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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사회봉사의 흐름과 방향 연구
[ 목 차 ]
Ⅰ. 서 론
Ⅱ.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역사
A. 선교초기시대
B. 일제시대
C. 외원의존시대
D. 자립준비시대
E. 자립발전 시대
Ⅲ. 한국교회 사회봉사 현황
A. 사회복지 의식
B.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구조적 조건
C. 사회봉사의 재정 및 활동
Ⅳ.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쟁점
A. 선교와 복지의 문제
B. 보완성과 실험성의 문제
C. 한국교회와 사회복지 이데올로기의 문제
Ⅴ.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모델
A. 지역에 따른 모델
B. 크기에 따른 모델
Ⅵ. 결 론
참 고 문 헌
Ⅰ. 서 론
한국의 개신교는 이 땅에 들어 온지 110년 남짓 되었지만 신도수, 교회수, 성직자수 등에 있어서 한국의 첫째 가는 종교가 되었고, 그에 따라 한국사회에 대한 책임도 늘어났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여러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사회봉사와 관련하여 논의하도록 하겠다. 사회과학적으로 좀 더 엄밀한 의미를 가진 사회복지 혹은 사회사업이라는 말 대신에 사회봉사라는 표현을 여기에서 사용하는 것은 교회가 가진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1차적으로 종교집단이지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집단은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회적 활동 가운데는 사회복지 혹은 사회사업 활동이라고 말하기에는 비체계적이고 일시적인 활동도 많이 들어있다. 따라서 교회의 이러한 활동까지도 포함하는 넒은 의미의 사회복지 혹은 사회사업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회봉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는 첫째로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역사를 한국사회 및 한국사회복지 일반의 역사와 연관시켜 검토하고 그것이 가진 의미와 성격을 규명하도록 하겠다. 둘째로 한국교회 사회봉사활동의 현황에 대해서 사회복지에 대한 의식, 한국교회 사회봉사가 이루어지는 구조적 조건, 사회봉사 재정 및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셋째로 한국교회 사회봉사와 관련된 쟁점들을 논의하도록 하겠다. 즉 선교와 복지의 관련성 문제, 국가의 복지와 교회의 사회봉사 사이의 관계의 문제, 사회복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교회의 입장 문제 등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넷째로 교회의 사회봉사 모델을 지역에 따라 농어촌과 도시로 나누어서 검토하고, 규모에 따라 소형교회, 중형교회, 대형교회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각각의 모델이 지향해야 하는 바와 생겨날 수 있는 문제점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Ⅱ.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역사
한국교회의 사회복지 혹은 사회봉사 활동의 역사는 그 자체로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크게는 한국역사 일반과 맞물리고 있으며, 작게는 한국사회복지의 역사 및 한국교회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역사가 가진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교단이나 교회 혹은 사회사업단체의 세세한 역사를 검토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다 거시적인 맥락에서 검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본다. 즉 한국교회 사회복지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사, 한국교회사, 한국사회복지 발달사의 맥락 속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한 역사적 검토에 있어서 시대구분이란 역사적 평가를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면서도 언제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구분의 기준 자체가 연구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기 쉬우며, 일단 시대 구분을 하게되면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단순화시키고, 다양한 현상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선택적으로 골라서 해석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구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구분을 하지 않으면 잡다한 자료들의 나열에 그쳐 역사적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역사적 발전과정 속에서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전개과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선교사의 도래에서 일제식민지로 들어갈 때까지의 선교초기시대, 일제치하의 식민지 시대, 해방 후부터 60년대 후반까지의 외원의존시대, 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의 자립준비시대,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자립발전시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의 근거에 대해서는 각 단계를 서술하면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A. 선교초기시대
1880년대 중반에 구체화되기 시작한 개신교의 도래와 수용에서 일제하로 들어갈 때까지의 시기를 선교초기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개신교 유입은 단순히 어떤 특정 종교의 전래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의 한국사회는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위하여 힘겨운 노력을 기울였지만, 세계자본주의의 확장에 따라 등장한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여 결국은 식민지화의 길로 빠져 들어가던 상황에 처해있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이러한 혼돈의 상황에서 서양문명과 미국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한국 땅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근대사회를 세우고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선각자적인 지식인, 전통사회의 관료․양반․지주 등의 억압을 받던 민중, 시대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선택한 구도자 등이 자신들의 다양한 동기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교회로 들어왔다. 이 가운데서 교회를 통해 근대사회로 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사람들의 동기는 위정척사파 식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한 사람들을 제외한 다수의 한국인들이 바라는 바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천주교 박해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 땅에서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벌이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실제적인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활동을 통해서 한국인에게 접근하고자 하였다. 시대의 변화, 근대사회를 향한 한국인의 요청, 선교의 방편 등과 같은 요인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선교본국의 도움을 받아 학교와 병원 등이 설립되었다.
이 시대의 사회복지는 아직까지 전통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즉 가족과 친족 그리고 지역공동체가 복지의 가장 중요한 주체가 되고 있었다. 서양의 경우 근대적인 국가가 복지의 주체가 되기 전까지는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서양의 기독교회에 해당되는 교회의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가장 주도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교는 국가나 친족과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으며 종교적인 성격도 상대적으로 약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한말의 전통종교는 실질적으로 복지와 관련하여 별다른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기독교회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대안을 제시하였고, 생활개혁․정치적 각성․사회봉사 등의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학교와 병원을 통한 사회봉사가 한국사회복지의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장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885년 감리교의 정동제일병원을 필두로 1910년경까지 약 30여 처에 병원이 세워졌다. 기독교회는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서 배재, 이화, 경신 등 여러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고, 1900년대 들어서는 당시의 애국계몽운동과 맥을 같이 하면서 많은 학교들이 세워졌다. 그리하여 1909년 현재 720개의 학교에 17,656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일반사립 및 관․공립 학교가 60개교였고 그 학생수가 10,914명이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당시 기독교 계통학교의 비중을 잘 알 수 있다. 감리교의 홀(R. S. Hall)여사에 의해 1894년 최초의 맹인학교의 농아교육이 시작되었으며, 고아들을 위한 사업이 1892년 성공회의 랜디스(E. B. Randies)에 의해 인천에서 시작되어 서울, 부산 등에 고아원이 설립된 것도 관심을 기울일만한 일이었다. 당시의 기독교회에 의해 세워진 학교나 병원이 절대치에 있어서 한국민의 교육과 의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였지만, 근대적인 의료시설이나 교육시설이 거의 없었던 구한말의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가 세운 병원과 학교는 비중이 클 뿐만 아니라 선구적인 것이었다.
B. 일제시대
일제시대는 한마디로 왜곡된 근대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성공한 일본은 시장의 확장을 위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통하여 한국인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3․1운동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국인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회를 향한 요구도 강하게 일어났다. 일제는 한국인의 이러한 요구에 대항하면서 그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몇 가지 정책들을 실행하여 학교와 병원을 지었다. 일제가 만든 학교는 한국인의 근대적 요구에 대한 대응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교육과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지배의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병원 역시 근대적 의료기관 설립이라는 의미와 함께 노동력 보존을 위한 전염병 방지의 의미가 강했다. 그리하여 폐결핵병원과 나병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아편을 허용하는 등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일제시대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시대이다. 따라서 근대적인 사회복지가 나타나게된 사회적 조건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사회복지가 산업사회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때, 일제시대는 근대적인 복지의 기틀이 시작될 수 밖에 없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21년 내무국에 사회과가 신설되면서 국가 기구 속에 사회복지 담당부서가 만들어졌고, 1929년 구호법을 제정 공포하였으며, 1944년에는 조선구호령이 공포 실시되었다. 이러한 기구의 개편과 법제의 마련은 사회복지의 이념으로서의 사회권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식민지 지배의 방편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식민지 지배시기에는 복지시설의 종류와 수도 꾸준히 늘어났다. 그리하여 1936년 현재 국립과 사립을 합하여 31종 287개의 복지시설이 운영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제시대의 기독교 학교와 병원 그리고 각종 복지시설들은 일제당국에 의해 세워진 시설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전체 복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당국에 의해서 세워진 복지시설이 사회통제적인 성격이 강하였던 것에 비해서 기독교회에서 세운 복지시설은 보다 더 인도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기독교 계통 사립학교가 일제 당국에 의해 세워진 공립학교의 식민지 교육과 비교하여 대항적이고 대안적인 성격을 일부 띠었던 것과, 나환자 요양원의 비교연구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바와 같이 기독교 계통의 복지시설 역시 일제가 세운 시설과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경쟁적인 성격을 띠었던 측면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 한국교회가 행한 중요한 사회복지사업으로는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의 농촌사업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20년대에 활발하였던 절제운동, 물산장려운동, 폐창운동 등에서도 한국교회는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그 외에도 농아학교, 고아원, 양로원, 나병원, 결핵요양원, 아동보건소, 자선남비 등을 통해서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지금까지 나온 한국사회복지 발달사와 관련된 논의에서는 이 문제가 별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좀 더 실증적이고 포괄적으로 이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C. 외원의존시대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한국교회 복지활동은 외원시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미국 등 서구 여러 나라의 원조에 많이 의존하였다. 이 시대 한국의 복지 일반도 외국의 원조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후부터 60년대까지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나라는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특히 1950년대는 전쟁의 고통과 상처를 경험하던 시절이었다. 빈곤과 전쟁의 상처는 수많은 복지의 대상자들을 배출하였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을 감당할 만한 힘이 없었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의 복지에 크게 기여한 당시의 중요한 법제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사회복지는 외원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 때의 외원기관 가운데 다수는 기독교계통의 기관이었다. 즉 한국에 들어온 외원기관 147개(해방 이전에 들어온 22개 포함)의 종교적 배경을 보면 개신교가 73개(49.7%), 가톨릭이 40개(27.2%), 무종교나 미상이 33개(22.4%), 불교가 1개(0.7%)로 개신교가 전체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연감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연감 1957년 판에 나오는 사회사업단체 목록에 따르면 543개의 사회복지 시설이 나타나고 있다. 보사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57년 당시 547개, 1968년 당시는 615개의 사회복지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물론 기독교연감에 나오는 시설들 속에는 비 인가시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인가 시설 중심의 보사부 통계를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50년대 한국기독교가 사회복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는 있겠다. 1952년 5월 부산에서 7개의 외원기관 대표들이 모여서 결성한 <외국민간원조기관한국연합회>(KAVA)는 제2의 보사부라고 불리울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53년부터 1968년까지 외원기관에서 도입된 물자들을 금액으로 추산하면 약 2억 3,364만불 정도 된다. 따라서 기독교와 기독교인이 이 시기 사회복지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사회사업학과가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사업학과’라는 이름으로 세워지고 이어서 1953년 중앙신학교(강남대학교의 전신)에 사회사업학과가 세워진 후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에 1958년 사회사업학과가 세워졌다는 것을 통해서 해방 후 한국사회복지에서 기독교회가 차지하는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6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외원은 점차 줄어들고 국가에 의한 복지가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가 나타나게 된다. 군사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통치의 안정을 위해서 군인, 공무원 등의 지지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최초의 연금제도가 여기서부터 실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공무원연금법 1962년, 군인연금법 1963년 제정). 이 시기의 복지정책은 일제시대와 비교하여 사회권이라는 의미를 좀 더 많이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군사정권은 경제성장 위주였고 사회정책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으며,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당시의 상황에서 복지국가나 사회보장에 대한 의식도 약했기 때문에 국민의 요구도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외원이 줄어든다는 것은 기독교회의 사회복지가 위축되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60년대는 급속한 신도증가를 경험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 자체의 확장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급속한 신도성장의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이 생겨난 교회들은 교회의 신축 등 자체의 유지 확장에 주로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교회와 사회복지는 점점 소원해지는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통하여 복지분야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60년대 이후 일반적인 교회와 복지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지만 이 시기에 복지활동 영역에서 양산된 개별적 기독교인은 그 후에도 각종의 사회복지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D. 자립준비시대
70년대에 이르러 한국은 어느 정도 경제성장에 성공하여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선진국에서 들어오던 원조는 급속하게 감소되었고 그 결과 복지의 책임을 국가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관심사였는데 이제 70년대에 이르면서 인간다운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전태일의 분신이나 성남의 소요사건은 하층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저항이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억압적인 국가 권력은 이러한 욕구의 분출을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재벌의 지지와 중산층의 묵인 아래 유신체제라는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적인 통치는 자체의 모순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끝을 맺었지만, 광주를 짓밟고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세력에 의해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권력이 억압적인 성격을 띤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성장과 교육수준의 증가에 따른 시민들의 복지에 대한 욕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부터 근대적인 사회보장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집권의 명분을 가지지 못한 5공화국의 경우 복지사회를 체제정당화의 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 6공화국 시절 일련의 복지 관련 법안 및 제도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동복지법(1981), 심신장애자복지법(1981), 노인복지법(1981), 최저임금법(1986), 모자복지법(1989), 장애인고용촉진 등에 대한 법률(1990) 등을 들 수 있다. 제5공화국 이후 정부는 복지사회를 모토로 여러 가지 복지제도와 법안은 만들었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재원이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민간인이 복지시설을 설립하면 그 운영권을 가지면서 국가로부터 운영비용을 보조받는 독특한 형태의 복지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외원시대에 복지활동에 참여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지시설을 설립하면서 변화된 상황에 적응해 갔다. 그리하여 1979년 현재 보사부에 등록된 시설을 종교별로 분류한 바에 따르면, 부녀복지시설의 87%, 아동복지시설의 91%, 양로원 시설의 67%가 기독교 계통의 시설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1987년 166개 시설, 1,393명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사회복지시설 종사자의 63%가 개신교 신도이고, 천주교가 14%, 불교 6%, 원불교 5%, 천도교 1%, 무종교 15% 등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기독교 계통의 시설과 기독교인의 사회복지에 대한 참여의 정도는 그 인구 비율에 비하여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분석의 단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그러한 활동이 기독교인 개인의 활동이라는 성격이 강하지 교회의 조직적 활동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교회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각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대 최고의 역사적 과제는 민주주의의 확립이었다. 그리하여 진보적인 교회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노동자와 하층민에 대한 관심도 많이 생겨나서 민중교회가 생겨나고 민중신학이라는 독특하고도 한국적인 신학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관심은 상대적으로 소수자에 해당하는 일부 진보적인 교단이나 교회에서 나타났을 뿐이다. 다수의 보수적인 교회들은 사회적인 관심보다는 교회 자체의 확장에 몰두하였고, 선교 혹은 전도라는 말은 이러한 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면 교회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에 대한 비판이 교회 안팎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이 시기 신도수도 엄청나게 늘어나 1985년 인구 및 주택센서스 통계에 따르면 한국개신교인의 수는 6,489,282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15% 가까운 숫자가 되었고, 한국의 종교 가운데 가장 많은 교회(26,044개)와 성직자(40,717명)를 보유하게 되었다. 한국의 종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개신교는 사회적인 책임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적지 않은 교회들이 사회봉사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E. 자립발전 시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직선에 의해 노태우 정권이 등장하였고, 이어서 이른바 문민정부라 불리는 김영삼 정권과 최초의 정권교체에 의해 국민의 정부가 세워지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형식적인 민주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과거의 민주화운동과 같이 한 시대를 주도하는 이념이 나타나지 않고 통일, 환경, 여성, 교육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의 시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시기 국가의 복지정책을 보면 6공화국 시절에는 몇 가지 변화도 있었지만 문민정부 이후에는 특별한 진전이 없었다. 특히 IMF체제와 함께 시작된 김대중정권은 경제정책 혹은 노동정책에 주로 매달리게 되었지 사회정책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한국교회의 경우 이 시기에 이르면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고 구체적인 사회봉사 혹은 사회복지 활동은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특별히 1990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신도성장의 정체 현상은 한국교회에 많은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사회적 공신력의 상실이 이러한 현상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회적 공신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내부의 개혁과 함께 이웃과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교회들이 사회봉사활동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 결과 모범적인 모델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들은 사회봉사의 필요성에 공감은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제약을 느끼게 되었고, 사회봉사를 하고 싶어도 재정, 공간, 프로그램, 인력 등에 있어서 많은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신도 수는 늘어나지 않는데 성직자와 교회 수는 늘어나게 되어 수많은 소규모의 개척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러한 교회들은 자체유지에 급급할 뿐 사회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거대한 건물을 세운 교회들의 경우 건축비와 관리비의 압박을 많이 받게되어, 그 규모에 걸맞는 사회봉사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5년 현재 한국 개신교는 교인수 8,760,336명, 교회수 58,046개에 이르는 한국 최대의 종교가 되었다. 현재의 사회봉사 상황은 미흡한 형편이지만 그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넓게 형성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면 한국교회 사회봉사는 한국사회와 사회복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Ⅲ. 한국교회 사회봉사 현황
A. 사회복지 의식
복지활동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행동은 행위자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영향을 받게된다. 행위자로서 기독교인이 사회복지활동을 할 때에 작용하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1차적인 출처는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 속에 사회복지와 연결될 수 있는 논의나 규범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성서 속에는 사회복지 혹은 사회봉사와 연결시켜 논의할 수 있는 귀절들과 내용들이 풍부하게 담겨져 있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기독교사회복지 문헌 속에 이러한 성경귀절들이 많이 인용되어 소개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많이 소개되는 성경귀절 가운데 하나는 신명기 14:19-22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며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성중에 거하는 떠돌이, 고아와 과부들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신약성경의 경우 사도행전 6장 1-7절에 나오는 구제를 위한 최초의 집사 선택과 최후의 심판 기준이 이웃에 대한 관심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아주는 것’임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주 소개되고 있다(마태 25:31-46).
사회복지의 신학 혹은 사회봉사의 신학은 아직 제대로 정립되어져 있지 못한 형편이다. 기독교사회복지학 쪽에서는 아직까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신학적인 작업에 이르지 못하고 사회복지학 혹은 사회복지발달사의 영역에 머물면서 필요한 경우 성경귀절을 인용하는 정도이다. 최근 실천신학, 성서신학, 선교신학 등의 영역에서 사회봉사와 관련된 논의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시론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한국의 사회복지 현실과 사회상황을 소화하여 신학화하는 작업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학 혹은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이 문제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학의 분야이지만 이 영역 역시 외국학자들의 소개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 사회과학적 논의들을 흡수하여 다루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복지신학의 정립은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일을 위한 다학문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한국교회의 사회봉사와 관련한 태도 혹은 의식에 대한 조사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통계학적 신뢰성이 높은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의 조사에 따르면 ‘사회봉사사업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질문하였을 때 전체 응답자 1,218명 가운데 3.0%가 ‘정부나 복지기관의 일이므로 관여할 문제가 아님’이라고 하였고, 23.2%는 ‘정부, 복지기관의 역할부족 시에만 보충적으로 해야함’이라고 답하였으며, 절대다수인 73.7%는 ‘정부, 복지기관에 관계없이 적극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다. ‘사회봉사는 교리상 신앙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라는 주장에 동의하는가를 물은 질문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의’가 6.6%, ‘동의하는 편’이 27.5%, ‘반대하는 편’이 40.6%, ‘전적으로 반대’가 25.3%로 나왔다. 동의 쪽의 주장이 34.1%로서 전체 답변의 1/3가량이 된다. 이러한 두 질문을 통해서 볼 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어떤 형태이든 사회봉사를 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사회봉사가 교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성격의 질문은 질문자가 좋아하는 답변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봉사를 교회가 해야할 하나의 사업정도로 생각할 뿐 그것을 신앙의 본질과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는 신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신학이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교리적인 성격을 띠는 보수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장통합측의 목회자 2,008명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사회봉사에 대한 의식의 정도가 좀 더 높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으로서의 사회봉사’에 대한 목회자들의 견해를 알아본 결과 ‘전적으로 동의’가 57.6%, ‘동의하는 편’이 31.7%, ‘동의하지 않지만 중요함’이 9.7%, ‘동의하지 않음’이 0.5%, 무응답 0.5%로 나왔다. 동의편이 89.5%의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의 조사보다도 23.6%나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난 데에는 질문의 방식, 질문시기의 차이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겠지만 보다 중요한 요인은 교단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장통합측은 KNCC 가입교단으로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전통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조사보다는 사회봉사에 대하여 전향적인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상의 조사들에 따르면 한국교회가 적어도 의식이나 관념의 측면에서는 사회봉사에 대하여 상당히 지지하는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적인 요소가 실제적인 활동으로 연결되고 있는가의 문제를 살펴보면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못하고 있다.
B.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구조적 조건
한국교회는 한국 땅에 유입 된지 110년 남짓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사회복지의 역사 또한 매우 짧아서 서양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교회와 사회복지 사이의 구조적 통합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최근 들어 전체국민의 20%정도가 기독교인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지만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문화는 아직까지 일반화되어 있지 못하며, 세속화의 흐름 속에서 사회의 다른 제도들과의 연결관계도 약한 편이다. 사회복지의 경우 교회가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복지의 공적인 전달체계 속에 교회가 들어가 있지는 못하다. 세속화된 다종교사회에서 한국교회가 사회복지의 공적인 통로가 되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려운 것이 현재의 구조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사회복지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법적․제도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교회는 한 민간단체로서 자발적인 결정에 의해 사회복지에 참여하고 있을 뿐 사회복지 참여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나 제재를 받지는 않고 있다. 즉 한국사회 속에서 교회의 사회복지는 교회 자체의 결정에 의해 행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사항이 되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사회복지나 사회봉사 활동은 후순위로 밀려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사회봉사와 관련된 한국교회의 미시적인 구조적 조건 가운데 중요한 것은 개교회주의이다. 개교회주의란 “교회가 그 목표를 설정하고 활동을 전개하며 교회내의 인적․물질적 자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개별 교회 내부의 문제, 특히 개별교회의 유지와 확장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 태도 또는 방침”을 말한다. 이러한 개교회주의가 형성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지도자의 공명심이나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물론 그러한 요인도 작용하였지만 세속화된 사회에서 국가나 다른 사회제도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는 상황에서 교회라는 조직체를 유지하기 위한 생존의 전략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개교회주의 원리는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게 하며, 교회활동의 우선 순위를 결정함에 있어서 사회봉사가 후순위로 밀려나도록 할 가능성을 크게 만든다. 개교회주의가 만들어내기 쉬운 또 하나의 성향은 물량주의라고 할 수 있다. 물량주의는 신도들의 내적 성숙보다는 교회 조직의 외형적 성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섬김과 봉사를 추구하기보다는 신도들 개개인의 심리적․종교적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쉽게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개교회주의․물량주의 등이 한국교회 운영 원리로 작용하면서 한국교회의 사회봉사가 위축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소형화 현상도 교회의 사회복지 혹은 사회봉사 활동을 위축시키는 중요한 구조적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규모를 1995년 인구센서스 통계를 근거로 신도수를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1교회당 약 151명의 신도가 소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8,760,336명의 신도와 58,046교회). 이것은 불교의 1개 사찰당 893명의 신도(10,321,012명의 신도와 11,561개 사찰), 천주교 1개 본당의 2,896명의 신도(2,950,730명의 신도와 1,019 본당교회)와 비교할 때 매우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숫자도 소수의 대형교회에 수 천명 이상의 신도가 밀집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평균적인 교회들의 규모는 더 작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신도수 별 분포를 예장 통합측의 통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등록된 성인신도의 수가 50명 이하인 교회가 47.0%, 51-100명이 19.0%, 101-300명이 19.5%, 301-500명이 5.5%, 501-1,000명이 4.5%, 1001명 이상이 3.5%로 나타나 있다. 등록교인 100명 이하인 교회가 전체 교회의 2/3에 해당되는 66.0%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통계 속성상 등록교인과 실제 활동하는 교인들 사이에 편차가 크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성인신도가 100명이 못되는 소형교회들이 한국 교회의 80% 가까이 차지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추정은 아닐 것이다. 성인신도가 50명 이하가 되면 교회의 경제적 자립이 위협받을 수 있으며, 50에서 100명 사이의 신도를 가진 경우 교회의 경제적 자립은 가능하지만 사회봉사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소형화 된 것은 90년대 이후 신도 수는 정체된 상태에서 성직자 수와 교회수가 급증한 것이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소형화 현상에 대한 분석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이지만, 그것이 한국교회 사회봉사에 많은 어려움을 준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C. 사회봉사의 재정 및 활동
한국 교회가 사회봉사에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동안의 여러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여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한국교회가 사회봉사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예산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그 동안의 여러 연구들을 정리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체 예산 가운데 사회봉사가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1980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조사에서는 5%, 필자가 1982년 자료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2.3%,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의 1989년 조사자료에 따르면 7.8%, 필자가 1992년 자료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3.88%, 기독교경영연구소의 1997년 분석에 따르면 5.6%가 나오고 있다. 각각의 연구마다 편차가 생기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조사 방법에 대한 비평적 검토를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나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와 같이 비교적 높은 비율로 나온 자료들은 성직자의 주관적 평가 자료이다. 즉 ‘귀 교회의 사회봉사 예산은 전체 예산의 몇% 정도 되십니까?’하는 식의 질문에 대하여 성직자들이 답변한 것이다. 반면에 필자의 조사와 같이 비교적 낮은 비율로 나온 경우는 각 교회들의 연간 재정결산서를 분석하여 그 가운데 사회봉사비에 해당되는 액수를 전체 예산으로 나누어 계산한 것이다. 따라서 필자 등이 행한 방법이 주관적인 답변에 비하여 더욱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문조사를 하면 대부분의 경우 사회봉사비․교육비․선교비 등은 실제보다 높게 보고하고, 관리비․운영비․교역자 급여 등은 실제보다 낮게 보고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사회봉사 예산은 전체 예산의 3-5% 정도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 전체 예산이 얼마나 되는가를 추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가 1992년 자료에 근거하여 추정한 바에 따르면 성인 1인당 연간 헌금 액수가 약 51만원 정도 되며, 98년 ‘한국교회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한미준)과 갤럽의 공동조사에 따르면 1인당 약 100만원 가량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개신교 성인신도의 수를 약 500만명 정도로 추산하면 한국교회 전체 헌금 액수는 약 5조원 가량 된다. 이 가운데 5% 정도가 사회봉사예산이라고 한다면 2,500억원 정도가 한국개신교회의 사회봉사 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3조원에 이르는 보건복지부 전체 예산의 약 8% 수준에 머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재정은 보는 시각에 따라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금액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체 액수 자체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교회 안에서 사회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는 재정의 비율이 교회의 영적, 도덕적 성격과 관련해서는 더욱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한국교회가 어떤 사회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예장총회에서 1993년에 2,008개 교회를 조사한 바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 동 복 지:493사례(24.6%) - 선교원(204), 유아원과 유치원(181) 어린이집과 놀이방(61), 어린이 공부방(22), 농번기 탁아소(7), 기타(18)
청소년복지:246사례(12.3%) - 청소년 공부방(112), 장학사업과 장학관(116), 계절학기(5), 야학(7), 기타(6)
여 성 복 지: 43사례( 2.1%) - 주부교실(39), 직업훈련(1), 모자원(1), 후원사업(2)
노 인 복 지:204사례(10.2%) - 노인대학(90), 경로잔치(78), 양로원과 요양원(6), 급식프로그램(6), 경로당과 노인정(6), 재가노인복지(9), 기타(9)
장애인복지:32사례(1.6%) - 장애인교회(6), 사회재활(8), 상담(1), 공동체(2), 기타(5)
보건정신의료:46사례(2.3%) - 무료진료(30), 병원봉사(3), 보건위생과 방역(4), 이․미용 기타(9)
교 정 복 지: 9사례(0.4%) - 재소자서비스(6), 출소자서비스(2), 기타(1)
지역사회복지:151사례(7.5%) - 결혼교실(2), 도서실(22), 시민대학(17), 농산물공동구매(22), 소득증대사업(4), 무료급식(5), 바자회(25), 인권사회운동(5), 영농교육(6), 소식지(15), 종합복지관(4), 기타(24)
기 타: 62사례(3.1%) - 가족상담(12), 노동상담(3), 공원선교(2), 빈민구제(31), 특수선교(5), 기타(9)
위의 사례들을 통해서 한국교회 사회봉사활동 프로그램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국교회 사회봉사의 대상은 아동․청소년․노인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국교회는 공부방, 장학사업, 주부교실, 노인대학, 경로잔치 등 비교적 경비도 적게들고 시행하기에 수월한 프로그램을 많이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전문적인 사회복지기관이 아닌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이 지닌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이 비전문화 되고 형식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사회봉사 프로그램 가운데 선교원, 유아원, 어린이집 등이 상당히 높은 빈도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설이나 프로그램들은 교회에 따라 다양한 성격을 나타내지만, 대다수는 유급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유급프로그램의 경우 자칫 시장원리가 작용하여 순수한 사회봉사가 아닌 영리적인 성격을 띨 위험성이 있다. 또한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경우 자율성의 상실, 회계감사를 받기 위한 허위문서의 작성 등으로 인해 복음의 원리에서 벗어나고 사회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사회복지 수용시설의 운영재단의 종교별 분포를 통해서도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현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996년 6월 현재 보건복지부가 허가한 716개 시설 가운데 종교 재단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전체의 55%에 해당되는 393개소이다. 이것을 종교별로 보면 개신교 266개(37.2%), 천주교 81개(11.3%), 불교 15개(2.1%), 원불교 15개(2.1%), 천도교 2개(0.3%), 기타 14개(2.0%)의 순으로 나타나며, 종교적 배경이 없는 시설은 323개(45.1%)이다. 앞서 논의한 바 있는 70년대의 시설의 80%정도가 기독교 계통의 시설이었고, 80년대의 시설 종사자 63%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90년대 중반 기독교 재단 시설이 전체의 37.2%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사회복지시설에서 기독교가 가지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개별 교회들의 사회봉사활동은 90년대 들어 약간씩 늘어나는 성향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지만 전문적인 복지시설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종교적 배경이 없는 재단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 재단의 경우에도 그 운영비의 상당부분을 국가지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회복지의 주체가 국가로 옮겨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단 차원의 사회봉사 현황은 예장통합측이 1994년 사회봉사총람을 발간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그 현황이 정리되어 있다. 이 총람에 수록된 각 교회에서 행하는 사회봉사활동은 앞에서 이미 소개하였고, 총회나 노회에서 운영하는 시설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총회와 노회 운영 복지시설이 11개이고 총회 산하 의료보건 시설 및 특수 지역 교회가 61개이며, 총회 산하 초중고 대학교가 37개이다. 예장 총회는 1978년 상설부서로 사회부를 창립하였고, 1984년 사회선교지침을 제정하였으며, 1986년에는 사회선교정책의 현장화를 위하여 ‘사랑의 현장 갖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997년 총회의 ‘21세기 교단발전을 위한 정책 제안서’ 속에는 사회봉사와 관련된 내용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총회 사회부는 복지, 훈련, 교회와 사회 등 3개 영역으로 나누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98년 현재까지 복지분과에서는 북한동포를 위하여 19억원을 모금하여 5,432톤의 옥수수와 의료품, 비료 등을 지원하였으며, 실직자를 돕기 위한 쉼터와 상담소,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1997년 총회회의록에 따르면 수해구조비로 4억9천만원, 재해구조비로 6억2천만원, 일반구조비로 3,300만원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훈련사업으로는 1979년부터 1994년까지 28차에 걸쳐 614명의 목회자, 신학생, 평신도 지도자에 대하여 사회개발과 선교권 강화를 위한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외에도 사회봉사 신학생 훈련(93년, 98년)과 사회선교훈련(94년)을 통해 170명을 훈련하였고, 65명의 목회자에 대한 해외연수훈련과 79명에 대한 환경지도자 양성학교 훈련을 실시하였다.
감리교 총회의 경우 1교회 1가정 후원사업, 각 교회마다 사회봉사비 10%이상 책정하는 운동, 교회사회봉사의 이론 정립 및 교육활동, 감리교 산하 사회복지기관 지도향상책 연구, 긴급재해 지원사업, 프로그램 개발 사업 등을 준비하고 있다. 감리교 산하에는 1994년 현재 24개의 각종 사회복지 시설과 82개의 어린이집, 4개의 유치원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Ⅳ.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쟁점
교회는 사회복지기관이 아니면서도 교회가 추구하는 속성상 사회복지 혹은 사회봉사와 관련된 내․외적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여러 기능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면서 사회봉사활동을 하는가의 문제에 직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이 생겨날 수 있는데 이와 관련된 쟁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선교와 복지의 문제
교회는 1차적으로 예배와 선교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죄인된 인간의 속죄와 구원을 추구하는 예배공동체이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그 안으로 들어올 것을 전하는 선교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교회가 예배와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고 하겠다. 사회봉사는 디아코니아라고 하여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아니면 선교의 도구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의 문제가 항상 대두된다. 진보적인 교회에서는 사회봉사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인정한다면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선교 혹은 전도의 도구로서의 의미를 더 중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약간의 편차가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봉사를 행하는 모든 교회 혹은 종교단체들은 그것을 선교나 전도의 도구로 여기는 경향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다.
사회봉사를 선교의 도구로 삼는 것은 사회복지의 정신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사회복지사 윤리강령 제4조를 보면 “사회복지사는 계급, 인종, 학식, 종교 등에 따라서 클라이언트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회복지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회통합이다. 즉 여러 가지 문제상황에 처한 사회성원들을 지원하여 사회 전체의 통합이 유지되고 사회성원 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줄이는 것이 사회복지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사람이 클라이언트를 종교나 기타 어떤 기준에 근거하여 차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또한 사회복지나 사회봉사 활동의 주체와 그 대상자 사이에는 권력의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복지의 주체로서의 교회 (혹은 기독교인)는 그 클라이언트에 대해서 자신의 종교를 강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이것은 사회복지의 중요한 윤리 가운데 하나인 클라이언트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직감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클라이언트는 교회의 사회복지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사회복지활동이 순수하게 교회 자체의 예산만으로 이루어질 경우에는 선교의 방편으로서의 사회봉사가 가지는 문제가 완화될 수 있지만 교회나 종교단체가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사회복지활동을 전개하는 경우 교회의 선교적 활동이 클라이언트의 복지선택권이나 종교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교의 수단으로서의 사회봉사 활동이 꼭 부정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선교란 기독교적인 구원의 원리와 삶의 방식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와 같이 높은 윤리의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이며 인간적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원리는 인간존엄이라고 하는 복지의 원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선교활동 그 자체가 복지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독교적 신앙을 가질 때 정신적으로 회복되며, 윤리적인 아노미를 극복할 수 있으며, 근면해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며, 인간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 참된 신앙이 참된 인간성을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선교는 곧 복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선교가 사회복지의 목적이 될 때, 복지의 주체자가 클라이언트에 대한 큰 관심과 열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테레사 수녀의 위대한 봉사는 그의 신앙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인은 물질적인 보상이나 명예를 얻지 못하면서도 평생동안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신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핵심은 다른 사람도 구원하겠다는 선교적인 열정이다. 따라서 교회사회복지나 기독교사회복지에서 선교적 목적을 제거하라는 것은 섬김의 삶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복지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복지의 담당자가 사무적이고 직업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복지의 프로그램은 있지만 클라이언트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없는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사회봉사 속에 들어있는 선교적 목적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사회봉사가 선교적 목적에서 수행되어지면 장단점이 함께 나타나기 마련이다. 기독교 속에 포함되어져 있는 인간성 회복의 추구와 복지에 대한 열정 및 애정을 살리면서도, 그것이 클라이언트의 선택권이나 종교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교회의 사회봉사 담당자는 복지주체로서의 힘에 의한 선교가 아니라 사랑과 헌신을 통한 선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B. 보완성과 실험성의 문제
현대사회에서 사회복지의 가장 중요한 주체는 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세속화된 정부의 출현과 다종교사회의 형성은 전통적으로 교회 혹은 종교가 주도적으로 담당하였던 사회복지나 교육의 영역을 국가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과거 기독교 세계에서와 같이 복지의 중심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황이다. 현대와 같이 분화된 사회에서 교회는 종교단체로서 교회 나름의 전문적인 영역을 가져야 되지 복지기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 나눔 봉사 등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치이고, 교회의 교회다움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열매이기 때문에 이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국가가 중심이 된 사회복지의 보완 혹은 보충적인 역할을 교회가 담당해야 할 것이다.
국가가 중심이 되는 사회복지의 가장 큰 약점은 관료제와 인력의 문제이다. 국가 사회복지 전달체계는 국가 기구에 속하여 있고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관료제화 될 수밖에 없다. 복지를 담당하는 공무원 개개인 가운데는 복지대상자에 대하여 비관료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관료제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의 복지 추세가 대규모 시설보다는 그룹홈과 재가복지를 중요시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룹홈과 재가복지 활동의 성공여부는 관료제적인 요소를 얼마나 많이 탈색시키고, 훈련된 자원봉사자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는 중요한 잠재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즉 교회가 가진 공동체적인 속성은 관료제적 요소를 극복하는데 매우 큰 힘이 될 수 있다. 또한 자원봉사 활동이 지속되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자원봉사자들 사이의 횡적인 연대가 약하다는 것인데 교회조직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정신과 자원봉사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잘 활용하고 우수한 자원봉사 인력을 기를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복지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사회복지 대상자들을 향하여 물질적인 지원을 하는데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사랑과 섬김의 정신에 충실한 교인들을 잘 훈련시키고 횡적으로 잘 연결시켜 격려함으로써 재가복지, 지역복지의 중요한 담당자가 되도록 하여 국가가 하기 힘든 일을 보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교회의 사회복지는 실험적인 활동을 통하여 전체적인 사회복지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국가나 국가의 지원을 받는 시설들은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미 만들어진 틀이나 기준을 벗어나기 어려운 속성이 있다. 국가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고 그에 따른 감사와 감독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결과가 불확실한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쉽게 실행할 수는 없다. 더욱이 복지시설 평가제가 도입될 경우 평가 기준을 맞추기 위한 활동에 더욱 몰두하여 실험적인 활동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국가기구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에 있는 교회는 외부적인 간섭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의미 있는 실험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 현직에 있는 복지전문가들과 협동하여 시행착오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외국의 발달된 프로그램을 도입하거나 변화된 현실에 맞추는 실험적인 복지 활동을 교회가 수행하여 좋은 효과를 얻은 경우 그것을 학계나 관련시설에 발표하여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여 사회복지에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는 교역자와 신도의 특별한 관심과 전문적인 인력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실험적인 활동을 하기 어려우면 전문적인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복지시설과 연계하여, 교회는 인력과 재정을 제공하고 시설은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협동적 사업을 위해서는 교회가 지나치게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교회의 명예를 높이려고 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C. 한국교회와 사회복지 이데올로기의 문제
교회가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을 가장 간단하게 나눈다면, 교회조직력을 이용하여 사회에 대하여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첫번째 방법이고 신도들의 의식과 태도 변화를 일으켜 신도들을 통하여 사회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두번째 방법이다. 한국의 교회사에서 볼 수 있는 바 진보적인 교회가 중심이 되어 실행하였던 교육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은 전자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의 방식은 짧은 역사적인 기간 동안 확인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막스 베버의 역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기독교회의 윤리적인 가르침이 신도들 개개인의 경제활동에 영향을 주어 자본주의의 형성에 기여한 바를 밝힌 것이다.
한국교회의 다수는 보수적인 교리에 근거하여 사회와 교회를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사회의 문제는 교회와 별다른 관계를 가지지 않는 이원론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즉 사회의 주도적 이데올로기가 아무런 여과 없이 교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의 정치경제를 움직여나가는 중요한 원리는 자본주의적 성장 이데올로기, 분단에 근거한 반공 이데올로기였는데 한국교회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한국교회에 확연하게 나타난 반공주의, 교회성장신학, 물량주의, 기복신앙 등은 모두 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과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교회가 여과 없이 받아들여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주어진 사회의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 무관심하면 그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이고 원색적으로 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사회복지와 관련된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빅 조지와 폴 윌딩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반집합주의, 케인즈주의적 전통을 따르고 있는 소극적 집합주의, 페이비언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는 사회주의, 그리고 가장 좌파적인 성향이 강한 막스주의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사회복지에 대해서 반집합주의는 확실하게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며, 막스주의자들은 그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결국 자본주의를 지속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를 한다. 소극적 집합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하는 입장에서 빈곤의 퇴치를 위한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입장이며,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복지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데, 레이거노믹스와 데처리즘의 등장과 함께 반집합주의에 가까운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미국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1998년 선거에서 많은 좌파정권이 들어선 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소극적 집합주의와 페이비언사회주의 사이의 어느 곳에 위치한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WTO체제의 형성과 금융자본주의의 발달에 의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IMF체제라는 것도 이러한 세계자본의 움직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현재의 김대중정권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상호 모순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원활한 조화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현 정권이 지나치게 시장경제에 몰두하여 신자유주의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는 논의도 나오고 있다. 만일 우리가 신자유주의 쪽으로 기울게 되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높은 실업률이 만성적으로 진행될 위험이 있으며, 고용의 조건은 더욱 열악해질 가능성이 크다. 설사 경제가 회복된다 하여도 사회성원들 모두는 격렬한 경쟁에 시달려야 하며, 경쟁에서 이긴 자와 패배한 자 사이의 격차가 더욱 커지는 결과가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마르틴과 슈만이 말한바와 같이 ‘20 : 80의 사회’가 될 수 있다. 즉 소수의 20%만 안정되고 여유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나머지 80%는 불안정하고 소득이 낮은 직장에서 일하거나 실업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교회는 구체적인 사회봉사나 사회사업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일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이것과 아울러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 이데올로기가 어떤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란 한 사회의 방향과 복지의 수준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어떤 정치경제적 이념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가까운가를 잘 가르쳐 주어야 한다. 사실 이 세상의 어떤 세속적인 이데올로기도 하나님 나라와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좀더 가깝거나, 멀 수는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좀 더 가까운 것을 지지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신도들을 고무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기독교적인 정의의 문제와 사회현실을 연결하여 생각하는 훈련도 필요하다고 하겠다. 물론 이 경우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고 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성직자나 교회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신도들의 시민적 활동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교회 조직이나 성직자가 지나치게 깊숙이 개입할 경우 권력 갈등의 장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권력의 문제와 항상 연결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고 교회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면서 그것을 비판하고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구체적 현실정치의 문제에 너무 깊이 개입하면 교회가 정치집단화 할 수 있고 교회의 본질적 기능이 훼손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것도 위험하다. 정치경제적 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강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비판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방향은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신자유주의적 입장 곧 반집합주의적 입장은 기독교적 원리에서 볼 때 경계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의 단기적인 효율성에 있어서 뛰어난 원리인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의 원리에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원리는 ①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인간 개개인을 지나치게 극심한 경쟁으로 몰아 넣어서 인간관계의 훼손을 가져올 수 있으며, ②결과적으로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켜서 사회통합과 공동체성을 파괴할 수 있고, ③효율성의 증대를 위하여 자연을 착취하여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원리가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그것을 손쉽게 정당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엘리트주의적 원리이며, 물질적인 부를 일차적으로 중요시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대중적이고 영적인 원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지지향적, 대중지향적, 공동체지향적, 자연친화적 원리와 이데올로기를 더 많이 선호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교회는 미국식 자본주의보다는 구라파에서 추구하고 있는 사회민주적 이데올로기를 정신적으로 지원해야 할 것이며, 최소한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 보다는 복지지향적인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독일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는 기독교사회윤리나 경제신학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교회는 복지지향적인 정치경제 이데올로기를 지지함으로써 신도들로 하여금 그러한 지향성을 가지게 하여 하나님 나라에 한 발 다가서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다.
Ⅴ.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모델
교회가 할 수 있는 사회봉사활동은 국가의 복지활동과 비교하여 그 규모가 작고 범위가 좁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의 실시는 현장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특정한 모델을 만들어 놓고 기계적으로 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방향을 설정하기 전에 교회사회복지가 직면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개략적으로 검토하여 그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는 한국교회 가운데 교회사회봉사를 모범적으로 행한 교회들의 사례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모델을 구성하고자 한다.
A. 지역에 따른 모델
교회의 사회봉사는 기본적으로 지역복지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처해 있는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제1차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지역의 특성을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농어촌지역, 도시지역, 특수지역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특수지역은 탄광촌, 공단, 관광지, 도심지, 군사지역 등 그 지역사회가 특수한 기능을 수행함에 따라 독특한 인구구조와 사회관계가 형성되는 지역을 말한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 맞는 독특한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이며, 할 수 있는 한 특수지역 교회들의 전국적인 조직망을 만들어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농어촌지역과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농어촌 교회 : 농어촌 교회 사회봉사활동과 관련해서는 이미 모범적인 사례들이 나와있으므로 그것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농어촌사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특성과 관련하여 교회의 사회봉사 모델을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인구의 감소와 노령화현상이 농어촌지역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며 이러한 특성을 감안한 교회복지활동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최근 들어 농어촌 지역 인구 감소율이 약간 둔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감소할 만큼 감소해서 나타난 현상이며, 노령화 현상은 더욱 더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어촌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봉사 프로그램은 노인복지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농촌의 많은 노인들은 질병, 빈곤,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으며 죽음을 앞두고 있다. 따라서 노인주일학교 등을 잘 운영하여 노인들의 영적 건강과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이 일차적인 과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차량을 이용하여 병이 든 노인들의 이동을 도울 수 있으며, 장례식과 관련된 봉사 프로그램도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는데, 이 경우 교회 단독으로 시행하기 어려우면 이웃의 교회들과 상조회 형식의 조직을 만들어 실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노인정을 운영하거나 지원할 수 있을 것이며, 도시에 있는 자녀들에게 지역노인들의 근황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사업도 가능할 것이다. 보건소나 도시교회와 연계하여 의료봉사활동을 할 수 있으며, 해당지역 종합복지관과 연계하여 재가복지서비스를 받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농어촌은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노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노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봉사활동을 계획하면 교회 실정에 따라 많은 프로그램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농어촌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지역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농어촌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먹을 것을 제공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먹거리는 생명의 보존과 직결되어 있다. 농촌의 이러한 특성을 생각한다면 생명운동과 관련된 사회봉사 활동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농약과 화학비료를 적게 사용하는 농사법을 개량하고 그러한 생산물들을 생산하는 수고가 경제적인 보상도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사실상 생명운동은 인간의 이기심과의 싸움이며, 환경파괴로 인해 인류의 재앙을 가져오는 기술문명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은 단순히 경제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신앙적, 사회운동적 차원에서의 접근도 필요하다고 하겠다.
먹거리의 생명가치 보존이라는 측면과 아울러 중요한 것이 생산공동체라는 것이다. 장기간 보관이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농산물의 특성으로 인해 농산물 시장의 유통구조는 매우 왜곡되어 있다. 그리하여 생산자, 소비자, 중간상인 모두 다 손해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농산물 직거래나 유통과정의 합리화를 통해 농민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여러 가지 사회봉사 방법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경제적인 활동에 너무 깊이 개입하는 것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그 방면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 교역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교역자의 지도에 따라 어떤 일을 하였는데 그것이 다른 경제적인 요인에 의해 손해가 났을 경우 교역자의 영적 권위까지 손상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김진홍 목사처럼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분도 남양만에서의 돼지파동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당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직접적인 경제활동과 관련된 사회봉사는 교역자가 아닌 교회의 신도가 앞장서서 행하는 것이 보다 안전한 방법이라 하겠다.
셋째, 농어촌 지역은 지역공동체가 발달되어 있다. 지역공동체가 발달된 농어촌 지역에서 의미있는 사회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지역 주민 사이의 유대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현재의 한국 농어촌교회는 이른바 ‘정거장 목회’라 불리는 바와 같이 교역자의 근무기간이 짧기 때문에 지역공동체와 교회의 지도자가 좋은 유대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유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회봉사나 선교 모두가 큰 어려움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농어촌선교와 사회봉사를 위해서는 교역자의 장기적인 목회가 필요하며, 이러한 목회가 가능하도록 노회나 총회 차원의 지원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농어촌 지역은 지역공동체가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다분히 폐쇄적인 성격이 나타나 처음에는 유대관계를 맺기가 어렵지만, 일단 좋은 관계를 맺게되면 농어촌 교회는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농어촌지역의 사회봉사나 선교에서 뛰어난 결실을 맺은 교회로 널리 알려진 백운교회, 활빈교회, 호저교회, 웅포교회 등의 공통된 특성은 지역주민들과 원활한 유대관계가 맺어져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농어촌 지역에 떠 있는 고립된 섬이 될 경우 선교나 사회봉사 모두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음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다.
넷째, 농어촌 지역은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인구의 감소와 노령화에 따라 농어촌지역에는 현대적인 문화시설이나 교육시설이 거의 들어가지 못하는 실정이며, 전통문화 역시 그것을 이어갈 젊은 사람들이 줄어듦에 따라 점점 약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저녁 내내 TV나 시청하는 형편이며, 때때로 티켓다방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왜곡된 자본주의의 퇴폐적인 문화가 침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공백과 단절 및 왜곡의 상황에서 교회는 문화센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최근 농어촌 교회의 젊은 교역자의 학력이 점점 높아지는 추세이다. 따라서 문화적 영역에서의 여러 가지 사회봉사활동을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고 할 수 있다. 미취학 어린이 보육시설 운영, 어린이 학습지도, 청소년 문화프로그램, 인터넷 등을 이용한 정보의 제공, 마을 신문의 발행 등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면서 농어촌 지역에서 봉사할 수 있는 문화적 활동이라 하겠다. 그리고 농어촌 지역에 남아있는 전통문화와 기독교문화의 결합의 문제도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봉사의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교회가 한국 땅에서 제도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의미도 가진다.
도시 교회 : 도시지역은 농촌지역과는 달리 사회 자체의 성격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하여 교회사회복지의 모델을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 동안 도시지역 사회봉사와 관련하여 다일공동체교회, 도림교회, 덕수교회, 광천교회 등이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었다. 이러한 교회들의 활동을 참고하고 도시지역의 특성과 관련시키면서, 도시교회 사회봉사 활동의 다음 몇 가지 측면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 도시의 지역 공동체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봉사 모델을 만들어야 하겠다.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도시의 경우 그 속성상 지역공동체적인 성격이 나타나기 어렵다. 더욱이 우리 나라와 같이 시간적으로는 급속하게, 규모에 있어서는 대규모의 도시화가 이루어진 경우 공동체적인 성격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다. 신도시 아파트 지역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교회는 1차적으로 신앙공동체로서의 성격을 띠면서 해당 지역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강한 결속력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결속력에 근거하여 지역의 공동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지역공동체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보호, 비행청소년 방지, 노인보호, 지역의 도덕적 유해환경 제거, 빈곤가정이나 결손가정 보호 등 지역주민들이 공동적으로 관심을 가질만한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역공동체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 교회는 사회봉사예산을 사용할 수 있고, 교회 공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목회자가 전면에 나서면 종교적인 벽에 부딪힐 수 있으므로 지역의 동장, 통반장 등을 맡고 있는 신도들이 앞장서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구의원이나 시의원 같은 인물들은 나름대로 좋은 인적 자원이 될 수 있지만 자칫 개인적인 정치적 야심이 작용하여 문제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도시적 삶의 조건 속에서 상실된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은 도시 교회 사회봉사의 중요한 방향이 될 것이며, 이것은 더 넓은 범위의 순수한 시민운동과 연계하여 사회 전체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도시는 많은 인구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관심사에 따른 사회봉사활동을 하기가 쉬워진다. 도시에서는 독특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서예, 그림, 사진, 등산, 스포츠 등 다양한 여가활동이나 문화활동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용이하다. 미혼여성, 홀로된 여성,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 알코올 중독자 가족, 재소자 가족 등 삶의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활동하고 섬기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의사, 교수, 약사, 기술자, 법률가 등 그 사회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조직되어 사회봉사 활동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와 같이 도시 지역의 두꺼운 인적 자원을 욕구나 기능 등에 따라 잘 조직화 할 경우 교회는 사회봉사의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도시 교회는 전문화된 사회봉사 활동과 연합적인 사회봉사활동을 추진할 수 있다. 도시 지역에는 많은 사회봉사의 요구가 있으며,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회는 그 많은 일들을 모두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종교단체로서 신도 개개인에 대한 신앙적 지도에 많은 힘을 기울여야 하는 교회의 입장에서 교회가 가진 모든 힘을 사회봉사 활동에만 사용할 수는 없다. 따라서 특정한 교회는 사회봉사 활동의 대상이나 영역을 전문화 시켜 그것에 교회의 사회봉사활동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겠다. 즉 장애인, 청소년, 노인, 여성, 소년소녀가장 등 특수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봉사 활동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대상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보와 섬김의 방법을 축적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결과 상당히 전문화된 사회봉사활동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전문화된 활동을 실시할 경우 관련된 다른 사회복지시설이나 국가기구 등과 연계하여 활동을 전개할 수 있으며,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교회들이 연합체를 조직하여 지방정부나 국가전체의 정책결정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사회봉사는 피상적이고 방만하며, 낭비적인 성격을 줄이고 특정 영역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어서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B. 크기에 따른 모델
교회의 특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크기이다. 한국개신교회의 경우 교구제를 실시하지 않고 있으므로 개별 교회는 제한 없이 확장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교회의 유지조차도 어려운 초소형교회에서부터 신도수에 있어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수 십 만의 신도를 가진 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교회의 크기에 따라 동원할 수 있는 재정이나 인력이 현저하게 차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 역시 교회의 크기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의 크기에 따라 사회봉사활동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검토하도록 하겠다. 교회의 크기에 따른 분류는 연구목적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기서는 소형, 중형, 대형 3가지로 구분하도록 하겠으며, 주일 오전 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신도수를 분류의 기준으로 삼겠다.
소형교회 : 주일 오전 예배참석 성인 신도수가 100명 이하인 교회를 소형교회라 할 수 있겠다. 소형교회는 물적 자원을 목회자 사례비나 교회 운영유지비에 주로 충당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봉사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인적 자원도 매우 부족하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은 협동적, 자원봉사적, 목회자 주도적 모델이 적합하다고 하겠다. ‘협동적’이라 함은 교회가 자체적으로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시행하기보다는 교회 밖의 복지시설이나 기관에서 실행하고 있는 활동을 협조하는 형태의 사회봉사를 말한다. ‘자원봉사적’이라 함은 사회봉사활동이 교회의 시설이나 물적인 자원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인적 자원을 주로 이용하는 형태의 사회봉사를 말한다. ‘목회자 주도적’이라 함은 사회봉사활동의 지도력이 담임 목회자 자신의 직접적인 활동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을 말한다.
소형교회의 경우 교회의 시설이나 물적인 자원을 이용한 사회봉사가 어렵기 때문에 목회자의 직접적인 관심과 노력이 사회봉사활동의 시행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목회자가 사회봉사활동에 어느 정도 비중을 두는가는 교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하겠다. 목회자 혼자서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담당해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사회봉사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회적 관심이 약한 교회로 정형화되어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도 형식적인 사회봉사활동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교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목회자가 사회봉사활동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민중교회, 장애인교회 등과 같이 특수 목회를 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모든 교회가 사회봉사를 위한 특수목회로 나갈 수는 없기 때문에 소형교회 목회자는 사회봉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부정기적이고 보조적인 성격을 띠는 사회봉사 활동이라도 계속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중형교회 : 주일 대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신도수가 101명 이상 700명 이하의 교회를 중형교회라 할 수 있겠다. 도시교회의 경우 연간 예산은 5,000만원에서 5억원 정도 될 것이며, 교회의 재정적 자립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교회들이며, 필요한 경우 어느 정도의 물적, 인적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겠다. 중형교회의 사회봉사 모델은 다른 사회복지 시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협조적 활동과 독립적 활동이 ‘공존’하며, 교회 나름의 ‘독자적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회봉사를 중요한 사역으로 하는 ‘부교역자’를 두는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중형교회의 경우 다른 사회복지시설을 돕는 보조적이고 자원봉사적인 활동도 계속할 필요가 있겠지만 교회의 특성에 맞는 독립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활동도 단순히 인력을 위주로 하는 자원봉사적 성격이라기 보다는 재정과 교회시설 그리고 인력이 결합된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재정에 여유가 있는 경우 소수이지만 구제 대상자를 선정하여 지속적인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노인, 청소년, 여성, 장애인 등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교회의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할 수 있다.
중형교회의 사회봉사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예산, 조직, 부교역자의 정확한 할당이 매우 중요하다. 교회예산의 5~10%정도를 사회봉사예산으로 설정할 경우 1,000만원 이상의 예산을 확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며, 신도수가 500명 이상이 되는 교회는 3,000~4,000만원의 예산을 세우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러한 예산을 소신있게 집행할 수 있는 사회봉사부나 사회봉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그것을 지도 감독할 수 있는 부교역자를 선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히 사회봉사예산의 수립이나 집행과 관련하여 평신도들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줄 경우 평신도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여러 예산 항목들 가운데 평신도의 참여를 가장 잘 유도할 수 있고 또한 그 집행을 통해 만족감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봉사예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봉사예산이나 활동의 상당 부분을 특정 분야에 초점을 맞추어 전문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작업도 중형교회로서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라 하겠다.
중형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이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는 담임목회자의 목회 방향과 의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안정되면 교회지도자와 신도들이 개교회주의에 빠져 자신들만의 성곽을 쌓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쉬우며, 반대로 교회 성장에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면서 끝없는 확장에의 열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양 쪽 다 교회의 사회봉사에는 부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특히 교회의 외형적 성장을 위해서 토지와 건물에 투자하는데 몰두하게 되면 사회봉사활동은 거의 불가능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건축의 압력에 부딪혔을 때 가장 쉽게 삭감시키는 예산이 사회봉사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산의 10%정도는 사회봉사예산으로 먼저 확정 지은 후 나머지 예산으로 교회성장을 모색하는 목회방침이 필요하다. 교회의 사회봉사는 ‘지금 여기에서’(now and here)의 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
대형교회 : 대형교회는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신도수 701명 이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단계에 이르면 담임목사가 신도들 모두를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형식화된 조직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연간 예산이 5억 이상이 되고 부목사, 전임전도사, 사무관리직원 등 담임목사를 돕는 전임직원이 최소한 5명 이상은 된다고 할 수 있다. 사회봉사를 위하여 3, 4천만원의 연간 예산을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며, 초대형 교회의 경우 수억원 이상의 예산을 세울 수 있다. 대형교회는 ‘독립적’이고 ‘전문적’이며 ‘지원센터’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회봉사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대형교회의 경우 예산, 인적 자원, 시설 등을 이용하여 일반 복지기관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회봉사활동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문 사회복지사를 고용하거나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진 목회자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사회봉사의 개념도 단순한 구제활동이나 비전문적인 봉사활동의 차원을 넘어서서 전문적인 사회복지 서비스의 차원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초대형교회의 경우 단순히 개별교회 차원의 사회봉사활동을 넘어서서 다른 교회의 사역을 지원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나가야 한다. 빈민지역 목회, 장애인 목회 등을 하면서 헌신하는 교역자나 교회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또한 전문화된 사회봉사의 영역을 확보하고 그 프로그램을 다른 교회들에 소개하고,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진 교회들의 연합활동을 주도하고 지원하는 역할도 맡아야 할 것이다. 대형교회는 단순히 교회의 자체 프로그램에만 관심 가지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전체의 복지문제와 국가나 지방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대형교회는 인가된 복지시설을 설립하여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종합사회복지관, 장애인 복지관, 노인 복지관, 청소년 회관, 주간 보호센터 등을 교회 부속으로 설립하여 국가의 예산지원을 받으면서 운영할 수 있다. 교회에서 시설 투자를 하고 예산 지원을 하면서 또한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면 가장 모범적으로 시설을 운영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교회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이 본래의 정신을 상실하고 조직 그 자체의 원리에 굴복하는 목적전치현상이나 조직의 변질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사 속에는 많은 기독교 학교와 기독교 병원이 설립되어 운영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들 기관 속에는 기독교의 원리와 학교나 병원이라는 조직으로서의 원리가 함께 작동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칫 학교나 병원의 조직원리가 기독교적 원리를 능가할 때, 세속적인 학교나 병원과 아무런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기독교적 원리에만 몰두하는 가운데 운영의 유연성을 잃어서 병원이나 학교로서는 낙후되는 모습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위험은 기독교 정당, 기독교 기업, 기독교 복지시설 등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사회복지관의 경우 작은 규모라 해도 연간 예산이 수억원에 이르고 전임직원만 해도 10여명이 넘는다. 이러한 시설의 운영과 관련하여 크고 작은 이권이 생기기 마련이므로 자칫 세속적 이해관계의 갈등에 휘말릴 여지가 많이 있다. 또한 국가의 지원과 감사를 받게 되면서 운영의 자율성이 상실되고, 공무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신앙적, 영적으로 불미스러운 결과가 생겨날 수도 있다. 한마디로 대형교회가 복지기관을 직접 운영하는 경우 가장 좋은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가능성과 조직의 운영원리에 굴복하여 기독교적 가치가 손상될 위험도 얼마든지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대형교회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시설은 잘만 이용하면 지역주민을 위한 복지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대예배실은 교회의 가장 큰공간이면서도 예배시간 이외에는 거의 사용이 되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 활용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하겠다. 이 일을 위해서는 먼저 예배공간의 거룩함과 구분됨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작업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즉 안식일이 무활동의 시간이 되는 것보다는 병든 자를 고치는 선한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예배실 역시 선하게 사용하는 것이 비워두는 것보다 더 거룩하다는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하겠다. 다음으로 예배실을 설계할 때에 칸막이의 설치 등 손쉬운 조작을 통해서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한 공간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이 일을 위해서는 현재의 전형적인 예배실의 모습 즉 높은 천장과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장의자를 배열해 놓은 공간 배치를 재고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간 형태가 엄숙한 예배 분위기를 만드는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친교와 봉사의 공간을 만드는데는 별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예배공간의 엄숙함과 실용성을 함께 가질 수 있는 설계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예배실을 몸통과 날개 및 꼬리의 형태로 만들어서 몸통은 예배의 분위기를 잘 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설계하고 날개 및 꼬리 부분은 천장도 낮추고 움직이기 쉬운 의자를 배치하여 간단한 칸막이 장치를 통해 교육, 봉사, 친교의 공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Ⅵ. 결 론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답변 가운데 하나는 한국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사회봉사의 역사, 현황, 쟁점, 모델 등을 고찰한 결과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1) 한국교회의 사회봉사는 전래 초창기와 일제시대에는 선구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60년대까지는 외원의 중요한 통로가 되면서 한국의 사회복지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70년대, 80년대의 자립준비시대에 이르러서는 외원은 줄어들고, 교회성장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여 사회봉사에서 한국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저하게 낮아졌다. 그 결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많은 비판과 반성이 교회의 안팎에서 많이 나타났다. 1990년대는 신도수가 정체 혹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면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교회들이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참여가 아직은 부족한 형편이지만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회봉사의 잠재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 한국교회 사회봉사의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한국기독교인의 사회봉사에 대한 의식은 비교적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봉사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로서 이해하는데까지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적 운영원리, 다수의 소형교회, 세속화된 상황 등은 사회봉사에 불리한 구조적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재정 가운데 사회봉사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5% 안팎으로 비교적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보면 선교원, 유아원과 유치원, 청소년 공부방, 장학사업, 노인대학 등이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빈도가 높은 선교원과 유아원은 자칫 영리단체화 되는 위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 사회봉사 프로그램은 단편적이고 비전문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단적으로 보면 예장통합측이 가장 활발한 사회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하겠다. 총회 사회부가 중심이 되어 97년 한해동안 구조비로 10억원, 북한동포돕기로 19억원 정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3)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쟁점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선교의 가치와 복지의 가치가 충돌할 가능성이 있으며, 자칫 그 가운데 하나의 가치만을 강조할 경우 기독교사회복지의 본질이 훼손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균형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기독교 사회복지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하기 어려운 복지활동을 실험적으로 실행하고 또한 보완할 수 있다. 교회는 복지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가져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좀 더 가까운 사회적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4)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모델은 지역에 따라 도시형과 농촌형으로 나눌 수 있고, 교회 크기에 따라 소형, 중형, 대형으로 나눌 수 있다. 농어촌교회는 노인복지, 생명복지, 지역복지, 문화복지의 차원을 강조하는 모델이 필요하며, 도시교회는 공동체적 복지, 전문화된 복지, 연합활동 등에 초점을 맞춘 사회봉사의 모델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소형교회는 기존의 사회복지기관과의 협동과 자원봉사에 초점을 맞춘 사회봉사가 요구되며, 중형교회는 기존의 사회복지기관들과의 협동과 독립의 활동을 함께 하고, 평신도의 지도력을 높이는 사회봉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대형교회는 독립적이며, 전문적이고 지원센터로서의 역할을 하는 복지의 모델의 요청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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