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란 것이 필연적으로 글쓴이의 어떤 내밀한 공간을 노출시키고야 마는 구석이 있다 믿고 있는 저로서는,
모임 시간에 발제했던, 충분히 농익지 않아 설익기 그지 없는 이 글을 공개하지 않고서 그저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는데요.
며칠전 '가장자리' 김선아 선생님의 '발제문을 올리라'는 강권(?) 덕분에 이렇게 용기 내어 글을 올리고 갑니다.
그러니,
홍세화 선생님으로부터 글을 잘 썼다고 칭찬 받았다 자랑하신 - 저는 칭찬 받지 못했습니다 OTL -
우리 3기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신미경 조장님도 어서 발제문을 올려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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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할 줄 아는 사람들’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1909)는 여러모로 수수께끼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생각의 좌표’ 3기 첫 모임 때 이 소설에 관해 함께 토론하던 저희는, 단도직입적으로 고백하자면, 약간의 ‘멘붕’ 상태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홍세화 선생님, 아니었던가요?) 전체적인 분위기는 ‘하인’이라는 말의 속살을 둘러싸고서 논의가 진행되어 나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날 홍세화 선생님의 김치찌개가 아니었다면 아마 저희 모두는 우울하게 발걸음을 집으로 돌려야 했을지 모릅니다.
‘하인’이라는 단어는 정말이지 문제적으로 보입니다. 도무지 잘 파악되지 않는 의미로 다가올 뿐이었습니다. 다만 소설을 읽어내려 갈수록 확실해지던 감각은, ‘하인’이라는 말이 ‘굴종’과 ‘무사유’를 가리키는 그것으로 쓰인 게 아닌 것 같다는 일종의 직관이었습니다. 그러다 다음의 문장을 만났고, 저의 직관은 서서히 확신의 감정으로 옮겨 갔습니다.
“이곳 벤야멘타 학원에서는 상실감을 느끼는 법과 견디는 법을 배운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능력,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벤야멘타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일종의 적극적인(positive) “능력”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는 하인에 대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통념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인은 보통 소극적인(negative) 존재로 간주될 뿐이니까요. 쉽게 말해 보통 그들은 명령과 요청을 ‘받는’ 존재이지 결코 그 역이 아니지요. 아울러 학생들은 “상실감을 느끼는 법과 견디는 법”을 배운다고 하는군요. 저는 이 표현을 ‘상상력’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 말입니다. 한 가지 비유가 떠오르는군요. 역사라는 이름의 기관차가 앞을 향해 맹렬히 전진해 나갈 때 우리는 두 부류의 인간과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 기관차를 계속 쉼 없이 앞으로 밀고 나가려 하는 자와 반대로 단호하게 기관차를 멈추려 하는 자. 다시 말해 ‘머리 칸’ 유형의 인간과 ‘꼬리 칸’ 유형의 인간. 슬프지만 우리는 이미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 칸’ 유형의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헤게모니적’ ― ‘수(數)적’이 아니라 ― 다수를 차지해 왔다는 걸 말이지요.(“I belong to front, you belong to tail!”)
필경 ‘가장자리人’들은 머리 칸 보다는 꼬리 칸의 세계에 공명하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이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몫을 갖지 못한 자들이 원한의 감정에 휩싸여 자신의 몫을 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꼬리 쪽을 택한 ‘우리’ ― 그러나 결코 배타적이지 않은 ‘보편’(普遍)으로서의 ‘우리’ ― 라는 공간을 도모하고 모색하는 분들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가장자리人’은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능력”입니다. 그것도 아주 굉장한. 그러니 이제 소설 속 화자인 야콥의 다음과 같은 소회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지는군요.
“잘 알지도 못하고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 그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그것은 신비로운 안개에 싸인 낙원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그러고는 결국엔 깨닫는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혹은 ‘거의 모든’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내 옆을 스쳐가는 저기 저 사람들, 그들은 나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보편으로서의 ‘우리’는 모두 ‘능력자’입니다. “겸손할 줄 아는 사람들”(104)일 테니까요. ‘우리’는 존중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첫댓글 아이고 칭찬이라니요 책을 열심히 읽어와서 해주신 말씀이었고요;;
<기억의 몽타주> 읽고 있는데 너무 재밌다가 중간부터 속도가 나질않네요 ㅎㅎ 그래도 책과 함께하는 가을이라 제법 즐거워요~ 우리 좀 멋진듯 크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