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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덤
김 성 한
느낌이 이상하다.
왁자지껄해야 할 집안이 조용하다. 지금쯤이면 두레상에 둘러앉아 제삿밥을 자시고 있을 할아버지도, 아래뜸 당숙도 보이지 않는다. 꼬끼오, 마구간 옆 닭장에는 수 닭이 홰를 치며 울고 있다. 닭이 울면 조상님도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데….
“흐 흥, 엄마는 깨우지도 않고.”
이번 제삿밥은 꼭 먹어야겠다고 다짐 한 것이 말짱 허사가 되고 말았다. 엊저녁 두루마기로 갈아입은 할아버지가 대청마루 위로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초롱초롱하던 눈꺼풀이 그새 풀려버렸던 모양이다. 하긴 제사 때마다 그랬다. 그래서 이번 제사는 자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어 보았지만, 마(魔)의 자(子)시를 넘기지 못하고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런 나를 날이 희붐하기도 전에 어머니가 깨웠다. 왜 깨우는지는 알고 있다. 마을에서 반 마장이나 떨어진 곳에 혼자 사는 할머니 집에 제삿밥을 갖다 드리기 위해서다.
“제삿밥 먹을 때는 깨우지 않더니 만은.”
뾰로통한 얼굴색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우리 집과 등을 맞댄 아래위 여남 집은 어머니 혼자서 이미 제삿밥을 돌렸다. 그러나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할머니 집에 갈 때는 명색이 장남이라고 열 살짜리 나를 데리고 갔다. 으스스한 상엿집이 있는 산모퉁이를 지나 한참이나 더 가야 할머니가 사는 초가집이 나타난다. 모르긴 해도 어머니 당신도 상엿집이 무서웠으리라. 남포등을 손에 쥔 채 앞서 가는 아들 뒤를 어머니가 조심조심 따라온다. 비녀 꽂은 머리 위에는 삶은 돼지고기며 어적(魚炙)과 자반 한 토막, 과일이 담겨있는 소쿠리가 얹혔다. 어린 내가 봐도 딴 집보다는 배가량이나 많다.
할머니는 첩첩산중 ‘덕골’ 마을에서 이 동네로 시집왔다. 시집온 지 채 이태도 되기 전에 유복자인 아들 하나만 남겨 둔 채 남편은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그 아들이라도 어머니 옆에서 진득하게 농사나 지었으면 좋았을 텐데,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지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도시로 떠났다. 방직공장에 다니다가, 거리에서 아이스케이크 장사 한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어느 해부터인가 소식조차 끊겼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안부조차 모른 지가 삼십 수년도 넘었다고 했다. 남편에 이어 아들조차도 가슴에 대못질해 놓은 팔자 기구한 할머니다. 혼자 봉천답 서너 마지기를 농사지어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해왔다. 그마저도 몇 해 전부터는 허리가 꼬부라지고 눈까지 침침해서 농사일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가끔 지팡이에 의지해 더듬더듬 우리 집까지 내려오셔서 신세 한탄을 하던 할머니다.
“일찍 팔자를 고쳐야 하는 건데, 저놈의 웬수 같은 아들이 눈에 밟혀서.”
저 멀리 할머니 오두막집이 희미하게 보인다. 호롱불이 켜져 있다. 허리 굽은 할머니의 실루엣이 비친다. 고쟁이 바람이다. 새벽잠이 없는지 발걸음 소리에 장지문을 연다. 아니 용케도 제삿날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사 음식을 받아든 할머니의 입꼬리가 귀 뒤에까지 걸린다. 산등성마루에 걸터앉아 할머니를 지켜보던 하현달도 따라 웃고 있다.
오늘은 추석 단대목장이 열리는 날이다. 아내와 함께 제사용품을 사러 경산시장에 갔다. 여느 때 같으면 파장 무렵이라 시장 바닥이 횅댕그렁할 터인데, 오늘은 제수(祭需)를 장만 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아내가 대추를 팔고 있는 노파의 거리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때 전 됫박에는 대추를 소복하게 담아 놓았다. ‘한 됫박’ 하며 눈짓으로 말하자 노파가 주섬주섬 검정 비닐봉지에 담더니 한 움큼을 덤으로 넣어준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이런 맛이 없다. 채소나 과일이 명찰 달린 플라스틱 통속에 갖춰 있다. 어서 오라는 사람도 없다. 덤은 아예 생각도 못 한다. 그 옛날 기차 개찰구를 빼닮은 계산대 앞에서 제복 입은 아가씨가 기계적으로 셈을 치르면 그만이다.
골목쟁이 안으로 들어서니 무엇이든 크게 부풀려줄 것만 같은 뻥튀기 기계가 돌아가고 있다. 할아버지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기계 아가리를 확 열어젖히니 고소한 함박눈이 쏟아진다. 아내가 강냉이 뻥튀기를 한 줌 주어 입에 넣는다. 뻥튀기 노인이 힐끔 쳐다보더니 씩 웃는다. 어릴 적 친정엄마 따라 의성 시장통에서 많이 해본 솜씨이리라.
어물전 앞에 이른다. 조기며 가자미, 낙지들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허연 배를 드러내놓고 누웠다. 장바구니를 든 아낙네와 어물가게 주인과의 침 튀기는 흥정이 벌어진다.
“알았어요. 천 원 깎아드릴게요.” “우수리로 한 마리 더 주세요.”
옆집 가게도 마찬가지이다. 장터가 모처럼만에 사람 냄새 풍기면서 흥정소리, 발걸음 소리로 자글자글 끓고 있다.
재래시장, 왠지 모르게 헛헛한 우리네 속을 채워주는 데는 이만한 곳도 많지 않으리라. 가객 장사익은 ‘사람이 그리워서 시골 장은 서더라.’고 노래했지만, 추억이 있는 장터가 그리워서 기웃거리는지도 모른다.
복닥거리는 재래시장을 보고 있으니 ‘석 덤’이 생각난다. 옛 어머니들이 뒤주에서 밥 지을 쌀을 퍼낼 때 식구들 먹을 분량 외에 세 사람 먹을 만큼의 쌀을 덤으로 퍼준다는 풍습이다. 뜨내기 방물장수, 길 가던 나그네, 동냥 그릇을 든 각설이패들에게 밥 한 끼라도 먹여서 보냈던 게 우리네 인심이었다.
불룩한 장바구니가 여러 개나 된다. 무거운 보따리는 나보고 들라고 한다. 좁아터진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니 해가 설핏하다. 기와집 담장 너머에는 동이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머지않아 된서리가 내리고 찬바람 부는 늦가을이 되면 저 감나무 우듬지에는 새색시 볼처럼 빨갛게 익은 까치밥만 남을 것이다.
그 옛날 이른 새벽 제삿밥을 돌리던 어머니의 마음이, 투박한 손으로 한 줌 더 얹어주는 장터 사람들의 석 덤 같은 인심이 저 까치밥에 속에 담겨 있으리라.
경계 너머에 대한 욕망과 환상
― 김성한의 〈석 덤〉(《잉걸불》, 수필미학, 2014) ―
이 경 희
무릇 모든 경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너머를 향한 탈출'이다. 경계에 대한 규범과 전통이 무거울수록 위반에 대한 욕망도 상승하기 마련이다. 문학에서 장르의 경계란 창작과 이론, 감상과 비평에 대한 전제조건이자 최소한의 장치이다. 즉 장르의 경계는 인간이 만든 제도적 장치일 뿐, 절대적 가치나 윤리의 영역은 아니라는 말이다. 포스트모던의 흐름 속에서 장르의 규범에 지나치게 엄숙한 태도는 창작에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문학 장르에 대한 의무와 위반은 떠남과 회귀를 반복하는 여행자의 행적처럼 지난한 논쟁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장르 허물기의 시도를 통해 새로운 수필의 영역을 확보한다. 신선한 시도가 흥미롭다. 토속적이고 정감어린 풍경이 그려진 두 개의 작은 액자를 마주한 느낌이다. 그 풍경 속을 걸어갔다 나오면 따스하고 안온하다. 두 개의 액자 속에는 동화 기법의 차용과 구성의 파격성이 숨어 있다. 작품 〈석 덤〉에는 동화의 구성요소인 대화체와 묘사, 등장인물, 서사적 흐름, 환상성 등이 내장되어 있다. 동화인가 수필인가 구분이 모호할 정도다. 작가는 동화적 기법의 차용으로 작품의 평면성을 뛰어넘는 지렛대로 활용한다. 구성의 입체화는 작품에 활기를 부여하고, 읽기의 맛을 북돋워준다.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파격적인 배치와 구성의 특이성이다. 이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은 과거 유년시절의 고향마을이 배경이고, 뒷부분은 현실의 전통시장이 배경이다. 시·공간적 배경이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배치된다. '과거 / 현재, 어머니 / 아내, 제삿밥 / 석 덤, 고향 / 시장' 등을 나란히 대비시키는 구성 방식은 하나의 주제에 다가가기 위해 선택한 작전이다. 극렬한 대치가 있어야 돌파구가 나온다. 제재나 시간, 공간이 다른 이질적인 것이 융합하여 의외의 재미를 창출한다. 전통적 장르 문법을 벗어나려는 과감한 시도가 가져온 효과이다. 얼마간 작위성의 낌새가 감지되지만, '석 덤 같은 인심'의 회복을 위한 진정성이 이런 의구심을 덮어버린다.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수필의 시제는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품 〈석 덤〉은 이야기의 전개상 과거 / 현재로 분명하게 구별된다. 그런데 서술어의 시제가 현재형이 많다. 이것 또한 수필의 문법을 위반한 행위다. 과거와 현재의 동일한 시제 배치는 의도적이다. 이때 화자에 의해 호명된 과거는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현재적 과거'일 뿐이다. 또한 현재형 시제는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데 기여한다. 그래서 독자와의 공감대를 넓혀줄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갓 잡아온 활어처럼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이 또한 〈석 덤〉이 지닌 매력이다.
수필이란 장르에서 작가와 소재는 불가피한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남자에게 고향은 '영혼의 행성'이다. 돌아갈 수 없는 행성을 향한 마음은 곡진하고도 간절하다. 화자는 초입부터 그 행성에 남겨놓은 기억들을 좇아간다. 환상의 시간 속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외딴집 할머니와 조우한다. 행성으로 날아간 화자는 샤먼처럼 경계 너머의 존재들을 호명하고 그들과 함께 고향의 고샅길을 거닌다. 작품 밖의 '나'는 작품 속 '화자'와 심층관계를 맺으면서 불가해한 시간 속으로 걸어갔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화자가 작위적으로 만든 환상의 세계는 현실의 거울처럼 자연스럽다. 문학은 직선적 시간을 원형적 시간으로 복원하는 마력을 지녔기에 가능하다.
한국 현대 수필이 걸어온 진화의 여정에서 '고향에 대한 환상'은 역린(逆鱗)이다. 역린이란 반대 방향으로 박힌 비늘을 일컫는 말이다. 차갑고 메마른 바람을 거스르며 찾아가는 고향의 노래는 실존에 대한 역린이 아니던가. 창작을 담당하는 수필가는 일상적 문법과 격돌하고 부딪히면서 새로운 광맥을 찾아 떠나는 모험심과 호기심이 기본 덕목이다. 그러한 창작자의 일탈에 대하여 변호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비평가의 몫이다. 어쨌든 전통의 문법으로는 시대의 정서와 가치를 담을 수 없다면 그릇을 바꾸든지 새로 구워야 한다. 지금 수필은 용감한 문제아를 수배 중이다. 문제아〈석 덤〉이 만든 일탈과 소음을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새로운 경계를 향한 참신한 도전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고향과 어머니는 수필계가 넘어야할 산이다. 낡은 서정의 수사학을 반복하는 지루함에 수필 스스로가 지쳐버렸다. 그러나 21세기의 수필은 인간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자본의 횡포에 저항하고 본래의 휴머니티를 회복하는 도정에 나서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성 회복의 지향점이 '고향과 어머니'라는 기호로 상정된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할 '고향과 어머니'는 화석화된 무표정한 얼굴이나 진부한 기호의 반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고향을 발견하고, 새로운 어머니의 환생을 희구해야 하리라. 그래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 다른 감각, 다른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과업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영토에 대한 도전은 단단한 기본의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실도.
** 이경희 (oksan97@hanmail. net) 프로필
- 《현대수필》(2010년) 로 등단
- 에세이집 《변방에 피는 꽃》, 독서칼럼집 《책을 통해 세상 속으로》,
수필집 《그림자 놀이》펴냄
- 경산문인협회, 수미문학회 회원
첫댓글 석덤, 진정 수필인의 품성인듯합니다. 김성한 선생님의 수필정신이기도 하구요. 작품, 좋습니다.
이경희선생님의 깊이 있는 평과 어우러져 한층 고급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