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엄청 변했지만 약 50여 년전만해도 선박의 시설이나 장비들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후졌다. 가끔 TV에서 보는 최근 선박들의 선교(船橋 : Bridge)를 보면 조그만 어선들부터 거대 선박들까지 모두가 전자식으로 컴퓨터와 인공위성이 연결, 현재의 위치는 물론 항내에서 접안(接岸) 혹은 이안(離岸)할 때도 완벽하게 상황을 눈으로 그것도 실제보다 모니터의 영상을 봐가면서 선장이나 도선사(導船士)가 조선(操船)을 할 수가 있다.
당시에 비하면 ‘누워 떡 먹기’ 이다. 특히 대양을 항해할 때 늘 알고 있어야 할 본선(本船)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경·위도로 표시된다. 그야말로 눈부신 비약(飛躍)이었다.
1980년도 초까지만 해도 본선의 해도상(海圖上) 위치는 하루에 두 번씩 일출몰 시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별과 수평선과의 각도를 초(初) 단위로 항해사들이 측정하여 테이블을 찾아가며 정확한 위치를 계산해야 했던 선박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천측(天測)’이라 했는데, 해적선(海賊船) 시절에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도 항해사를 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이 천측 때문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원들의 일상생활을 위한 시설들 가운데 식품을 보관하는 냉장·냉동시설도 그랬다. 육류(肉類)는 우선 얼음덩이 같이 냉동시키면 그런대로 오래 보관할 수 있었지만 야채나 과일 등 신선식품 보관에는 애로가 많았다. 또 식자재(食資材) 자체가 그랬다. 특히 이것은 민족에 따라, 지역에 따라, 계절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식품으로서 야채류가 없어서는 안 된다. 특히 야채를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의 식성(食性)이지만 오래 보관할 수 없다는 핸디캡이 있다. 급하면 육류는 바다생선이라도 건져 올리면 되지만 야채나 과일 등은 한계가 명백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소금, 된장, 간장 등에 절인 것, 통조림으로 만든 것들로 대체한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싱싱한 야채와 과일은 소고기 등심보다 귀하고 입맛을 당기게 한다.
1950년대에 국내 대학실습선에서 야채가 떨어졌다가 우연히 들린 섬에서 생들께잎을 따서 그 자리에서 씹어 먹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지금이야 생으로 먹는 깻잎은 보양식이기도 하지만 당시는 먹지 않았던 때였다.
실습선으로 남태평양을 향해 항해 중 어느 날, 평소 친하기로 소문이난 기관과(機關科) 실습생 두 사람이 후갑판에서 싸움이 터졌다. 이유는 된장통에서 막 꺼낸 짜디짠 깻잎 한 장 때문이었다. ‘내 꺼다, 아니다’ 하다가 붙은 것이다. 야채의 귀중함을 엿보게 하는 사례들이다.
Vitamin C가 결핍되면 괴혈병에 걸려 사망에 이른다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워온 것이다. 이 비타민 C의 발견도 영국 해군의 전함(戰艦)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18세기 영국 해군(海軍) 군의관 James Lind가 영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이를 장기(長期) 항해하는 군함에 승선한 많은 해군병사들이 원인불명으로 사망하는 것에서 연구하여 찾아낸 것이다.
폭풍우 때문에 우연히 임시 정박한 곳에서 레몬과 오랜지를 사 먹인 병사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 1749년부터 직접 해군병사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과 연구결과, 오랜지나 레몬 섭취자는 사망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1753년에 그 연구결과를 정부에 제출했으나 영국정부에서는 무시했다. 내노라 하는 의사 박사들을 두고 일개 군의관의 연구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는 의미였으리라. 그후 50년 뒤에도 계속 린드 군위관과 동승한 선박의 병사들은 사망자가 없었음을 보고 정부에서 재검토하기 시작하여 1802년에 법제화하여 어디를 가던 1주일 이상 항해하는 선박에는 필수적으로 오랜지나 레몬을 선적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비타민 C였다. 그만큼 야채나 과일이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식품들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1. 배추김치
야채는 민족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배추이다.
「옛날 중국 제(齊)나라가 들어서면서 순무와 구분되어 숭(菘)이라는 야채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배추의 기원(起源)이다.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푸르러 소나무의 절개가 있다 하여 소나무풀이란 뜻인 숭(菘)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다. 옛날 문헌을 취합해 보면 지금 배추처럼 크지도 살찌지도 또 알이 배기지도 않은, 시금치처럼 생긴 야채였다. 겨울을 살아낸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오늘날의 얼갈이배추가 바로 숭이었을 확률이 높다. 이 숭의 줄기가 희다고 하여 바이채(白菜)로 불리었으며 이 바이채가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배추란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다. 조선조 중엽의 농서(農書)에 숭이나 배추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고 후기(後期) 농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미루어 우리 선조들이 무를 주로 먹었지 배추를 가꾸어 먹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역사가 깊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그나마도 가을과 겨울에만 먹는 동계 야채였다.」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배추가 어떻게 우리 한국인들이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을까? 배추김치! 잘 삭은 젓갈로 얼버무린 그 얼큰 맵싸한 맛은 한국사람에게는 꿈에서도 잊지 못할, 잊혀지지도 않는 고유한 음식이다. 외국인들에 따라서는 즉석에서 맛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처음에는 너무 맵다는 등 먹지 않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한 입 두 입 먹다 보면 먹을수록 당긴다는 데 나도 그들 자신들도 놀랐다. 마치 중독성이 있는 것처럼….
그런데 이 김치를 담는 주재료인 배추, 그것도 큼직한 통배추는 돈을 줘도 구하지 못하는 곳이 많았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이 그랬다. 더운 지방에서는 생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기(日記)엔 1977년 3월 20일로 적혀 있다. 아프리카 토고(Togo)의 로메(Lome)항에서의 일이다. 장기 항해를 앞두고 부족한 식자재를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배추가 제1순위이다. 아침부터 일과시간에 큰일 없는 기관장, 2등기관사, 조리장 3명을 데리고 부식구입차 바로 시장(市場)으로 나갔다. 정식 선식상(船食商)이 있으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대개가 국영(國營)이라 개인의 수입과는 무관함으로 관심이 없기에 ‘구해보마’ 하고 대답은 하지만 믿을 수가 없고,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다니 직접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출입구의 경비들에게는 뇌물(?)을 썼기에 통과가 가능했다. 시장(市場)이랄 것도 없이 그냥 거리에 자리를 펴고 야채는 너댓 묶음씩, 곡식은 자그마한 자루 한 주먹씩 넣어 두고 있는 난전(亂廛)이었다.
배추라기 보다 그 모양만 비슷한, 우리의 속칭 ‘납닥배추’ 같은 게 있었다, 담당자인 조리장이 “없는 것보다야 안 났겠심껴”하여 흥정을 시작했다. 널린 것 모두 거두어야 두 소쿠리도 안 되기에 더 없냐고 하자, 밭에 더 있다고 해서 같이 가 보자고 했다. 밭 하나를 통째로 입도선매(立稻先賣)했다. 2,400프랑 불렀으나 1,400프랑에 낙찰, 거금(?)을 받아든 주인 아줌마의 두툼하고 넙데데한 입이 쩍 벌어지면서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내게는 먹고 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먹구름처럼 짙을 뿐이었다.
우리 손으로 뽑아 대충 흙을 털고 묶었다. 무는 고양이 똥만한 것이지만 일곱 가게를 모두 모아 겨우 2-3kg 구했다. 두어 번만 더 왔다간 로메(Lome)시장 채소값 폭등시킬 판이다. 그래도 구할 수만 있으면 좋으련만… . 사실은 이것도 정식으로 선식을 경유하지 않기 때문에 불법이다. 쌀도 바로 국경을 넘어 가나의 골목시장에서 우리 쌀과 가장 비슷한 것을 구하기는 했지만 후에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배추김치를 먹지 못하다가 다행히 굵고 흰 통배추를 구할 수 있는 항구에 기항(寄港)하여 미리 전문(電文)으로 주문한 배추부터 실어 올리면 전 선원들이 자진해서 나르고 다듬고 야단이다. 그날 저녁때는 ‘오늘 배추겉절이 나오는 날’이라고 소문이 나서 상륙했던 자들도 일찍 귀선한다. 우리 속담에 ‘3년 묵은 체증이 넘어간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도 남는다.(계속)
첫댓글 50년 후에 항해사가 되었더라면 이리도 신기한 경험담을 올릴 수 없을텐데........ㅋㅋㅋ
"오늘 배추 겉절이 나오는 날"^&^
바람새가 갑자기 겉절이 생각이 나서 시장 퍼뜩 갔다 오겠습니다.
마침 오늘이 오일장.^^
파장 때가 되었군요. =3=3=3=3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가 흔하게 먹는 배추 김치도 이렇게 귀하다니..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