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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은하수
젖과 꿀이 흐르는 나일강 모태삼아
기원 3천년경부터 고대문명 꽃피워
상하(上下) 이집트 '나르메르'왕이 최초통일
고왕국부터 신왕국까지 ‘26대 왕조’가 흥망
파라오가 절대권력 행사 天文學 幾何學 발달
BC 1700년경 '이민족 힉소스왕조' 1세기 지배
◇ 신의 선물 ‘나일강의 축복’
BC 3200년경부터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이 통일할 때까지 약 3,000년간 오리엔트 지역에 번영했던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 ‘오리엔트(orient)'라는 말은 로마인이 태양이 솟아오르는 동방지역을 '오리엔스(Oriens)'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며, 이곳의 핵심 요충지로 나일강 유역인 이집트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거점인 메소포타미아를 응당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의 대찬사인 '나일 강의 선물'이라 할 만큼, 나일강의 영향을 지대하게받았다. 거대 문명을 탄생시킬 만큼 풍요롭고 아름다운 나일강! 길이만 해도 6,700km로 미국 미시시피강과 브라질 아마존강 다음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나일강은 수량도 비교적 일정하여, 일찍부터 교통로로 사용되었다.
나일강은 고대부터 사하라 사막을 넘어 북부아프리카와 적도 이남의 내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으며, 고대 이집트문명이 지금의 하르툼(Khartoum, 수단의 수도) 북쪽 메로웨를 거쳐 에티오피아에 영향을 준 생명선이 되었다.
이집트는 사막으로 둘려 쌓여 있음에도, 나일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사막을 가로 질러 흐르며 사막 건너편의 비옥한 토양을 주기적으로 이집트에 공급해 주었다. 특히 연례행사로 다가온 나일강의 정기 범람은 미스터리일 정도로 온건하고 규칙적 특성 때문에 태양력·기하학·건축술·천문학의 모태로서 지대한 여파를 미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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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문명 발흥의 독특성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천년 6천km에 달하는 나일강을 따라 발달된 상(上)·하(下) 이집트를 통일하여 대규모 왕국을 건설하면서 꽃피기 시작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라미드, 스핑크스, 파라오, 파피루스등 기원전 3천년 경부터 나일강 유역에서 꽃핀 이집트 문명의 독보적 존재들이다.
이집트는 지정학적(地政學的)인 면에서 개방적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큰 차이가 있다. 사막과 바다로 에워싼 이집트의 지역적 폐쇄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이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홍해와 시나이 사막, 북쪽은 바다, 남쪽은 누비아의 정글에 둘러싸여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좁고 긴 하곡지대(河谷地帶)인 상(上)이집트에는 다른 민족의 침입이 거의 없었고, 삼각주 지대인 하(下)이집트에도 서아시아나 북아프리카로부터의 침입이 간혹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이집트 문명은 천혜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외침이 없이 무려 2000년 동안 고유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기에 당시의 흔적들이 가장 생생하고 완벽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 고대문명 태동과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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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대 이집트 왕국의 연원과 형성을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한다.
기원전 4000년경부터 함(Ham)족이 나일 강 유역에 노모스(Nomos)라는 40여개의 도시국가를 일으켰는데, 점점 통합되어 BC 3500년에 상·하 두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BC 3000년경에는 통일 왕국이 성립되었다.
고대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 종교, 문화의 정서가 서로 다른 나일 삼각주의 下이집트와 상류지방인 上이집트로 구분된다. 상이집트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급감하면서 생산성 역시 쇠퇴 일로를 걷고 있는 나일 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었다. 하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 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의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서 활발히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그 후 1,0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 하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무렵 상이집트의 '나르메르(Narmer)'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어 수도는 중간지점인 나일 델타 곡창지대가 시작되는 '멤피스'에 구축되었다. 이를 상세하게 알아본다.
이집트는 통일 왕조 수립 후 26대 왕조가 흥망 하였는데, 크게 대략 3개의 시대로 나누인다. 고왕국 시대(古王國, Old Kingdom BC 2850∼2060)는 1대 ∼10대 왕조기로 수도는 멤피스였으며, 왕의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인 피라미드 건설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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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중왕국 시대(中王國 BC 2060∼1670)는 11대∼17대 왕조기로 수도는 테베였으며, BC 1700년경에 이르러 약 1세기 동안 힉소소(Hyksos)의 지배를 한 때 받았으나 이를 몰아내고 시리아까지 진출하였다. 마지막으로 신왕국 시대(新王國 BC 1570∼525)는 18대∼26대 왕조 시대로 수도는 ‘아마르나’였으며, 페르시아에게 멸망하였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본다. 이집트 왕국은 피라미드 시대로 일컫는 고왕국 시대 제4왕조와 제5왕조 때 최초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오늘날 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피라미드는 이 시대에 축조되었다.
그 중에서도 카이로의 서쪽 기제에 있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가 가장 웅장하다. 기제의 피라미드는 높이147m, 밑변의 한쪽길이가 230m로 2.5톤 가량 되는 거대한 돌을 약 230만개나 쌓아 올려 축조한 것이다.
도읍을 테베로 옮긴 중왕국 시대에는 귀족의 세력이 억제되고 중하층민 세력의 급부상으로 서민국가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 말기에는 약 100년 동안 힉소스의 지배를 받았으나 신왕국 시대의 힉소스를 쫓아내고 오리엔트 최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신왕국은 기원전 11세기경부터 차차 국력이 쇠락하여 기원 525년에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아 내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이집트 대제국의 흥망성쇠기에 있어 유일하게 이민족(異民族)이 통치한 것은 힉소스 왕조이다. 힉소스족의 침입은 BC 2000년경 오리엔트로부터 동지중해역(東地中海域)에 걸친 대규모의 민족이동과 관계가 있다. 힉소스족들은 시나이반도에서 델타 동부에 침입, 아바리스에 성채를 구축하여 점차 나일강 유역에 세력을 뻗쳤다.
이들의 최고 백미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전차(戰車)다. 기원전 1800년 경 남부 중앙아시아에서 본격 등장한 전차는 말을 동력원으로 하는 괴력으로 고속 기동을 할 수 있었다. 근거리에서 칼과 창을 접전해야 하는 보병은 전차가 대열로 돌진해오는 장면만으로도 전투 의욕을 상실했다. 패권국으로 군림하던 이집트로서는 굴욕적 일이었다. 막강 힉소스족도 테베의 호족으로 새로운 전술을 채용한 제18왕조 창시자 아하메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결국, 기원전 525년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압제에 놓이게 된다. 기원전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의 마케도니아-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알렉산더는 나일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이 항구 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우여곡절 끝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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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Actium 海戰)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야심파이고 보기 드물 게 유능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로 고대 이집트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의 배경과 이집트를 밀접하게 연관지우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는 창세기의 대홍수 이후, 그리고 바벨에서의 분산 이후 미스라임(Mizraim,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아들)의 후손들에 의해서 자리잡게 된다. 현재의 이집트(Egypt) 라는 이름은 미스르(Misr)에서 나왔다.(창세기 10:6, 50:11)
BC 13세기 모세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선민 이스라엘의 시발이었다면, 서기전 608년경 여호아하스왕이 굴욕적으로 이집트로 잡혀가고(왕하 23:34), 유다왕국이 멸망하면서 ‘대소 백성과 군대장관들이’ 이집트로 망명함으로써(왕하 25:26) 구약의 역사가일단락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고대문명 전진기지 맹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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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약술한 도시국가들의 통일은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통일 후, 이집트는 강력한 사회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이집트는 정부 조직과 행정 체계, 건축과 토목 기술, 예술 등 모든 면에서 비약적 발전을 달성하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상형 문자 체계인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도 정비되었고, 1년을 365일로 하는 태양력이 완성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처음에는 그림으로 뜻을 나타내는 그림 문자를 쓰다가 것을 간략하게 하여 나중에는 상형 문자를 만들어 썼고, 문자가 점차 발달하여 부분적이나마 표음문자 단계까지 이르렀다.
한 해 농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나일 강의 범람 시기를 알기 위해 천문학과 태양력이 만들어졌다. 또한 홍수로 사라진 논밭의 경계를 다시 정하기 위해 수학과 측량술의 근간인 기하학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과학 기술은 피라미드나 신전 축조에 이용되었으며 건축술의 발달로 이어졌다. 또한 신전의 축조 과정에서 지렛대, 도르래의 원리가 이용되었다. 수학에서는 10진법이 사용되고, 미이라 제작 과정에서 외과 의학이 발달하였다.
고대 이집트는 오리엔트의 다른 나라처럼 다신교를 맹신했으며, 그 중에서도 태양신(太陽神)인 라(Ra)와 나일 강, 저승의 신인 오시리스(Osiris)가 가장 숭배되었다. 특히 고대 이집트 문화 생활상 조감과 관련하여 농경 생활과 관련 깊은 태양신을 빼놓지 않을 수 없다.
날마다 출몰을 되풀이하고 만물을 생동하게 하는 태양은 농경 생활을 하는 이집트인 에게는 도도히 흐르는 나일 강과 마찬가지로 비할 때 없이 신비하고 위대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왕으로서 전권을 휘두른 ‘파라오(Pharaoh)’는 바로 이 ‘태양의 아들’이란 뜻이다. 파라오는 살아있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파라오는 정치․ 종교․ 군사상의 절대 권력을 갖고 국가를 통치하였으며, 수많은 농민과 노예를 부려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축조했다. 귀족들은 소수의 관료와 신관(神官)으로서 왕에게서 넓은 토지를 받아 그 세력이 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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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들은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영혼 불멸을 믿어 미라를 만들어 시체를 보존했고,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를 기록하여 내세의 심판에 대비하였다. 이들은 사람이 죽더라도 영혼은 살아있고, 육체를 남겨두면 저승에서 부활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시체에 약을 바르고 천으로 싸서 썩지 않게 미라(mirra)를 만들었다.
'미라'는 포르투갈어로서 역청을 뜻하는 아랍어 ‘무미야흐(mumiyah)’에서 유래된바, 피라미드 속에는 왕의 미라가 안장되었다. 피라미드 근처에는 사람 얼굴에 사자 몸을 한 동물 석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이것이 스핑크스이다. 스핑크스는 신성한 무덤에 마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수호신이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변에서 야생하는 파피루스(papyrus)로 만든 종이에 검댕을 물에 타서 만든 잉크를 갈대 펜으로 찍어 글씨를 기록했다. 고대 이집트인이 개발한 파피루스 종이는 서양으로 전래되어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애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