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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스토리
석굴암. 그 오욕의 역사
석굴암(석불사), 그 오욕의 역사 1: 보수공사 그리고 쟁점들
1913년부터 3년간 일제는 석굴을 완전해체해서 보수했다. 그 과정에서 석굴을 두께 2미터의 콘크리트돔으로 덮고 286개의 석재를 교체했다. 천장 앞부분만 수리하면 되는 간단한 공사를 이렇게 방대하게 한 이유는 문화유산 하나 지키지 못하는 조선인의 열등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은혜를 강조하는 과시용이었기 때문이다. 신식기술과 재료를 사용했지만, 왠일인지 석굴에는 누수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러차례 보수공사가 시행됐지만 푸른 이끼가 끼며 그 손상이 정도를 더해 갔다. 1927년 결국 일제는 보일러를 설치하여 증기에 의한 세척법을 사용할수 밖에 없었다. 수증기분무에 의한 세척작업은 석굴의 돌들에 풍화작용을 일으켜 치명적 손상을 준다.
1945년 일제가 물러갔을때 석굴암에는 두께 2미터의 콘크리트돔과 끊임없이 생기는 습기와 푸른 이끼, 그리고 가공할 흉기인 증기세척보일러가 남아있었다.
1차 콘크리트돔은 일제시대, 2차콘크리트돔은 박정희정권때 만들었다.
1961년 박정희정권은 석굴의 습기와 이끼문제의 근본원인을 제거하는 보수공사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황수영(미술사)이 주도하는 정부측은 석굴의 습기문제가 습한공기의 유입과 누수에 있다고 판단하여 빗물과 지하수 차단,습한공기 유입방지를 위한 다음과 같은 대책을 마련했다.
1.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이중돔설치
2.지하수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석굴밑 샘물의 배수구강화
3.습한 공기의 유입을 막기위해 전실에 목조건축물을 세움 4.석굴내부의 환기를 위해 지하에 공기통로를 만들어 이중돔공간으로 빠지게 한다
이 과정에서 습기발생원인,전실석상의 전개문제,목조전실문제,광창문제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쟁점들은 결국 원래의 형태가 어떠했는가로 모아질수밖에 없다. 원형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복원결과도 시비의 대상이 될수 밖에 없었다.
현재 석굴암 구조
석굴암의 기본구조
<주요 쟁점들>
1>습기발생 원인은 무엇인가? :
남천우(물리학),이태녕(화학)등은 신라인들이 지하수와 통풍을 이용, 자연제습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a)지하수를 이용한 자연제습법
석굴내부 돌표면에 이슬이 맺히는 결로현상은 석굴보존의 가장 큰 장애다.돌표면에 이슬이 맺히면 이끼가 끼게 되고 이끼는 조각이 새겨진 돌표면을 부식시키기 때문이다. 천년동안 온전히 보존돼왔던 석굴내부에 습기가 차고 이끼가 끼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기 보수공사때부터 였다.일제는 배수구를 만들고 콘크리트로 완벽한 방수층을 만들었지만 습기는 없어지지 않았다.
신라인들은 어떻게 습기를 제거했는가?
석굴바닥아래에는 샘물이 있었다. 즉 자연수가 솟아오르는 수맥위에 석굴이 위치한 것이다.솟아오른 물은 석굴바닥돌의 온도를 떨어뜨린다. 결국 벽면보다 바닥돌의 온도가 낮게 되고 이슬은 온도가 낮은 곳에 맺히기 때문에, 바닥에 이슬이 생김으로서 벽면을 보호하는 자연과학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b)통풍을 원활하게 시켜줘야 한다:두터운 흙속에 파묻힌 석굴안에 어떻게 통풍을 시켰는가?
석굴의 원통형벽면 상부에는 감실이 10개나 조성되어 있다.이 감실바닥에 작은구멍이 있는데 환기구역활을 한다 석굴외부는 돌과 흙으로 덮여 있지만 입자들 사이에 크고 작은 틈이 있어 자연통풍이 가능했다.그런데 일제가 콘크리트로 석굴외부를 감싸는 바람에 통풍로가 끊어진 것이다. 또 전실입구가 개방형이었다
결국 석굴의 습기문제는 일제의 콘크리트벽, 제3공화국시절의 목조전실과 유리창,샘물의 배수관등을 모두 제거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주장했다.
본존불 주변의 벽에 조그만 홈을 파고 작은 불상을 안치한 감실들이 보인다 출처:위키디피아
감실확대그림)감실 안쪽에 환기구기능을 하는 조그마한 틈이 보인다
2>전실의 목조건축문제(이는 벽면의 굴절,전개문제,광창 문제와 한몸이다)
정부측은 전실목조건축이 외부공기차단뿐 아니라 원형복원이라고 주장했다.그런데 전실에 목조건축을 얹히려면 벽면을 굴절(절곡)에서 전개로 바꾸어야 한다.굴절설에 따르면 석굴자체가 네모난 전실을 가지므로 별도의 목조전실이 의미가 없지만 전개설을 따르면 그 부분은 목조전실과 원형주실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정부측은 보수공사당시의 굴절상태는 일제가 원형을 훼손하고 잘못 원한것이라고 주장했다.그리고 1963년 보수공사에서 벽면을 전개시키고 전실목조건축물을 세웠다.
2000년이후 일제가 1913년 보수공사를 하기전에 찍은 사진들이 공개되기 시작했다.그 사진들은 한결같이 벽면이 굴절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굴절설은 대세가 되었다. 언젠가 석굴암은 고쳐져야 할 것이다.
굴절설(절곡설) 전개설
목조전실을 세운 현재의 석굴암구조
굴절설,목조전실불가설,광창설(혹은 바닥돌 반사설)은 한 몸통이다,굴절설에 의하면 전실이 있는것이고, 전실이 있기에 추가 목조전실은 필요없는것이며. 전실 입구와 전실 윗부분를 개방시켜 통풍(습기조절)과 채광(광창 혹은 바닥돌)을 시켰다는 것이다.
이제 굴절설은 대세가 됐지만 상부와 입구를 개방시켰다면 석굴에 심각한 손상을 주는 비와 눈.바람과 풀씨들에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굴절설은 여기에 대답을 못하고 있다.
1913년 일제가 보수공사를 하기전. 입구와 전실윗부분이 개방된 석굴암모습
전실목조건축물이 세워진 현재의 석굴암 출처:문화재청 홈피
3>광창문제
석굴내부의 조명은 어떻게 했을까? 목조전실의 난점중 하나가 내부채광문제다.이는 굴절형개방구조도 마찬가지다 .개방을 해도 석굴내로 빛이 잘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굴절설과 목조전실불가설의 연장선상에서 원형주실입구상단에 광창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쇠창살을 꽂았던 흔적이 뚜렷한 아치형의 부재를 증거로 제시했다.그러나 전개설에 의하면 광창은 있어서는 안되는 요소였다.
그들은 쇠살창으로 된 광창이 있었다면 본존불에 창살그림자가 지는데다가 채광효과도 미미하다고 광창설을 반박했다. 또다른 주장은 거울처럼 매끈한 면을 가진 화강석을 바닥에 깔아 빛을 반사시켰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이주장도 굴절설계통이다)
원형주실 입구상단에 광창이 있는 모형
광창설의 근거가 되었던 부재 석굴암입구쪽에 놓여 있다.
4>팔부신중 진위문제
팔부신중이 원래 8개가 아닌 6개였고, 일제가 보수공사때 석굴암주변에 있던 두구를 가져다 붙여 팔부 신중을 맞추었다는설
5>석굴이 바라보는 곳은 어디인가?
토함산 동쪽산자락 해발 565미터상에 세워진 석불사의 석굴이 향하는 방향은 동동남30도 멀리 동해바다의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자리다. 석굴암이 현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대왕암을 바라보기 위한 것 이라는 설이 있으나 대왕암은 석굴정면에서 왼쪽으로 밀려있고 김대성창건설화와 연결이 안된다. 석굴방향은 동지날 해뜨는 방향과 일치(29.4도)한다는 설이 제기됐고, 공감을 얻고 있다.
6>본존불은 누구인가?
석가모니설,아미타설,비로자나설이 있기에 보통명사인 본존불이라고 부르고 있다.
a)석가모니설: -수인이 항마촉지인
(유력) -본존불의 크기와 비례가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나오는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리사
의 석가상과 일치
b) 아미타설: -통일신라시대에는 아미타불도 항마촉지인을 한 예가 있고 8세기중엽에는 아미타
신앙이 팽배해있던 점.
-본존불 뒤에 11면 관음보살이 있는점(관음은 아미타의 협시보살)
-석불사에 수광전이라는 현판이 19세기에 걸려있었다는 주장
(수광전은 아미타불이 주불인 전각이다)
c>비로자나설
1961년 정부측의 주장대로 보수공사가 시행되어 1964년 끝났지만 그후 석굴암은 물바다가 되었다. 준공2년뒤 에어컨을 설치, 강제로 습기제거를 시행했고, 그로부터 50년이 다된 오늘날까지도 석굴 바로 옆에 붙은 기계는 진동소리를 내며 하루24시간 1년 365일 계속 돌아가고 있다. 1971년 석굴보존을 이유로 석굴입구에 유리벽을 치고 일반 관람객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허나 밀폐될수록 실내공기가 습해지고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기계장치를 사용해야 한다.
기계장치의 문제점은 소음과 진동,기계가 갑자기 고장날 경우 문화재에 큰 손상을 준다는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복원보수공사가 필요하다. 석굴암을 외부에서 감싸는 콘크리트벽이 모든 문제의 씨앗이라는 지적이 높다.석굴을 완전밀폐시켜 습한 공기가 석굴의 표면을 부식시키고,콘크리트에서 나오는 화학성분이 석굴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면해체해서 재조립하는것만이 온전한 석굴보존이라 주장한다.그러나 일각에서는 콘크리트를 제거하려면 기존석재를 손상할수밖에 없어 또다른 문화재훼손을 야기할 것이며 아직 석굴의 원형을 정확히 고증할만큼 연구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가상조라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피
현재 석굴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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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석불사), 그오욕의 역사 2: 약탈
석굴암은 잊혀져 가고 있었다. 석굴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것은 1907년무렵이었다.1905년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땅에 도굴을 조장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무수한 고려청자를 일본천황과 일본귀족들에게 선물했다. 그로인해 고려시대 고분이란 고분은 모조리 도굴되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원래 조선은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자들을 중벌로 다스렸다.그래서 무덤을 도굴한다는 것은 상상할수 없는 일이었다.그런데 일인들이 앞장서서 도굴하고,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것이 알려지자 성한 무덤이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1907년 곳곳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산사의 승려들은 불안감으로 산에서 내려가 빈절로 남아있는 절집이 많아졌다. 이틈을 타 도굴꾼들이 사찰문화재를 마구 약탈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토함산 높은 산중에 있는 석불사 석굴이 세상에 늦게 알려진것은 차라리 천운이었다.
1902년 시행된 일제의 고건축실태조사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석굴은 한 우체부가 우연히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석굴이 알려지자 드디어 도굴꾼들이 이 높고 험한 산중까지 들이닥쳤다. 도굴꾼들은 석굴내 감실에 안치된 불상중 두개(아마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을 것이다)를 훔쳐갔다. 이때 이들은 혹시 본존불밑바닥에 복장유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본존불 궁둥이부분을 무참하게 정으로 깨뜨렸다. 그때 깨진 파편은 땅에 묻혔다가 후일 보수공사때 다시 붙였지만 그 흔적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모두 40개의 석굴조상은 두개를 잃어버려 38개만 남아있다.
1909년 2대통감으로 소네 아라스께가 부임하였다. 그 또한 엄청난 문화재약탈자였다. 그는 주로 불교미술품과 고문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년도 못되는 통감재임시에 고가,사찰,서원에 소장된 고문헌을 무더기로 갈취하여 황실에 헌납했다. 또 석굴안 11면관음보살 앞에 있는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석탑을 가져갔다. 본래 석굴은 인도의 석굴사원에서 기원한것이므로 본존불 앞뒤에 소탑 한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존불뒤의 소탑은 소네가 훔쳐가고 앞쪽 소탑은 부서진 파편만 남아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지금 석굴안에는 석탑받침돌만이 쓸쓸히 그 자취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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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석불사)은 어떤 가치가 있나? 국제 석굴운동의 종착지:인도에서 경주까지
석굴암은 인간이 만들어낼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술로 축조되었다. 석굴암의 구조는 그 평면과 입면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수리체계를 이루어 부분과 부분의 조화, 전체에 의한 부분의 통합이 빈틈없이 이루어져 있었다. 엄청난 무게의 돌을 깎아 세우면서도 10미터에 1밀리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20세기들어 보수를 거듭하면서도 온전한 보존책을 여지껏 마련치 못하는 것은 현대의 기술만 과신하고 고대인의 과학을 무시한 소치였다. 석굴암은 암자가 아니라 석굴사원이었다. 원래 석굴은 모든 종교의 초기 종교공간이었지만 ,임시방편 적 공간이었다. 그런데 불교에서만은 석굴사원이라는 정식유형이 생겼고 불교가 국제적으로 전파되면서, 전파된 지역에 석굴사원이라는 형태가 유행했다. 불교가 최초로 발생한 인도는 무더운지역이었다. 따라서 시원하고 어두운 석굴이 최상의 종교공간이 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인도에서는 암석을 파고 석굴을 만들어 그안에 도량을 세우기 시작했다.
석굴사원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로 구성되며 주실중앙에는 탑이 있어 참배자들이 이탑을 돌며 예배하였다. 석불암의 석굴도 기본구조는 이와 같다. 석굴사원은 기원후 불상시대로 넘어오며 주실에 불상을 모시게 되는데 이것이 국제적으로 퍼지게 된다.
석굴사원의 기본구조
불교가 해외로 퍼져나가자 전파된지역을 중심으로 석굴조성붐이 일어났다. 파키스탄의 바미얀,중앙아시아의 키질,베제클리크석굴등이 실크로드를 따라 조성되었고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자 둔황 막고굴,룽먼,윈강석굴이 만들어지고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하지만 한반도에서는 좀처럼 석굴사원을 조성할수가 없었다.
중국의 암벽은 퇴적암층으로 파내고 조각하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한반도의 바위는 거의 화강암이었다 화강암은 파내기도 조각하기도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이를 변형하여 백제의 서산마애불처럼 바위에 새기거나, 고신라의 감실부처처럼 작은규모로 바위를 깍거나, 중대신라이후 군위삼존불처럼 자연석굴을 이용한 석굴사원을 만드는등 여러 시도를 하였다.
군위 삼존불 출처:문화재청 홈피
그 실험과 염원의 끝에서 마침내 석굴암(석불사)의 석굴이 탄생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인공석굴을 만든 것이다.돌로 쌓고 흙을 덮은 축조석굴을 말이다. 그것도 주실의 천장을 반
구형의 돔으로 만들었다. 모르타르가 없던시대에 반구형의 돔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었다.
인도에서 시작된 석굴운동이 지리적으로는 9000Km를 이동해서.시간적으로는 천년의 긴 여정끝에
한반도의 동쪽 끝 경주 토함산에서 그 찬란한 마지막 꽃을 피웠다. 이것이 석굴암이다. 국제적 경향속에 석굴암이 있다고 하지만 그 형태와 내용은 독창적이었다.
첫째, 대부분의 석굴이 굴착석굴인데, 석굴암은 축조석굴이다
둘째,외국의 석굴은 수십개가 모여있는 군집형인데 석굴암은 단독형이다
단독형은 한국석굴의 특징인데 화강암이라는 단단한 암질때문이었다.단하나의 예외가
골굴암인데 골굴암은 12개의 작은 자연동굴로 이루어진 한국유일의 석굴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