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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혈전으로…" 우리 민족 첫 독립선언서 原本 발견 '기미 선언'보다 앞선 '무오 독립선언서'… 무장노선 촉구 조소앙 선생이 작성… 이승만·김좌진·신채호 등 참여
‘대한독립선언서’의 앞부분.‘ 아(我) 대한(大韓) 동족 남매와 기아편구(우리 세계 만방) 우방 동포아. 아 대한은... /조선일보1 of 2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선포한 독립선언서인 1918년 11월(또는 1919년 2월)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원본이 처음 발견됐다. '무오(戊午) 독립선언서'라고도 불리는 이 선언서는 '기미(己未) 독립선언서'보다 앞서 나온 것으로,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서지학자이자 애국가 연구가인 김연갑(金煉甲)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최근 발굴한 '대한독립선언서'의 원문을 11일 본지에 공개했다. 그는 "6년 전 아리랑 조사를 위해 중국에 갔다가 옌지(延吉)의 한 동포가 '대한독립선언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
최근 이 동포가 작고한 뒤 그 아들이 자료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가로 51.8㎝, 세로 37.5㎝ 크기의 이 문서는 '大韓獨立宣言書'라는 제목 왼쪽에 세로로 선언서 전문을 실은 석판 인쇄본이며 왼쪽 아래에 서명자 39명의 이름을 명기했다.
[사진설명 : ‘대한독립선언서’의 앞부분.‘ 아(我) 대한(大韓) 동족 남매와 기아편구(우리 세계 만방) 우방 동포아. 아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아 자손 여민(黎民\일반 백성)에 세세상전(世世相傳)키 위하여 자(玆)에 이족전제(異族專制)의 학압(虐壓\학정과 압제)을 해탈(解脫)하고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고 적었다.1979년 중앙대 영신아카데미에서 이 선언서의 사본을 처음으로 전시했던 김성근 한국학연구소 자료조사실장은 이 자료를 검토한 뒤 "종이의 재질과 왼쪽 가운데에 찍힌 도장의 상태 등을 보아 광복 이전의 원본이 분명하다"며 "원본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본지 확인 결과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것은 재일 학자 강덕상씨가 소장한 마이크로필름을 복제한 것이었고, 이화장(梨花莊)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에도 원본은 없었다.]
김연갑 이사는 "작고한 소장자는 일제시대 간도로 이주해 이 선언서를 입수한 뒤 1920년대 초 독립자금 영수증과 함께 벽지 속에 숨겨 놓았는데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야 다시 꺼낼 수 있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그의 아들은 한국에 이 선언서가 필요한 기관이 있다면 양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 '대한독립선언서'는 누가 왜 선포한 것일까? 선언서의 주인공들은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망명 독립운동가들이다. 학자들은 작성자가 훗날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이 되는 조소앙(趙素昻·1887~1958) 선생이며 선언의 실질적 주체는 길림성의 대한독립의군부라고 본다. 서명자로는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 안정근(안중근의 동생), 안창호,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조용은(=조소앙) 등 당시 해외에 있던 대표적인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이어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無道), 무력·폭행에 의한 것'이라며 한일병합의 무효를 선언하고,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에는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라며 일본에 대해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밝혔다. 이 때문에 4000부가 배포된 것으로 알려진 이 선언서의 목적이 무장독립 노선을 촉구하는 데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김기승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해 "무장투쟁론에 가까울 정도로 전투적 입장을 지니고 있는 독립선언서"라며 "당시의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생각은 '기미독립선언서'에서 나타난 국내 지도자들의 평화적인 노선과는 크게 달랐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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