 하미드 2세의 보수정치: 전제정치 강화, 친독정책 표방, 범이슬람운동 확산
②청년 투르크당의 근대화 투쟁: 연합진보회를 조직하고 국내외에서 반정활동 강화
(2) 오스만제국의 와해와 서아시아의 독립
①제 1차 세계대전과 오스만제국의 와해: 터키공화국 수립(1923)
②오스만의 멸망과 아랍세계의 분열
③영토분할을 위한 열강들의 음모
9장 고대 지중해세계
그리스의 폴리스 시대
1. 에게해 문명
(1) 크레타 문명
-기원전 3000년경에 이룩한 지중해 최초의 청동기문명.(소아시아계통의 사람들)
-이집트, 소아시아 및 그리스 본토를 잇는 교역로의 중심에 위치하여 번영을 구가하였으나, 그리스 본토에서 성장한 미케네인들에게 멸망.
-동방 오리엔트와 이집트의 문화를 그리스인에게 전해줌으로써 동서양 교류의 가교 역할을 담당.
(2) 미케네 문명
-그리스인 최초의 문명
-독일의 슐리만이 1873년 트로이 성터를 발굴함으로써 호메로스 서사시의 역사성을 입증.
-평화적인 미케네 문명과는 달리 호전적인 기풍을 지닌 전사적 성격이 두드러짐.
2.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1) 폴리스의 형성
-시민들의 공동체 국가. 중심지에 해당하는 도시와 주변부 농촌으로 구성.
-경제 중심지는 농촌이었으며 도시는 유한계층의 소비도시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짐.
(2) 폴리스의 특징: 소규모 국가, 독립국가, 각 폴리스 정체 다양
-시민들 스스로 국정을 책임지고 국가방위를 위해 군대에 복무. 이를 부담할 수 있는 재산과 시간을 갖춘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음. 따라서 혈통과 재산에서 일정한 요건을 갖춘 자유인들만이 시민자격을 가지고 국정에 참여.
-유력 시민의 회의체나 시민전체의 회합인 민회가 국가의 핵심 권력을 장악.
(3) 폴리스 귀족정의 붕괴
-식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이후 지중해 전역에서 교역이 촉진.
-새로이 부를 축적한 부유층은 귀족층의 정치독점에 도전.
3. 스파르타인과 아테네인
(1) 스파르타인의 사회
-정복자인 도리아인의 국가로서 선주민을 예속시켜 강압적으로 지배.
-초기의 귀족제에서 민주제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수의 자유시민이 다수의 피정복민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과두제로 체제를 굳힘.
-호모이오이(homoioi): 자유 시민으로 폴리스의 국정 책임. 국내치안과 대외방비 담당
-페리오이코이(perioikoi): 평야지대에 거주하는 반예속민들. 자치를 행하고 납세와 군사적 의무를 지고 있었지만 참정권은 가지지 못했음.
-헤일로타이(heilotai): 시민들이 전사로서의 공동생활을 할 수 있게끔 물질적인 지원을 담당한 예속민들.
-참주정 과정 겪지 않음. 과두제 확립
(2) 아테네 민주정 발전의 배경
-식민운동이후 활발해진 교역활동과 수공업 생산에 힘입은 농민, 상인, 수공업자들의 등장.
-군사전술상의 변화: 소수의 기병 중심에서 사각 밀집대형인 팔랑크스를 주축으로 하는 중갑보병전술로 변화. 여기에 주로 중농 이상의 농민들, 부유한 상인, 수공업자들이 충원되면서 폴리스 내에서 이들의 발언권과 책임이 증대. 그러나 식민운동으로 얻은 혜택을 받지 못한 농민들은 잇단 자연재해로 인해 노예로 전락하기도 함.
-솔론의 개혁정치: 농민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혈통에 의해 참정권을 제한하는 과거의 방식 대신에 재산의 등급에 따라 참정권을 차등 부여하는 금권정치를 실시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으나 실패.
-페이시스트라토스(BC.546-545)의 참주정 성립: 귀족세력 약화시켜 이후 민주제 발전에 도움을 주고 아테네인의 문화발전에도 기여를 했으나, 제도적인 개혁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권력과 자질에 의거했음. 아테네인들은 참주정 타도하고 도편추방제 제정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적 행정개혁(BC.508): 전통적인 4개의 혈연부족을 10개의 지연부족으로 개편함. 그러나 아직 하층시민은 국가 운용에 참여할 만한 경제적 여력과 여가를 갖지 못했으므로 그의 개혁을 통해 실질적인 혜택을 입은 시민은 중갑보병층.
-페르시아전쟁: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치면서 그리스 내의 강국으로 부상. 동방의 강국 페르시아에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신감으로 폴리스체제에 대한 신뢰는 더욱 공고해짐.
(3) 델로스 동맹과 아테네 민주정치의 급진화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하여 아테네인과 주변국가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맺은 동맹. 그러나 월등한 해군력을 장악하고 있던 아테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동맹은 제국으로 변질.
-동맹금고의 자금이 아테네인들을 위해 이용됨으로써 아테네 최하층시민인 테테스들이 함대의 수병에 지원여 이들까지 포함하는 보다 완성된 민주제가 등장.
-페리클레스와 아테네 민주정의 황금시기
-그러나 펠레폰네소스 전쟁(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동맹 對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는 제국과 해상지배권을 상실.
(4) 아테네민주제의 특징
-폴리스라는 소규모 국가에서 행해진 직접 민주정치
-노예와 아테네 제국: 노예는 시민들이 실질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만한 경제적 역량과 시간적 여유 제공했으며, 델로스 동맹을 통해 아테네 제국으로 성장함을로써 민주주의 완성할 수 있었음.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만이 누리는 자유로, 여성․노예․외국인은 제외.
4. 폴리스의 쇠퇴와 헬레니즘 세계
(1) 폴리스의 쇠퇴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에게 패배하면서 폴리스 세계는 막을 내리게 됨.
(2) 헬레니즘 세계의 대두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제국 원정.
-단순한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 문화의 보급에도 주력.
:그리스인 군인과 정복지 여성들을 결혼시키거나 페르시아인 군인들을 자신의 군대에 편입.
(3) 헬레네즘 문화의 특징
-그리스 문화는 헬레니즘 세계의 공통 기반.
-개인주의화되거나 세계시민의식을 지향.
-동방문화를 정복자의 문화인 그리스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성격이 강했으므로 일반 하층민들에게는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함.
-그리스문화는 폴리스문화에서 탈피하여 지중해의 국제적인 문화로 발전.
고대 로마 세계
1. 로마 공화정의 발전
(1) 로마 공화정의 성립: 귀족정
-로마 공화정에서는 토지귀족들의 회의체인 원로원이 실질적인 의결기관의 역할 담당.
-신분투쟁: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할 기구를 갖지 못한 평민들이 귀족의 정치독점에 대항.
(2) 신분투쟁의 경과
-성산(聖山)사건 이후 귀족들은 평민만의 집회인 트리부스평민회를 조직하고 평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관직인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도록 인정.
-십이표법(十二表法):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 귀족들의 자의적인 법운용에 제동을 검.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두 명의 집정관중 한 명은 평민신분에서 선출하도록 규정.
-호르텐시우스법: 트리부스평민회의 결의가 켄투리아나 원로원의 인준 없이도 법의 효력을 갖게 됨.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실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부유한 평민들임. 따라서 전통적인 혈통귀족에 부유한 평민층이 가세하여 새로운 지배층(신귀족층) 형성.
-신분투쟁의 전개시기는 로마인의 이탈리아반도 통일과정과 거의 일치. 로마인의 이러한 화합과 안정은 로마인이 대외적으로 성공적인 팽창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
(3) 로마의 이탈리아 정책
-이탈리아 반도 통일: 이 과정에서 로마인은 패한 상대를 강제로 예속시키지 않고 로마시민권을 부여하거나 또는 동맹을 맺어 자치권을 인정하는 포용력을 발휘. 이에 대해 동맹국은 로마에 일정 병력과 전쟁비용을 제공하는 의무를 부담.
2. 로마의 지중해 세계 통일
(1)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와 로마가 서부 지중해의 해상권을 두고 벌인 전쟁으로 로마의 승리로 끝남.
-속주: 로마총독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 로마에 세금을 납부. 이와 같은 직접 통치정책은 이후 로마 대외정책의 근간을 형성.
-기원전 2세기 중엽에는 지중해를 총괄적으로 지배하는 대국으로 성장.
(2) 로마 팽창의 경과
-중소농민의 몰락과 라티푼디움의 등장: ①계속되는 전란으로 농지가 황폐화되고 전쟁포로 출신의 노예 노동력이 대거 유입되면서 로마군대의 주축을 이루던 농민들의 사정이 악화.
②대지주들은 빈곤해진 농민들의 토지를 사들여 대토지농장(latifundium)에 노예노동력을 동원하여 수익성 높은 과수재배에 열을 올림.
③토지를 잃고 일자리도 뺏긴 농민들은 로마로 몰려들어 로마정부의 구호를 바라는 사회불안세력으로 전락.
3. 공화정의 붕괴와 제정의 성립
(1)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공화정의 위기: ①자영농민층의 감소는 로마 군사력의 약화와 조세수입 감소를 의미. ②라티푼디움이 과수재배를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이탈리아 내 곡물생산이 전반적으로 감소.③로마의 곡창지대인 시칠리아에서 노예봉기가 일어나면서 곡물부족 위기까지 대두.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자영농민층을 육성하여 전반적인 로마의 안정을 기하자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원로원 세력의 반대로 실패.
(2) 공화정 말기의 내전기
-평민파(populares)와 귀족파(optimates) 사이의 정치투쟁.
(3) 공화정 붕괴의 배경
-마리우스의 병제개혁: 약화된 로마시민군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빈민 중에서 지원군을 모집. 이 방안은 군대가 급료를 지불하는 장군의 사병 집단화되는 결과를 초래.
(4) 군인정치가들의 난립
-빈번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은 사병화된 군대를 기반으로 정치가로 부상하여 공화정의 제도와 전통을 무시.
-1차 삼두정치(60 B.C.) / 2차 삼두정치(43 B.C.) / Actium해전(31 B.C.)
(5) 로마제정의 수립
-원수정(Principatum)의 수립: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로마시민들 가운데 제일 가는 시민일 뿐이라고 강조. 그러나 군대와 재정에 관한 핵심적인 권한을 모두 장악한 사실상의 1인 지배체제.
(6) 로마의 평화(Pax Romana)
-국방과 치안을 안정시키고 시민의 편의를 위한 공공시설 건설. 그러나 이는 로마제국의 강력한 군사력과 물질적 풍요, 뛰어난 행정력에 의해 통제된 평화⇒‘빵과 서커스’ 정책.
4. 로마의 문화
(1) 로마의 실용적인 문화
-대제국 운용에 필요한 실용적이고 외형적인 문화. 법률․언어․건축술․도로시설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김.
(2) 로마법의 발전
(3) 기독교의 세계종교화
5. 로마의 몰락
(1) 콜로노스의 신분화
-혼란의 시대, 군인황제시대 (235-285)
-경제적 쇠퇴: 노예제 생산성의 하락, 콜로누스제, 도시경제의 쇠퇴
-콜로누스의 지위는 토지에 결박된 부자유 소작인으로 중세 서양의 농노와 유사.
(2)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전제군주정의 등장: 동방의 전제군주적 요소를 도입하여 황제의 개인권력을 강화하고 그에 따른 군대와 관료제 유지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제국주민들에 대한 경제적 통제를 강화.
(3) 게르만족의 이동과 서로마제국의 멸망(476)
10장. 서양 중세사회의 형성
1. 중세 서유럽세계의 탄생
-형성 시기: 9세기 (영국: 1066년 노르만의 정복 이후)
-형성 무대: 서부 유럽 (프랑스, 영국, 독일)
-성격: 로마의 몰락과 게르만의 침입 이후 사회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로마의 유산과 게르만적 요소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정치, 군사, 사회, 경제적 제도 및 구조.
2. 주종제(봉건제의 군사적 특성)
-주군(lord)과 봉신(vassal)간의 쌍무적인 계약관계: 정치, 경제, 법률적 보호 對 군사적 봉사와 개인적 충성
(1)주군의 의무: 봉신의 부양과 보호(봉토(fief)를 부여하여 봉신의 생계 보장. 법정에서의 옹호, 봉신들간의 분쟁을 조절)
(2)봉신의 의무
①군사적 봉사: 1인의 봉신이 여러 명의 주군을 섬기는 경우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 봉신은 우선 순위를 정하여 봉사.
②조언: 주군이 중대사를 결정해야 할 경우, 궁정에 출두하여 조언(전쟁, 결혼).
③보조금: 전쟁비용, 주군 아들의 기사 서임, 결혼식, 축성비용, 몸값
④상속세: 봉신의 사망 후 아들이 계승할 때 (1년간 영지수입에 해당하는 액수)
-주종제의 의미: 지배계급 내부에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기준
3. 지방분권제(봉건제의 정치적 특성)
-불입권(immunity): 모든 봉신은 자신의 봉토 안에서 영주(seigneur, seignior) 곧 주인으로서 상급자 특히 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배타적으로 통치하는 불입권 보유.
-중세의 왕은 봉건귀족 중의 제1인자. 곧 자신의 봉토 이외의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지니지 못함.
-이런 의미에서 중세 봉건사회에는 통일된 국가가 존재치 않았으며 통치행위는 봉토마다 분권적으로 이루어졌음
-중세 말의 중앙집권화: 왕은 비록 상징적으로나마 로마 황제와 같은 최고 통치자로서의 성격을 지녔음. 중세 말에 이르러 교황권의 쇠퇴 및 기사층의 몰락을 계기로 봉건 귀족의 권력을 통합해 나감으로써 중앙집권적 민족 국가를 형성해감.
(1) 프랑스: 주종제가 전형적으로 발달하여 봉건귀족의 세력이 강력.
(2) 영국
-프랑스 서부의 노르만족의 대영주였던 노르만공 윌리엄에게 정복되면서 봉건화.
-윌리엄은 프랑스 봉건제를 이식, 정복자로서 영국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충성서약 요구.
-영국의 봉건제는 강력한 왕권과 아울러, 게르만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 인민의 자유와 권리가 비교적 많이 존속. (왕실법정․인민법정․민병대의 존재가 이를 증명)
(3) 독일
-게르만적 요소가 강했지만 영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
-유명무실했던 신성로마제국 하에서 귀족들의 소군주화로 지방분권적 영방 국가가 난립.
(4) 이탈리아
-고대 로마의 전통이 강한 이탈리아에서는 일찌감치 봉건제가 소멸되고 북부의 도시국가, 남부의 노르만 봉건왕국, 중부의 교황령 등으로 통치권이 분산.
(5) 이베리아반도
-8세기이래 이슬람의 지배가 계속.
-중세 말 중앙집권화와 함께 이슬람 세력 축출.
4. 장원제(봉건제의 사회, 경제적 특성)
-장원의 구조: 농경지와 목장, 임야, 황무지 등으로 이루어짐.
-도랑과 밭두둑 이외에 별도의 구분없이 개방. 2포제 혹은 3포제로 윤작.
-농경지인 영주 직영지와 농민 보유지가 장방형의 지조의 형태로 혼재.
-농노: ①땅을 빌어 사는 대가로 영주의 직영지를 경작해주는 부역노동(service)을 제공하는 농민
②로마 말기 콜로누스의 후손이거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몰락한 게르만의 자유민들로서 영주에게 예속되어 거주 이전의 자유 부재.
③인두세, 혼인세, 상속세, 영주가 비치한 각종 시설물(방앗간, 양조장, 제빵소 등)을 강제로 사용하고 수수료를 지불. 영주의 재판권에 종속
④그러나 고대 노예와 달리 독립된 가계를 형성, 원시 게르만 사회에서 비롯한 공동체적인 권리를 보유하여 영주에 맞섬, 중세 말에 빈번했던 농민반란은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력에 기반.
5. 중세 사회의 역동성
(1) 중세 유럽의 경제적 변화
①10세기 경 봉건제가 안정된 서유럽은 성장과 팽창의 경향.
②10세기부터 말이 끄는 철쟁기, 3포제 등 농업기술상의 혁신과 생산성향상으로 인구가 증가.
③11세기에는 대대적인 개간운동이 일어나면서 봉건제가 동유럽지역까지 확산. 이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 과정에서 12, 13세기에는 농노의 부담이 줄어드는 추세가 나타남.
(2) 중세 상업의 발전
①생산성의 향상: 잉여생산 출현 ②교역 발전 ③상업과 도시의 출현
④동방 즉 이슬람 및 비잔틴과의 원거리무역(십자군전쟁이 자극)으로 향료와 비단, 귀금속 등의 동방사치품 유입, 모직물산업의 발달 촉진.
(3) 중세 도시의 출현
①10세기말에서 11세기에 걸쳐 본래의 성곽밖에 상공업자층의 새로운 성곽이 형성되면서 중세도시 및 시민이 출현.
②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의 이탈리아 항구도시와 플랑드르 및 북독일 지역의 도시가 발전하면서 유럽 각지에는 시장의 그물망이 확산.
③중세 도시의 자치확립: 도시공동체(commune)의 투쟁으로 12세기에는 영주의 예속에서 벗어나 경제활동의 자유 및 정치적 자치권을 획득, 이는 농민을 자극해 농노의 신분 해방에 기여.
(4) 길드
①도시경제의 중심은 도시공동체투쟁에 앞장섰던 상인길드와 수공업자길드
②길드의 성원: 중세도시의 수공업자는 도제→직인→마스터로 구성(마스터(주인) 밑에서 도제(견습공)와 직인(일용노동인) 과정을 통해 직업수련을 한 수공업자는 길드의 심사에 합격하면 주인으로 독립해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음)
③길드의 기능: 모든 성원의 생계기반을 유지, 성원 상호간의 평등과 상부상조 존중, 자유경쟁 억제(원료, 작업시간, 생산기술 및 판매가격 등을 통제)
④길드규제는 당시의 협소한 경제규모에 합당했으나 기술혁신을 억제해 중세말 경제적 침체와 사회불안을 초래 내지 심화
6. 중세의 경제적 쇠퇴와 근대로의 이행
(1) 원인-봉건적 생산양식의 한계, 유효수요의 부족, 광업(화폐원료인 귀금속) 생산의 기술적 한계, 흑사병(봉건적 위기)
(2) 양상-농업침체와 도시생산 위축, 영주의 봉건반동(부역강화, 지대상승, 임금하락), 길드규제의 강화 및 폐쇄화
(3) 사회 전반의 위기
-농촌: 농민들의 도주 및 반란(자크리의 반란(1358), 와트 타일러의 난(1381)), 뚜렷한 정치적 목표가 결여된 자연발생적인 봉기로 대부분 쉽게 진압,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 점진적인 변화를 초래.
⇒영주를 압박하여 부역지대가 현물 또는 화폐지대로 대체되는 지대의 금납화 내지 농노제 폐지의 과정이 진행됨.
①서유럽: 농노제가 소멸하고 농민들은 소작농 내지 자영농 혹은 농업노동자로 변신.
②동유럽: 봉건세력이 강하고 농민공동체적 유대가 미약, 재판농노제(Second Serfdom) 수립.
-도시: 도시대중폭동(1378, 피렌체 치옴피의 반란): 임금노동자의 반란, 계급적 갈등 표출.
①서유럽: 길드의 규제에서 자유로운 지방을 중심으로 상업자본과 장인노동이 결합한 선대제 출현,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도시는 자치권을 상실하고 왕권에 복속, 왕과 상공업자의 접근; 중앙집권화에 기여, 자본주의적 발전 촉진
②동유럽: 도시의 쇠퇴, 봉건귀족의 지배강화, 자본주의 발전 지연.
(4) 중앙집권적 민족국가의 탄생: 봉건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의 균형상태 위에 성립한 과도기적 국가(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교회세력 쇠퇴, 장원제의 기사전술의 쇠퇴로 세속봉건영주들의 정치적 영향력 약화됨에 따라 국왕의 권한 강화. 따라서 주종제가 약화되고 국왕이 중앙집권적 지배자로 부각됨. 국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상비군, 관료제 운영하고 재정 충당을 위해 도시 상공업자들과 협력.
11장 유럽 국가체제의 수립
1. 지리적 팽창
(1)지리적 팽창의 동기
①경제적 요인
-십자군운동과 함께 촉진된 동방과의 교역을 통해 향료, 비단, 귀금속 등 동방 산물과 동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
-오스만투르크의 출현 (1453년 비잔틴제국의 멸망)으로 지중해 무역이 쇠퇴.
②정치적 요인
-새로이 등장한 국민국가⇒특히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재정복운동(이슬람 세력 축출) 및 중앙집권화의 추진력을 발휘, 대서양 연안의 입지 조건을 활용하여 지중해 무역에서의 소외로부터 탈피 시도, 국왕의 막대한 군사력과 자금 지원.
③이슬람과 중국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학설들과 발전된 과학기술 유입
양상
-포르투갈: 아프리카, 아시아, 브라질로 진출
①아시아: 방대한 인구, 토착문화와 정치제도를 보유한 아시아지역 식민에는 실패, 상업기지만 건설함.
②브라질: 식민제국 건설(총독의 지배), 선교사업(예수회)
-에스파냐: 북남미, 필리핀으로 진출하여 총독령 설치, 언어와 종교를 전파, 서양의 영주제 도입. 원주민 노동에 입각하여 사탕수수․밀․커피 등을 재배
-이후 유럽 각국의 식민지경쟁 강화(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자본주의 실패(지리상 발견의 혜택은 극히 일부에게만 돌아감, 국내산업기반을 육성치 못함)
2. 유럽의 경제적 변화
(1)가격혁명: 지리적 팽창을 통해 새로운 천연자원의 유입, 특히 귀금속이 광범위하게 유입되면서 16세기의 약 100여 년 동안 물가가 2-3배 인상 ⇒가격혁명
(2)상업혁명: 상품의 양과 종류가 증가
-향료, 귀금속, 비단, 면, 옥수수, 감자, 설탕, 커피, 차, 담배, 코코아, 키니네.
-경제활동의 방향 및 무대의 변화: 종전의 동부유럽, 도시국가, 지중해 → 서부유럽, 국민국가, 대서양
-사회적 변화: 빈부 격차의 심화(부르주아의 등장, 귀족의 몰락과 농민반란, 도시 자치 상실), 국민적 의식의 출현과 국제적 경쟁의 출현
3. 중상주의 및 국가주의의 출현
(1)중상주의
①절대주의의 경제적 이데올로기: 국가권력과 경제활동의 결탁 가능성
②자유방임에 입각한 고전주의 경제학이 출현하기 전까지 중요한 경제이론이었음
③국부의 증진을 위한 경제적 행위 특히 상업과 산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
④방법: 지금의 확보(중금주의), 수출의 확대(무역차액주의), 공업의 육성(중공주의), 왕립 매뉴팩츄어(작업장)의 설립, 전쟁을 통해 식민지 경쟁 및 무역거점의 확보
⑤전쟁, 관료기구, 독점 등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인해 자유로운 경제발전에 지장을 초래
4. 절대주의체제의 수립
(1) 절대주의체제: 17세기 초 유럽에서 나타난 강력한 군주에 의해서 통치되는 체제
-절대주의체제의 주권 개념은 군주권력을 의미함. 따라서 군주권이 행사되는 세력범위, 즉 영토가 명확히 규정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제도가 확립되었을 뿐 아니라 엄격한 의무에 종속되는 신민이라는 구성원의 개념이 나타나게 됨(주권, 영토, 국민-국가 개념 출현)
-절대주의체제의 제도
①상비군: 군사력의 중앙집권화, 귀족의 존재 유명무실화(전쟁은 군주주권의 대내외적 최고성의 확립하는 장치)
②관료제: 통치권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영구적 관료기구
③관직매매(부르주아의 관료화 및 귀족화, 왕실에 대한 재정지원)
④전국적 규모의 징세-재정의 중앙집권화(면세특권-귀족, 자치도시)
⑤성문법의 확립, 사법권의 통합(보편적인 기준의 정립)
⑥통합된 시장의 출현, 부르주아 세력의 중대
(2) 서구의 절대주의국가
-14~15세기 사회경제적 위기 경험. 16세기 절대주의국가의 출현
-프랑스, 영국, 스페인: 전국가적 차원의 왕권 강화, 귀족세력 쇠퇴, 부르주아의 성장(신분제의회, 봉신제를 종식시킴)
(3)절대주의체제의 성격의 규명 (Marx, Engels)
-봉건귀족과 도시부르주아의 균형 위에 군림하는 절대왕권
-부르주아의 발언권 강화: 관료제는 부르주아의 지배도구가 되었고, 봉건귀족은 통치권 및 군사권을 박탈당함.
-절대주의는 근본적으로 봉건적. 시민혁명에 이르러서야 봉건제가 완전히 종식됨.
-전반적으로 절대주의체제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국왕은 자신의 세력유지 및 확장을 위해 때로는 부르주아를, 때로는 귀족을 옹호.→봉건적 요소와 부르주아적 요소가 혼재
⇒사회구조는 봉건적 신분제의 틀을 유지. 단지 그 안에서 인적인 이동 발생.
(프랑스:부르주아의 귀족화, 영국:귀족의 부르주아화)
(4) 동구의 절대주의국가: 사회 변화의 산물이라기보다, 정치․군사적 산물.
-당시 서구의 군사적 위협을 느꼈던 동구의 국가들은 서구 팽창의 요인을 서구의 절대주의 정치체제의 확립으로 파악하고 절대주의 국가구조의 설립 시도.
-절대주의 확립의 성공여부는 이후 각국의 세력을 반영.
①프로이센: 가장 성공한 국가
②폴란드: 봉건귀족 세력의 강세로 절대주의체제 수립에 실패→이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분할됨.
-국내 계층구조
①부르주아 세력의 약세: 자본주의 미발달 (전반적으로 16세기 유럽의 경제적 팽창에서 소외, 후진적 농업지역, 장원제 및 농노제 해체가 미비)
②사회․경제적 주도권은 여전히 토지 귀족이 장악
③군주는 귀족에 의존해 주권 확립, 타협 불가피
:군주는 절대 권력의 기반(상비군, 관료, 징세권)을 부여받음.
⇒대신에 귀족의 경제적 기반은 전혀 손상 받지 않았음(재판농노제).
⇒귀족의 정치․군사적 지배(관료 및 군인으로 충원됨)
-성격 규명: 동구의 절대주의는 귀족관료 중심적인 절대주의.
①사회계층의 이동 거의 불가능: 국왕-토지귀족-부르주아-농노(부르주아는 귀족에 종속, 관직매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음, 열악한 농민의 지위(농노신분))
②전반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산업화의 지연, 중산층의 약체)
③절대주의 체제가 오래 지속(러시아의 로마노프왕조, 프로이센의 호엔쫄레른왕조)
14장 시민혁명 (프랑스 혁명)
1. 프랑스혁명의 발발
-프랑스혁명의 의의: 근대사회 성립과정의 하나의 분수령,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키려던 반봉건적이고 반귀족적 부르주아 혁명.
-프랑스혁명의 원인
(1)절대왕정하 구제도의 모순: 신분제
①제 1신분: 성직자-프랑스 인구 2,700만 중에서 10만명, 그러나 교회의 영향력 막강, 교육, 구빈사업 독점, 언론 통제 및 출판 겸열을 통제하면서 국민들의 정신 생활을 지배, 토지의 10% 정도가 교회의 소유. 성직자들은 귀족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함.
②제 2신분: 귀족-40만명 정도, 토지의 20% 보유, 면세 특권과 명예특권을 누림.
③제 3신분: 평민-대부호에서 걸인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을 포함하는 프랑스 국민 전체를 지칭, 국가의 재정적 부담을 전담.
⇒문제는 특권신분이 사회적 특권을 향유하는 가운데 제 3신분에 속한 시민계급이 경제 적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성장했다는 점, 여기에 신분제를 근간으로 하는 구체제의 사회모순과 절대왕정의 행정적 무능력이 변혁의 계기를 제공.
(2) 재정위기: 엘리트 집단의 분열과 프랑스혁명의 직접적 계기
①루이 16세는 재정위기를 타개하고자 1789년 5월 150여 년 간 열리지 않았던 3부회를 소집, 그러나 3부회에서 귀족신분과 제 3신분, 특히 부르주아가 서로 반목.
②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은 6월17일에 국민의회 선포로 사회 엘리트 집단의 와해 및 분열이 시작, 사회 하층인 민중이 움직일 여지가 커짐.
2. 프랑스혁명의 경과
(1) 민중의 개입-1788년 흉작으로 1789년 봄 농촌과 도시에서 식량소요가 일어나자 루이 16세는 베르사이유에 군대를 집결해서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려하자 파리 민중은 7월 14일 압제와 전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프랑스혁명에 폭력이 개입하기 시작(농촌에서도 '대공포'속에서 무장 농민들이 영주들의 성을 공격하고 봉건문서들을 소각)
(2) 국민의회
①봉건제의 폐지선언(1789년 8월 4~5일)-형식적인 명예특권의 폐지. 실질적인 봉건적 공납은 되사기, 즉 유상폐지로 결정.
②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8월 26일)-全文 17개조. 자유, 평등, 국민주권 등 혁명의 원리 및 이념의 천명, 앙시앙레짐(구제도)의 사망문서. 민중의 지지 및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
③91년 헌법(1791년 9월 3일)-권력분립에 입각한 단원제의 입헌군주제 채택, 시민을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 구분하고 능동적 시민에게만 참정권 부여, 재산자격에 의한 유산계급의 지배체제 수립.
(3) 입법의회 소집(91년 10월)과 국내외 반혁명 움직임에 대항한 혁명전쟁의 시작(92년 4월)-파리 민중의 왕궁습격 및 방화(8월 10일), 1792년 9월 왕권을 정지하고 국민공회를 소집하여 프랑스 제1공화정 수립.(9월 20일), 루이 16세 처형(93년 1월 21일)
(4) 자코뱅의 독재시작(92년 6월 2일)과 93년 헌법(6월 24일)
①국민공회는 자코뱅당(중산층 부르주아지 및 소생산자층)과 지롱드당(상층 부르주아지)이 대립했으나, 1793년 5월 31일 민중세력이 국민공회를 습격하자 6월 2일 지롱드당 지도자를 숙청하고 자코뱅 독재를 확립
②93년 헌법: 보통선거권, 노동권과 생존권 등을 규정한 민주적 헌법, 그러나 평화시까지 그 실시가 보류됨,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안위원회는 공포정치를 실시.
(5) 테르미도르의 반동(94년 7월)-온건파 중심,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내고 공포정치를 종식.
(6) 총재정부(95년 10월~ 99년 11월)-유산계급에 입각하여 수립된 정부, 전쟁에 따른 경제난 좌․우파의 압력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속에 군대에 의존.
(7) 나폴레옹 체제의 등장(99년 11월)-혁명군지휘자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통해 무능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정부 수립, 유럽을 혁명의 이념으로 제패한 나폴레옹은 혁명의 계승자라기보다 군사적 정복자, 혁명의 성과를 수용하여 프랑스 시민계급 및 재산권, 행정제도를 확립하여 프랑스 사회의 제도적 틀을 마련(법전 편찬, 군사적 승리로 프랑스인들에게 위대한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줌)
3. 혁명지도자들
(1) 계급적 구성과 혁명이념
-혁명 지도자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시민계급출신으로 상공인․금융가․법률가․교사․의사․관리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
-계몽사상, 특히 루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음.
-혁명과정에서 제시된 그들의 이념은 자유, 평등, 우애로 요약(자유롭고 평등한, 그리고 형제애와 같은 우애로써 결합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함)
(2) 혁명지도부의 대립과 반발: 지롱드당과 자코뱅당
-지롱드: 부유한 시민들을 기반으로 자유주의경제체제, 입헌군주제와 지방분권제를 지향.
-자코뱅: 중산층 및 소생산자층을 기반으로 민중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 통제경제체제, 공화정 및 중앙집권체제를 지향.
(3) 로베스피에르-지방 법률가 출신인 로베스피에르는 가난하고 불행하며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혁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독립적인 소생산자들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함. 그러나 그의 이상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는 실현 불가능함. 민중의 요구를 직접 대변하려 했던 과격파와 당통의 온건파를 계속 제거했고, 이 과정에서 상퀼로트와 멀어지고 우파의 지지도 상실⇒자코뱅의 몰락.
4.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
-혁명과 전쟁에 지친 프랑스인들은 평화와 안정을 희구했고, 자코뱅의 몰락 이후 프랑스혁명은 반동의 국면을 걷게 되면서 궁극적으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라는 군사적인 독재자를 출현시켰음. 그러나 나폴레옹은 야심가였고 프랑스 혁명의 적자라기보다는 서자.
5. 프랑스혁명에 대한 해석
(1)성격: 반봉건적, 반귀족적 부르주아 혁명
(2)이념: 자유․평등․우애
(3)영향: 19세기 유럽 사상 전반의 이념적 기반 제시(민족주의, 자유주의)
6. 프랑스 혁명의 현재적 의의
-자유, 평등, 우애로 요약되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은 당시에는 충분히 실현되지 못했으나 그 이후 인류의 역사에 어떻게 하면 자유를 상실하지 않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를 남겼음.
15장 산업혁명과 산업자본주의의 확립
1. 산업혁명의 내용 및 배경
(1) 배경-①인구의 지속적인 증가, 농업생산성의 혁신, 상업과 금융제도의 발전
②16세기 이후 경제적 팽창으로 꾸준히 축적되어온 부, 절대주의 시대 중상주의정책을 통한 자본가계급의 성장, 해외시장의 확대와 국내시장의 통합 등을 통한 대중적 수요의 증진
(2)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된 이유
①1, 2차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농촌의 공동체적 성격이 파괴되고 계층분화가 일어났음.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면서 풍부한 산업예비군 형성.
②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통해 국내의 정치, 사회가 안정되었고 무엇보다 넓은 해외시장을 확보하고 있어 유효수요와 구매력의 창출이 유리.
③석탄, 철강 등의 풍부한 자원과 근대적인 금융제도가 경제활동 자극.
④기업가들은 기계발명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혁신 및 생산방법상의 혁신을 추구.
(3) 결과-①생산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
②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감소.
③인간의 생활이 기계의 움직임 및 작업의 리듬에 따라 규제를 받는 비인간화가 촉진됨. 특히 당시의 노동조건 열악, 노동자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훨씬 열악해짐.
④경제적 변화 이외에도 인간 생활의 총체적 변화를 가져온 거대한 역사적 과정.
(4)의의-산업혁명은 전대미문의 비약적인 생산 증가로 인간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약속했고, 산업자본주의 내지 산업사회 도래를 가능하게 함.
(5) 산업자본주의 혹은 산업사회의 특징
①중상주의 경제이론은 세상의 부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한 반면, 고전경제학자들은 부를 무한히 증대시킬 수 있다고 생각.
②산업자본주의의 확립은 부의 양을 증대시키기 위해 생산을 조직함.
③산업자본주의에서는 유통의 개념보다는 생산의 개념이 강조되고 영리 추구 강조.
④고용된 노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게 됨. 특히 분업은 생산속도를 높여 부의 양을 증대시키는 중요한 방법으로 등장.
(6) 영국의 산업혁명 초기단계에서 나타난 문제점
①마르크스의 「자본론」에는 공장에 나가야 하는 엄마가 우는 아기에게 아편을 먹여 울음을 그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음.
②생활수준 논쟁에서 제시된 비관론: 산업화 초기 노동자 가족의 생활형편 더 악화.
③자본주의 사회의 체제 내적인 모순: 자본주의 사회는 소수의 자본가와 대다수 노동자들간의 갈등이 항상 존재.
(7)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성격
①사회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은 귀족들에게 대항하는 한편, 그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노동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제시.
②자유주의-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로 구분.
③부르주아는 경제활동의 자유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증진하려한 반면 만인에게 시민적인 권리를 부여해주는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인색한 반응을 보임.
④경제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계급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보편적 이념으로서의 측면도 지님.
2. 각국의 산업화
(1) 프랑스의 산업화-①부르주아혁명이 일어났던 국가였으나, 역설적으로 프랑스의 산업화는 완만하게 진행됨.
②사치품 내지 고급품 생산의 전통이 있었던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분야들이 장인의 기에에 의존했기 때문에 대규모 기업화에 큰 성공 거두지 못함.
③프랑스혁명으로 소농체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영국에서처럼 광범위한 산업예비군 배출하지 못함.
④프랑스 산업화는 7월 왕정기에 본격화되었고, 1850년대에 국민적 기반에 입각한 경제체제와 더불어 경제발전이 가속화 됨.
(2) 독일과 러시아의 산업화
①절대주의체제와 봉건집단의 사회적 우위 속에 산업화가 진행.
②부르주아 세력 미약.
③봉건적 사회구조로 말미암아 산업화가 이루어질 가능성 희박.
④다라서 국가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 경험.
-독일:①19세기 초 농노제 폐지로 농민계층 희생, 그러나 융커층이 자본주의 세력으로 변모.
②프로이센이 주도한 관세동맹으로 정치적 통일에 앞서 경제적 통일 달성.
③1871년 통일 이후 독일은 후발 국가로서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국가의 강력한 지도와 기술혁신으로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하여 19세기 말에는 영국을 능가.
④독일의 산업화는 독점을 강화시키고 권위주의적인 부르주아를 형성.
⑤이러한 국내 분열을 치유하고자 국가는 제국주의 정책에 관심을 돌리게 됨.
-러시아:①러시아는 독일보다 훨씬 늦은 19세기 중엽에 농노제를 폐지했으나, 성공거두지 못했고 광범위한 노동력, 강력한 자본가 계층의 형성도 실패.
②독일에 비해 러시아의 지배층은 무능하고 무기력했고 새로운 기술의 도입, 변화에 무관심.
③1890년대 들어와 유럽 선진산업국들과 치열한 제국주의 경쟁 속에 산업화의 필요를 절감하고 외국의 차관을 들여와 무리한 산업화를 추진.
(3) 미국의 산업화
①1861-5년 남북전쟁 이후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에 힘입어 산업화의 기틀 마련.
②1, 2차 세계대전을 자기영토에서 치르지 않음으로써 유럽의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됨. 양차대전 이후 경제부문의 패권국가로 등장.
3. 산업화가 초래한 문제점
(1)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어 심각한 사회갈등을 초래할 뿐 아니라, 국제적 위기감 조성. (2) 공해 문제로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면서 환경문제 야기.
4. 산업혁명의 현재적 의의
(1) 산업화를 거쳐 발전한 자본주의체제는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특히 산업기술문명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의 차이, 혹은 선진국과 저개발국가를 막론하고 인간의 생활과 사고를 지배하는 공통의 배경을 이룸.
(2) 산업혁명은 끝났다기보다는 여전히 진행중이라 할 수 있음.
16장 시민사회의 전개
1. 1815년 이후의 현실추세 및 이념동향
(1) 보수주의-①계몽사상에 대한 반발의 성격이 강함 ②전통과 역사의 중시: 공동체적인 견제와 권위의 필요성 느낌 ③에드먼드 버크: 「프랑스혁명에 대한 고찰」에서 인간의 파괴적인 본능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함을 지적.
(2) 자유주의-①프랑스 혁명에서 선포된 개인의 가치,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개념에 입각하여 주장된 이념 ②자유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이루었던 것: 부르주아(보수화 하는 경향)
(3) 낭만주의-①상상력과 감정의 교양 중시 ②인간의 감정, 상상력을 중시함 ③민족의 과거나 중세문화에 관심을 가짐 ④영향: 민족주의적 경향을 초래, 서구의 합리주의적인 기반을 붕괴, 19세기 유럽의 문화생활을 지배.
(4) 민족주의
①기원: 프랑스혁명
②독일의 민족주의: 독일의 고유한 문화정신 확인/ 정치적 통합성
③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비교
-민족주의: 개인을 민족에 종속시키는 다소 폐쇄적이고 비합리적인 성향을 지님.
-자유주의: 모든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보편, 합리적인 원리.
(5) 사회주의
①초기사회주의: 설득과 계몽 및 형제애적 유대에 입각한 공동체를 통하여 자본주의화에 동반했던 사회적 불행을 불식시키려는 시도
②마르크스주의: 과학적 사회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초기사회주의를 역사발전의 과학적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관념체제라고 비판함/ 영향: 1차 인터내셔널 조직과 독일의 사회민주당 결성에 영향을 끼침.
2. 1815년 이후의 현실추세: 혁명과 반혁명
(1) 빈 체제
①빈 체제와 유럽협조체제
-유럽열강들이 빈에서 유럽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
-빈 회의를 지배한 정신은 보수반동의 정신으로 프랑스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려는 것
-유럽협조체제: 보수반동체제를 유지하고 강요하는 국제기구로 4국동맹
②빈 체제에 대한 저항
-독일의 학생운동(부르셴샤프트 운동), 스페인 지역의 혁명, 이탈리아의 카르보나리 반란, 러시아 젊은 장교들의 반란(12월당의 반란): 빈 체제의 존속을 위협
-그리스 독립전쟁: 유럽의 자유주의자와 지식인들의 호응으로 성공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독립선언
-미국의 먼로 독트린
(2) 7월 혁명과 2월 혁명
①7월 혁명
-1830년 7월 혁명으로 인하여 프랑스는 입헌군주제의 7월 왕정 수립
-영향: 자유주의와 함께 민족주의가 전 유럽적으로 크게 고무되어 벨기에는 독립하고, 스위스에서는 자유주의 체제 수립
②2월 혁명
-7월 왕정의 소극적, 보수적인 정치에 반발하여 부르주아와 노동자 및 사회주의의 세력이 결집하여 1848년 2월에 혁명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제 2공화국이 수립.
-영향: 빈 체제 와해, 각 국의 자유주의 및 민족운동 확산
3. 각 국의 발전
(1) 영국: 점진적인 개혁
①1830년대 말부터 종교적 자유확립 ②1832년 7월 선거법 개정 ③정당정치에 입각한 의회정치 ④1840년대 후반 자유방임주의의 원칙 확립
(2) 프랑스: 정치적 동요와 공화정 확립
①1847-1848년의 경기침체 ②1848년 2월의 선거권 확대 요구 ③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2월 혁명 초래, 제 2공화정 탄생 ④루이 나폴레옹은 1852년 12월 국민투표로 황제가 되어 제 2제정 수립 ⑤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몰락, 제 3공화정 수립.
(3) 이탈리아 통일: 1866년 베니스 수복, 1870년 로마를 병합하여 통일 완성.
(4) 독일 통일: 1871년 프로이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의 전쟁을 이겨 독일제국 수립
4. 19세기 문화
(1)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발전
①자연과학과 기술의 발달-19세기 말 뉴턴에 의해 기초 확립
-멘델의 유전 법칙, 다윈의 진화론, 영국에서 제너의 종두법 발견
-독일의 마이어와 헬름홀츠는 에너지 불멸의 법칙 정립
-영국의 패러데이는 전기학의 법칙 정립, 퀴리부부의 라듐 발견
②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발전
-콩트의 실증주의 -벤담의 공리주의 -애덤 스미스의 자의적 고전 경제학
(2) 19세기 문학과 예술
①낭만주의: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 존중/ 독일의 괴테, 쉴러, 하이네. 노발리스, 프랑스의 위고, 영국의 워즈워스
②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인간의 사회와 현실 직시/ 19세기 후반은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③19세기 미술과 음악-전기: 낭만파가 주류/ 중기: 사실파 주류, 밀레의 목가적 전원생활/ 후반: 세잔, 마네, 모네. 르느와르 등의 인상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