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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상대에게 믿음을 주어야 물건이 판매된다.
어려운 과정에서도 신뢰성을 쌓을 무렵
삼척에서 학원강사하던 여조카는 미용학원이 전망이없다
한다. 1996여년 때에 미용대학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심지어 고등학교까지 생겨났다. 학원생이 점차 줄었다.
미용에는 유통,교육,미용샾 세가지가 주류다.
조카는 삼척에 세가지를 하며 독립을 하게된다.
평소 "나는 이모부같은 사람 아니면 독신으로 살꺼야"
영원히 있을것 같았으나 머리가 크면 독립하게 된다.
독립하기전에 나와 판박이며 내보다 덩치가 더크다.
시아버지는 삼척김일동시장님과 친구이며 시의장지내신
분이시다. 노는 아들과 같이 우리집에 봉고신형을 가지고
먼저 와서 일을 배우며 있을 무렵 나는 다리가 부러지고
병원신세를 지며 어느정도 나아서 절룩거릴때
삼척여고생들이 예비고사를 치고 본고사준비중에
컴퓨터,미용등 교육의뢰가 와서 교육을 하루에 4시간을
같은 여고생에게 하는데 3시간은 조카가 메이크업,두발,피부미용에 관하여 강의를 하고 1시간은 내가 인성교육 4일간을 하고난뒤에 진학 안하는 여고생들이 대거로 몰려온것 같았다.
학원을 그만두고 삼척에 미용실을 오픈 준비를 한다기에
학원을 넘겨주었다. 조카사위도 나와서 삼척에 미용유통사업을 시작했었다. 병원에 간호하던 부인은 경영이 엉망이었으리라. 종업원급여가 배로나갔는데다가 거래처 물꼬를 틀게된
집안이 나타났기에 당황했으리라.때마침 경상도로 이사간 큰동서도 대성을 했었다. 커오는 젊은이들에게는 피도눈물도
없을때가 더러 있다. 2년병원신세진 후 휴우증이 있어도 영업을 부득히 해야할 무렵 우리집에 기존에 있던 종업원이 동해에 독립을 주장했다. 같은교회다녔고 부모님이 취직 좀
시켜달라고 애걸하던 직원이었었다. 컸다. 자연의 원리다.
사방이 사면초가다. 게다가 부인이 서울병원에서
대수술을 한다.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앉게되었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게 현실이다. 부정하고싶어도 현실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최고의 메이커 거래처에서 자기들 물건
단독으로 팔지않으면 거래를 중지한다는 제안서를 내 밀었다.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있을때 고통이 심할 무렵
예비군대장과 예비군담당44년생과 같이 병문안와서
"자네가 뛰어 내린다고 자랑하고 다녔잖은가?"
아퍼 누워있는 사람에게 자잘못을 가리러 온 사람같았다.
잘못을 뒤집어 씌우려 온 사람들이었다해야 맞다.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기어나오는 목소리로 "대장님! 대장님이 저보고 뛰어내리라고 하셨죠?" 대답이 없었다.
어설퍼하고 당황하는 눈치에 말을 이었다. "그럼 훌련광경 사진은 누가 찍습니까? 하니 DH씨를 줘라 하며 그 사람도 사진 잘찍는다며 먼저 선임이름을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으응~ 그랬지"
이때 나는 다쳐 서러워도 위로해 줄 사람 아무도 없는
외톨이인것을 알았다. 집에서는 부도설이 돌고 내외 전부 수술에 들어갈 형편에 내부는 곪아 터질 지경이었다.
(내 다리가 조금 붙어서 휠체어를 타고 밖에 나갈수만 있다면
총무부장 당신을 3개월 안에 정리하리라)
3개월후 쌍우회 환우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는
신고식을 한다하며 멕시칸,이서방,페리카나,처가집 양념통닭등 소주,흑맥주까지 분수없이 사는척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먹지 않았다. 술잔이 오고간 뒤에 "내가 다리 부러지기 전에 바로 이병원에서 1년 전에 다리를 다쳐 뼈와 살이
떠서 점점 더 아파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점점 더 그대로 두면
골다공증이 되어 다리를 절단하게 될 우려가 있어서 다리가
나으려면 절단해서 아교가 나와야지만이 치료가 되니 살길은 교통사고를 내서 나자마자 차에 있는 망치로 다리를 부러트려
절단사고가 난 것처럼 해서 치료를 하려니 그 방법 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교통사고를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회사에서 훌련있다고 뛰어내리라니 이런 챤스가 어디있는가?
처음에는 빼다가 나중에는 뛰어 내린다고 했지 뛰어내리니까
아닌게아니라 바로 공상 난 거기가 똑 뿌러진거야. 거짓말아니야. 내가 왜 거짓말 하겠나. 거짓말하면 다 들통나는데.
이병원에서 치료했으니 이병원에 조사하면 다 나오지.
바로 1년 전이야"
사꾸라를 역이용하는 방법이다.
(3개월 안에 나를 지시한 놈은 정리가 된다.) 나는 이들중에
누가 사꾸라인지도 모른다. 알필요도 없다.
그런데 소식은 1개월 후에 대외부장겸 총무부장인지
골재장에 대표로 나가야 한다는 소식이다. 단 사표를 놓고
가야한다. 사표를 놓고 갔다. 같은 류의 부장들은 1억의 자금을 들이댈 정도로 서로 신뢰감이 두터웠었다.
칼자루는 내가 들은 것이 아니다. 그런 능력도 안된다.
잘 운영하려는 회사가 다양한 방법을 써서 발전을 가하리라
했지만 개인이 영업부주의인지 얼마안되어 경영을 접었다.
5년후 정도인가 이번엔 상무를 입으로 불어 보았다.
(내 능력에 이건 힘들꺼야) 그런데 바로 봄소식이 들려왔었다.
내가 친것은 절대 아니라고 다시 강조한다.
회사에서 필요한 곳으로 발령을 냈으나 본인이 생각키로 좌천이라 생각키에 사표수리 한 것으로 본다.
내 생전에 태어나서 이렇게 사람을 미워해 보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가? 우연이라 치자.
다리뼈를 부착키위해 무릎 밑에 8cm가량 칼로 찢고 쇠를 박고 뺄때 무릎을 그냥 꾸겨 닫은지를 몰랐었다. 다리를 절을때
내가 다쳐 다리를 저는줄 알았으나
MB정부 들어서고 녹색환경 자전거도로를 만들으려고
우리집 샾 앞에 도로를 파뎅기어 각이 진 돌을 바닥에 까라놓고 보이지도 않는 줄을 쳐 놓았으나 배달을 빨리하려고
뛰어 차에 실으려다가 줄이 발에 걸린줄도 몰랐는데 줄이 팽팽해 지고 공중 떨어지며 모설기에 무릎이 파열되어
가로로 찢어졌었다. 그때 묵중16기 박동기가 병원에 입원해서
서울쪽에 면회 갈시 붕대를 감고 갔으나 엘레베이터에서 통증이 시작되었다.
동해 오자마자 수술했는데 걸어도 그전처럼 다리를 절지
않는 것이다. 꾸겨서 꿰멘무릎을 제자리에 갖다 놓은 것이다.
이제는 절지 않는다. 몇년이나 절룩거렸으나 이제는 괜찮다.
무릎을 보면 세로로 찢어놓은 자리와 가로로 무릎이 깨어져 찢어진 자리가 선명히 나있다.
자전거 도로개설하지 않았다면 나는 절름발이로
일생을 보내야 한다. 우연인가? 우연이라하자.
그대로 두면 골다공증인데 다리가 부러져야만 아교가 나온다.
아교가 나오게해야지만 치료가 되는데 부러져야만하는기회다
1년전에 미리 다치게 할때 다친다는 느낌이 와서 난간대
쇠를 가만히 밟고 걷는데 쇠가 쑥들어가며 넘어지며
다친것도 우연인가?
우연이라치자.
만약 등을 보이며 일하는 동료가 없었다면 옆구리까지 다친다. 온몸의 상처가 일어날텐데 동료있는곳 그곳에서
다쳐야지만 동료등 때문에 다른곳이 멀쩡하고 다리 다친 부위 중에서도 부러진 그부위만 이상했고 내가 공상을 안내었다면
내 혀로도 상대를 넘어지게 할수도 없다.우연인가?
이번 마지막 이얘기는 우연으로 정리하기 힘든다.
동해는 묵호와북평을 합하였는데
중심시가지가 어디로 정하느냐가 장사하는 사람들은
신경이 곤두 서있다. 내가 기존에 묵호나 북평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어느 천년에) 하고 서로 자기 자리를 지킨다.
중심지인 천곡동 땅이 처음에는 허허벌판이라서 값이 싸더니
점점 비싸지기 시작했었다. 점점비싸도 기존 메이커
사업가들은 자리를 옮기려니 비싼 돈을 주어야 사고
또 새로 시설해야지 장사가 그많큼 되어야 투자한 가치가
있는데 옆집도 옮기지 않았는데 그대로 서로를 의지하며
옮기지 말자고 약속도 했지만 먼저 옮겨가는 추세로
점점 바뀌고 있을 당시다. 메이커 회사들도 자리를 서서히
천곡동 쪽 아니면 허가를 내어 주지 않을 그 시절 조금
전 인것 같다. 묵호에만 장사를 하면 되겠나시퍼 천곡동에
가게 하나를 얻자고 제안한다. 부인은 쾌히 승락하고
우리는 대학로에 가게를 하나 얻는다. 2000만원에
월 80만원에 복합건물이라서 관리비를 낸다. 건물 총무는
주차비조로 돈을 거두어 들인다. 지하 주차장에 우리고객이나
나도 차 한번 들어간적이 없다. 2년동안 계약하고 있는동안
월100만원씩 적자를 봤었다. 2년계약이 다 되니 주인이
나타나서 건물을 팔겠다는 것이다. 안산다는 의견을 내 놓자마자 가게를 팔겠다며 작자가 가게를 비워달라는 것이다.
1억4천짜리가 2년후 1억 6천에 팔리게 되었다.
가게를 두개 운영했는데 다시 묵호로 1개만 운영하려니
2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눈에 들어 온다. 어떻하던지
천곡동에 가게를 더하다가 합하던지 해야하는 결론이 나왔다
퇴직금을 많이 썼어도 1억 2천이 남아있었다.
가게를 한칸 아예 사버릴 계획에 착수했었다.
천곡동 대학로 약국있는 자리가 건물은 5층 다 올라갔지만
1층자리가 매매가 되지 않고 있어서 물어보니 평당 1750만원을 요구했었다. 그때 당시는 20평을 사면 30평값을 줘야 산다. 공유면적화장실등 모두 계산에 넣었다.가격만 알고
대도로변에 지하 시설하고 1층으로 건물이 오르려는 건물이 있었다. 평당 1550만원을 요구하였으니 대학로자리가
더 번화가였었다. 실평수가 35평이니 적어도 6억이라는 돈이
있어야 덤빌수 있었다. 때마침 삼척에 둘째손위동서가 명예퇴직을 해서 퇴직금을 가지고 있어서 건물을 동업해서 사기로
약속해서 계약을 한다니 계약하라고 하여 계약하려니
건물주는 둘이 동업하여 짓기에 상대에게 물어보고 내일계약하자고 제안한다. 다음날 계약했다. 훗날 알았는데 옆가게를
산 친구는 건물질 당시 건물주에게 "형님들 건물지으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시지요? 제가 2억을 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가 사려고할때 제일좋은 자리를 저에게 파십시요"
하고 계약을 했는데 하루는 와서 코너자리는 1550만원이고
그다음 옆칸은 1100만원이다. 어떻게 할꺼냐?질문에
"그럼 옆가게를 하지요 뭐 하고 옆가게를 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1400만원씩 치였다고 그럴줄알았으면
코너쪽을 할건데" 하며 XXX하고 다니며 싸움이 대판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때 공유면적이 법이 바뀌며 2평정도아니면 3평정도만 인정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동서부부가 밤에 천곡동에 나왔다가 건물 바닥을 보며
우리부부에게 정신이 났다며 한칸에 6억을 주고 계약한 우리 부부를 향해 정신이 났다며 공동으로 산다는 계약을 취소했다
하늘이 털컥 무너졌다. 계약금 6000만원을 건넸으니 세금 6000만원주면 먹을 떼거리도 없다. 주저 앉았다.
그때당시 건물3층에 5억씩 하여서 건물 3층을 계약한줄 알았는데 한칸에 5,6억이면 돌았다,제정신이 아니다라고 간주.
심지어 후배가 찾아와 "김사장님, 건물 샀다는데 어디요? 예에~? 이거 한칸에 6억이나요? 아이쿠 두야"하며 손으로 이마를 치며 뒤로 나가떨어지는 모션을 취해 우리부부는 끙끙
앓았다. 이왕 부도난것 부도 난들 뭐가 그리 걱정이냐?
태무심하고 무덤덤했었다.
건물주는 계약문의가 자주 들어오는지 게약을 해지하려고 했었다. 해지해도 6000만원을 배로 주면 해지가 된다.
그러나 6000만원을 더주고 해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장사에 감각이 무디고 돈을 구해 6000을 더 주어도
그 자리가 그많큼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다른 자가 사기위해 돈을 더 얹어주어도 건물주는 덕이없다.
이미지만 나빠지니 팔은것 더 받을수있다한들 강건너갔다고
체념하고있는 느낌을 읽고있었다.그나저나 중도금과 잔금?
어디서 구해대는가? 건물이 올라가고 날짜는 다가오고
동서도 돌아서고 이제 희망이 절벽이라도 하루하루를
적들과 전쟁을 치루는 어느날 세를 들겠다는 사람들이
억대되는 돈을 들고 나타났다. 통채로 얻는다는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코너기에 반을 갈랐다.
가게는 두칸으로 둔갑했다.뒤가 길지 않았지만 가게는 두칸이다. 가게는 최고의요지자리다. 우리는 세칸을 만들어 단 1평이라도 우리가게를 하려고 덤벼들었으나 3칸은 무리였다.
자기들이 가게를 빛내 준다며 우리처럼 잡상인은 오지 못하게 하여 가게를 세 얻으러 천곡동에 다녔는데 자리가 없었다.
2가게에서 받은 돈으로 중도금을 치루고 남은 돈은 은행에서
대부해 주어 돈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현재 최고의 위치다.
몇년전에는 에레베이타가 있는 5층건물까지 인수했다.
년봉 억대가 될 정도로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었다.
믿을수가 없을 정도로 둔갑했다.
천곡동 가게를 어려운 과정을 걸쳐 쉽게 인수하면서
그냥 풀려 나가는 것 같았다.
그 건물을 사게될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제일 좋은 자리이며
지금에 와서는 그 건물이 내 차례에 오지도않고 살수도없다.
꼭 그건물을 고집하게된것도 부부둘이 마음이 맞어야산다.
어느 하나가 마음이 틀려도 사는것을 포기하게 된다.
사게된 동기는
부인은 세를 살아보니 대도로변을 끼어야하고 나는 이땅의
한평이라도 사야하는 이유는 과거로 또 돌아가야한다.
아버지가 살아계실때다.
북평우체국 옆에 마을금고가 들어서 있다. 바로 그땅은
밭이였고 단지를 모아두고 팔던 옹구점자리다.
그 땅을 지날때 아버지께서는 "저기 저 땅이 원래 할아버지 땅이다. 할아버지가 팔았다" 할아버지가 읍장자리를 내 놓고
친일파든 친미파든 누가 정치를 하던 나라만 찾으면 되지 하며 손님들을 만나 술한잔씩 하던 자리같았다.
할아버지 친구에게 땅을 팔았고 다음 아들이 물려 받았고
그다음 큰 아들은 성공하셨고 둘째 아들이 물려 받았으나
새마을 금고들어서며 400평을 8억에 팔었다.
5층도 사고 건물짓는 사업에 덤비었는데 너무 고가라
성큼 덤비는 사람없었으나 동서 퇴직금 믿고 덤볐지 처음부터
동업해서 살 의사가 없었더라면 나는 엄두도 못냈었다.
할아버지 땅을 손주가 한평이라도 찾아보겠다는 신념이
부인마음과 같았다는 것이다. 우연인가?
천곡동에 세를 얻으러 다니다가 중앙초등학교 근처에 수족관에 들려 흥정하는데 2000만원에 권리금을 1700만원을 달라고하신다. 깍아보려고 애를 써도 10원도 안된다는 것은 자기도
주고 들러왔다는 것이다. 수족관이라도 하나 달라고하니
수족관도 40만원이나 치이기에 안된다는 것이다.
하도 갑갑해서 나와서 로타리쪽으로 걸었다.
수족관과 로타리 중간지점에 이르니 쇼윈도우에 점포세줌이라는 종이를 써붙이는 집 호박 장수탕 가게가 난것이다.
이때 우리는 모토로라 300만원짜리를 서로 한대씩 갖고있었다. 부인에게 빨리 나오라 빈 가게있다고 하여 부인은 계약직전에 나오게 된다. 건물주는 2층에 살고계시어 2층에가보니
딸이 10명에 아들1명의 노부부였었다."가게 난것 어떻게 알았소?" "써 붙였던데요" "써붙였다와" "예" "써붙인기다. 그 가게 나면 꼭 연락달라고 숱한 사람들이 전화오고 했는데 주인될사람이 따로있네" 주인은 우리가 마음에 들으신 모양이다.
마음에 안들면 가게 올 사람이 따로있다면 우리는 포기다.
주인은 권리금을 인정안한다하니 그 집에서는 나가려고 작년부터 나간다했는데 다음 주인이 우리를 만나러와도 권리금을 인정안한다하니 다 포기하고 계약을 안했는데 내일이
이사가는 날인데 이제 써 붙여 놓으니 그걸보고 가게가 난걸 알고 왔다는 것이며 운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싼곳이없다. 가게도없지만 2000만원에 월40만원이다.
이 가게를 계약한지가 1999년이나 2000년도인데 이 둘중에
어느해인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때 여름에
봉고차를 가게에 대고 물건을 빼러 왔는데 긴넌닝구 반소매를 입은 할머니 한분이 애기를 업고 나에게로 오며 말을건넨다.
"이 집 할머니 왔소?" "할머니 어디 갔는데요?"
"아, 이 집 영감이 서울 딸네집에 놀러가서 이 집 할멈이
이층 집에서 목깡하는데 전화가 와서 영감이겠지하고 안받으니 또 전화가 와서 받으러 나오다가 문찌방에 쭐꺽 미끄러지면서 허리를 다쳐 디스크로 병원에 입원했잖소?" "할머니 이리 좀 들어와봐요"물한잔 마시며 애기를 옆의자에 내려놓는
할머니에게 물어 적었다. '어느병원입니까?" 이름과 병실호수를 물었다. 할머니를 같이 가자고하니 면회를 갔다 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맹랑하게 보였다. "할머니 원래 집이 어디예요" "나는 쇄운 아이요" "그럼 우리 할아버지를 알겠네요"
"할아버지 이름이 뭔데" "김 원자 대자 김원대요" "아이"
깜짝놀라시며 "김원대 아저씨 손주나?" "예" "원대아저씨 손주가 맞나?" "예에" "아버지가 몇째요?" "첫째요" "거기는 몇째요" "저는 셋째닙다" "아아~ 원대 아저씨 손주구나" 하며 혼자서 중얼거리시며 원대아저씨와의 비밀을 처음으로 얘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한테 신세져서 좋은 얘기를 들려주는가하고 귀를 귀울렸었다. "소녀시절 14살때 북평에
있는 공민중학교를 다녔는데 학교를 가려면 광희 고등학교있는데서 효가리를 걸쳐나안리를 지나 철도를 넘어 송정으로해서 북평학교로 가는데 나안리에서 원대아저씨를 만나서
[아저씨,우리 뭐 하나줘요]하면 [너희들 뭐 하나줄까?]
하고 홍실 감 하나씩 손에 쥐어 주었는데 내가 27살에 시집을 갔는데 왜 하필이면 태몽꿈에 원대 아저씨가 나타났고
우리는 소녀 학생시절로 돌아가고 꿈에 학교갔다오다가
원대아저씨를 만났는데 [아저씨 우리 뭐 하나줘요?] 하니
[너희들 뭐 하나줄까?] 하더니 쪽삽을 가져와서 흙을
떠서 손에 담아주며 [집에가서 심으라] 하길래 손에 꼭쥐고
집에 가다가 우물가인지 샘터에 와서 고만 잠이 들어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깨어 (아이구 이걸 심으라했는데)하며 손을
펴보니 쑤들수들한게 참외가 하나....." 나는 말을 짤랐다.
"할머니! 할머니 자식 하나 꺾었지요" "맞애" "할머니 아들입니까? 딸입니까?" "딸이잖나" "할머니 딸 4살때 죽었지요?"
"맞애" "할머니딸 XX생 맞지요?" "맞애" "할머니 딸 X띠 맞지요?" "맞애" "할머니 딸 추운 겨울에 죽었지요?" "맞에. 바람이 몹시 불았아" "할머니" 나는 손을 양손으로 만지며 무릎부터 꿇었다. "할머니, 뭐라고 사과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니 딸이 내대신에 죽었습니다. 우리 엄마가 원래 죽을 운명인데 우리 엄마를 살리고 내가 죽게 되었는데 내가 죽을때
되어 내가 살려달라하여 살아났는데 내대신 죽은 딸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할머니 딸이 제 대신 죽었습니다. 이걸
뭐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니!"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는 옆에 애기를 더듬으며 업기 시작하더니 일어서서 "원대 손주가 우리부부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4,50년이나 된 옛날 까마득한 얘기를 우리 부부만 알고있는 사실을 원대손주가,원대손주가 어떻게,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있는가? 아무에게도 얘기를 안한 비밀을 원대 손주가
어떻게 알고있는가 말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갔다. 종업원도 놀라는 눈치였다. 나도 놀랐다.
(세상에 이런일이) (세상에 이런일이는 아무도 아니다.아아~)
어느날인가 천곡동에 물건 가지러 가게들렸더니 그 옆건물 틈에서 두 노부부가 얼굴만 내밀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겁을 먹고계시었다. 나는 편안한 인상을 주려고 애를 썼고 죄스러운 마음에 그 노부부를 대했었다.
이 집에 세를 들어야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되고 나 역시
모든 죄를 짊어진 마음이 변함이 없어졌고 옛날 일이지만
꼭 기억하고 살어야 한다. 수족관에 세들어도 알수없는 일이된다. 꼭 이집에 세를 들어야 한다. 먼저 세들은 사람도 권리금 받으려고 1년을 버티고 있다가 권리금을 받지 말고
나한테 세를 건네 주어야 한다. 집주인도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있다한들 나에게 세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목욕중에
전화오고 미끌어져야한다.우리는 세를 안 얻으면 안되는가?
2명의 젊은이와의 전쟁에 늙은이는 좀 쳐 진다. 이들과의
전쟁에 이기려면 장소도 그때는 중요했었다.
지금 갑자기 부자가 된것도 이 집에 세를 얻으러 돌아서 왔다면 동업자도 모션을 취했고 집을 나누어 세를 주고 어떤 마음이 요동되어도 천곡동에 세를 얻으러 이집에 와야지만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부자도 하늘에서 만들어 주신것이다. 감사한 마음이 넘쳐 흐른다. 그런데 표현이 적어보인다.
항상 감사한 마음에 있다. 항상 벅차오르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반드시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16기를 사랑하고 계신다.
16기 동창회를 빌려서 글을 쓰게한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동창회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하나님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