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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소녀가 갑자기 말을 못하고 오른손이 저리는 증세와 더불어 안면신경마비까지 나타났다. 이 중 하나만 있어도 부모들이 까무러칠 텐데 세 가지가 동시에 나타났으니 본인은 물론이고 부모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는 차원이 아니라 뇌 쪽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니 말이다. 놀란 부모는 소녀를 병원에 데리고 갔고, 의사가 진찰을 해보니 오른팔과 손가락의 움직임에 이상이 있었다. 오른손을 다스리는 건 왼쪽 뇌, CT를 찍어본 결과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뇌출혈이 관찰됐다. 이 나이 때 뇌출혈이 생겼다면 뇌혈관에 기형이 있다가 그게 터졌을 확률이 높은데, 검사결과 그건 아니었다. 의사들은 뇌수술을 권했지만, 부모 입장에선 신경학적 증상도 시나브로 없어졌고 의사가 진단도 제대로 못 내리는데 덜컥 수술을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환자는 항 간질약을 먹고 퇴원을 한다.
폐디스토마가 뇌를 침범한 경우의 MRI 사진. 화면 오른쪽(왼쪽 뇌)의 동그란 것이 환자의 증상을 일으킨 원인이었다. <출처 : Koh EJ, et al., “The Return of an Old Worm”, J Korean Med Sci 2012; 27: 1428-1432>
하지만 두 달 뒤 환자는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 응급실을 찾는다. 원래 증상에다 오른쪽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일종의 부분발작까지 더해졌고, MRI를 찍어보니 이전보다 출혈부위가 커져 있었다. 의사는 생각했다. 혹시 암이 아닐까? 암 덩어리에서 계속 출혈이 있어서 이런 사단이 난 게 아닐까? 의사는 재차 수술을 권했고, 부모들은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뇌를 열어보니 뇌 왼쪽에 무슨 주머니 같은 게 보여서 그걸 떼어냈는데, 그러자마자 환자의 증상은 드라마틱하게 좋아졌다. 이제 궁금한 건 그 주머니의 정체, 병리소견에서 관찰된 건 놀랍게도 기생충의 알이었다. 의뢰를 받은 기생충학 교수는 그게 폐디스토마의 알이라고 확인해 줬다. 기생충이, 그것도 폐에 살아야 할 폐디스토마가 뇌로 가서 증상을 일으키다니, 놀란 의료진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뇌 폐디스토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폐디스토마는 이름처럼 폐를 침범해 병을 일으키는 기생충이며, 폐흡충이라고도 한다. 민물에 사는 가재나 게가 인체 감염원으로, 가재즙이나 민물게장을 먹을 때 기생충의 유충이 사람에게 들어와 폐에 병변을 일으킨다. 폐조직에서 주머니를 만들고 사는데, 거기서 알도 낳고 염증도 원 없이 일으키다 보면 주머니 안이 거의 피투성이가 된다. 낳은 알들을 어떻게든 외계로 내보고 싶은 폐디스토마는 사는 곳을 청소도 할 겸 우리 몸더러 알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비켜 달라던 일본이 생각날 텐데, 조선과 달리 우리 몸은 주머니에 버티고 앉은 폐디스토마가 두려운 나머지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기관지를 통해 내보낼 수 있도록 연결통로를 만들어 준다. 폐디스토마에 걸렸을 때 기침과 가래가 끓고, 가래를 뱉으면 피가 섞여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소위 ‘쇠녹물색 객담’으로, 이런 게 있으면 결핵이거나 폐암을 우선적으로 의심하지만, 아주 드물게 폐디스토마로 인해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이 객담 안에는 기생충의 알이 들어 있으므로, 폐디스토마의 진단은 대변검사가 아닌, 객담검사를 통해 기생충의 알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연결통로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지라 폐디스토마에 걸려도 객담에서 알이 안 나올 확률이 높으므로 혈청검사에서 폐디스토마에 대한 항체를 발견하는 게 도움이 된다.
폐디스토마의 생활사. 민물에 사는 가재나 게가 인체 감염원으로, 가재즙이나 민물게장을 먹을 때 기생충의 유충이 사람에게 들어와 폐에 병변을 일으킨다.
위에서 말한 환자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폐디스토마 진단이 나오자 의료진은 환자에게 최근에 게나 가재를 먹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환자는 몇 달 전 집 근처 식당에서 민물게장을 두 차례 먹은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 게장 중 한 마리에 기생충이 잔뜩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폐가 아니라 뇌일까? 여기엔 사연이 있다.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간 폐디스토마가 자신의 주요 서식처인 폐까지 가려면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 폐디스토마의 유충은 십이지장에서 껍질을 벗은 뒤 장벽을 뚫고 밖으로 나간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건 어두컴컴한 복강, 몇몇은 길을 잃기도 하지만 절반 이상의 폐디스토마는 오랜 세월 각인된 습성을 따라 폐를 향해 간다. 간을 지나고, 배와 가슴을 갈라놓고 있는 거대한 횡격막을 뚫고 나면, 그리고 폐를 감싸고 있는 막을 돌파하면 드디어 폐가 나온다.폐에 도달한 폐디스토마의 유충은 비로소 안도하며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서 어른으로 자란 뒤 객담을 통해 알을 내보내며 ‘자손 번식’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다. 이 과정에서 폐디스토마는 수많은 장벽을 돌파하는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궁금해 하던 학자들에 의해 폐디스토마가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를 다량 분비한다는 게 밝혀지기도 했다.
폐디스토마가 폐를 침범한 CT와 X-레이 사진. 화면 오른쪽(폐 왼쪽)에 뚫린 구멍은 폐흡충으로 인해 기관지가 확장된 모습이다(A). 화면 왼쪽에 비해 오른쪽(폐 왼쪽)에 하얀 부분이 더 많은데, 공기 대신 물이 차서 이렇게 보인다. <출처 : Koh EJ, et al., “The Return of an Old Worm”, J Korean Med Sci 2012; 27: 1428-1432>
하지만 모든 유충이 다 이렇게 되는 건 아니다. 험난한 산을 올라갈 때 등산을 포기하고 산 밑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폐디스토마의 유충 중에도 폐로 가는 대신 복강 근처에 철퍼덕 주저앉아 거기서 사는 애들이 있다. 등산을 갈 때 길을 잘못 들어 “이 산이 아니구나!”라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듯이, 폐디스토마 중에도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가는 애들이 있기 마련이다. 척추 주위의 조직을 따라 한없이 위로 올라가다 보면 결국 도달하는 곳은 뇌, 그래서 폐디스토마 중에는 뇌로 가서 병을 일으키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등산 대신 막걸리를 택하면 건강에 해롭고, 원래 가야 할 대신 다른 산을 올라가면 119의 구조를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길을 잘못 든 폐디스토마도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폐에 안착한 폐디스토마가 5-6년, 길게는 20년까지 천수를 누리다 죽는 반면 폐에 가지 못한 폐디스토마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 거기서 낳은 알들을 밖으로 내보내지도 못한 채. 안타까운 건 이 경우 숙주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는 거다. 폐디스토마가 폐에 있어도 증상이 제법 심하지만, 간을 비롯해서 다른 장기에 가면 훨씬 더 증상이 심하니 말이다. 일례로 어릴 적 가재를 잡아먹고 자란 한 남자 분은 그 뒤 20년간 간질발작에 시달렸는데, 나중에 뇌 사진을 찍어보니 뇌에 뭔가가 있었고, 수술 결과 폐디스토마의 알이 나왔다. 폐디스토마는 오래 못살고 죽었지만, 거기 칼슘이 쌓여 뇌를 압박한 게 간질의 원인이었다.
의료진은 아까 그 10세 소녀에게 가재나 게를 생으로 먹은 적이 있냐고 물었다. 소녀는 집 근처 식당에서 민물게장을 두 차례 먹은 적이 있다고 했다. 환자는 디스토마의 특효약인 프라지콴텔을 먹고 퇴원했고, 그 뒤 어떤 증상도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단다. 결과는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그 소녀는 앞으로 민물게장만큼은 다시는 먹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민물게장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폐디스토마가 있을까?
폐디스토마가 처음 발견된 건 야생에서 사로잡혀 동물원에 있다 죽은 벵갈 호랑이의 폐에서였다. 즉 폐디스토마는 사람 이외의 동물에서도 얼마든지 어른이 되어 알을 낳을 수 있는데, 야생 고양이나 늑대 등의 야생 동물이 폐디스토마의 보유숙주다. 이 동물들은 사람처럼 카악 하고 객담을 뱉는 능력이 없고 가래가 끓으면 그냥 삼켜 버려, 폐디스토마의 알이 대변으로 배출된다. 그 알에서 나온 유충은 1중간숙주인 다슬기로 들어가 자라고, 거기서 나온 유충이 가재나 게로 가서 사람 등의 종숙주를 기다린다. 가재나 게도 웬만큼 물이 맑지 않으면 살지 못하지만, 다슬기는 환경오염에 더 취약하다. 1960년대만 해도 웬만한 계곡에는 폐디스토마를 가진 가재나 게가 득실거렸겠지만, 지금은 연구에 쓸 폐디스토마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렇긴 해도 폐디스토마에 걸린 환자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많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어딘가에는 폐디스토마에 걸린 게가 기어 다니고 있으리라.
참게. 바다에서 태어나 민물에서 성장하는 게이다. 폐디스토마의 중간숙주이기도 하다. <사진: 박수현>
2009년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게에서는 폐디스토마의 유충이 나오지 않았고 다만 전남 해남 지역의 게 중 1/3 가량에서 유충이 나왔는데, 마리당 평균이 30마리 가량이란다. 하지만 폐디스토마 환자들에게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민물게장을 먹고 걸렸다고 하니, 가재보다는 게에 대한 조사 결과가 더 중요할 것 같다. 올해 기생충학회에 보고된 내용에 의하면 중앙대 팀은 민물게장을 파는 식당에서 게장을 사다가 폐디스토마가 있는지 여부를 조사했단다. 전남과 경남, 경기도 등의 식당이 대상이었는데, 섬진강 유역에서 구한 게장 19마리 중 한 마리에서 폐디스토마의 유충이 발견됐다 (5.3%). 조사한 마리 수가 그리 많지 않아 비율은 크게 의미가 없는데, 그렇긴 해도 폐디스토마에 걸린 게가 있다는 건 확인이 됐다. 우리가 주로 먹는 건 민물게장, 게를 간장으로 처리해도 폐디스토마는 살아 있을까가 두 번째 관심사가 되겠다. 친절하게도 중앙대 팀은 여기에 대한 실험까지 했다. 실험결과 간장에 오래 담글수록 폐디스토마의 유충이 죽어가는 걸 관찰했는데, 통상적인 방법으로 담글 경우 보름 정도는 되어야 유충이 완전히 죽었다. 민물게장이 밥도둑이라 불릴 만큼 맛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안전을 위해서 이 정도는 물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이 게장, 보름 이상 담근 건가요?”
1960년대까지도 폐디스토마에 걸린 가재와 게가 많았으니, 환경오염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던 조선시대는 그야말로 폐디스토마의 천국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무덤에서는 자연적으로 생긴 미라가 가끔 발견되는데, 이런 미라를 조사해보면 폐디스토마의 감염률이 굉장히 높다. 그 중 2009년 하동에서 발견된 400년 된 미라는 폐디스토마의 집대성이라 할만 했다. 30세가량이었던 그 여인은 폐는 물론이고 장과 간에서도 폐디스토마의 알이 발견됐는데, 기생충학에 몸담은 지 20년이 됐지만 그렇게 많은 폐디스토마 알을 본 건 처음이었다. 짐작하건대 여인은 폐디스토마로 인해 시종일관 기침. 가래에 시달렸을 테고, 객담을 뱉지도 못할 만큼 상태가 안 좋았으리라. 객담을 뱉지 못했으니 폐디스토마의 알들이 장에서 발견됐고, 폐로 못간 폐디스토마 중 일부는 여인의 간을 침범해 간염을 일으켰을 것이다.
폐디스토마의 알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발견된 미라에서 발견된 폐디스토마 알
그녀는 왜 그렇게 많은 폐디스토마에 감염됐을까? 몸에서 나온 태아의 뼈로 보건대 그녀는 임신 중이었고, 양반집 며느리답게 온갖 보약을 먹었을 것이다. 그 보약 중에는 가재즙이 있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목구멍이 붓고 아프며 손과 발이 차지고 기가 막혀서 통하지 못하면 곧 죽게 된다. 그럴 때 석해(가재)를 짓찧어 즙을 내어 먹인다.”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가재즙의 효능에 대한 설명이 있던 것으로 보아 가재즙이 그 당시 보약으로 쓰였던 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먹은 가재엔 폐디스토마의 유충이 들어 있었고, 몸에 좋으라고 먹었던 가재즙은 그녀가 삼십세의 한창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원인이 됐을 것이다. 회충이나 장디스토마처럼 장을 침범하는 기생충은 대부분 별다른 증상을 일으키지 않지만, 폐디스토마나 스파르가눔처럼 조직을 찾아 들어가는 기생충은 필연적으로 병을 일으켜 사람을 고통받게 만든다. 더 이상 보약으로 가재즙을 먹는 사람은 없겠지만, 민물게장을 먹을 땐 폐디스토마 유충이 있는지 조심하자. 보름 이상 담갔는지 물어보는 것만 잊지 않으면, 맛있는 게장을 안심하고 즐길 수 있다. 보름간 담글 여건이 안 된다면 하루 정도 냉동시키는 것도 기생충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