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25강
제 3장 칼 품(Satti vagga)
삿띠숫땅
Sattisuttaṃ
칼 경(S 1: 21)
삿띠(Satti)는 칼을 말합니다. 삿띠(Satti)는 능력, 힘, 자격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뜻하는 사띠(Sati)와는 다른 말입니다. 두 가지 단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발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삿띠(Satti)는 일반적인 칼이 아니고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칼입니다. 또 무엇인가를 찌르기 위해서 만든 칼입니다. 인도나 스리랑카도 호신용이나 열매를 따먹는 용도로 사용하는 칼을 옆에 차고 다니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칼을 지니지 않고 일반 사람들은 칼을 가지고 다닌다고 봐야 합니다.
인도의 10가지 종교 중에 시크교(Sikhism)라는 머리를 올리는 종교가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할 때 시크교 사람이 한 분 있었는데 그 사람이 머리를 다 잘랐습니다. 부모님은 모르게 한국에 있을 때 즐기고 가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자살할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시크교 사람들은 머리를 기르는 것이 전통이고 머리에 칼 하나를 숨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족과 종교에 따른 또 하나의 전통입니다. 시크교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머리를 깎지 않습니다. 남자들만 그렇게 합니다. 인도의 운동선수들 중에 남자들이 머리를 또아리를 틀어서 천으로 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칼이라는 것을 옛날부터 인도에서 민족적으로나 전통적으로 많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호신용 칼이 있으며 등산하는 사람은 등산용 칼을 소지하기도 합니다.
1. 에까만땅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바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삿띠야 위야 오맛토 다야마노와 맛타께
Sattiyā viya omaṭṭho ḍayhamānova matthake,
까마라갑빠하나야 사또 빅쿠 빠립바제띠.
Kāmarāgappahānāya sato bhikkhu paribbaje’ti.
2. 칼이 부딪힌 것처럼, 머리가 불타는 것처럼
감각적 욕망을 버리기 위해
비구는 알아차려서 유행(遊行)해야 합니다.
바가와(bhagava)
세존
3. 삿띠야 위야 오맛토 다이하마노와 맛타께,
Sattiyā viya omaṭṭho ḍayhamānova matthake,
삭까야딧팁빠하나야 사또 빅쿠 빠립바제띠.
Sakkāyadiṭṭhippahānāya sato bhikkhu paribbaje’ti.
3. 칼이 부딪힌 것처럼, 머리가 불타는 것처럼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버리기 위해
비구는 알아차림으로 유행(遊行)해야 한다.
이상이 칼 경의 내용입니다.
이 경은 요즘 스님들이 잘못하면 신도회장이 큰 스님들께 일러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큰 스님이 안 계실 때 스님들이 운동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는 것을 큰 스님께 말하는 것처럼 바로 이런 것들을 천신이 부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천신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스님들이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부처님께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천신이 이런 문제가 궁금하기도 해서 부처님께 여쭤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왕자일 때 칼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카레를 만들 때 숟가락으로 자주 저어 줘야 카레가 맛이 납니다. 숟가락으로 카레를 많이 저어도 숟가락은 카레의 맛을 모릅니다. 그것처럼 바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법구경에 수행도 직접 경험해야 지혜가 생겨남을 비유적으로 설법하셨다고 나옵니다.
옛날 인도에서 칼을 네 가지 방식으로 사용하여 싸웠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오맛토(omaṭṭho)로 위에서 아래로 찌르는 것입니다. 이 방식은 제일 위험하고, 상처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복하려고 해도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움맛토(ummaṭṭho)로 밑에서 위로 찌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맛토(maṭṭho)로 던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위맛토(vimaṭṭho)로 사방으로 찌르는 것입니다.
천신은 게송으로 비구들이 감각적 욕망을 버릴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가진 비구는 칼이 위에서 아래로 꽂힌 것같이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빠립바제(paribbaje)는 거주한다, 머무른다, 유행(遊行)한다는 뜻입니다. 유행한다는 것은 전법을 위해 떠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냥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바른 노력을 하면서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이는 거주, 머묾, 지낸다는 뜻의 위하라(vihara)와 비슷한 말입니다.
다이하마노와 맛타께(ḍayhamānova matthake)에서 다이하마노와(ḍayhamānova)는 불타는 것이고, 맛타께(matthake)는 머리 꼭대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머리가 불타는 것처럼’입니다. 이때의 머리가 불타는 것이란 머리카락이 불타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머리카락이 많아서 머리에 불이 붙기도 했습니다. 머리카락은 의외로 불에 약해서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불에 타버리기도 합니다. 인도에서는 불을 섬기거나 불로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불을 섬기던 깟사빠 삼형제와 그들의 제자 1000명이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그들은 우루벨라 깟사빠(Uruvela Kassapa)의 500명의 제자와 나다 깟사빠(Nada Kassapa)의 300명의 제자 그리고 가야 깟사빠(Gaya Kassapa)의 200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항상 불을 섬기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당시 제사는 불을 의미합니다. 브라흐만 쪽 사람들은 불로 태워야 신에게 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불을 아주 좋아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들에게 어떤 법문이 좋을까 생각하시고 불을 좋아하니 12처가 항상 불타오르고 있다, 라고 하는 ‘불타오름 경(Ādittapariyāyasutta, S35:28)’을 천 명의 제자들에게 설했습니다. 이 법문을 듣고 이들 모두가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행방법도 근기에 띠라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까마라갑빠하나야(Kāmarāgappahānāya)는 감각적 욕망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천신은 색계천신으로 감각적 욕망을 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삼매를 얻었던 분으로 감각적 욕망은 어느 정도 벗어난 천신입니다. 그런데 천신은 감각적 욕망과 삼매를 말하고 부처님은 유신견과 무상, 고, 무아를 말씀하십니다. 감각적 욕망도 버려야 하지만 유신견(有身見)을 더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선정 상태에서 감각적 욕망을 억누르면 일시적인 해탈을 얻습니다. 색계에 계신 분들이 그렇게 산다고 말합니다.
고디까 경(S4 :23)에서 고디까 스님도 일시적인 해탈을 얻었던 분으로 사선까지 얻은 분이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6번이나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 도달했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한 끝에 우울증으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수행하다가 우울증이 올 수 있습니다.
일시적 마음의 해탈을 심해탈이라고 하는데 삼마이까 쩨또위무띠(samayika cetovimuti)이라고 합니다. 심해탈은 삼매를 통해 얻어지는데 이것을 열반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유사 닙바나로 볼 수 있습니다. 유사 닙바나는 열반이 아닌데도 열반으로 착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유사 닙바나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 천신도 일시적 심해탈에 도달한 분인데 부처님께서 다음의 게송으로 일깨워줍니다.
게송에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버리기 위해 비구는 알아차리면서 유행해야 한다.’는 말에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는 모든 것이 변하는데 나는 변하지 않는 그래서 불변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를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하는데 몸과 마음이 나고 나의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이와 같은 유신견 때문에 오온을 집착합니다.
빨리어 삭카야딧티(Sakkāyadiṭṭhi)에서 삭카야(Sakkāya)는 존재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을 모두 포함한 말입니다. 이것은 나라는 개체, 개체성, 개성(個性), 유신(有身)을 의미합니다. 이때의 유신(有身)은 몸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만 사실은 오온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몸이 있으면 자연히 마음이 함께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삭카야(Sakkāya)에 딧티(diṭṭhi)라는 견해가 붙으면 유신(有身)에서 유신견(有身見)으로 바뀝니다. 몸이 있다는 단순한 유신(有身)에서 견(見)이라는 견해가 붙으면 유신견(有身見)으로 바뀌어서 존재의 무더기인 오온이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됩니다.
그래서 그냥 몸이 아니고 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오온이 아니고 나의 오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개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바로 유신견(有身見)입니다. 이렇게 나의 소유가 붙어서 바로 오취온이 됩니다. 오온과 오취온은 범부와 아라한의 차이입니다.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나와 분리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오취온이 됩니다. 이때의 분리가 위빠사나 수행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빨리어로 삭카야딧티(Sakkāyadiṭṭhi)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잘못된 견해 세 가지를 말할 때 첫째가 유신견이고 둘째가 상견(常見)이고 셋째가 단견(斷見)입니다. 이 세 가지를 잘못된 견해로 꼽습니다. 유신견은 나의 몸과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상견은 모든 것이 항상 하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신을 믿는 인도의 힌두교 사상입니다. 불교는 무상하기 때문에 항상 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견은 이번 생으로 끝이라는 견해입니다. 단견에 빠지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무상, 고, 무아와 상반된 견입니다. 유신견과 상견과 단견은 원인과 결과라는 진리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보실 때 천신이 삼매를 얻어 삼매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을 잘못된 유신견을 말함으로써 위빠사나의 지혜로 유신견을 제거해야 함을 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매와 관련된 내용으로 보아 색계 천신과 부처님의 대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색계는 선정수행을 해서 아직 유신견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이 게송을 다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색계천신이 말한 게송은 감각적 욕망을 버릴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세존께서는 천신의 말과 달리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것보다 유신견을 버릴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천신이 말한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것은 세 번째 도과를 성취한 아나함의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유신견은 첫 번째 도과를 성취한 수다원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천신은 높은 단계를 말하고 부처님은 낮은 단계를 말했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생각하셨다. 이 천신이 말한 게송은 아주 강하게 들리지만 그 뜻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가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는 감각적 욕망을 단지 삼매에 들어 억압하는 것을 통해서 버리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감각적 욕망이 아나함의 도에 의해 완전하게 뿌리가 뽑히지 않는 한 거기에 묶여 있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천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신이 말한 아나함의 도에서 소멸하는 것보다 수다원의 도에서 소멸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에서 유신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번뇌의 소멸은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세계에 붙들어 매는 족쇄는 10가지인데 그 첫 번째 족쇄가 소멸해야 다음 단계의 족쇄가 풀립니다. 그래서 유신견부터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단계적 과정의 지혜가 성숙해야 다시 낮은 단계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아닌 지식에서는 억압해서 얻는 단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집중을 해서 얻은 초선정에 들면 감각적 욕망을 제일 먼저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계의 집중에서 벗어나면 억눌려서 사라졌던 감각적 욕망이 다시 살아납니다. 이때 전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정의 집중의 힘으로 감각적 욕망이 억제된 상태이지 완전하게 뿌리가 뽑힌 상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선정의 집중의 단계와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의 단계에 대한 결과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천신은 단지 선정의 집중을 통해 감각적 욕망을 억압한 것을 말했을 뿐이지 실제로 감각적 욕망을 완전하게 뿌리 뽑지는 못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는 아나함보다 낮은 단계이지만 첫 번째 단계인 수다원의 도과에서 유신견을 소멸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세계에서 단계적 과정의 지혜가 성숙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신견을 통해서 감각적 욕망을 제거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펴신 것입니다. 오직 집중력이 생긴 순간에만 억압된 오염원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지를 일시적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시적 해탈을 사마이까 위뭇띠(sāmāyika vimutti)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천신을 색계선정의 상태에서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천신은 삼매를 얻었던 사람이고 본인이 한 질문을 부처님께서는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던져줬습니다. 그 이후에 이 천신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릅니다. 부처님 말씀을 알아들었을 수도 있고 본인이 일시적인 해탈을 얻었던 천신이라서 그냥 색계천상으로 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질문 1) 천신들은 지혜가 계발될 수가 없는데 부처님을 만나서 영향을 받을 수 있나요?
(답변 1) 색계는 영향을 받습니다. 물론 욕계도 수다원인 소따빠나까지는 됩니다. 마야부인도 부처님 설법을 듣고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도솔천과 도리천에는 수다원이 있습니다. 신도들이 괴롭다고 하면 도솔천에 가서 태어나라고 말합니다. 거기에는 너의 도반들이 많다고 스님들께서 가끔 말씀하십니다.
담미까 우바새가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어 스님들 초청해 독경을 요청했습니다. 스님들이 독경을 하시는 데 모든 욕계 천상에서 담미까 우바새를 데리러 왔습니다. 우바새는 천신들에게 ‘잠깐 멈춰라’고 했습니다. 스님들의 독경을 더 듣고 싶어서 천신들께 잠깐 멈추라고 한 것이었는데 스님들은 자신들에게 독경을 멈추라고 한 것 인줄 알고 그냥 가셨습니다. 담미까는 자식들에게 꽂 다발을 들고 ‘이 꽃다발이 도솔천의 마차에 걸리기를!’ 이라고 하면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담미까는 도솔천에 태어났습니다. 비구들이 돌아와서 담미까가 죽을 때가 되어 정신이 혼미 해졌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일을 아시고 천신들에게 잠깐 멈추라고 한 것임을 비구들에 말해 주십니다.
다음은 닿음 경입니다.
푸사띠숫땅
Phusatisuttaṃ
닿음 경(S l:22)
1. 에까만땅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바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나푸산땅 푸사띠 짜 푸산딴짜 따또 푸세,
Nāphusantaṃ phusati ca phusantañca tato phuse,
따스마 푸산땅 푸사띠 압빠둣타빠도시난띠
Tasmā phusantaṃ phusati appaduṭṭhapadosinanti.
2. 짓지 않는 자에게는 닿음이 없고
지은 자에게는 닿음이 있습니다.
청정한 자를 망가지게 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렇게 지은 자에게는 닿음이 있습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3. 요 압빠둣탓사 나랏사 둣사띠,
Yo appaduṭṭhassa narassa dussati,
숫닷사 뽀삿사 아낭강앗사,
Suddhassa posassa anaṅgaṇassa,
따메와 바랑 빳쩨띠 빠빵,
Tameva bālaṃ pacceti pāpaṃ,
숙쿠모 라조 빠디와땅와 킷또띠
Sukhumo rajo paṭivātaṃva khitto’ti.
3. 누구든지 청정하고 흠이 없으며
순수한 그런 사람을 망가지게 하면
그 죄악은 어리석은 그에게 되돌아가니
바람을 거슬러 던진 먼지더미와 같이
이상이 닿음 경에 있는 내용입니다.
푸사띠(Phusati)는 대다, 스치다, 접촉하다, 달성하다, 도달하다는 뜻으로 서로 닿는 것을 말합니다. 첫 문장에 있는 ‘나푸산땅 푸사띠 짜 푸산딴짜 따또 푸세(Nāphusantaṃ phusati ca phusantañca tato phuse)는 짓지 않는 자에게는 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업을 짓지 않는 자에게는 과보가 없다는 뜻입니다. 업을 짓지 않으면 이러한 업에 대한 과보를 받지 않습니다. 업이 있을 때만 과보를 받지 업이 없으면 받을 것이 없습니다. 원래 이 게송의 뜻은 ‘접촉하지 않은 자는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닿지 않는 자는 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처음 접촉은 업을 말하고 다음에 접촉은 업에 의해서 생긴 과보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셔서 업을 짓지 않아 받을 것이 없어서 윤회가 끝납니다. 오직 이때만이 괴로움이 소멸한 해탈의 자유를 누립니다. 이것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다는 연기법입니다.
다음에 있는 문장은 ‘따스마 푸산땅 푸사띠 압빠둣타빠도시난띠(Tasmā phusantaṃ phusati appaduṭṭhapadosinanti)’입니다. 이는 ‘청정한 자를 망가지게 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렇게 지은 자에게는 닿음이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청정한 자를 청정하지 못하게 하는 자는 그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업을 짓지 않으면 업의 과보가 없지만 업을 지으면 당연히 과보를 받습니다. 업은 선업과 불선업이 있는데 청정한 자를 무너지게 했으면 불선업이므로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청정하고 흠이 없는 순수한 사람을 망가지데 하면 그 죄악이 본인에게 되돌아갑니다. 꼬띠까 비구는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근거 없이 심하게 비방하다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고 3번이나 말씀했는데도 듣지 않았습니다. 본인과는 별 상관이 없는 데 괜히 질투하여 아라한을 비방한 업의 과보입니다.
산자야는 사리뿟따와 목갈리나 존자의 출가 전 스승입니다. 그는 회의론자로 사람이 다음 생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물어본 사람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당신은 다음 생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고 하면 있다고 대답하고 없다고 하면 없다고 답합니다. 그래서 미꾸라지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산자야에게 제자 250명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사리뿟따가 앗사지 존자(āyasmā Assaji)를 만나서 연기법을 듣고 법의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목갈라나에게 가서 법을 설해줍니다. 그래서 목갈라나도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출가하기 전에 소따빠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산자야에게 부처님께 가서 같이 출가하자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산자야는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산자야의 제자 250명은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250명이 모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붓다고사 스님은 나중에 산자야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인연이란 이런 것입니다. 정법이 있어도 인연이 없으면 나의 것이 아닌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연은 선한 공덕이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목련존자와 사리불 존자만 바로 아라한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목련존자는 출가 후 걷기 명상을 했습니다. 걷기 명상을 1주일 하니 몸이 너무 지쳤습니다. 나는 이제 힘들어서 더 이상 명상 못하겠다는 생각과 게으른 생각이 났을 때, 즉 몸과 마음이 게을러졌을 때 마침 부처님의 설법으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15일 걸렸습니다. 돼지 땅굴을 파고 땅굴 안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고 있을 때 사리뿟따의 조카 디가나카가에게 부처님이 법문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사리뿟따존자는 부처님께 부채질하고 있었는데 그 법문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뒤 늦게 아라한이 된 사리뿟따존자와 목갈라나존자를 상수 제자로 삼으니 말이 많았습니다. 초기의 60아라한, 1,000명의 아라한, 250명의 아라한이 있었고. 가섭 삼형제도 신통력을 얻었던 사람인데 왜 상수제자를 주지 않았는지 말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오해를 풀기 위해서 이 두 분은 전생부터 부처님의 상수제가가 되고 싶다고 서원을 세워서 상수제자가 된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불교에서 서원을 세우는 것은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집착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내가 아라한이 되고 싶다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겠다는 붓다가 되겠다는 보살의 목적이 있었으니 깨달은 것입니다.
또 예를 들어서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꼰단냐도 전생에 나는 부처님을 만나서 첫 번째 제자가 될 것이라고 서원을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80대 제자 모두 서원을 세운 분들입니다. 10바라밀과 6바라밀도 의도입니다. 그래서 구도자에게는 의도가 중요합니다. 이때의 의도가 바로 업입니다. 나는 올바르게 살아가겠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8정도의 삶을 살겠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의도가 없으면 실행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목련존자가 맞아 죽은 것은 브라흐만 쪽 사람들한테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종교인들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매우 공격적입니다. 이때 카스트제도도 사라지는 분위기고 그 사람들 자리를 부처님 제자들이 대신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밥줄이 줄어든 것이었습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따라 다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신통이 없으니 그 사람들한테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과거의 전생과 미래를 물어보려고 목련존자를 많은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교도들이 목련존자를 질투했습니다. 그것도 브라흐만 쪽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님들의 조그만 일도 항상 문제로 만들었습니다. 자이나교에서는 교리 부분에서 고기를 먹나 안 먹나, 안거를 하나 안 하나 등 교리 부분이 다른 부분에서 논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브라흐만 쪽 사람들은 본인들의 권력이나 힘이 사라지니 질투심으로 시비하였던 것입니다.
목련존자는 사람들의 사업이나 과거 생이나 미래 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신통력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해결한 것이 많습니다. 목련존자가 잘못된 방법을 쓰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부처님이 신통력 사용을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아라한 스님들도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감각욕망이 없기 때문에 신통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마타 수행을 하여 선정을 얻는 것은 요즘 박사학위를 받아서 교수가 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정을 얻는 것은 깨달음을 떠나서 신통력을 얻어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신통력 대회도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 발우를 올려놓고 어떤 스님이 와서 발우를 깨면 온 마을 사람들이 귀의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인도에 가면 신통을 부려서 금도 주고 병도 낫게 해 준다고 하는데 나중에 거짓말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인도 사람들은 무조건 보고 믿고 따라 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 스님들도 신통력을 많이 발휘했습니다. 신통을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금지시켰습니다.
불교에서 신통력을 금지한 계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신통대회가 있었습니다. 스님들이 지나가는데 고따마의 제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밥만 얻어먹고 신통도 없다면서 욕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한 스님이 화가 나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것은 괜찮은데 부처님까지 욕하는 것은 못 참겠다고 하면서 신통으로 꼭대기에 올라가서 발우를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많은 신도들이 참배하고 죄송하다면서 귀의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스님들끼리 이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가서 말씀드렸더니 부처님은 잘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신통력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 되었습니다. 불교는 사마타를 넘어 지혜를 구하는 것이 목적인데 신통을 부리면 사마타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리뿟다와 목갈라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6명의 비구들이 있었습니다. 찬나, 꼬띠까, 데와닷따 등인데 그들 중 꼬띠까는 대놓고 의도적으로 싫어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산자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산자야는 잘 못된 것을 올바르다고 말하고 올바른 것을 잘 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리불과 목련존자 두 분이 아라한이 된 이후 부처님께 어떻게든 산자야를 데리고 오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견해가 막혀 있어서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의 공덕이나 서원을 세운 것이 없으면 부처님도 어떻게 해 줄 수 없습니다.
천신의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변하신 내용은 ‘누구든지 청정하고 흠이 없으며 순수한 그런 사람을 망가지게 하면 그 죄악은 어리석은 그에게 되돌아가니 바람을 거슬러 던진 먼지더미와 같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악한 사람에게 악업을 행한 것하고 선한 사람에게 악업을 행한 것은 과보가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지혜가 있는 사람을 해치면 지혜를 가진 만큼의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이것도 현상계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누구에 어떤 선행과 악행을 했느냐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상계의 질서입니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며 원인과 결과의 진리입니다.
이 ‘닿은 경’의 게송 마지만 문장은 ‘바람을 거슬러 던진 먼지더미와 같이’입니다. 이 게송은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근거도 없이 심하게 비난하다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고깔리까 비구에 대한 게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