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뫼비우스의 띠
"얘기하다가 해 뜨겠네. 고봉식이는 언제 나오는 거야."
추경감이 비워진 5병의 소주를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겁니다. 사실 그 홍길수라는 친구는
애당초 양경숙을 보고 차를 세운 거고 흑심은 온통 그 여자한테 쏠려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식사 도중에도 계속 추근댔지요.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는 디스코텍에까지 간 건데 말입니다."
강형사는 말을 끊더니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그런데 애시당초 양경숙은 그런 풋내기하고는 어울릴 맘이 없었다 이겁니다.
그런 젖비린내나는 총각들하고의 시작은 피곤과 경제적으로의 어려움까지 있고,
거기다가 귀찮게 하는습성도 있다나요? 왜 노래에도 있잖습니까?
남자는 여자를정말로 귀찮게 하네."
강형사는 갑작스레 노래까지 한 곡조 뽑아내는 것이었다.
"아이고, 됐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 나폴레옹이라는 디스코텍에서 문제가 생긴 겁니다.
거기는 그냥 젊은 애들이 모여서 춤만 추는 데가 아니라
쇼도 하는 성인 나이트 클럽인데 말입니다."
첫 블루스타임에는 희정이 얼씨구나 좋다 하고 홍길수와
춤을 추었다. 춤을 춘 건지 부둥켜 안고 몸을 비벼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번째 블루스 타임이 돌아오자 홍길수는 경숙에게 춤을 권했다.
"저는 블루스 같은 건 싫어요."
경숙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골고루 추어야 뒷말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홍길수는 물러서지 않고 넉살 좋게 들러붙었다.
"난 하여간 싫어요."
경숙은 여전히 간단하게 거절을 표시했다. 그러자 홍길수
도 일단 한 걸음을 양보하여 상임에게 춤을 권했고 상임은 쾌히받아들였다.
"너 왜 그러니?"
희정이 맥주를 들이키며 말했다.
"난 저런 능글거리는 타입은 딱 질색이야. 나이도 너무
어리고. 못 되도 서른 다섯은 되어야지."
텍 안은 블루스 타임으로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시끄러운 음악이 나갔던 관계로 귀가 멍멍했던 경숙은 음량 조절을 하지
못해 그 소리는 꽤나 크게 나왔다.
"영광입니다. 그럼 저와 한 곡조 추실 수 있겠습니까?"
문득 뒤에서 한 소리가 들렸다. 경숙이 깜짝 놀라 돌아보 았다.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멋장이였다.
"올해로 꼭 서른 다섯이올습니다."
사내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요."
경숙은 간단히 그 제안에 응했다. 그 사내가 꼭 마음에 든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홍길수에게 정신차리라는 의미에서 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블루스 타임에는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지 않는다.
그때문에 홍길수도 곧 경숙이 어느 남자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속이 당연히 편할 리가 없었다.
홍길수는 디스코 타임으로 넘어가며 그대로 춤을 추는 두 사람에게
어느 새 뛰쳐나온 인파를 헤치며 다가갔다.
"블루스 같은 건 싫으시다더니?"
경숙의 우윳빛 팔을 사납게 잡으며 홍길수가 말했다.
"어머나, 왜 이래요? 나 좋은 사람과 내가 추겠다는데?"
경숙이 발칵 화를 내며 팔을 비틀어 빼내려 했다.
그러나 홍길수가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잘 빠져 나오지를 않았다.
"아파!"
경숙이 비명처럼 고함을 뻑 질렀다. 사람들이 흘끔 돌아
보았다가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고개를 돌리고는 춤을 계속 추었다.
"이것 봐, 팔을 놓아 드려."
경숙과 춤을 춘 사내가 홍길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당신은 상관 말아."
홍길수가 화를 내며 사내를 돌아보았다.
"나와 춤을 같이 추시는 분인데 왜 상관을 말라는 게야."
사내가 한 마디 하자 홍길수는 갑자기 얼어붙기라도 한양 옴짝달싹을 하지 못했다.
"팔을 놓으라니까?"
그 말이 사내 입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홍길수는 팔을 놓았다.
"재있게 지내십시오."
홍길수는 인사까지 꾸벅 하더니 슬금슬금 사람들 속으로 자신을 감추었다.
"이상한 놈이구만."
사라지는 홍길수를 보며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여기서 나가요."
경숙은 갑자기 사내가 한껏 좋아졌다. 경숙은 그의 팔깡을 끼고 말했다.
"난 양경숙이라고 해요. 유는?"
"고봉식."
사내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뭐 그래요? 뭐하는 사람인지도 말해야지요."
고봉식은 차문을 열며 다가오는 기사를 손짓으로 보내 버렸다.
"그쪽도 말 안 하기는 마찬가지잖아."
"난 여자잖아요? 하지만 그럼 좋아요. 난 대학생이에요."
"음, 그래? 난 사장이지."
고봉식은 반대쪽 문을 열어 경숙을 태웠다.
경숙은 요염하게 다리를 오므리며 차에 올랐다.
"알겠어요. 명왕성 그룹하고 관계가 있는 자리에 있군요."
"어, 그걸 어떻게 알았지?"
고봉식은 깜짝 놀랐다.
"아까 그 남자, 명왕성 그룹의 직원이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꽁지가 빠져라 하고 달아났던 거예요."
"아하, 그랬었군."
고봉식은 감탄하는 척하며 경숙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스타킹도 신지 않은 맨살이었다. 고봉식은 손을 떼지 않은채 그냥 얹어 놓았다.
"기어는 여기가 아니에요."
경숙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을 떼어낼 동작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상관 없어. 이 차는 자동 변속이야."
고봉식은 경숙이 저항하지 않는 것을 알자 좀더 대담하게
미니스커트 속으로 손을 들이 밀었다. 경숙은 잠깐 놀란
듯이 다리를 오므렸다가 이내 포기한 듯 살며시 벌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자동 변속에 속한다고요."
경숙의 목소리에는 어느 새 물기가 어려 있었다.
"어디로 갈까?"
"근사한 호텔로 가요."
"둘이 만난 첫날부터 호텔로 갔단 말야?"
추경감이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바로 80년대식, 아니 90년대식 사랑입니다.
그저 즐기겠다는거지요. 고급 매춘입니다.
오히려 난 돈 받고 팝니다 하는 그런 데 여자들이 솔직하고 솔직한 만큼 더
인간다운 겁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강형사는 얼굴이 벌갛게 되어 열변을 토했다.
"그래 즐기면 그만이지, 어떻게 비서실에 취직까지 되었어?"
"여자한데 놀리면서 돈을 주느니 공금으로 화대를 주자는
고봉식의 천재적인 계산 덕분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비서실에 있다고 해도 경리 따위의 일에는 문외한이라 무슨
약점을 잡힐 염려도 없고요.
심심하면 사장실 문 잠가 놓고 한바탕 몸을 풀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여자는 결혼을 원한다든가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추경감이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것도 다 남자가 기력이 쇠퇴해서 영 만족을 시킬
수가 없게 되었을 때나 하는 이야깁니다. 고봉식은 이제
30대 중반입니다. 정력이 펄펄 할 땐데 여자 하나 만족 못시킬 것 같습니까?"
"그래도 여자는 먼 미래를 내다봐야지?"
추경감이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성인군자다우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어디 그렇습니까?
여자라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남자한테 기대지 않고 잘 살수 있다 이겁니다.
나이 차가 지는 것도 아니고 세컨드라고 경숙이 꿀릴 게 뭐 있겠습니까?"
"그 집안에서는 이런 내막을 아나? 모르면 선이라도 보라고 할 텐데?"
"집에서는 그러겠지만 싫다는 소 물 먹일 수야 없지요.
그냥 세월 가는 데로 보고 있는 거지요."
"그럼 고봉식의 생각은 어떤 거야?
어차피 마누라하고는 벌써 예전에 사이가 틀어졌던 게고."
"그걸 경숙도 눈치를 챘지요. 그래서 이 기회에 아예 자
리를 꿰차고 들어가겠다고 고봉식을 조르기 시작했더랍니다."
"그래? 고봉식은 거기에 뭐라고 답을 했었대나?"
"이혼을 생각 중이다, 이제 곧 이혼한다, 위자료 절충 중
이다, 이혼 수속을 밟기로 했다, 기타 등등."
"계속 거짓말을 했단 말야?"
"그렇죠. 나라도, 치마만 보면 환장하는 이 강형사도 그런 여자 트럭채 가져오면
트럭만 갖고 여자는 내다 버립니다.
고봉식이 환장이라도 하기 전에는 절대로 경숙이라는 여자와는 결혼을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은 경숙도 딱히 결혼할 맘은 없는 모양입니다. 만나는 남자들
도 따로 있는 형편이고, 이 기회에 돈이나 우려내겠다는
생각인 모양입니다. 한 마디로 무서운 세상이지요."
"이번 사건에 대해서 알리바이는?"
"그 희정이라는 친구 집에 있었더군요. 하지만 위증일지
도 모릅니다. 둘은 워낙 가까운 사이니깐요."
"그 여잔 뭘 하는데?"
"홍길수의 아내가 되었지요. 그리고 홍길수 그 자는 실장으로 앉아 있습니다.
역시 빽이 좋으니까."
"능력이 좋은 건지도 모르지. 너무 나쁘게만 생각치는 말게."
"물론이지요. 능력도 좋았겠지요. 이부자리에서 말이에요."
강형사가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러니까 남편의 지속적인 출세를 담보로 거짓 알리바이를 대줄 수도 있다, 이건가?"
"그날 대관령에서 사람들 눈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먼저 출발을 했지요.
그래서 범행 시간 전에 서울에 도착한 것은 아주 확실합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집, 혼자 사는,
그래서 알리바이가 없을 집이 아니라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는
있어도 부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대목이지요."
강형사는 다시 술을 한 잔 했다. 마지막 잔이었다.
"그만 일어나지. 늦었네."
"반장님, 뫼비우스의 띠라는 말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뫼, 뭐라고?"
"뫼비우스의 띠. 안과 밖이 없는 희한한 띠지요.
잘라도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이상한 띠, 이 사건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다들 한통속이에요. 다들 한 여자를 죽이고 싶어했지요.
다들 하나, 자르려 해도 둘이 되지 않아요."
강형사는 비틀거리며 근처 쓰레기통에 엎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