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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1 : 2017.08.19 문장 추가 爲善被禍吾所甘心 성어의 시작`근원은 漁溪先生集卷之三 附錄 魯陵事實 이다
잊히는 인물, 영월부사 윤양래
안녕하세요~영월군문화관광해설사 김원식입니다.
오늘은 잊혀져 가고 있는 인물, 윤양래 어른에 대하여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영월의 이야기는 조선국의 국왕을 모시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역사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1725년부터 1727년까지 영월부사로 재임하셨던 윤양래 어른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재임하시는 동안 하신 일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놓치고 마는, 287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통하여 영월의 인물로서 존경과 공경의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윤양래 어른과 영월은 어떠한 인연이 있었는가? 에 시선이 모아질 것입니다. 그 내력을 살펴보면,
윤양래(尹陽來) : 1673년~1751년. 자는 계형(季亨), 호는 회와(晦窩), 본관은 파평(坡平). 숙종 무자년에 문과(文科)에 오르고, 벼슬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익헌(翼獻)입니다.
걱정되는 부분은 조선국 시대를 사셨던 어른의 이야기라서 후대 문중 분들이 계시기에 극히 조심스럽고, 조선왕조 영조실록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말씀 드리지만, 혹 부족함이 있을 수도 있기에 미리 양해를 구하게 되고,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럼, 하신 일에 대하여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윤양래 어른과 깊은 관련이 있는 분은 단종임금의 옥체를 수습하여 장릉에 모셨던 엄흥도 어른입니다.
때는 1725년 7월이 됩니다.
조정에서 높은 관직에 계시던 윤양래 어른은 자신과 신념을 같이 하던 세력들이 권좌에서 밀려나게 되자 사관원(司諫院)의 으뜸벼슬인 대사간(大司諫)에서 강원도 영월땅 부사로 물러나 앉게 됩니다.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일까요?
고위직에 있던 분이 하루아침에 좌천된다면 저부터도 세월과 시절을 탓하면서 큰 절망에 빠졌을 만도 한데 이분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아니 하고 임지인 영월에 부임하셨습니다.
구석구석 둘러보니 옛 임금이 계시던 성지임에도 임금을 모셨던 분들에 대한 공덕을 기록한 비문과 정려문 하나 없는 것을 알고는, 요사이 말로 말씀을 올린다면 ‘역사바로세우기’라고 할까요?
그 일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하신 일은 엄흥도 어른의 묘소에 세울 묘갈명(묘비 비문)을 짓게 되었고,
둘째로는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청령포(淸泠浦)에 금표비를 세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조선국 역사에 길이 빛날 일인데요, ‘단종임금께서 여기 계시노라’고, 이곳이 ‘임금의 옥체를 모신 장릉’이라고, 만백성 모두에게 알리는 단종신도비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럼, 첫 번째인 엄흥도 묘갈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엄흥도 어른이 하신일은 조선국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가장 큰 일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덕을 기리고 후대인들이 본을 받을 수 있도록 세상사람 모두에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대변하는 그 어느 것 하나 없었습니다. 하여, 스스로가 엄흥도어른의 묘갈명(묘비문)짓고 후손은 묘소에 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름하여 ‘寧越府使 尹陽來 撰幷書(영월부사 윤양래 찬병서)’가 됩니다.
그 문장을 보면,
朝鮮朝忠臣嚴興道墓碣銘(조선조충신엄흥도묘갈명)
옛날 조선조(朝鮮朝)의 六代(육대) 임금인 단종(端宗)께서 숙부(叔父)인 세조(世祖)의 강압에 못 견디어 급기야는 보위(寶位)를 내놓으시고 강원도 영월(江原道 寧越) 땅으로 귀양살이를 오시게 되니, 아! 정축년(丁丑年, 단종이 승하한 해)의 일을 회고하면 오직 목이 메일 뿐이다.
그러나 엄흥도(嚴興道)가 있어서 피를 토하며 통곡해 마지않았도다.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함에 공(公)은 마음을 굳게 먹고 棺(관)을 준비하여 양지바른 산언덕에 수장(壽藏, 장사 葬事)하려 할 때 뭇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연(空然)히 망령되어 나서지 말라. 당장 나라에서 앙화(殃禍)가 내릴 것이라고 만류하는데도 공(公)은 흔연(欣然)이 나는 의(義)로운 일을 하고 화(禍)를 당하는 것은 두려워하는바 아니다.
누대(累代)의 명신(名臣)들과 귀족들은 모두 안일(安逸)에 젖어 일신의 평안에만 급급 하는데 엄흥도는 하급직(下級職)의 미미(微微)한 자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의(義)로움은 당세(當世)에 가장 뛰어 났도다.
그 후 二百年(이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차며 경악(驚愕, 놀라는 것)하여 마지않았도다.
우암(尤菴) 송시열옹(宋時烈翁)이 나라에 고(告)하니 칭송(稱頌)하는 소리가 빨리 퍼져나갔고 강원감사 홍만종(江原監司 洪萬鍾)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제향(祭享)을 누리게 되니 경건(敬虔)히 머리 숙여 생각하는바 숙종(肅宗)께서 폐허(廢墟)된 궐사(闕祠)를 보수(補修)하게 하시고 장릉(莊陵)의 위(位)를 회복케 되므로 사람들은 물론 신(神)까지도 기꺼워하였다.
숙종(肅宗)께서 흥도(興道)의 사적(事蹟)은 실로 높고 높으며 해와 달같이 조명(照明)하고 태산같이 높으니 이에 작록(爵祿)은 없으나 빛나는 용포(龍袍)를 포상(褒賞)함에 우리의 후(后)가 밝았으니 대저 그대는 영월(寧越) 사람으로 임의(林義)의 자손이니 오랜 세월 그 계서(系序)는 족보(族譜)에서 빠졌지만 그 후손들은 오히려 가(可)히 견디어 오도다.
충의공(忠毅公)의 子(자) 호현(好賢)이 화(和)를 낳아 근근이 이어 오는 것 같더니 희령(希齡)과 한례(漢禮)가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으로 점점 벌어져 나갔으며 오세손(五世孫) 응원(應垣)과 응평(應平), 그리고 응일(應一)에 미치니, 응원(應垣)과 응평(應平)이 비록 죽어 후손(後孫)이 없으나(당시 삼족을 멸함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됨) 多幸(다행)히 성(姓)은 같으나 派(파)가 다른 承軫(승진)에게 마침 和(화)에 딸이 있어 아내로 주었고, 外孫(외손)인 悌漢(제한)이 이미 없으나 그 後(후)에도 계속(繼續) 대신 향화(香火, 제례)를 받들어 오히려 결례(缺禮)하는 일이 없었다.
팔계(八溪, 영월읍 소재 寧越邑 所在)에 있는 公(공)의 묘소(墓所)는 유좌혈(酉坐穴)인데 처음에는 보잘 것 없었으나(당시의 여건으로 보아 묘소관리가 안된 탓) 지금은 잘 손질되어 완연(宛然)히 면목(面目)을 일신(一新)하게 되었다.
슬프다! 그대여, 그대의 행적(行蹟)이 알 길 없어 유감(遺憾)없이 기술(記述)치 못함이 한이 되는구나. 그 충의(忠義)를 생각건대 여타(餘他)의 일들도 가(可)히 헤아리고 남음이 있도다.
태화산(太華山)이 무너지고 금수(錦水, 영월 동강 東江)의 물이 마를지라도 그대의 이름은 길이길이 後世(후세)에 남아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며 멸(滅)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제 내가 그대의 의기(意氣)와 절의(節義)를 모아서 묘비(墓碑)에 적어 높이 들어 世上(세상)에 보이노니 마음과 뜻이 있는 者(자)는 이를 짓밟고 없애지 말지어다.
숭정(崇禎) 九十九年(구십구년) 丙午(병오) (英祖 二年, 1726년) 十月(시월) 日(일) 立(립)
가의대부(嘉義大夫) 행(行) 영월부사(寧越府使) 윤양래(尹陽來)는 아울러 씀
현세에 널리 알려진 성언(聖言) “위선피와 오소감심(爲善被禍吾所甘心)·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한다 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는, 바로 이 찬병서에 있었습니다.
2017.08.19 문장 추가
1457년 당대를 살으셨던 어계 조려선생이 남긴 문집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爲善被禍吾所甘心 최초시작은 어계집이 된다.
* 漁溪先生集卷之三 附錄 魯陵事實
修棺營葬。수관영장。관을 갖추어 장사를 하려고 하니
興道族黨。흥도족당。엄흥도의 친족들이
懼有禍爭止之。구유화쟁지지。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만류하였다.
興道曰。흥도왈。이에 엄흥도가 말하기를
爲善被禍。吾所甘心。위선피화。오소감심。“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즐겨하는 바이다” 하고는
卽葬于郡北五里許冬乙旨向東之原。즉장우군북오리허동을지향동지원。즉시 영월군 북쪽 5리 동을지 동향에 장사하였다.
둘째로는 청령포금표(淸泠浦禁標)비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청령포는 1726년만 하더라도 뭇 백성들의 출입이 많았던가 봅니다. 땔감용 나무를 하고, 가축 먹이용 풀을 베어가고 밭을 갈아 곡식을 심었던가 봅니다. 이것을 보게 된 윤양래 부사는 ‘옛 임금께서 임어 하시던 곳이기에 풀 한포기 나무한그루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해야겠다.’는 뜻을 굳히곤, 세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표지석을 세우게 됩니다.
그 문장을 보면, 전면에는 ‘청령포금표(淸泠浦 禁標)’라 표기되어있고, 뒷면에는 ‘동서 삼백척, 남북 490척(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차후니생역재당금(此後泥生亦在當禁)’이라 하였고, 측면에는 ‘숭정99년 병오 10월 일 립(崇禎 九十九年 丙午 十月 日立)’. 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비석이든 단단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지만, 청령포의 금표 표지석의 재질은 이암이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의 범위 내에서 세워야 하였으니 영월 땅은 석회암지역이라 쉽게 구할 수 없어 그 중에서 진흙과 석회석이 혼합되어 조금 단단하게 굳어진 이암을 선택하였던 것이지요.
오늘날에는 조금 더 아름다운 용어를 선택하여 ‘비단결 꽃무니 이암’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 이암에 새긴 금표로 인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 단종임금의 능인 장릉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한가지,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깨달음을 얻다’ 는, 청령포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기를 청냉포(淸冷浦)라는 말이 자주 기록되다가 청령포(淸泠포)로 굳어짐을 알게 됩니다. 즉, 삼수변이 없는 령(令)자 에서부터 시작되어 삼수변이 있는 령(泠)자로 변화된 것이라고 유추해석이 되기에 그를 바탕으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처음에는 령(令)자에 삼수변이 없는 청령포(淸令浦)가 아니었던가? 입니다.
청령포(淸令浦), ‘임금의 령이 내려져있는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이다’ 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픔뿐인 단종임금의 유배지에 적합하지 않는 지명인지라 다시 정하기를 령(令)자 옆에 점을 두 개 찍어서 청냉포(淸冷浦)라 했습니다.
청냉포(淸冷浦),그것도 지어놓고 보니 ‘차디차게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이다’ 이니, 임금의 유적지를 차디찬 냇가라? 그 또한 매우 불편하여 다시 이름 짓기를 찰 냉(冷)자 옆에 점을 하나 더 찍어 삼수변이 들어간 령(泠)자를 선택하여 청령포(淸泠浦)라 했습니다.
청령포(淸泠浦),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깨달음을 얻다’
참으로 좋은 이름, 온전한 지명이 되었습니다.
“옛 임금의 역사를 절대로 잊지 말고 후세에는 절대로 되풀이해서는 아니 되니,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배우고 깨닫기를 바라노라” 라는 듯 청령포(淸泠浦) 그 바람을 오늘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되돌아본다면, 이름한가지, 말 한마디, 글자 하나에도 몹시도 깊은 고민을 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도 쉽게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글자를 쓰는 오늘의 이들에게 이 ‘청령포’라는 말은 또 다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푸름을 자랑하고 이곳이 단종임금의 유적지로서 온전하게 보존되고 보호되어 후대까지 전하여 줄 수 있었던 청령포는 1726년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풀과 나무와 산새와 짐승들만이 자리를 잡아 버려지고 잊혀졌던 유적지를 보호하고자 금표를 세웠고,
37년이 지난 1763년에는 이곳이 ‘단종대왕께서 계시던 집터이다’ 라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를 세우게 되고,
지난 2000년에는 어소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옛날이 이러했노라”고,
영월 땅에 조선국 역사를 비문으로 남기셨으니 오늘의 우리들에게 말없는 가르침을 주신 윤양래 부사, 1727년 4월에 병조참판으로 등용되어 영월을 떠나게 됩니다.
세 번째로는, 세월이 흘러 1730년에는 함경도관찰사로, 1732년에는 한성부우윤·경상도관찰사·승정원도승지·평안도관찰사·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사헌부대사헌을 지낸 윤양래 어른은 1733년 6월19일 영조임금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임금에게 진언한 말이 실록에 기록되기를 -
“신이 영월(寧越)에 재임(在任)할 때 장릉(莊陵)을 봉심(奉審)하였는데 당초의 상설(象設)이 단지 망주(望柱)와 무석인(武石人)만 있고 비석이 없었습니다. 능소(陵所)가 대단히 먼데 만일 비기(碑記)가 없으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무엇으로 능침(陵寢)이 있는 곳을 알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북도(北道)를 안무(按撫)하면서 모든 능(陵)을 두루 봉심하였는데 역시 다 비석이 있었는데 그 길이는 두어 자를 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장릉에도 역시 여기에 의하여 비석을 세워 아무 대왕(大王) 아무 능이라 쓴다면 마땅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능침이 있는 데가 대단히 멀고 또 성고(聖考)께서 추복(追復)한 것이 뜻이 있으니 선대(先代)의 뜻과 서업을 계승하는 도리에 있어서 문적(文跡)이 없을 수 없다. 듣건대, 북도의 모든 능의 비석도 역시 다 검약하다 하니 여기라 해서 또한 어찌 반드시 풍대(豐大)하게 하겠는가? 아직 앞으로 봐서 본도(本道)에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자, 윤양래가 말하기를,
“영월에는 원래 비석에 마땅한 돌이 없습니다. 신이 재임할 때에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비석을 세웠는데 돌의 품질이 대단히 좋지 못하였으니, 경사(京司)에서 돌을 다듬고 글자를 새겨서 수로(水路)를 따라 능소로 운반하면 편리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월 수령이 오히려 엄호장의 비석을 세웠는데, 나라에서 능침에 아직도 비석을 세우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하고,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묘당(廟堂)에 물어 거행하게 하였다. 엄흥도는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했을 때 충성을 다하여 노고를 바친 사람이다.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영월장릉에 있는 단종대왕 신도비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전면에는
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표기 되어 있고
뒷면에는 단종임금님의 출생에서부터 영월땅에서 승하하시기까지 내력이 표기되어 있으니까요.
그 내용을 보면,
端宗大王 諱 文宗大王 嫡嗣母
단종대왕 휘 문종대왕 적사모
妃 顯德王后 權氏 以 正統 辛酉 七月二十三日 誕生
비 현덕왕후 권씨 이 정통 신유 7월 23일 탄생
王 戊辰 封 王世孫 景泰 庚午 冊封 王世子 壬申 五月
왕 무진 봉 왕세손 경태 경오 책봉 왕세자 임신 5월
文宗 昇遐 王嗣 登 大位 乙玄 尊爲
문종 승하 왕사 등 대위 을현 존위
上王上號 恭懿溫文 天順 丁丑
상왕상호 공의온문 천순 정축
王在 江原道 之 寧越郡
왕재 강원도 지 영월군
是年 十月二十四日 薨 春秋 十七
시년 10월24일 훙 춘추 17
葬 郡 北 辛坐乙向 原
장 군 북 신좌을향 원
肅宗大王 二十四年 戊寅 追諡
숙종대왕 24년 무인 추시
王恭懿溫文 純定安莊 景順 敦孝大王 廟號 端宗 陵日莊
왕공의온문 순정안장 경순 돈효대왕 묘호 단종 릉일장
附 永寧殿 上之九年 癸丑 命竪石于
부 영녕전 상지 9년 계축 명수석우
陵以識之
릉이식지
즉, 단종대왕신도비는 한양의 궁궐에서 만들었고
수로를 따라 운반하였다 하니 서울의 한강에서 출발하여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 영월의 동강에 이르러 이곳 장릉으로 운반하여 세웠다는 뜻이 됩니다.
그 모든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요?
준비된 인물이었습니다.
높은 학식과 인품이 겸비되어야만 가능하였던 일이었습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던 단종임금님의 발자취를 따라 한 점 한 점 찾아내고 증표를 세우셨으니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의 청령포가 존재하게 해준 인물, ‘이곳이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니라’ 를 알 수 있도록 표석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윤양래 어른!
영월 땅 그 어느 곳에도 공덕을 기리는 표석 한 점 없이 신록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입니다. 겉으로만 보이는 형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적 가치를 찾아내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게 해준, 내면의 세계를 세상에 알려준 인물을 공경해 드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2015.09.16. 글자 한자 잘못 표기를 바로잡음
현세에 널리 알려진 성언(聖言) “위선피와 오소감심(爲善被禍吾所甘心)· 올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한다 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는, 바로 이 찬병서에 있었습니다. ~에서
~위선피와 오소감심(爲善被禍吾所甘心)· ~을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吾所甘心)· ~ 올은 일을 하다 ~를 옳은 일을 하다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