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유산 조선 왕릉[선릉과 정릉]-외로운 왕, 중종의 정릉
도심 속 가을 단풍의 명소 여행
가을이 짙어갈 무렴 친구들은 삼삼오오 단풍구경을 간다고 난리다. 설악산이며, 내장산이며, 젊은 청춘들이라서 그런지 어른들이 좋아한다는 명소를 찾는다. 요즘 너무도 나쁜 나는 멀리 떠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렸다. 오히려 사람들이 덜 찾는 곳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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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가장 가까운 서울 한복판이다. 서울 한폭판에서 황금색 물결로 가득한 여행을 즐긴다. 아무것도 준비할 것이 없다. 그냥 느즈막히 일어나 아침겸 점심을 먹은 후 카메라 하나만 담고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떠난다. 오늘 따라 사람들이 없어 빈 자리에 찾을 수 있다. 잠시 피곤함에 지하철 좌석에 앉아 졸았지만 금색 이곳에 도착한다. 이곳은 선릉역이다. 전에는 8번 출구로 나갔었는데 이제는 8-1번 출구가 만들어져 조금 더 쉽게 이곳에 갈 수 있다.
인정받지 못한 외로운 왕, 중종
선릉 옆에 사라잡은 정릉, 선릉은 성종과 계비 정현황후가 나란히 잡고 있는데 반해, 중종의 능인 정릉은 한 구석에 홀로 외롭게 자리잡고 있다. 죽어서 조차 외로워보이는 중종,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일단, 그는 정치에서 많은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해해줄만한 신하가 없어 외로웠던 인물이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 동생이었다. 성종 25년인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고,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에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조광조등의 신진사림을 중용하였으나 그의 이상주의적인 정치 세계에 오히려 염증을 느낄 정도였다. 이후 1519년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의 모함에 따라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 등의 사림을 몰아내었다. 정치의 풍파가 많았던 시기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三浦倭亂), 1522년 동래 염장의 왜변(倭變), 1524년 야인의 침입, 1525년 왜구의 침입 등이 잇달아 국가 정세는 내외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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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릉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가을길에 역사 문화관이 가을 빛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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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릉과 정릉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재실이다.
선릉과 정릉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재실공간이다. 입구에서 들어가자마자 선릉쪽으로 꺽지않고 직진해서 50m정도 걸어가면 보인다. 이곳은 왕릉의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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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으로 가는 길에 떨어진 낙엽, 중종의 외로움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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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무덤인 정릉, 1970년에 선릉과 함께 사적 19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단종의 장릉,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조선왕조 500여년에 걸쳐 이 왕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기분이 가라앉는다.
정릉은 원래 중종 제 1계비였던 장경황후의 무덤인 희릉 옆에 있었으나 제 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 이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릉은 땅이 좋지 않은가 보다. 지세가 낮아 여름철 홍수때가 되면 재실과 홍살문의 홍수의 피해가 자잦고, 임진왜란 때는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는 상처입은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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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릉의 홍살문, 어도, 정자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 왕릉은 죽은자가 머무는 성의 공간과 산자가 있는 속의 공간이 만나는 곳이다. 따라서 그 공간은 성격에 따라서 능침, 제향, 진입 등 세 부분으로 나눈다. 능침공간은 왕과 왕비의 봉분이 있는 성역의 공간이고, 제향공간은 죽은 자와 산자가 함께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진입공간은 왕릉의 관리와 제례를 준비를 위한 공간이다.
정릉의 처음은 다른 능과 같이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하는 공간이 시작되는 홍살문에서 시작된다. 홍살문 아래는 박석이라는 돌로 깔아놓은 참도(參道)가 보인다. 참도를 자세히 보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가운데는 왼쪽보다 약간 높고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하여 신도(神道)라고 부르고, 왼쪽은 신도보다 약간 낮아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고 하여 부르는 어도(御道)이다. 이 신도와 어도는 정자작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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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향공간인 정자각은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이다.
참도의 끝에는 정자각이라는 건물이 들어 서 있다. 정자각(丁字閣)은 하늘에서 보면 정(丁)자 모양으로 지어져 붙여진 이름이다. 제향공간으로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게 하는 영역이다. 우리나라 왕릉 건축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건축물로 중국의 묘사(廟寺)건축과 일본의 신사(神社)와 유사하다. 사대주의 입각하여 중국은 황제국이라 하여 매우 크게 짓고 조선은 제후국으로 작게 지어 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제례(祭禮) 때는 이곳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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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수 진설도와 기신제 안내도를 보면 조선의 제사 왕실의 제사를 눈을 감고 직접 느껴본다.
정릉의 정자각 입구에는 조선왕조의 기제사(각 왕의 왕릉에서 기일에 지내는 제사) 제수차림(제수진설도)과 제(기신제)에 대해 안내도가 제시되어 있다. 먼저 제수진설도를 잘 보면 일반 제상에서 보이는 음식 두 종류가 보이지 않는다. 하나는 ‘생선’이고 다른 하나는 ‘육류’다. 그 이유는 유교국가였지만, 기제사 상차림은 불교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종묘에서 ‘제례’는 국가에서 지내는 제인 만큼 성동 백서 형식을 따르지만, 능에서 지내는 ‘기제사’는 왕가의 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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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이 돌 하나 하나에도 당시 왕과 신하가 어떻게 걸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다. 한걸음 한걸음 걷는 순간 마음이 조금씩 경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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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이나 신도비를 보호는 비각과 신도비
정자각 오른편으로는 비각(碑閣)이 자리잡고 있다. 비각이라는 비석이나 신도비를 보호하는 건물이다.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이다. 무덤의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게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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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과 왕비의 능침이 있는 성역 공간인 능침공간
정자각 왼쪽으로는 큰 언덕인 능침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외로운 왕 중종의 잠들어 있으신 이 공간을 들어가도 될까?’ 잠시나마 경건하게 마음으로 죄송한 마음을 전한 후 묘 위로 올라간다. 잔디로 입혀진 묘 위에 맨 앞에서 부터 무인석, 문인석, 망주석, 능침 순으로 자리잡고 있다. 왕릉의 능침에는 12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이 둘러있고, 능침 밖으로 12칸의 난간석이 세워져 있다. 능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광릉(세조의 능) 이후 조성된 왕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나 선릉에는 병풍석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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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현<두리쌤> 글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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