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63)
어떤 환갑
작년 봄에 혼자된 친구가 얼마 전 선을 봤다 캅디다. 마누라 생각하면 애간장이 녹지마는 너른 과수원에 죽자 사자 복숭꽃은 피고 손은 달리니 새봄이란 것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더랍디다.
어찌 알고 붙은 중신어미가 내미는 여자 역시 사별한 촌댁이라 크게 맘 없어도 일단은 보자 했답디다. 먼 데서 고만고만하게 사는 자식들 걱정도 덜 겸요.
그런데 조건이라는 게 현찰 일억을 통장에 꽂고 월급 택으로 몇십만원씩 다달이 넣는 거라대요. 호적에도 못 오를 몸 밤낮 없을 밭일에 늙어갈 새 영감 치다꺼리까지 하다 덜컥 죽고 나면 버려질 생은 누가 책임지냐고요. 그 말도 맞지요.
혼자 살다 비비 말라 죽어도 이런 거래는 아니지 싶어 결국 파투 낸 친구가 강소주 같은 노을을 짊어지고 마누라 무덤에 엎어져 꺼이꺼이 이랬다 캅디다.
“여보게, 자네가 일억도 넘는 고귀한 사람인 줄 내는 왜 여적 몰랐을꼬 참말로 미안했네.”
- 권선희(1965- ),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창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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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쓰지 않았다/축항을 치는 파도와 말봉재 골짝골짝 넘나드는 바람/그들의 이야기를 가끔 받아 적었다”(첫 시집 ‘시인의 말’ 중에서, 『구룡포로 간다』, 애지, 2007). 아시죠, 시인은 다만 “받아 적었다”고 하지만 받아 적는다고 다 받아 적는 것도 아니고, 받아 적는다고 다 시가 되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것. 저는 먼저 받아 적는 이의 심사心思부터 헤아립니다. 이 시를 말하는 데 긴말이 필요하지는 않지 싶습니다. 애초 제 말을 친구에게 옮기는 이의 심사나, 전하는 이의 심사나, 받아 적는 이의 심사나, 읽는 이의 심사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아니라고요. 읽는 이의 위치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고요. 쯧쯧, 세상 망조亡兆 어쩌며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합니다만, 저는 역시나 긴말 안 드립니다. 남편의 직장 따라 포항에 내려와 살다가 2000년에 ‘구룡포’로 들어가 낯가림 심한 이들과 몸 부대끼며 살면서 마침내 ‘구룡포 시인’이 된 시인이 2017년에 낸 『꽃마차는 울며 간다』(애지, 2017)에 이어 이번에 세 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살아래이/살 거래이/가믄 안 된데이/살아야 한데이/춘자야 인나거라, 인나라, 인나라” 두 권의 시집에 이어 이번 시집에도 역시나 시집 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건 “가라앉는 삶을 떠받치며” “검게 울던”(「물의 말」 일부) 말입니다. ‘살이’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 가까이에서 사람과 부대끼는 다른 뭇 살이들의 자리도 역시나 이번에도 함께 깔아놓았습니다. 남편의 퇴직 후에도 못내 아쉬워서인지 “나이거나 너였던 풍파를 타며 살다가/이곳에서 저곳으로/이것에서 저것으로 건너가는 순정한 음절들”과 쉬 이별하지 못하고 “바닷가 부족이” 달아준 “입으로 노래”(이번 시집‘시인의 말’ 중에서) 하던 시인이 23년의 구룡포살이를 끝내고 이제 구룡포를 떠났습니다. “수희미용실 대중여인숙 대천식당 세리미용실 돌풍수산 재영정밀 이태리세탁 ……”(「구룡포, 내 영혼의 마킹 로드」 일부). 못내 헤어짐이 아쉬웠을까요. 마지막으로 둘러보며 속으로 되뇌었을 이름들을 함께 따라 뇌다가 속으로 되뇌어도 그 목소리 우렁차서 저는 그만 귀가 먹먹해집니다. 쪼잔해서 호명하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세며 뇌고 있는데 200을 한참 넘어서서도 다 못 뇌는 이름이 있었는지 “……” 긴 줄임표로 결국 마무리 못 하는 ‘구룡포 시인’의 마음을 생각하다가 저는 마음마저도 먹먹해졌습니다. “어쩔 수 없다.//사랑하고 말았다고/쓴다. 이제야.” 하는 ‘시인의 말’ 마지막의 고백 앞에 저는 “애초에”를 세웁니다. 다만 뱉어내지 않았을 뿐인 이 사랑 고백, 애초부터 있었으리라는 제 생각은 무리가 아닐 겁니다. 사랑은 선택과 동시에 촉발觸發하니까요. “그래島에서” 시인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알려주는 택호宅號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래島’는 몸은 떠나도 절대 떠날 수 없는 시인의 마음의 집일 겁니다. (20240925)
첫댓글 구룡포 시인 권선희가 창비에서 올해 세 번째 시집을 냈나 봅니다. 혼자된 친구가 올해 환갑인 모양인데요~~
혼자 살다 비비 말라 죽어도 이런 거래는 아니지 싶어 결국 파투 낸 친구가 강소주 같은 노을을 짊어지고 마누라 무덤에 엎어져 꺼이꺼이 이랬다 캅디다.
“여보게, 자네가 일억도 넘는 고귀한 사람인 줄 내는 왜 여적 몰랐을꼬 참말로 미안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