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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63강
출애굽기 27:1-8
번제단
성막뜰에 배치되는 제단은 ‘번제단’ 혹은 ‘놋제단’으로 불리는데 이에 대한 계시가 주어진다. 마당의 번제단은 제물을 태우는 용도에서도 놋 재료가 적절하다고 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성소에서 가장 멀리 배치된다는 점에서 뜰의 비품은 금과 은보다는 저렴한 놋으로 만든 것이다. 제작에 대한 기록은 출애굽기 38:1-7에서 볼 수 있다.
“1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2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이어지게 하고 그 제단을 놋으로 싸고”(1-2절). “제단”의 ‘미즈베아흐’는 ‘살육하다, 죽이다, 도살하다’라는 말의 ‘자바흐’에서 유래한 단어로 ‘죽이는 장소, 죽음이 담기는 곳, 죽는 곳’이라는 뜻이다. 번제단(여기서 ‘번제단’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통상 번제가 드려지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번제’의 히브리어 ‘올라’는 ‘올라가는 것’이라는 뜻이다)은 조각목으로 틀을 짜고 “놋”으로 입힌다. 크기는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 높이는 삼 규빗”(1절)이다(2.5m × 2.5m × 1.5m). 그리고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2절)라고 말씀하였는데 이 뿔은 본체와 같이 조각목으로 만든 뒤 뜨거운 온도에 견디도록 하기 위하여 놋을 두껍게 입혔거나, 혹은 네 뿔과 제단 상단부는 놋을 녹여 제작하였을 수도 있다. 250명의 고라 일당이 각자 놋 향로를 들고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켰을 때 하나님의 심판으로 몰살되었다. 니때 남은 놋 향로들을 모두 녹여 번제단을 싸는 데 사용하였다. 이는 반복적으로 제단 표면을 두꺼운 놋으로 입혔음을 시사한다.
38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들의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 39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탄 자들이 드렸던 놋 향로를 가져다가 쳐서 제단을 싸서 40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다른 사람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또 고라와 그의 무리와 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여호와께서 모세를 시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민 16:38-40)
뿔의 형태는 고대 가나안 땅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주전 8-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뿔을 가진 제단들에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사진 참고).
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을지며(출 29:12)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시 118:27)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왕상 1:50)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9)
제단의 뿔이 구원의 상징이 되는 것은 제단에서 행하여지는 희생 제물의 죽음 때문이다. 즉 하나님 자기 희생을 심판으로 보여주시고 그 죽음 안에서 생명을 허락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제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3절). 번제단의 부속 비품들을 놋으로 만들라는 계시의 말씀이다. “재를 담는 통”은 번제단에 쌓이는 재를 처리하기 위한 도구이다. 매일의 제사로 인해 계속 많은 재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재”의 히브리어 ‘다셴’은 ‘살찌다, 기름지다, 풍족하다’라는 뜻이다. 즉 기름진 재를 버린다는 의미인데 이는 이스라엘의 풍족함 그 자체가 야훼 하나님을 버리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신 31:20, 잠 15:30). 그러나 버려진 그 기름진 것에 생명을 담아 놓으셨다(시 23:5).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시 20:3)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네 번제가 기름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이다. 소제와 번제라는 제사 속에 담아 놓으신 메시아의 희생, 즉 기름부음 받은 자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을 언약의 당사자 다윗이 노래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놋”(히, ‘네호셰트’)은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된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네호셰트)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창 4:22)
모세가 놋(네호셰트)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9)
결국 번제단을 통해 보여주는 희생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성취하셨다. 이는 죄인을 의롭게 만드시는 죽음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부삽”은 재를 긁어내어 통에 담는 도구로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임시로 쌓아 두었다. 동쪽, 즉 뜰의 입구 방향으로 제단 바로 옆이 재 버리는 곳이다. 제사장들은 재와 제물의 버리는 부위들을 그곳에 쌓아 두었다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정기적으로 진영 밖에 내다 버렸다.
그것의 모이주머니와 그 더러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레 1:16)
10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11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레 6:10-11)
“대야”는 제물의 피를 받는 그릇이다. 양푼에 담긴 피를 제단에 끼얹고 사방에 뿌렸다(레 1:5, 3:2, 4:6). “고기 갈고리”(히, ‘마즐레그’)는 삼지창과 같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단 위에 제물을 가지런히 놓고 또 잘 타도록 정돈하기 위한 도구였을 것이다. 엘리의 아들들이 자기 것으로 가지기 위해 제물 고기를 건져 올린 갈고리와 같은 것이다(삼상 2:13-14).
“불 옮기는 그릇”(히, ‘마흐타’)은 제단에서 숯불을 담아 옮기는 용도로 쓰인 비품으로 제사장들이 자주 향을 담아 직접 향을 피운 향로이기도 하다(레 10:1, 16:12 등). 아마도 내성소의 분향단에 향을 피우기 위해서나 등잔대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등잔대의 부속 비품인 “불 똥 그릇”(출 25:38, 히, ‘마흐타’)에 옮겨 담았을 것이다. 결국 ‘마흐타’는 불 옮기는 그릇, 불 똥 그릇, 향로 등은 모두 같은 종류의 비품으로 쓰임새만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4 제단을 위하여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 그 위 네 모퉁이에 놋 고리 넷을 만들고 5 그물은 제단 주위 가장자리 아래 곧 제단 절반에 오르게 할지며 6 또 그 제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 7 제단 양쪽 고리에 그 채를 꿰어 제단을 메게 할지며 8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4-8절).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4절)라고 하였는데 그물과 같은 철망으로 정확한 용도나 모양, 부착된 위치는 알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번제단을 재구성하면서 철망을 고기 굽는 석쇠의 종류로 간주하고 제단 안쪽에 놓는다. 그러나 번제단은 안쪽이 텅 비어 있는데(8절, 출 38:7) 설치할 때마다 여기에 흙을 채워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참고, 출 20:24). 그리고 그 위에 장작들을 쌓았으므로 석쇠를 놓을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위 네 모퉁이에 놋 고리 넷을 만들고”(4절)라는 말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즉 네 모퉁이에 놋고리 넷을 부착하는데 위치는 놋그물 “그 위”이다. 아마 채를 끼우는 고리들이 놋그물 주위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것은 제물을 태우기 위한 석쇠일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물은 제단 주위 가장자리 아래 곧 제단 절반에 오르게 할지며”(5절)라는 말씀이다. 공동번역에 의하면 “이 철망을 제단 가두리 밑쪽에 달아, 철망이 제단 중간에까지 닿게 하여라”라고 번역하였다. 즉 앞에서 번제단 그림에서 보았듯이 제단 사면을 둘러서 중간 지점에 턱진 부위(가두리)가 있으며 그 아래로 철망을 달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바로 그 지점이 채를 끼우는 놋 고리들이 부착되는 위치이다.
“놋 고리 넷”(4절)은 번제단에 채를 끼워 운반하기 위한 것으로 네 모퉁이에 고정된다. “채”는 싯딤 나무로 두 개를 만들어 놋으로 입힌다. 채는 제사장들이 행동의 불편함이 있었기에 진설상과 및 분향단과 마찬가지로 제단을 사용 중에는 두 채를 빼서 따로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번제단은 나무로 틀을 짤 때 속을 비워 두어야 한다(8절). 그 안에 흙을 채워 제단을 사용하고 운반할 때는 틀만 들고 다녔을 것이다. 사용을 위해 흙을 제단 뿔들 근처까지 채운 뒤 그 위에 장작을 쌓아 제물을 태운 것으로 보인다. 이때 내부의 흙이 방화벽 역할을 하여 조각목 제단 틀이 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에 보면 이렇게 전한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레 9:22)
제단 본체의 높이가 불과 3규빗(1.5m)인데도 제사장이 오르내렸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제단이 높
은 곳에 설치되었음을 의미한다. 제단 본체가 매우 낮은 이유는 제사를 행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나 제단을 높이 설치한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쉽게 제단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제단에 오르기 위한 비탈진 길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제단에는 결코 계단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출 20:26). 그래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제사장이 제사를 행하기 위한 공간과 제물을 가지고 올라갈 수 있는 경사로의 경사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왼쪽 그림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흙과 자갈로 넓은 면적의 튼튼한 둔덕을 쌓았다면 제단을 둘러가며 수행된 피 뿌리기 절차를 비롯한 제단 활동은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동 시에는 흙 둔덕은 그대로 두고 번제단만 운반함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어쨌든 번제단 또한 우리가 실체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제단의 높이를 고려해 볼 때 흙과 자갈로 둔덕을 쌓아 제사장이 제사 활동을 적절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레위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0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11 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레 1:10-11)
이렇게 보자면 성막 뜰의 북쪽은 제물을 잡는 곳으로 북쪽에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번제단 남쪽에서 올라가는 경사로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다.
성막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듣는 곳이다. 그것을 제사로 확인하는 것이 번제단이다. 여기서 매일 상번제로 어린 숫양 두 마리가 아침 저녁으로 기본으로 행하여지고(출 29:38-42, 민 28:3-4), 백성들은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를 끊임없이 드렸다(레 1-7장). 흔히들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성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수단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가로 생각하고 제사에 집중하고 그 제사를 오늘날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로 대체되었다고 한다면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종교가 된다.
그러나 성막에서 보여주셨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가에 초점이 있다. 그래서 지성소에서 뜰, 언약궤부터 번제단으로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휘장을 찢고 나아와 번제단에서 희생 제물이 되시는 죽음을 언약으로 성취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러므로 성막을 공부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나아와 이 땅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성막을 통해 나타내신 언약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심을 보여주신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담아놓으신 것이 성막이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네모반듯한 지성소에 둔 언약궤를 일반 백성들이 볼 수 있는 것이 네모반듯한 번제단이다. 세 영역을 통해 이스라엘은 철저히 죄인됨을 확인하여야 했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허락하시는가를 성막 전체와 매일 보는 번제단을 통해 확인해야 했다. 제사에서 구별되어 관리되는 기름과 피는 기름 부음 받은 자가 피를 흘리는 희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 되는 교회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 9-18)
(2026052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