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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3월 16일(제11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사도행전 20:7-12
제목 : 말씀 앞에 졸다가 죽은 사람
살면서 혹시 나무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본 경험이 있습니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자칫하면 크게 다쳐서 불구가 되거나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렸을 때 집안 아주머니가 홍시를 따러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죽으신 일이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 은혜를 나누려는 본문도 한 청년이 하나님 말씀을 듣던 중에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다 늙은 노인이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3층에서 떨어져 죽었던 사람은 유두고라는 청년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냈습니다.
‘떨어졌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떨여졌다’는 말은 ‘원위치에서 이탈했다거나 미끄러졌다거나 낙방했다’는 의미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 ‘떨어졌다’는 말은 ‘입학시험에 떨어졌다, 믿음이 떨어졌다, 은혜가 떨어졌다, 양식이나 기름이 떨어졌다, 지위가 떨어졌다’는 등의 의미로도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7:23에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3) 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밀 까부르듯이 흔들어대지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눅 22:31-32).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눅 22:40)고 당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생활 하면서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떨어지면 믿음의 실패요 지옥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말씀 앞에 졸다가 죽은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본문의 주는 말씀 - 유두고를 살리신 목적
본문에 보면 바울 사도가 2차 선교여행 중에 ‘드로아’서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오늘 밤이 지나면 드로아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그런데 윗다락 창에 걸터앉아서 바울 사도의 설교를 듣던 청년 유두고가 그만 졸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죽어버렸습니다. 사도행전 20:1절부터 본문까지는 바울 사도가 ‘드로아’에서 이레 동안 사역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드로아’라는 곳은 바울 사도가 선교사역의 방향을 바꾸었던 곳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 사도의 제2차 선교 여행의 목적은 제1차 때 선교했던 아시아 여러 지역들을 다시 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세운 교회와 성도들을 굳건히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선교내용을 정리해 보면 사도행전 13:1-14:28까지는 1차 선교여행에 대한 내용이고, 15:36-18:22까지는 2차 선교여행에 대한 내용이고, 18:23-21:16까지는 3차 선교여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2차 선교여행인 사도행전 16:6-10을 보면 성령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즉, 바울 사도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는데 예수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바울 사도는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다가 밤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하였습니다. 이 환상을 본 바울 사도는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인 줄 알고 마게도냐로 향해 떠나기를 힘씁니다. 복음이 갑자기 서쪽으로 진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분기점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바울 사도는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며 로마의 식민지였던 빌립보에 이르러 수일을 머물게 됩니다.
이처럼 ‘드로아’는 바울 사도가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은 곳입니다. 그런데도 드로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부흥을 통해 드로아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장기간의 선교여행으로 바울 사도는 몸과 마음은 많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드로아에 새로운 교회공동체가 세워진 기쁨 때문에 그곳에 가서 이레 동안 머물며 강론하였습니다.
6절과 본문 7절이 그 사실을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는 머무니라,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말씀 강론에 대한 바울 사도의 열정도 대단하지만, 말씀을 사모하는 드로아교회 성도들의 열정도 대단합니다. 밤중까지 계속되는 말씀 집회에 열광했습니다.
본문 7절이 증거 하듯 그 집회는 ‘그 주간의 첫날에’ 열렸습니다. 즉 안식일로부터 그다음 안식일까지 일주일의 첫 번째 날인 주일에 열린 것입니다. 또 본문 7절을 보면,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는 성만찬이 거행되는 예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드로아에서의 집회는 순전히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26을 보면 안식 후 첫날에 모임을 가진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 의해 모임이 시작됩니다. 이후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정착이 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념하던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시대부터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동안 제 7일에 안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구체적으로 나타난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면서 그때로부터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본문 7절 하반 절을 보면 그날 예배에서 바울 사도는 밤중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합니다. 당시 성도들 중에는 복음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일꾼들과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밤 시간이 아니면 도무지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드로아 지역의 일몰시간이 오후 7시였음을 볼 때 드로아교회 성도들은 오후 7시가 넘어야 예배드리며 바울 사도의 강론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강론이 이튿날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의 일출시간이 오전 5시임을 보면 바울 사도는 저녁 7시 이후부터 새벽 5시까지 최소 몇 시간 이상 말씀을 강론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피곤한 몸에다 긴 강론까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대한 성도들의 사모함이 있었고, 게다가 바울 사도는 위대한 복음전도자이자 설교가였음으로 말씀 강론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성도들 또한 ‘바울 사도로부터 말씀 강론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드물고 귀한 일이었으므로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는 강행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드로아교회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열망에 바울 사도도 장기간의 여행으로 인한 고단함을 잊고 장시간 강론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 사도 혼자서 10시간 이상을 말씀 강론으로만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바울 사도의 강론이 시간의 주를 이루었겠지만, 성도들의 질문도 받아서 답변하는 식의 강론도 이어졌고 중간에 휴식 시간도 가졌을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보면 그 시간에, “우리가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라고 설명합니다. 초대교회 복음 전도자들이 말씀을 강론하는 장소는 대체로 회당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본문에서처럼 성도의 가정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가정에서 자주 모임을 가짐으로써 가정이 회당만큼 빈번하게 말씀을 강론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드로아의 한 성도가 제공하여 예배를 드리던 이 집에는 8절에 보면 등불이 많이 커져 있었습니다. ‘왜 등불을 많이 켰느냐’라는 질문에 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모임의 분위기를 엄숙하고 화려하게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또는, ‘사람이 많이 모인 밤중이므로 집회에서 있을 법한 잡담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는 견해들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점이 유월절이 시작되는 때로부터 3주가 지난 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날 밤은 많이 어두웠고, 그 어둠 때문에 등불을 많이 켰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그날이 유월절 당일이었다면 보름달이 떠 밤에도 매우 밝았을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낮에 모이든, 밤에 모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깜깜한 밤에 모인다 해도 낮의 해처럼 밝은 전등 아래서 강론자는 강론을 하고, 성도들은 그 강론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당시는 밖이 많이 어두우니까 집안 곳곳에 등불을 켜서 바울 사도의 강론을 도왔을 뿐 아니라, 그 강론을 듣는 성도들도 강론자 바울의 얼굴을 보고 은혜를 사모할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등불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등잔에 간간이 기름을 채워주어야 하고, 또 종종 그을음과 연기를 많이 냄으로 방의 공기가 탁해질 수도 있습니다.
또, ‘유두고’란 청년이 3층 창에 걸터앉은 것을 보면 당시 바울의 강론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방안에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 집안의 공기는 더 나빠졌을 것입니다. 공기는 점점 더워지며 탁해져 가고 있었고 산소는 점점 부족해져 갔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자리의 불편함까지 겹쳐 피로도가 가중되지 않았을까요?
본문 9절을 보면 거기에 모인 성도들 가운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밤중까지 진행된 강론을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깊이 졸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바울 사도의 강론은 계속되었고, 유두고는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 삼 층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영적 호사다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 강론은 밤중까지 계속될 정도로 점입가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 거기에 모인 성도들의 심령에 성령의 불을 지피고 활활 타오르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사고가 일어나버렸습니다. 성도들은 물론 특히 말씀을 강론하고 있던 바울 사도가 얼마나 황망해 했을까요?
그런데도 본문 10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서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합니다. 말씀 강론하는 것을 중단하고 곧장 사고의 현장으로 내려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성도들에게 “떠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유두고를 살리기 전에 갑작스런 사고로 우는 성도들을 먼저 진정시켰습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10절)고 하였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문 10절을 두고 이렇게 해석합니다. “유두고가 죽은 게 아니라 까무러친 것이고, 바울이 인공호흡을 하여 깨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맞는 해석이 아닙니다. 본문 9절을 보면 분명히,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의사인 누가입니다. 그런데도 바울 사도는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하면서 맨 먼저 한 행동은 유두고를 끌어안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생명이 되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유두고를 살린 바울 사도는 본문 11절을 보니까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습니다. 죽은 유두고를 살린 바울 사도는 곧장 성도들과 함께 떡을 떼며 교제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성찬과 더불어 즐거운 교제를 하며 음식을 나눠 먹는 애찬을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새벽 5시에 있을 일출과 동시에 떠나야 했습니다. 떠나기 전, 드로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피곤함도 잊고 잠을 자지 않으면서까지 계속 말씀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유두고가 3층 창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지기 전까지 바울 사도의 강론은 바울을 중심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유두고를 살린 후부터 새벽까지는 성도들을 참여시키는 방법으로 말씀이 오갔을 것입니다. 드로아에 교회가 섰으니 성도들은 자기 믿음생활에 필요한 질문들을 바울 사도에게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난 유두고의 죽음 때문에 모두가 놀랐을 것입니다.
죽은 유두고가 다시 살아남을 목격하며 더 큰 놀라움과 두려움과 흥분 속에서 도무지 잊을 수 없는 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나누었을 것입니다ㅣ. 바울 사도 또한 강론자로서 하나라도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말씀을 가르치며 대화를 인도해 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 절인 12절에서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고 증거 합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바울 사도와 그 일행은 드로아를 떠났습니다. 바울 사도를 떠나보낸 드로아교회의 성도들은,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데 대한 기쁨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증표를 직접 보면서 큰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사실 유두고 청년의 죽음은 드로아 교회에 결정적 악영향을 주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별안간 교회에 크나큰 위기가 닥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위기 가운데서 바울 사도는 유두고를 살렸고 그로 말미암아 드로아 교회는 큰 위기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교회와 성도들은 믿음 위에 굳게 서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유두고를 살렸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유두고에게 이승의 기회를 다시 주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유두고의 코에 있는 호흡을 영영 거두어가지 않고 다시 보내신 것입니다. 다만 그 역사를 바울을 통해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두고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죽었던 유두고를 살려 주신 뜻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5:36-42절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딸이 죽은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아이의 부모와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시어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열두 살 된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며 증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반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유두고를 살려서 일으킨 사건은 바울 사도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과 방불한 역사를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굳이 바울 사도의 손길을 통해 죽은 유두고를 일으킨 뜻은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님 되심’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사실을 그곳에 모인 성도들과 오늘날 성도들과 우리를 비롯하여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하시기 위해 죽은 유두고의 생명을 다시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님 되심’의 사건은, 우리가 섬기는 가정과 교회를 비롯하여 우리 삶의 영역인 사회에서 많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유두고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것도 굳이 바울을 통해 살려주신 뜻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여태까지 사도행전을 읽어온 것이 아닌가요? 물론,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주목받을만합니다. 또, 본문 12절 하반 절의 증거처럼 성도들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믿음의 본질 곧, 하나님의 뜻과는 별개의 믿음으로 도로 변질되기가 쉽습니다. 그런 성도들 중에는 자기 스스로 영권이 있음을 내세우곤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다른 종교들과 결정적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다른 종교들은 상향식인데 반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하향식이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그 신을 믿는 사람이 자기 신에게 반드시 무엇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신은 드린 내용의 경중에 따라 상도 등급을 따라 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정반대입니다. ‘무엇을 드리느냐?’, ‘얼마나 바치느냐?’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용의 경중도 의미 없고 상의 등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실 뿐입니다. 결단코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섬김이나, 헌신의 대소를 따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전히 자기 생각을 따라 독단적이고 일방적으로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 은혜를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유두고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사건을 접하더라도 나타난 결과에 관심을 두기보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님 되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믿음 생활에 가시적인 결과물이 없다 해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고통이나 고난이 올 때 금방 넘어집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항상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님 되심을 기억하고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즉 우리 믿음 생활에 대한 결과의 유무를 떠나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님 되심을 늘 기억하고,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삶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을 종국에는 영생으로 이끌어 주시는 구원주이시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가 매사에 하나님께 뜻을 묻고 가르쳐주시는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우리의 믿음과 삶의 전 영역에서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님 되심을 기억하고, 믿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이런 내용을 담고서 유두고라는 청년이 가졌던 약점을 살펴보겠습니다.
2. 예배를 걸터앉아 드리지 말라
본문 9절을 보면 “유두고라 하는 청년은 창에 걸터 앉아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이 죽었는지라”고 하였습니다. 7절에 보면 이 모임은 ‘그 주간에 첫날’ 모임이었습니다(7절). ‘그 주간의 첫날’을 오늘날에 적용하면 바로 주일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주일날 성만찬이 있는 아주 중요한 예배였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만찬이 있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만찬을 마치고 바울 사도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날이 새면 드로아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그 강설이 길어졌습니다.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한 마디로 설교가 길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두고라는 청년은 바울 사도가 선포하는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졸음을 못 이겨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유두고의 이런 태도가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유두고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앉을 자리가 없어서 3층의 창에 걸터앉아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유두고는 노예였기 때문에 낮에는 힘들게 일하여서 밤이 되어 너무 피곤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만찬을 시행하며 말씀의 강론이 있는 그 중요한 예배에 이런 자세로 앉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불경건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이 없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라면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립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자리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자리입니다. 앉아 있지만 이 자리는 하나님이 계신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배드릴 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앉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드려야 합니다. 마음을 드릴 때 자세는 당연히 바르게 해야 합니다. 유두고가 앉아있던 그 자리는 정상적인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좋지 않았습니다. 유두고가 앉은자리가 3층 창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경건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자세로 앉으면 당연히 집중력을 부족하게 만듭니다. 마음도 흔들리고 생각도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곳은 떨어지기 쉬운 높은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는 언젠가는 내려와야 할 자리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도 3층 창문에 걸터앉는 것이 위험한 자리인 줄 알았을 것이지만 아마도 자신만만했을 것입니다. 이런 자만은 믿음의 가장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12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누구라도 교만에 빠지면 넘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솔로몬 같은 탁월한 지혜를 가졌던 사람도 교만하여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은 떨어질 곳이 없습니다. 유두고가 앉아 있던 자리, 3층의 창에 걸터앉아있던 자리는 좋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성도는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할 수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얻겠다고 높은 자리로 가면 반드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위험한 장소는 지켜야 하고 위험한 장소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 갔다가는 유혹에 넘어지고 패가망신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잘못된 장소에 있다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유두고의 믿음 중에 잘못된 자세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경건하지 못한 예배 태도였습니다. 청년 유두고가 바울 사도가 설교하는 동안 창에 걸터앉았다고 하였습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7절).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학자들은 유두고가 창에 걸터앉은 이 배경에 대하여 그는 노예였기 때문에 적당히 앉을 자리가 없었고, 그가 졸은 것은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였기 때문에 피곤하여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모임은 예배의 모임이요,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이 중요한 시간에 사람이 많든, 등불로 인한 공기가 혼탁하든,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여서 피곤하든, 창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제 입장에서 보자면 앉을 자리가 없었다면 창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문 앞에라도 일어서서 말씀을 듣거나, 무릎을 꿇고 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피곤하고 졸음이 오더라도 일어서거나 아니면 무릎을 꿇으면 졸수가 없습니다.
유두고의 예배태도는 예배에 임하는 그의 자세부터 경건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유두고의 앉은 위치는 처음부터 많이 잘못되었습니다. 본문의 유두고를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 청소년 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창에 걸터앉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곳은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인 회색분자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는 없지만 예배 시간에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비꼬아 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라면 다리를 걸치거나 걸터앉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예배에서는 겸손한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학자들은 유두고가 창에 걸터앉은 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라고도 합니다. 창에 걸터앉은 것은 그가 건방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 보다는 방이 사람들로 꽉 차서 유두고는 청년이기에 노인들과 여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 틈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등불을 많이 켜서 등불로 인해 혼탁해질 공기 때문에 좋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에 걸터앉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유두고는 주일날 교회에 나와 앉아 있었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떨어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의 교훈은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 주님의 전에 나오지 않는 것은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에 나와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참 예배자의 정신과 자세를 가다듬고 앉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 나와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세상의 창에 걸터앉아서 인간적인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배는 절대로 걸터앉아서 드리면 안 됩니다. 바른 예배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 말씀 앞에 졸지 말라
요한복음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3:29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수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같아서 냉랭한 심령을 녹여버리기도 하고 방망이 같아서 굳은 심령을 격파해 우리를 회개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 또한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히브리서 4: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찔러 쪼개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히 4:12)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살립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영혼도, 가치관도, 가정도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징어 게임’이나 ‘지옥’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다룹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 은 학교에 고립된 학생들이 어떤 외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좀비들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입니다. 모두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것 같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디스토피아)를 다룹니다.
그러면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죽은 것을 살려내는 진리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이야기 합니다. 7-10절을 보면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서 움직이며 이 뼈 저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55:3은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영혼이 삽니다. 그 말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혼이 죽는다는 말입니다.
유두고의 죽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하나님 말씀 앞에 졸았다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밤늦게까지 강론하였는데 목숨을 걸고 사력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두고는 그 말씀에 아무런 관심이 없이 졸고 있었습니다.
유두고의 죽음은 어떤 죽음이었습니까? 유두고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졸다가 발생한 죽음입니다. 참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세상에 졸다가 죽은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유두고는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어느 때입니까? 바울 사도의 능력 있는 설교와 가르침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날이 밝아오면 바울 사도는 이제 드로아를 떠나야 합니다. 이를테면 고별 설교입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밤이 깊도록 말씀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할 시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음을 맞이하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절박할 때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하나님 말씀 앞에 졸았습니다. 드로아의 모든 성도들이 바울 사도에 대하여 걱정과 슬픔에 잠겨 있는 그 순간에 유두고 청년은 졸고 있습니다. 왜 졸았을까요? 졸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물론 학자들은 유두고는 하루 종일 노동으로 지치고 힘들어서 졸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생명과 같이 중요한 말씀 앞에서는 졸지 않습니다. 말씀이 졸음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유두고는 신령한 귀가 막혔고, 신령한 세계에 눈이 감겼고, 무엇보다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은 채 몸만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유두고의 영적 상태는 ‘깊은 밤’이었습니다. 물론 바울 사도의 설교가 밤중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피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깨어 있으면 피곤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배에는 언제나 믿음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3:11-12절에서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말세지말’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 하실는지 알 수가 없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자다가도 깰 때라고 말합니다. 왜요? 영적으로 밤이 깊었고, 죄악의 밤이 깊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실정을 보십시오. 어제까지 믿음생활을 잘하던 성도들도 교회를 떠납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넘어지고 죄악의 밤에 휩싸여 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밤이 깊어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졸며 잠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들은 깨어나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졸다가는 유두고처럼 죽습니다.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유두고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하나님 말씀 앞에 졸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을 보면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두고의 사건으로 인하여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배시간에 말씀을 들을 때 조는 사람들에게 좋은 경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데 말씀 앞에서는 절대로 졸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생명보다 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생명을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 말씀 앞에 잘 깨워서 세워나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유두고는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능력의 사도인 바울 사도를 통해서 살아났습니다. 바울 사도는 ‘떠들지 말라! 그에게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은 죽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살 소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떠들고 안달할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의 뜻은 ‘다행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름 그대로 다행히 살아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큰일 날 뻔했습니까? 사실 그가 떨어져 죽은 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입니다. 그런 반면에 그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구원 얻은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에베소서 2: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저지른 죄로 죽은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 값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 말씀 앞에 졸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를 세상에 걸터앉아서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세상일에 지치고 힘들다고 졸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 앞에 졸다가 죽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으로 자신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