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정말 참인가?
"며칠 전 신문에서 보니까, 영국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가 부활했던 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증명했다고 하더라.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니?" 한달 전쯤, 학교에서 리더 교육 준비를 하느라고 컴퓨터로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을 때, 그것을 지켜본 한 친구가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삶에 충실하고 진리를 찾는데 진지한 친구입니다.
그는 이렇게 물은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네가 믿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증명이 되었다는데, 흔들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신문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나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풍부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증명해 잰 내용이 분명 잘못 되었을 것임을 확신해. 어떤 사람이 구구단이 틀렸음을 아주 복잡한 방법을 통해 증명해 냈다고 해서, 실제 생활과 이성에 착착 들어맞아 그것에 기초해서 살고 있는 구구단에 대한 확신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오히려 더 문제는 부활에 대하여 '어쩌면 아닐지도 몰라'확신이 없으면서도 계속 교회 나와서 헌금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때의 이스라엘로 가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는 없었다고 알게 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자살하겠다. " 고 임영수 목사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것과 아는것의 일치를 추구하는 바른 신앙입니다. 우리는 역사상으로 실제로 존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이 글자를 쓰고 있는 철호를 지켜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직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그분이 성경에 쓰인 대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셨고, 육체로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셨음에 대한 확신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그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요?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적을 때 신앙은 별로 힘있지 못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도박과 같습니다. 도박에도 종종 완전히 미치면 집도 아내도 다 그 도박에 거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내가 믿는 것이 참이라는 확신이 100%가 아니라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생을 다 걸고 가정과 온 재산을 다 그 불확실한 믿음에 바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게 전 인생을 다 걸고 전적으로 헌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적당한 헌신. 적당한 열심. 적당한 헌금. 적당한 전도. 적당한 봉사. 적당한 거듭남. 확신은 "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무릎꿇게 될 때, 성령님의 도움으로만"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즉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지으신 것과, 그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과, 그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하여 고백하게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텐데, 하나는 초자연적(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에 있는 물리 법칙을 뛰어 넘는)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법칙을 뛰어 넘지 않는 방법이겠습니다. 성령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성령님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 예를 들자면, 현재 이슬람교 국가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약 1/3은 꿈속에서 직접 예수님께서 "나,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셔서 믿게 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전 오셨을 때에도,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심으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자심이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히브리 방언으로 말씀하심을 들었고, 눈까지 멀어 가며 초자연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자연적인 방법의 역사하심이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선호하셨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나는 예수이다. 나는 널 사랑한다. 그러나, 네 죄를 먼저 씻어야겠으니, 네가 죄인임과 내가 널 씻어 주러 왔다는 것을 믿어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방법은 인간의 인격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으시며, 사용하실 때에도 그 인격성을 보호하시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하신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인격의 의미는 "자유" 에 관한 것입니다.
인격과 자유의 의미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지으실 때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만드셨다면, 더 좋지 않았겠는가?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생각하고 판단하고 사랑하는 존재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인격이 있다는 것)과 그에게 자유가 있다는 점은 따로 분리해 낼 수 없는 개념입니다. "죄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그 자유가 없는 피조물로 지으셨다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창조를 하실 때 동물까지만 창조하고 인간은 창조하시지 않으셨다면"과 같은 말이라고 프란시스 쉐퍼는 말합니다. 인격성에는 자유가 반드시 포함됩니다. 진정한 사랑을 얻으려면, 억압적으로 억지로 사랑하게 하여서는 안되고(많은 동화에서 나쁜 사람이 공주를 납치하여 결혼하려고 하듯이 하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잖아요?),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라도,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뿅~가는 상태로(자유가 없는 로봇이 되어서)아버지를 사랑하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다닐때에는 "기적을 체험하면 하나님을 믿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간고사 시험 칠 때 잘 모르는 문제를 찍으면서도 기도했습니다. 찍은 문제마다 다 맞으면,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형광등을 보면서 "꺼지게 해주세요."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꺼지면, "다시 켜지게 해주세요."기도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처음 믿는 철호의 기도를 웬만하면 들어주셨기 때문에 아주 큰 확신을 얼마동안은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이번에는 절대로 우연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기도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세상에는 의심 생긴 마음에 영원히 확신을 줄 만한 기적적인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일단 의심이 생기면, (모세의 말을 믿지 않으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 나와 이야기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눅 16:31]. 복음서에서 표적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시기도 하셨습니다[마 16:1-4, 막 8:11-12].
이러한 의심은 신비주의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앞의 예에서와 같이 더 큰 신비 체험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의심은 모든 신비 체험이 거짓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인격을 보호하시면서 만나신다는 표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확신을 얻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확신을 주시는 성령님의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상호 보완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전혀 기이하지 않은, 그렇지만 진실로 놀라운 성령님의 사역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기도 합니다. 은밀한 기도에는 기도한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은밀히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토의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역사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나온 첫 예루살렘공회에서는 주로 보고, 토의, 의견교환만 했는데 (행15:6,7,12,13,19) 그들이 편지를 보낼 때는 성령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28절). 별로 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합리적 토의 과정을 통해서도 성령님께서는 말씀[ 송인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pp.149-150, 1995, IVP ]하십니다. 그러한 초자연적이지 않은 성령님의 역사 중에서 가장 주된 것이라고 필자가 생각하는 것은 "마음과 지식을 새롭게 하심" [ "지식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라는 말은 라브리의 성인경 간사님의 강의 TAPE을 통하여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표현이 적당한 것 같아 제글에도 인용하였습니다. ] 입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한 성령님의 역사 하심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이 참으로 중요한 문제라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확신을 얻는 방법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 확신을 주시는 사역의 방법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한 것과, 어찌 보면 평범한, 그러나 진실로 놀라운 "마음과 지식을 새롭게 하심"이라고 불리는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두가지는 상호 보완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도 이야기했는데, 성령님의 초자연적 방법으로 얻는 확신은 보통 100%까지 이르는 확신이 아니도록, 그 인격성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만나신다고 했습니다.
" 나는 성경은 잘 모르고 지식적으로는 공감이 잘 안되지만 하나님을 직접 만났기에 그 분을 전적으로 확신하며 신뢰한다."고 어느 벗님이 말하신다면, 진실로 그 말이 참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출애굽 이스라엘 온 족속 중에서 모세 한 사람이었음을, 그리고 그 모세와의 만남도 매우 인격적이었음을 이야기해야겠지요. 일반적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방법이 이 글에서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 나는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나지도 않았고, 성경도 체계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제시할 믿음의 근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증거나 근거에 관계없이 나는 예수님을 확신한다."고 생각하는 벗님이 있다면 그 확신 위에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 행함으로 굳건한 기반을 다져 놓기를 바랍니다. 아래 글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흔들릴 때 잡을만한 충분한 근거들이 연약한 인간에게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성령님의 두번째 방법에 대하여 더 깊이있게 생각해 봅시다. "지식을 새롭게 하심"의 역사는 성경공부를 하는 궁극적 근거입니다. 이는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터놓으신 방법입니다.
일발 계시인 자연 만물과 자기자신 속(양심, 인간됨, 의미성 추구,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 등)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에 대하여 "핑계할 수없을 만큼"분명히 알게 됩니다[ 롬 1:19-20 ]. 진화설(현 학교 과학 교과서에는 진화'론'이라는 말이 더 이상 없습니다.)과 심리학 등의 인간에 대한 연구로 인하여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무디어질 만큼 무디어져 있지만, 그들도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우주의 기원과 자신의 도덕성을 생각하는 양심을 꺼내어 함께 대화를 나누면, 핑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존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서로 이야기하며 살도록"인간을 지으셨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이야기"를 통해 침묵하시지 않으시고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놀랍고도 객관적인 계시를 주시기 위해 인간의 역사를 계시의 방편으로 선택하셨고 그것을 문자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성경을 통한 계시는 어찌 보면 참으로 불편한 방법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체계적으로 알고 있지 않으면,실생활의 수많은 다양한 문제에 별로 해답을 주지 못하기도 합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언어에 대하여는 다시 어렵고 어려운 번역작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불편한 방법인 성경을 통한 자기 계시를 가장 주되게 사용하십니다[대학부 19기 옥중서신 리더님 한 분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이유를 천국에 가서 한 번 물어볼 만하겠지만, 추측해 보건대, 이것도 우리의 인격을 보호하시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만큼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위대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세상 학문은"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 타락한 사실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우연히 발생한 무의미한 기계에 불과한 존재이다."라고 말하지만, 성경은"너희는 창조주를 떠나 타락했다. 그러나 참으로 소중하고 의미있는 존재이다."라고 말합니다.'[프란시스 쉐퍼의 말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작가와 그가 만들어 낸 인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음미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작가가 한 번 특정 작품을 써 내려가다가 이러저러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을 만들어 낸 경우, 진정한 작가는 "오늘 따라 기분이 별로 안 좋으니까"라며 전체 인물들 각각의 이미 만들어진 성격을 무시한 채 마음대로 작품을 일관성 없게 쓰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인격이 있도록 지으신 하나님은 그 인격성을 무시하시는 방법을 인류 구원의 길로 삼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100% 진실한 책으로 우주와 인간과 역사와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확신과 가치관(기독교 세계관)을 얻게 하는데 가장 일반적이고도 객관적이며 능력있는 책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면서도 성경을 읽는 인간의 인격성을 파괴하지 않도록 모두 인간의 손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성경이 역사와 과학, 우주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오직 종교적 의미성에만 무오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도 성경이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에 불확실하고, 그가 물위를 걸으셨다는 것도 성경이 "과학"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에 틀릴 수도 있으며, 그가 천국과 지옥을 선포한 것도 역사의 기록이기에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종교적 의미성, 즉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하신다."와 같은 개개인에게 다가오는 주관적 의미성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는 며칠 전에 대입 수능시험을 치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며칠 후 합격통지서가 올 것은 확신한다."는 말처럼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만일 이러한 말이 정말이라고 설득 당하여 제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고, 그것의 의미를 생각할 만한 하루동안 계속 그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저는 분명 자살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의 문을 연 칼 바르트는 그의 경이로운 통찰력과 깊이 있는 신학,그리고 은혜로운 강해서 '로마서 강해'등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근동 한고대 종족의 종교이며 헬라 종파의 옛 문서이다. 다른 것과 꼭 같이 인간의 기록이다."라고 단언하였기에[ 칼 바르트,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60 : 김기홍, 역사와 신앙 p199, 두란노서원, 재인용하였습니다. ] 초기에 바르트는 "예수의 부활은 불확실하다."고까지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바울이 한 말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
요..."[ 고전 15:14-15, 17 ] 후기 바르트는 부활에 대하여 깊이 묵상한 후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하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 믿음이 헛것이라고 한 바울의 말은 옳다."고 말하며 자신의 일관성에 약점을 드러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했습니다.
세상이 너무도 복잡해져 있고 대적하는 사단의 전략이 더욱 교묘하여져서,"진화의 증거들이야 어떻든, 나에게는 별 반박의 근거는 없지만 어쨌든 예수를 믿는다.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라고 출발한 이러한 신학이 어느 정도는 이해됩니다. 성경을 떠난 신앙이지만, 다윈이 처음 진화설을 발표하고 자유주의적 신학이 난무한 그 시대의 "성경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상황과 역사를 볼 때 그러한 시대를 잠시 감당하는 신학으로써의 의미는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화된 성경관으로 말미암아 얻게된 것은 "내가 믿는 것,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드는 신앙에 대한 불확실"과 "지옥이 아마 없을꺼야, 사랑 많은 하나님이신데..., 어쩌면 그냥 잘 살라고 겁주는 이야기로 성경 기록자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어라는 만민 구원설", 그로인한 "선교 열정의 쇠퇴" 그리고 "비합리를 내세움으로써 불신자와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 것" 등 입니다. 열심히 신앙에 대한 토론을 벌이다가 막히게 되면 "어쨌든 일단 믿어봐야 대화가 통할 것 같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 계셔서 합리적으로는 모순되는 게 많아."라로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의 대화는 단절됩니다. 토론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식의 대화가 초대교회 바울에게 있었습니까? 중세 때에도 이러한 대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극히 최근 19세기에 접어들어 실존주의 철학 이후에야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전도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이방인에게 설명할 때 그 답을 비합리 영역으로 회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또한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비합리적 신앙, 초신령한 것만을 추구하는 신앙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요즘의 신 신학 이야기는 별로 은혜스럽지 못하니까 여기에서 그만하겠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프란시스 쉐퍼의 "거기 계시는 하나님"과 "이성에서의 도피"(생명의 말씀사 또는 크리스찬 다이제스트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를 잡아 이해하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삼위일체에 대하여 논하라."라고 문제를 내셔서 천국에 가는 사람을 뽑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믿음에 내용이 없이 "예수"라는 이름만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도 또한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아론과 함께 만든 금송아지를 일컬어 아론은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32:4)라고 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 금송아지 받침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인 자음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고 쉐퍼는 말합니다. 즉 믿음의 내용이 없이 그저 이름만 가지고는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말에 의미가 하나도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하고, 그 내용에 따른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놀라운 계시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파악해야 합니다.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40이 넘도록 방황하여도 얻지 못할 우주와 인간에 대한 무오한 진리가 마음먹으면 1년에 5번은 볼 수 있을 만한 분량의 책에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우주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우주의 반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고결한 양심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과, 인간 사회에 죽음과 질병과 잔인함과 악이 죄 때문에 온 것임을 모르기에 인간에 대하여도 반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조각조각 나뉘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이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잡아 하나의 커다란 체계로 연결될 때, 그곳에는 참으로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사 이 땅에 오신 그 분이 몸서리 처지도록 엄존(儼存)하여 계시고, 그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믿음과 실천이 하나로 있게 됩니다.
그 때에도 나의 인격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분명히 성경에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일에 대하여 여전히 철호는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갈등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철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하여 살아 간다고 해서, 자유를 가진 철호의 인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아무리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을 하여도 여전히 두 사람의 인격이 없어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프란시스쉐퍼,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여성 해방 운동의 파괴력" ] 결론적으로 크리스챤이 고민해야 할 것은"하나님,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말씀의 순종"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하면 육신을 처 말씀에 복종하게 할꼬"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구약의 모세오경 마지막쯤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1-14]
지금은 세상이 복잡해져서 모세오경 이후로 하나님께서 66권의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멀리 있지 않고, 이 말씀 속에 있으니, 하늘에 가서 가져 오려고 시도할 것도 아니요, 마다 밖으로 찾으러 갈 필요도 없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현재 우주의 복잡성과 인간의 고결함과 잔인성이 동시에 공존함과 똑똑한 동물(침팬지)에 비하여 저능아 인간이 존엄한 근거와 저녁의 황금빛 노을이 우리 보기에 아름다운 이유와 인간에게 양심과 도덕성이 있음과 인식론의 근거인 언어의 궁극적인 기반 제시에 유일무이한 해결책을 이 천년 전에 제시해 놓은 놀라운 책입니다. 처음 이야기에서 나온 구구단을 생각해 봅시다. 구구단은 합리적이고, 또한 실생활에 잘 맞아떨어집니다. 3*9=27이 정말임을 우리는 100%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계산으로 돈을 꾸이기도 하고 물건을 사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전능하심과 초자연적 능력으로 인해 비합적인 면이 있습니다.(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많은 부분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성경은 합리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주와 인간에 대하여 실제 생활과 분리됨 없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종교개혁때 어떤 개혁가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성경을 평신도의 손에 주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건만, 종교개혁 전과 같이 우리는 목사님이 해설해주는 성경 말씀만 듣고, 리더가 말해주는 성경만 보고 있습니다. 지퍼가 달린 성경을 들고 주일날 옵니다. 예배 때와 성경 공부할 때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입에 채워 놓은 지퍼를 열듯이 성경을 엽니다. 그 시간이 끝나면 다시 다음주가 될 때까지 "하나님, 이제는 조용히 계세요."하나님의 입의 지퍼를 채워 둡니다.
성경을 삼국유사처럼이 아니라 지존하신 주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과학이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구절이 있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는 겸손으로, 성경이 쓰여진 때와 장소와 그 실존 인물로 자신을 넣어가며, 그래서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질 때 나도 함께 만지고, 바울이 마게도냐 땅을 밟을 때, 그 발자국을 눈앞에 그려가며, 그렇게 말씀을 읽어봅시다. 주일 성경공부때 미리 성경 읽고 생각해 보고 옵시다. 주석 성경으로 답만 읽지 말고, 시간을 들여서 직접 성령님의 "지식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체험합니다. 그 때 우리는 도마가 예수님께 대하여 한 다음의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삼위 일체적 고백을 똑같은 확신으로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8]
[옮긴글] 영락교회 대학부 학생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