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금성관(錦城館)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인 나주 금성관(錦城館)은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세웠다. 일제시대에는 내부를 고쳐 청사로 사용했던 것을 1976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성관은 객사(客舍)로 사용하던 공간이다. 객사(客舍)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했던 곳으로 관사(館舍) 또는 객관(客館) 이라고도 한다. 객사(客舍)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던 곳이요, 중앙의 사신이 지방에 오면 묵던 곳이었다. 금성관은 나주목 관아의 중심으로, 왕명으로 내려오는 벼슬아치를 묵게 하는 나주목의 숙소 공간이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객사의 정청(政廳)에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에 예를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서, 관부의 위엄을 세우는 곳이었다.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는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八作)지붕이다. 지붕 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장식하여 만든 공포(拱包)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이며,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위엄이 느껴진다. 내부는 모두 대청으로 꾸몄으며, 앞면 중앙의 3칸과 앙쪽 협간은 각각 4짝과 2짝의 빗살문을 달았다. 기둥은 곧고 둥근 모양으로 세웠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望華樓)도 함께 지었으나 중간에 소실되어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1592년 의병장 김천일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 명성황후의 빈소를 마련하고 남도의 항일정신을 고조시킨 유서 깊은 문화 유산이다.
나주는 백제 때의 이름이 발라군이다. 물론 백제 이전에는 불미지국이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통일신라 때는 금성군(금산군)이었고, 견훤이 후백제 건국 이후 903년에 지금의 이름인 나주가 되어 982년(성종 2년)에 나주목이 되었다가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나주관찰부(16개군 관할)가 설치되고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누어서 전라남도청이 광주에 설치 될 때까지 천여 년간 남도의 중심 도시였다.
금성관 주변은 고려 때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은 전라도관찰사 이행(1403.1.~1404.5. 재임)이 벽오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또는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갖은 피해를 당하여 훼손된 바 많았으나 금성관 앞쪽에 있는 나주군청사를 2005년 철거하고 외삼문인 망화루(望華樓)를 복원하였으며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월대와 박석 내삼문, 각종 부속건물 터가 확인되어 나주시에서는 금성관의 동익헌(문관숙소)과 서익헌(무관숙소) 복원 등 금성관 주변의 복원 정비사업을 추진하였다.
금성관과는 직접 관계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주의 역사를 되새기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914년 고려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던 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다가 나주 금성산 남쪽에 상서로운 오색 구름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말을 타고 그곳으로 달려 갔다. 열일곱 살쯤 보이는 예쁜 낭자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청하자, 낭자는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서 건내주었다. 버드나무 잎을 띄운 까닭을 왕건이 물었다.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 하였나이다."
이에 감동한 태조는 그의 아버지를 찾아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락을 받았다. 이 여인이 바로 고려 초대 왕 국모 장화왕후 오(吳)씨다. 장화왕후 오씨가 낳은 아들이 제2대 왕 혜종 무이고, 그래서 나주 오씨는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략으로 고려 제8대 왕 현종이 나주로 피난하여 나주가 임시 수도가 되기도 했다.
금성관 현판<김현 7세 때 쓴 글씨>
김현(金晛)은 광산 김씨 25세손이다. 1606년 나주(羅州)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명원(明遠). 호는 낭옹(浪翁)이다. 기개가 높고 도량이 넓으며 재능이 남달리 뛰어나 나이 겨우 6세에 필명을 세상에 떨쳐 1612년(광해군 4년) 7세의 나이로 금성관(錦城館)의 현판을 썼다. 162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만년에 주거를 장성군 삼서면 소룡리로 옮겨 산수와 화훼의 즐거움 속에서 시문 창작에 정진하였으니 그 후손이 지금도 250여호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시문집으로 낭옹유고(浪翁遺稿)가 전한다. 이의 번역판 “浪翁 金晛의 文學과 思想” (도서출판 간행) 이 있다.
☆ 김현(金晛)의 시를 감상해 보자.
① 臨水(임수)
시 / 낭옹(浪翁) 金睍(김현)
臨水如仙骨 (임수여선골)
還家卽世人 (환가즉세인)
緱山何處在 (구산하처재)
虛負碧桃春 (허부벽도춘)
靑天倒澗水 (청천도간수)
白日浴澄淵 (백일욕징연)
府視三淸路 (부시삼청로)
誰爲上界仙 (수위상계선)
물가에 다다르니 신선 같건만
집으로 돌아가면 속인이 되네.
구산은 어디에 있나
복숭아꽃 핀 봄날을 그냥 보냈네.
푸른 하늘 시내에 내리비치고
흰 해는 맑은 못에서 미역감는다.
삼청으로 가는 길 굽어보니
그 누가 상계의 신선 되었나.
② 惜別(석별)
시 / 낭옹(浪翁) 金睍(김현)
芳草蓮天春日晴 (방초연천춘일청)
暫停盃酒計前程 (잠정배주계전정)
離鄕更遇還鄕客 (이향갱우환양객)
送別應知焟別情 (송별응지석별정)
고운 풀 봄날이 맑으니
잠시 머문 술잔에 앞길 생각하네.
고향 떠난 환향객 다시 만나니
송별할 적 석별의 정을 응당 알겠네.
나주목 고지도
금성관 전경
망화루(정문)
내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