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 칼럼 - 이천설봉신문 2015. 9.9일자 게재>
마을공동체에서 희망을 보다
박수진(시인, 동요인)
북한의 도발로 인해 촉발된 남북대치 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8월 하순의 일요일이었다. 마을 청소와 단합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신둔면 고척2리 정용구 이장님의 부름을 받고 아침에 아내와 함께 서울 집을 나서 마을회관으로 갔다. 날이 덥기 전에 끝내려고 아침 일찍 시작을 했는지 청소는 이미 막바지 단계였고 정자 앞 그늘에서는 중년 남자 두 분이 숯불을 피워놓고 보기에도 먹음직한 장어를 구워내고 있다.
이장님의 안내로 마을 어른들과 주민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무더위 쉼터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회관 1층 입구에는 범죄 없는 마을 표창장 두 개가 액자에 걸려있다. 안에서는 활달한 성격의 이장 사모님이 젊은 아낙들과 함께 잔치 국수와 과일 등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중에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사모님이 아낙들을 부르는 호칭은 ‘며느리’들이다. 그 말이 정겹기 그지없다. 밖에서는 이장님이 청장년들을 인솔해 마을 청소를 하고 안에서는 사모님이 며느리들을 이끌어 잔치 준비를 하는 모습이 말 그대로 부창부수(夫唱婦隨)다. 뒷전에 앉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할머니 한 분이 내게 고향을 묻는다. 당신은 경북 안동에서 이곳에 이주해 30년을 넘게 사셨단다. 불과 일주일 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하기에 손을 잡고 위로를 드렸더니 며느리 칭찬을 하신다. 시집와 7년 동안이나 시아버지 병수발을 어찌나 정성껏 했는지 효부상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 범죄 없는 마을에 효부가 사는 마을이라니. 이 동네를 귀촌지로 선택한 것이 참으로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주변으로 아이들이 연신 오가며 재잘거린다. 분명 사람 사는 동네다. 시골 마을에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놀랍고 반갑다. 이장님 설명에 따르면 이 작은 동네에 어린이들이 무려 18명이란다. 아이들이 모여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시청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올해 예산이 배정되었다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누군가 무상으로 놀이터 땅을 제공하게 하는 데도 이장님의 역할이 필요했을 터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며 선행으로 이웃을 감싸고 이끄는 이장님은 올해 환갑을 맞았지만 메모하고 글쓰기를 즐기는 문학도로 외지인을 대하는 열린 마음이 요샛말로 글로벌하다.
이날 행사는 해마다 하는 마을 전체 활동으로 인근 학암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수로를 중심으로 마을 전체 구성원들이 울력으로 청소를 하고 길가에 자란 잡초를 베는 작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이 끝난 뒤에는 보양식인 장어구이를 준비해 더위에 지친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마을 잔치를 벌임으로써 단합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과정이 본받아야 할 미풍양속이었지만 마을 진입로의 길가에 풀을 베는 일이 추석을 맞아 찾아올 귀성객들을 위해서라는 말에 먼 옛날 고향의 인심과 정취가 느껴져 가슴이 따뜻해졌다.
밖으로 나와 정자에 마련된 상 앞에 앉았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장어구이에 술잔이 몇 순배 돌 때쯤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면장님께서 부면장님과 함께 도착해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어울린다. 이어 농협의 전·현직 조합장님을 비롯해 이웃 동네 이장님들도 과일과 음료수를 들고 찾아와 마을 잔치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모두가 가까운 이웃이거나 친척같다. 조촐한 마을 행사로 알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참석한 나는 뜻밖에 예비 마을 주민에서 면민 자격까지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중국 남송 시대에 송계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새로 집을 샀다. 덕이 높은 학자 여승진의 바로 이웃집이었다. 송계아가 이사 오자 여승진이 송계아에게 얼마를 주고 집을 샀느냐고 물었다. 송계아는 집값으로 1100만 냥을 주었다고 했다. 여승진은 그 집은 100만 냥 정도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송계아가 집값을 너무 많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송계아는 100만 냥으로 집을 사고, 1000만 냥으로 이웃을 산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웃이란 바로 여승진 자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승진은 놀라고 반가운 마음에 그를 융숭하게 맞이하였다는 얘기다. 중국의 사서(史書)인 남사(南史)의 여승진전(呂僧珍傳)에 나오는 ‘백만매택(百萬買宅) 천만매린(千萬買隣)’의 고사다.
우리에게도 예로부터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다. 좋은 동네, 좋은 이웃이 그저 만들어지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사람이 마을을 만들고 마을이 사람을 불러들인다. 어린이 문화의 중핵을 이루는 동요활동을 돕기 위해 이천과 인연을 맺은 지 여러 해, 꿈에 그리던 전원생활을 위해 이곳에 땅을 마련하고 이제 겨우 한 철 드나든 사람을 이토록 따뜻하게 이웃으로 맞아주는 마을 분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오늘 신둔면 고척2리 마을 이장님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과 친절한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곰곰 생각해 본다. 마을 공동체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소중한 하루였다.
첫댓글 박수진 교수님!
깔끔하고 매끈한 글(수필) 잘 읽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동요 사모님은 작곡을 하시고 피아노 연주를 하시며, 교수님께서 작사 하시는 부창 부수 참 부럽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부부간의 금슬이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박수진 선생님^^* 이 글 안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