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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곡 고희동
(高羲東1886~1965)
관립 한성 외국어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뒤 궁내부에서 행정 관리로 일하였는데, 이때 서양의 화가들이 궁을 드나들면서 남긴 그림을 보고 서양화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그는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문하에서 취미와 교양으로 동양화를 배우고 있었다. 고희동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충격을 받고 관직을 그만두었으며, 스스로를 달래려고 동양화가 아닌 서양화에 눈을 돌리게 된다.
1909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15년 학업을 마치고 고희동이 귀국할 무렵 한국에는 ‘미술’이라는 용어가 처음 생겨났는데, 고희동의 귀국을 알리는 신문 기사에 처음 쓰였다. 귀국 후 서양화를 가르치며 지냈다. 그러나 사회의 시선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그가 유화도구를 들고 나가면 엿장수나 담배 장수로 오인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정자관을 쓴 자화상> 1915년 고희동作 캔버스에 유채, 73×53.5cm 도쿄 예술대학 미술자료관
고희동은 청색 두루마기에 정자관을 쓰고 있는데, 그는 자신을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그렸다. 기존에 제작된 초상화와 달리 서구적으로 그렸지만, 소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졸업 작품으로 제작한 그림으로, 도쿄미술학교의 서양화과 졸업미전은 의무적으로 자화상을 출품하게 했고 대부분은 모교에서 소장하는 정책을 폈다.
<부채를 든 자화상> 1915년 고희동作 캔버스에 유채, 61×46cm 국립현대 미술관
이 두 자화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그린 작품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랜된 유화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6천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 ‘문화재 지정’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품이 <부채를 든 자화상>이 될 것이라는 데에는 어느 미술가나 비평가도 별 다른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설리강매 雪里江梅> 1940년 고희동作 간송 미술관
春谷은 1925년쯤 유화 작업을 돌연 중단하고 동양화로 돌아갔다. 뒤에 고희동은 이렇게 회고했다. “전 사회가 그림을 모르는 세상인데, 더군다나 양화洋畵를 알 까닭이 없고 유채油彩를 보면 닭의 똥이라는 둥 냄새가 고약하다는 둥, 나체화를 보면 창피하다는 둥 춘화도를 연구하고 왔느냐는 둥 가지각색의 말을 들어가며 세월을 보내던 생각을 하면, 나 한 사람만이 외로운 고생을 하였다는 것보다 그 당시에 그렇게들 신시대의 신지식과 신사조에 캄캄들 하였던가 하는 생각이 나고, 근일에 이르러서는 어찌 이다지도 새것에 기울어지는 풍조가 엄청나게 지나치는가 하는 감이 든다”
-동아일보 1959년 1월 5일-
* 고희동
http://naver.me/5n3tqzc4
#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은 1910년대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공부한 선구자들이다. (김찬영의 경우 현재 그의 작품은 단 한 점도 국내에 남아있지 않다) 더불어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1918)하고 귀국한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유화가 였다.
☆ 김관호(金觀鎬
1890~1958)
동경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두 번째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평양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6년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해 ‘문부성 전람회’에 졸업작품인 ‘해질녘’을 출품하여 영예의 특선을 차지했다.
<해질녘> 1916년 김관호作 캔버스에 유채, 127.5×127.5cm 도쿄 예술대학 자료관
“조선인의 그림이라는 여학생들의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려보니 대동강 석양에 목욕하는 두 여인을 화(畵)한 김관호의 <해질녁 夕暮>이라. 아아! 김관호 군이여! 감사하노라. (…) 군이 조선인을 대표하여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를 세계에 표하였음을 다사(多謝)하노라.” -매일 신보, 1916년 10월 28일- 춘원 이광수의 감탄사다.
보랏빛으로 물든 석양의 능라도 풍경은 인상파 화풍으로 아련하게 묘사하고 풍만한 두 나부의 뒷모습은 몽환적인 낭만파 화풍이다. 서양미술의 수용기인 1910년대 누드그림은 파격 가운데 파격이었다. 전통 미술의 관념으로는 나체화라는 개념조차 부재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당시 매일신보 보도를 보면, “김 군의 그림 사진이 동경으로부터 도착했으나 여인이 벌거벗은 그림인 고로 사진으로 게재치 못함”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지면에는 김관호의 풍경화가 대신 실렸다.
<정자가 있는 풍경> 1916년 김관호作 합판에 유채 23.7×33cm 개인소장
<호수> 1923년 김관호作 그림사진 (작품은 남아있지 않다)
김관호는 1923년 조선미전에 단 한 차례 출품했다. 바로 <호수>라는 작품이었고 역시 나체화였다. <해질녘>은 그나마 여성의 뒷모습이었지만 <호수>는 호수를 배경으로 앉아있는 여성의 전면을 화면 가득 그린 것이었다. 역시 금기 작품으로 꼽혔다. 미술 전시에 출품은 허락했지만 ‘나체화 촬영 금지’라는 단서가 붙었다. 1927년 무렵 그는 소리 소문없이 화단에서 사라졌다. 술과 사냥에 빠져 결국 폐인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끝내 손이 떨려 붓조차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처녀> 1955년 김관호作 캔버스에 유채 27×35cm
<농춘 풍경> 1955년 김관호作 유화 55×67cm
<노인> 1956년 김관호作 유화 60×70cm
김관호는 해방기에 다시 미술계에 나타났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재기하였다. 하지만 이미 그림에는 힘이 빠져서 젊은 시절의 영광과는 거리가 있었다. 김관호는 1950년대 후반 며느리에게 “이 세상에 머저리가 있으면 그것은 김관호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 김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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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羅蕙錫
1896~1948)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며 근대 한국사에 있어서 주목되는 선구자이다. 할아버지가 호조참판, 아버지가 시흥 군수를 지낸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나혜석은 수려한 외모와 우수한 성적으로 진명여고 최우등 졸업 사실이 「매일신보」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하이틴 스타였다. 1913년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연애와 파격적인 이혼 그리고 행려병자로서 삶을 마감한 파란만장한 생애로 더 유명한 여성이다. 그녀는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으로서 예술분야 뿐만 아니라 여권 운동을 비롯한 사회 운동 등 다방면에서 다재다능한 능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여성이었다. 나혜석이 인생의 질곡을 이겨가며 끝까지 지키고자한 것은 바로 그의 예술세계이며 인간적인 자유이다.
<농촌 풍경> 1922년 나혜석作 캔버스에 유채 27.5×39cm 개인소장
사실적인 표현이지만 붓놀림이 매우 활달하고, 따뜻한 이른 봄의 햇볕과 맑은 날씨를 느끼게 하는 밝고 따뜻한 색채구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른쪽 초가집과 구도상 균형을 이루는 왼편의 나목 사이로 물동이를 인 여인이 화면의 중심적인 시점이 되어있고 뒤에 있는 볏가리가 농촌의 서정적인 현실감을 자아낸다.
<스페인 해수욕장> 1928년 나혜석作 캔버스에 유채 32.5×43cm 개인소장
화면을 크게 상하로 이등분하고 하반부에는 해안에서 보트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반부에는 이국적인 건물들과 하늘공간을 포착하였으며, 세부적 묘사가 거부된 형태감각과 수면위의 태양광선, 그리고 대기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구름의 형태 등에서 그녀의 뛰어난 표현감각을 볼 수 있다.
*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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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928년 나혜석作 캔버스에 유채 88×75cm 수원 시립 아이파크 미술관
1927년 변호사이자 외교관인 남편 김우영과 세계일주 여행을 하던 중 남편은 베를린에서 법 공부를 하고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게 된다. 이때 파리에서 나혜석은 천도교 교령이자 독립운동가 33인 중 하나인 최린과 불륜에 빠진다. ‘사랑은 눈으로 오고 술은 입으로 오듯’ 불같이 빠져들었고 훗날 이혼의 빌미가 된다. 자화상은 나혜석이 파리에 머물던 1928년 쯤에 그린 것이다. 나혜석은 자화상에 자신의 얼굴과 사뭇 다른 중성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으로 얼굴을 표현했다. 자화상이 이토록 우울한 이유에 대해 가부장적 사회분위기 속 신여성으로서의 의식을 표현했다는 견해부터, 이혼을 예감하고 실의에 찬 심경을 표현했다는 견해까지 다양하다.
<선죽교> 1933년 나혜석作 목판에 유채 23×33cm 개인소장
정제되지 못한 필치와 파괴된 원근법, 난간의 배열에서 보이는 비합리적인 표현 등은 지난날 그녀가 보였던 조형적 완결성이 많이 상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9년 귀국 후 1930년에 김우영과 이혼하게 된다. 이혼한 ‘나쁜 어미’ 나혜석은 더 이상 아이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악착같이 그림에 매달렸고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러던 중 1934년 나혜석은 그 유명한 ‘이혼고백장’을 발표한다.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소상한 자기고백을 통해 정조관념의 남녀 평등을 얘기했다.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이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수원 서호> 연도 미상 나혜석作 목판에 유채 30×39cm 개인소장
수원 서호변에 정착했을 때 나혜석의 정신적 안정을 반영한 듯 느껴지는 그림이다. 정확하게 묘사된 왼편의 붉은 기둥을 한 정자일각이 화면구도를 무게있게 해준다.
<무희> 1940년 나혜석作 캔버스에 유채 41×32cm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
<무희>는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는 나혜석의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흰색코트와 갈색코트를 입은 두 명의 서양무희가 무대 커튼 옆에 서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짙은 갈색과 흰색이 대비를 이루고 있으며 볼과 입술, 반지와 신발은 빨간색을 사용하여 눈에 띈다. 인물들의 얼굴, 손과 발이 작게 그려졌고, 키는 늘려 놓은 듯 크게 묘사하여 신체비율이 다소 어색한 느낌이다.
그녀의 외도는 시대적 한계 탓에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큰 일탈이었고 탕녀로 낙인 찍힌다. 김우영으로부터 완전히 배척당하였고, 자식들과는 철저하게 격리 당하였으며 그토록 자신을 위해주던 오빠로부터도 외면당하였다. 개인전 등 피나는 재기 노력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경제적 곤란과 우울증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중, 1948년 12월 서울 시립 자제원의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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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초상> 1930년 이종우作 캔버스에 유채 65.5×50cm 유족소장
<청원> 1953년 이종우作 캔버스에 유채 36.5×44cm 유족소장
<아침> 1957년 이종우作 캔버스에 유채 92×72cm 故김종필 국무총리가 총리공관에 걸었던 작품
정원의 판판한 자연석 위에 백자 하나가 놓였다. 위아래 반구형을 붙인 도자기 이음새가 불룩하다. 사람이 빚은 백자와 뜰 안의 자연이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조화롭다. 세상 모두를 다 끌어안을 듯한 넉넉함을 가진 백자다. 항아리 표면에서 파르스름한 초록 기운이 도는 것은 이날의 청명한 날씨와 주변의 싱그러운 녹색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백자 발치 끝 돌 주변으로는 하얗고 노란 채송화가 옹기종기 피어있다. 그 위쪽으로는 햇빛 잘 안들어도 잘 자라는 옥잠화가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백자를 통해 한국적 아름다움을 자신있게 드러내면서도 자연스럽게 녹여낸 구성이 탁월하다.
☆ 陶泉 도상봉(都相鳳
1902~1977)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나 1917년 보성고보에서 고희동으로부터 서양화법을 배웠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간 도상봉은 부모의 뜻에 따라 메이지대 법학과를 2년 동안 다니다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1923년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했다. 1928년 귀국한 도상봉은 경신고보, 보성고보, 배화여고, 경기여고 등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미술교사로 매진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화단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도상봉은 탄탄한 데생과 엄격한 구도를 기반으로 확고한 고전주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자연을 관찰하고 분석해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깊이있는 색조로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었다.
<도자기와 여인> 1933년 도상봉作 캔버스에 유채 117×91cm 용인 호암미술관
이 작품은 도상봉의 초기 대작으로 의자에 앉은 여인좌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조선시대 도자기와 오른쪽에 시계, 액자 등을 배치하였다. 배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황토색의 차분한 색조와 도자기의 부드러운 견고함이 여인의 단아한 성격을 강조해 준다. 인물과 정물이 조화된 현대적 화면을 통해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의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물> 1954년 도상봉作 캔버스에 유채 72×90cm 개인소장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백자와 국화들은 도천이 생전에 가장 사랑하던 한국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소재들이다. 화가는 백자를 두고 자신의 친구라 말하였을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성균관> 1959년 도상봉作 캔버스에 유채 72.5×91cm 용인 호암미술관
도천은 우아하면서도 품위있는 조선민족의 정서를 반영할 수 있는 고궁이나 전통 가옥을 소재로 풍경화를 종종 그렸다.
* 도상봉(都相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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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풍경> 1965년 도상봉作 캔버스에 유채 73×116cm 개인소장
부산 송도를 그린 작품이다. 바다 가운데 건물이 서있는 곳이 거북섬이다.
<해운대 풍경> 1966년 도상봉作 캔버스에 유채 72×117cm 개인소장
2009년 서울 옥션이 부산에서 여는 경매에서 <해운대 풍경>의 추정가가 3억50000만~4억5000만원 이었으나 유찰되었다.
<고관설경> 1969년 도상봉作 캔버스에 유채 45.5×53cm
하얀 눈이 내린 전통가옥의 모습을 눈 덮힌 가지들이 인상적인 나무들과 함께 배치하여 그려 놓았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나 별다른 것도 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관조하듯 작가의 그림은 조용히 일상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향원정> 1970년 도상봉作 캔버스에 유채 53×45.5cm 개인소장
말년에는 주로 정물화와 풍경화를 그렸다. 풍경화에는 주변의 자연풍경을 담았으며, 정적감을 주는 특유의 부드러운 색채로 가득 차있다.
<정물> 1971년 도상봉作 캔버스에 유채 24.2×34.8cm 개인소장
<동해 풍경> 1973년 도상봉作 캔버스에 유채 24×33.4cm 국립현대미술관
<안개꽃> 1974년 도상봉作 캔버스에 유채 53×45.5cm 개인소장
도상봉은 1919년 보성고보 3학년 때 3.1운동을 앞두고 거사 연락업무를 담당하다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 이응노(1904~1989)
충남 홍성에서 출생. 17살 때 가출, 단청을 그리는 상여집의 칠장이를 전전하다, 1923년 당시 명필이자 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 사군자, 묵화를 배웠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동양화와 서양미술의 소묘와 유화 기법을 연수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활동하다 1954년 서라벌 예술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958년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작품생활의 무대를 바꾸었다. 그는 1967년 동백림 사건(한국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러 동독의 동베를린으로 갔다)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일로인해 대한민국 예술계와 단절되었으나 유럽에서는 꾸준한 활동을 하였다. 1977년 취리히에서 북한에 의해 발생한 ‘백건우 윤정희 부부 납치 미수 사건’에 그의 아내 박인경이 연루되어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등나무> 1940년대 이응노作 한지에 수묵담채 130×117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서울에서의 작품들은 난이나 대나무를 굵은 붓의 필치로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근대 미술을 배우기 위해 온 도쿄에서는 사실주의를 많이 접하다보니 <등나무>처럼 섬세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서울과 도쿄에서 미술을 배우면서 쌓인 동양적 정체성은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의 기본을 이룬다.
<거리 풍경-양색시> 1946년 이응노作 한지에 수묵담채 50.3×66.5cm 이응노 미술관
세 명 여성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으며 사람들의 시선은 그 여성들에게 향한다. (색안경을 쓴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작품 하단에 ‘현모가 되어주기를 원하노라’에서처럼 계몽적인 소견을 표현하여 해방직후의 사회상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고자 하였다.
<취야醉夜> 1950년 이응노作 한지에 수묵담채 40.3×55.3cm 이응노 미술관(대전)
술취한 밤을 그린 그림 속의 사람들은 어둡고 괴물처럼 보인다. 술에 취해 밤늦게 까지 술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고단하고 지친 몸과 마음이 보인다.
* 이응노
http://me2.do/xMwqzLhB
<수레끄는 사람> 1955년 이응노作 한지에 수묵담채 18×20cm 이응노 미술관
화면 우측에 짐을 실은 수레의 일부가 보이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눈이 튀어나올 듯이 허리를 굽혀 힘을 쓰는 인물이 먹의 중첩과 갈필을 통해 형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수레를 끄는 인간의 형태가 종정문鐘鼎文에서 볼 법한 문자 ‘노奴’와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을 헤아림이 글씨에 담겨 있음을, 그리고 문자의 의미가 상징을 넘어선 지점에 있음을 본다. 갈필渴筆-먹물의 사용을 억제하여 마른듯한 상태의 붓으로 그리는 수묵화의 기법. 먹을 풍부하게 사용하는 것을 습필濕筆이라고 한다.
종정문-중국의 은주시대殷周時代의 청동기위에 새겨진 글자를 가리킨다. 상대(商代= 殷代)말년의 갑골문자와 근접해 있다.
<대나무> 1975년 竹士 이응노作 한지에 수묵 133×69cm 이응노 미술관
<닭> 1977년 이응노作 한지에 수묵담채 62×33.5cm 이응노 미술관
학문과 출세에 뜻을 둔 선비라면 서재에 닭 그림 하나는 걸어두었을 만큼, 닭 특히 수탉은 벼슬이 마치 관을 쓴 것 같다 해서 입신양명과 부귀출세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먹으로 전체적인 형태를 완성한 후, 부분적으로 색을 더하였으며,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기품이 넘치게 묘사되었다. 이응노는 동물의 눈 속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여기어 몸의 나머지 부분보다 눈을 크게 그려 시선의 표현을 강조했다.
<무제> 1978년 이응노作 한지에 수묵담채 34.7×34.7cm 개인소장
<문자 추상> 1978년 이응노作 발위에 채색 91×110.5cm
문자 추상은 그림의 근본을 서예의 글자 형태에서 가져온 것으로, 서예적 추상이라고도 한다. 그는 글자의 조형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한자의 태생적 의미, 즉 한자가 자연과 인간의 형상이나 인간의 생각을 기호화하여 만들어진 상형문자라는 점을 중요하게 여기며 한자자체가 동양의 추상화적 바탕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았다.
<무제> 1983년 이응노作 한지에 수묵담채 36.5×34cm童畫 硏究 해본 것
<군상> 1986년 이응노作 한지에 수묵 167×266cm 이응노 미술관
멀리서는 새카만 개미떼인가 싶지만 사람이다. <군상>이 아니라 ‘군무(群舞)’라 했어도 좋았겠다 싶은 작품이다. 뛰고 솟고 얼싸안고 구르는 모양새가 음표가 되어 흥을 부르는 듯하다. 혼자인 사람도 있지만 둘 혹은 서넛이 짝을 이루어 기쁨에 몸을 놀린다. 수백 명 군상 중에 어느 하나도 같은 게 없으니 이게 삼라만상인가 보다. 삐죽한 먹 선 몇 개 놀리고 점하나 찍어서 이토록 다채롭게 인간사를 보여주다니 참으로 기발하다.
☆ 오지호(1905~1982)
전남 화순 출신으로 구한말 보성군수를 지내다 나라를 잃은 통한에 자결한 아버지 오재영의 영향으로 오지호는 강직한 성품과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한다. 1926년에 도쿄미술학교를 들어가 미술공부를 했다. 1931년 귀국하여 개성 송도고보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였고, 1948년 광주에 정착하여 조선대학교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빛을 바탕으로 우리의 자연을 화푝에 담아서 ‘빛을 그린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1982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3년 뒤 그의 아내 지양진 여사가 국립현대미술관에 유작 34점을 기증했다.
<누드> 1927년 오지호作 캔버스에 유채 77×51cm 국립현대미술관
김관호의 나체화 <해질녘-1916년>과는 11년의 차이가 난다.
<사과밭> 1937년 오지호作 캔버스에 유채 73×95cm 오지호 기념관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지호는 우리나라의 빛에 대한 실증적 접근에서 나아가 우리나라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하는데 그 목표를 두었다.
<남향집> 1939년 오지호作 캔버스에 유채 80.5×65cm 국립현대미술관
화면속의 집은 오지호가 광복 전에 살았던 개성의 자택으로 햇볕이 잘 드는 남향집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열린 문안(부엌)에는 빨간 옷을 입은 작가의 둘째 딸이 서있고, 앞마당에는 그의 애견인 ‘삽살이’가 햇볕을 받으며 누워있다. 나무의 그림자와 돌 축대 등이 푸른색과 보라색으로 처리되어 작가의 인상주의적 경향이 매우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현재 등록문화재 제536호로 등록되어있다.
<초추 初秋> 1948년 오지호作 캔버스에 유채 90.5×72.5cm 국립현대미술관
우거진 수목들이 잎마다 빛깔을 달리하는 풍경을 스냅사진을 찍듯 포착한 것이다. 짧고 격정적인 필치를 속도감있게 구사하고 있으며, 구도에서도 시계視界를 좁혀 대기의 표현보다는 화면 안에서 이루어지는 색과 형체들의 조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
<추경> 1953년 오지호作 캔버스에 유채 49.5×60cm 광주 시립미술관
활달하고 생기 넘치는 특유의 붓 터치와 미묘하게 변화하는 색감으로 한국적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 미학을 수립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였다고 평가된다.
<수련> 1957년 오지호作 캔버스에 유채 53.5×45cm 개인소장
<선인장> 1959년 오지호作 나무판에 유채 33×24cm 국립현대미술관
<항구> 1969년 오지호作 캔버스에 유채 53×73cm 고려대학교 박물관
<푸른산> 1968년 오지호作 캔버스에 유채 45×53cm 개인소장
<두 소녀> 1982년 오지호作 캔버스에 유채 40.5×52.5cm 국립현대미술관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해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은 색채가 다 인듯하다. 색채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한 것 같다. 사람의 얼굴은 차라리 두루뭉술하다. 그러나 그 청초함과 싱싱한 젊은 혈기는 역력하다. 얼굴에 팽팽한 피부와 탐스런 혈색이 철철 느껴진다. 원시적 생명력이 넘친다. 죽는 날까지 이런 그림을 남기는 화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