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전태일 열사 50주기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이 50년 전 열사의 항거 덕분이라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일과를 마치고 카페홀더 힐링캠프를 떠났다. 올봄에 해외연수를 계획했다가 코로나19로 미루다 결국 1박 2일 캠프로 변경했다. 그것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되면서 가능했다.
숙소는 함평 돌머리해수욕장 인근의 주포마을 한옥펜션이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다. 이번 캠프는 처음부터 회의나 교육은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기로 했다. 멀리 돌머리해수욕장 갯벌탐방로의 야경이 보인다. 지난달 근처에 왔다가 갯벌탐방로는 다음 기회에 오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는데 기회가 온 것이다.
카페홀더 직원 모두가 숙소에서 출발하여 걸어가기로 했다. 막상 출발은 했으나 걸어가기에는 무리다 싶어 펜션 마당에 있는 자전거를 가져와 올라탔다. 처음에는 비틀거리다가 이내 중심을 잡았다. 27년 만에 자전거를 탄 것이다.
빨리 가는 것도 천천히 가는 것도 힘들어서 걸어오는 일행을 뒤로하고 내 속도로 페달을 밟았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밤 바닷가를 달렸다. 돌머리해수욕장이 가까워지자 왼발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목적지인 갯벌탐방로 종점에 도착하니 사방은 캄캄하고 입고있던 옷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전거를 배웠다. 동네 또래들은 4학년 때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해서 5학년에는 모든 아이들이 탔기에 내가 제일 늦었다. 어느 날 보리밭에 버려진 자전거를 동생 용삼이가 가지고 와서 타보라고 했다.
밭고랑 사이를 몇 번이나 넘어지다가 중심을 잡았다. 처음에는 동생이 밀어주다가 신작로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동네 길 옆에 또랑이 있고 가다 보면 작은 둠벙이 있어서 자칫하면 물속에 처박히게 된다. 그날의 팽팽한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자전거는 내 발이 되어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페달을 밟으며 다녔다. 자전거는 내 삶의 영토를 확장해 준 첫 번째 공신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를 타며 등하교를 했다. 중학교 때 벌교 소화다리를 건너며 맞았던 바닷바람은 왜 그리 시리던지. 용돈이 떨어졌을 때는 자전거를 타고 광주에서 벌교 고향집까지 가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짠하게 보였는지 용돈을 좀 더 받았다.
자전거를 타며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2박 3일 하이킹이다. 동명동에 살던 여름날 점심을 먹고 출발하여 목포 유달산에 도착하니 어둑어둑 해가 졌다. 고향 동생인 용범, 용운과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목포와 강진을 거쳐 광주로 돌아오는 2박 3일간의 하이킹은 힘들 때마다 삶의 에너지로 작동했다.
실로암사람들에서 일하고 나서 1993년에 승용차 운전을 하기까지 자전거는 이동과 건강의 파수꾼이었다. 당시까지 몸무게가 50kg이 안되어서 헌혈을 하며 몸무게를 속여야 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잔병치레 없이 살았던 것은 자전거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힘들 것이라는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절반쯤 돌아왔을 때부터 몸은 그로키 상태가 되었다. 자전거가 좌우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풀리고 숨이 멎을 지경이 되었을 때 바로 앞 해변가에서 폭죽을 쏘아 올렸다. 마치 자전거 레이스를 응원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나의 자전거 타는 방식은 왼발로 페달을 굴리고 오른발은 페달 위에 얹어놓고 페달의 움직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오른발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왼발 하나로는 페달을 굴리기가 어렵다. 발의 힘이 부족하다 보니 나머지는 팔과 상체의 움직임으로 보충해 나간다.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았으나 이미 한계상황이 지났다. 왼발이 풀리고 양팔과 어깨가 아파오더니 엉덩이 아래에 물집이 터져 쓰려왔다. 겨우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자전거보다 내가 먼저 마당에 쓰러졌다. 왕복 15리 정도의 길을 달렸을 뿐인데 27년의 공백은 생각보다 컸다.
밤은 모닥불의 시간이다. 바비큐 통에 장작을 올려놓으니 한기가 물러가고, 장작이 다 타고 숯불로 변하자 더욱 오묘한 불빛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새날이 되어서야 방으로 들어갔다. (2020.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