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못에서
이영백
조양 못은 어린 날 나의 추억이 오롯이 퐁당 빠져 있는 곳이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해에 지은 집으로 네 번째 이사를 가면서 우리 집 우물곁으로 도랑물이 흘러 마지막 닿는 곳에 못이 있었다. 그 못은 나에게 온갖 추억을 만들어 둔 곳이다. 못은 너른 공간에다 다음 해에 쓸 물을 채워둔 마음의 고향이다.
못은 자연적으로나 인위적으로 넓고 깊게 판 땅에 늘 물이 괴어 있는 곳을 가리킨다. 못을 지(池)·소(沼)·당(塘)·방축(防築) 등으로도 표현한다. 지는 못 자체를 가리키는 글이고, 소는 자연의 힘에 의하여 땅이 우묵하게 팬 자리에 늘 물이 괴어 있는 곳을 뜻하는 글이다. 아울러 당은 원래 물을 막기 위하여 쌓은 둑을 가리키는 글자로서 못을 만들기 위하여 쌓은 둑을 지당(池塘)이라 한다. 방축은 저수시설을 가리킨다.
물론 고향에서는 신라의 오래 전부터 월지(月池)가 있다. 한때 우리 역사를 부정하고 업신여겨 역사서에도 나타나고 있던 이름을 왜곡시켜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리었다. 즉 궁궐에 딸린 못을 기러기나 오리가 노는 곳쯤으로 핍박하였다. 늦었지만 “달못”인 월지(月池)로 찾은 것은 다행이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에 일어나 못으로 가보라. 그곳에는 나무배에 뱃사공이 삿대 하나로 물 위를 미끄러지듯 타고 가는 모습은 과히 신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사는 풍광이요, 멋진 한 폭의 수묵화일 수밖에 없다.
어린 날 즐거운 시간을 이 못에서 보내었다. 봄이 와서 벚꽃이 만개하면 요조숙녀들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양산을 곱게 받쳐 들고 못 둑으로 줄지어 산책하는 그 모습은 너무 좋았다. 비 오는 날 하릴없어 조공(釣公)들은 낚시 드리워진 물 위를 응시하고 있는데 그 그림자까지 곱으로 장관이다.
비 오는 날 도롱이 받쳐 입고, 삿갓 쓰고 넷째 형이 시간 죽이기 낚시질을 한다. 물론 미끼는 우리 집 하수구 진흙을 내 손으로 파헤쳐 잡아 온 지렁이 미끼가 최고이었다. 고깃바구니 들면 그날 잡은 고기들이 촬~ 촬~ 꼬리치고 소리 낼 때 그날의 기분이 그렇게 좋았다.
이른 봄 아직 찬 물인데도 집 방문 위에 걸쳐 두던 모기장으로 못 가 얕은 물에 그물을 친다. 새비*가 용하게 잡히어 백철 주전자에 한 가득 모인다. 그것은 아버지 술안주로 그저 그만이었다. 술안주가 될 것이 익으면 새우가 발갛게 된다.
집 가까이에 못이 있어 어린 날이 즐거웠다. 다만 못 둑으로 자전거 배우다가 물에 쳐 박혀 죽을 번한 것은 내 생애에 또 다른 흥밋거리이었다.
*새비 : “새우”의 경주 사투리.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