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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집회]
인간의 문제와 그 대책 2019. 6. 6. 이현래 목사
[고린도전서 2장 9절]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
지금 여러분들은 인간 문제가 별로 심각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잘 살고 있고, 이렇게 살면 되지, 이렇게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점점 부유해지면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이 점점 없어진다. 그러면 인간 문제는 다 없어진다. 지금 유럽 몇몇 국가들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완벽하게 되어 있어서 부족한 것이 없다. 그래서 말씀을 듣기가 조금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편하냐, 편하지 않느냐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람이 원래의 목적대로 쓰여지고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이다. 우리가 만일 아무리 잘 먹고 잘산다고 하더라도 목적대로 쓰여지지 못하면 그것이 인간의 문제다.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본 바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복을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땅 위에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면 다 해결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잘 사는 나라일수록 인간 문제가 없다. 젊어서 좀 고생하고 돈을 벌면, 노후에는 연금이 나온다. 연금을 받는 미국 사람들은 아무 할 일이 없다. 가방 하나 들고 여기저기 휴양지를 찾아다니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우리 같으면 팔자 좋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 말씀을 보면 팔자 좋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는 그렇게 하려고 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면 사람이 잘 먹고 편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까 읽은 말씀처럼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들어야 아는 일이지 내가 생각한다고 아는 일도 아니고, 세상을 봐서 아는 일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50년대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잘살고 있다. 그렇지만 잘살고 있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 잘 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리니까 별로 생각이 없다. 오히려 상대적인 빈곤 때문에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상대적인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주의를 해결이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간의 문제가 발견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인간의 문제는 없다. 나도 내 성격은 무난한 사람이고 모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세상에서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냥 돈만 조금 있으면 된다. 큰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때 생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 정도만 되어도 나는 아무 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면 그렇게 살았으면 돼지나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돼지는 그것보다 더 편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맛본 사람만이 ‘저러면 안 되는데...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것을 말한 사람도 그렇다. 바울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도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는 것이 아니고 전혀 모르는 것이다. ‘천당은 이러이러할 것이다. 극락은 이러이러할 것이다.’는 이런 것이 아니다. 천당과 극락은 우리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전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다른 축복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안 받아도 이렇게 살면 되고 이렇게 살다 죽으면 되지 별게 있는가하고 돌아갈 수도 있다. 우리가 ‘나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하는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심각하게 고통하고 있는 이런 사람에게만 복음이 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 사람만 일부러 찾아다는 경우가 있다. 편안한 사람을 보고는 복음 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문제로 고통하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주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 복음이 필요하다고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이 바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본 사람이다. 옛날에도 도시는 전깃불을 켰다. 시골에는 전깃불이 없었다. 우리 사는 곳은 더군다나 섬이니까 전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전기가 없을 때는 없는 대로 살았다. 방에 가보면 한 쪽에 초롱불을 놔두는 곳이 있는데, 그 벽이 그을음이 올라가서 시커멓다. 누구집이든지 다 그랬다. 그렇지만 별 불편 없이 살았다. 왜 이렇게 어두운가? 그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도시에 살면서 전깃불을 사용하다가 호롱불을 사용하는 곳에 가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지옥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외국선교사들이 처음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우리나라 형편이 지금의 아프리카와 비슷했다. 그들로서는 어땠을까? 그 사람들이 볼 때는 저들이 인간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하지 않았겠는가? 그때는 전염병에 대한 대책이 없어서 미국 선교사들이 지리산 노고단 산속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 밤에는 그곳에서 살고, 낮에 전도하러 나올 때만 밖으로 나왔다. 지금도 지리산 노고단이 기념물로 남아 있다. 그때 우리가 그 정도로 미개했다. 문화의 차이가 그만큼 컸다. 선교사를 생각할 때, 꼭 천국에서 온 사람같이 생각했다. 일본의 유명한 성경학자 우찌무라 간죠가 선교사들을 만나보고 미국은 천국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렵게 미국에 갔는데, 하필이면 그때가 1800년대이니까 미국도 교파싸움이 심했던 것을 보았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미국이 천국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무교회주의를 창시하게 되었다. 문화 차이라는 것은 굉장하다. 우리는 지금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우리는 에덴동산을 가보지 못해서 전혀 모른다. 인간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우리는 단절된 지도 모른다. 이어져있는지 단절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관계가 단절된 지도 모르고 계속 기도하고 있다. 기도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기도해도 소용없다. 본 것이 없는데 뭘 기도하겠는가? 천국을 본 일이 없는데 무슨 기도를 하겠는가? 이방인들이 중언부언한다는 것과 똑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중언부언한다. 우리 생각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게 생각하시겠는가? 밤새도록 조르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답답할 것 같다. 열심이 믿는 권사님들은 예배당에서 보통으로 철야기도를 하는데, 그것도 일주일에 몇 번씩 한다. 그것도 모자라면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기도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참 답답할 것 같다. 줄 것이 없는데 하나님 속이 썩을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서 성경에서는 그것을 ‘죽는다.’고 되어 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7) 했는데 우리는 죽은 경험이 없다. 그리고 육신의 죽음밖에 모른다. 관계의 단절이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과 내가 관계가 단절되면 생명이 없으니까 죽은 것이다. 그런 죽음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나는 하나님 안에서 죽은 것이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그런 사람이 된다. 그래서 자연히 만유와의 관계가 비정상화가 된다. 내가 부려야 할 종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천사를 섬기고 있다. 천사들은 원래 부리는 영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사람이 오히려 천사를 숭배하고 섬기고 있다. 천사를 숭배하고 섬기는 일은 아주 고상한 일로 보인다. 시장바닥에서 놀고 있는 사람은 아주 세속적으로 보이고, 천사를 숭배하고 있는 사람은 거룩하고 훌륭하게 보인다. 일부러 옷도 거룩하게 보이려고 그렇게 입고 다닌다. 만유와의 관계가 모두 비정상이다. 부려야 될 것을 섬긴다. 돈도 그렇다. 우리가 필요해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돈을 섬기고 있다.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다. 돈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첫째가 돈이다. 여러분이 집을 비운다면 무엇부터 챙기게 되는가? 집에 있는 돈을 챙긴다. 제일 중요하다. 이번에 우리 동네에 산불이 났다. 빨리 피신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뛰지를 못하니까 차를 대기해놓고 왔다. 만일 불이 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집안에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그것부터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뭐니 해도 돈이다. 형제간의 의리도 돈 때문에 끊어진다. 돈이 아니면 형제간에 나쁠 일이 하나도 없다. 부모 밑에서 재미있게 잘 살던 형제간들이 살림을 따로 하게 되면, 그때부터 내 것 네 것이 생기게 된다. 그때 잘못되면 원수가 된다. 세상 사람도 다 좋은 사람들이다. 돈이 아니면 걸릴 일이 없다. 우리가 만물을 지배해야 하는데 반대로 섬기고 있다. 그것이 자기의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돈은 필요해서 만든 것이니까 사람은 돈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만일 인간으로서의 권위가 있으려면 자기가 만든 것을 자기가 지배해야 한다. 성경에서 우상을 만든 것을 왜 책망하는가? 자기가 만들어 놓고 왜 자기가 섬기느냐는 것이다. 손으로 깎아 만든 것을 세워놓고 절을 하고, 돌을 세워놓고 절을 한다. 대학을 나와도 할 수 없다. 갓바위 부처님을 찾아가는 사람이 모두 무식한 사람이 아니다. 학벌 좋은 사람들이 찾아간다. 왕비도 답답하면 산에 가서 불공드리러 간다. 왕도 그랬다. 세조가 등창이 나서 너무너무 괴로우니까 전국 사찰을 돌면서 불공을 드렸다. 사람은 편하게 사는 그 정도밖에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혼란이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고 했다. 하나님이 쉴 곳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은 인간의 문제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있을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창세기 1장 2절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 외에는 지금도 다 혼돈 가운데 지금도 있다. 아무리 말해도 모르고 보지 못한 것이니까 모른다. 우리가 눈으로 본 일도 없고 귀로 들은 일도 없고 마음으로 생각해보지도 못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막막하고 막연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도 3박자 구원이니 5박자 구원이니 하는 것이 있다. 그런 것은 잘 들린다. 내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건강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아주 잘 들린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대의 교회가 나왔다. 교인 숫자가 50만이라는데 상상이 되는가? 안 된다. 세계 어디에도 단일교회로서 그렇게 사람이 많은 교회는 없다. 왜? 모두 필요를 찾아서 가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목회하러 가니까 뭔가 한방이 있어야지 말씀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단번에 들었다. 감기라도 고쳐야 사람이 오지 말씀만 한다고 해서 사람이 오지 않는다. 사람이 안 오니까 나도 모든 것을 제쳐놓고 그런 대열에 끼어 보려고 쫓아다녔는데, 아무리 해도 나는 되지 않았다. 만일 그때 조금이라도 되었더라면 그쪽으로 출세를 하는 것인데, 아무리 해도 안 되었다. 방언도 못해보았다. 옆에서 하는 데도 나는 안 되었다. 시골에 있는 친구를 일부러 그런 집회에 불렀었다. 그때 친구는 와서 첫날 바로 방언을 했다. 나는 몇 달째 해도 방언을 못했는데 친구는 첫날 했다. 참 답답하기도 하고 나는 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생각을 C.C.C.에 와서까지 버리지 못했다. 하지는 못해도 늘 내 속에 잠재하고 있었다. C.C.C.에 오니까 간사들도 방언을 하는 간사들이 훨씬 열심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와도 그렇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지 못했더라면 평생 나는 방언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밑바닥에 깔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목회가 잘 됐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목회가 잘되는 경우가 드물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끊어지면 천사와 인간 사이가 혼란에 빠지게 되고, 만물과 인간 사이가 혼란에 빠지게 되고, 모두가 창세기 1장 2절로 돌아간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죽음’이라고 한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7)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육신의 죽음이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하나님에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모르는 것이다. 죽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겠는가? 죽은 사람이 6.25사변이 일어난 것을 알겠는가? 아니면 해방된 것을 알겠는가? 죽으면 아무 것도 모른다. 왜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모르는가? 죽었기 때문이다. 죽었기 때문에 영생이라는 것이 없어졌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3:22)고 한다. 그래서 동산의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닫혔으니까 영생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영생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히 산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영생도 모르는 것이다. 영생을 오래오래 사는 것이라고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은 오래오래 살지 못하니까 천당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천당이 가면 죽지 않고 산다고 생각한다. 천당이 있으면 좋겠지만 사람이 안 죽고 사는 곳은 없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천사를 섬기게 된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천사를 섬기게 된다. 알고 보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천사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대할 때 항상 경계심이 있다. 나에게 무슨 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이런 경계심이 사람에게 항상 있다. 그것이 심해지면 적대감이 생기게 된다. 정신과 환자를 상대해보니까 굉장한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다. 누구에게도 자기 마음을 열지 않는다. 똘똘 뭉쳐서 감아서 자기를 숨기는 것이다. 자기가 밥을 못 먹을 것 같으면, 맛이 없어서 못 먹는 것을 입맛이 없다는 것은 정상이다. 이 사람들은 밥에 독을 넣어서 못 먹겠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입맛이 없다는 것은 감춰져 버린다. 그럴 때 그 사람의 혓바닥을 보면 백태가 하얗게 끼어서 절대로 뭘 못 먹게 되어있다. 입맛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놓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독을 넣어서 못 먹겠다고 하고, 입에 넣어주면 그냥 뱉어버린다. 이런 사람을 직접 보았다. 정신병의 문제는 불안이다. 이 불안이 근본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 불안만 없으면 정신병에 걸릴 일이 없다. 그런데 그 불안이 있으니까 아무리 약을 써도 안 된다. 약을 쓸 때만 조금 가라앉는 것이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약을 안 먹으면 도로 마찬가지가 된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무서워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결국 동물적 본성만 남아서 그냥 경계심만 가지고 있게 된다. 참 불쌍하다. 자기 혼자 엉뚱한 짓만 하고 있다. 자기를 은폐시키기 위해서 다른 짓을 한다. 다른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자기가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만유에게 복을 주려고 지어졌다. 그런데 만유에게 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만유에게 귀찮은 존재이고 괴로운 존재이다. 여러분이 식물하고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사람은 참 하나님 아들 같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사람들은 괴물들이라고 하겠는가? 사람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자연이 훼손되었다. 아마존의 밀림까지도 벌목을 해서 지구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은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다. 자기를 굉장히 중요한 존재라고 알고 있지만 도움이 안 되는 존재이다. 다 거부하는 존재이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씀이 있다. 그런데 관계가 이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고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유가 탄식하기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한다. 자기들을 축복해줄 사람을 고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만유는 그만두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복이 되는가? 복이 안 된다. 상대적 빈곤이라는 말은 옆에 사람이 너무 잘사니까 꼴 보기 싫다는 말이다. 자기로서는 밥을 굶는 사람은 없지만 다른 사람이 너무 잘 사니까 나는 왜 못 사는가, 한다. 이것은 상대적 빈곤이다. 또 옆 사람이라고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고동창생들끼리 만나면 처음에는 반갑다고 했는데 한참가면 네 신랑은 뭘 하느냐가 나온다. 그러면 자랑거리는 있는 사람은 실컷 하는데,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은 기가 죽어서 오면서 다시는 안 간다고 하면서 집에 간다. 그런데 집에 있으면 또 심심하고 답답하니까 또 간다. 대구에 특별히 그런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한참 잘나갈 때 대부분 **여고 나온 분들의 남편이 장관 차관이다. 아무 것도 못하는 남편과 살면 쪽팔려서 못나간다. 우리 교회에 똑같이 **여고 나온 분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자기보다 못했는데, 지금은 남편이 장관이니까 얼마나 차별이 심하겠는가. 잘난 사람이 자기를 무시하니까 자기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무시한다. 그러니까 남에게 복을 주지 못한다. 내가 잘 살면 남에게 복을 주어야 하는데, 내가 잘살면 오히려 남을 가난하게 만든다. 여러분들은 어디 가서 돈 자랑을 하지 말기 바란다. 돈 자랑하면 속으로 굉장히 욕을 얻어먹는다. 남을 주지도 못할 돈을 왜 자랑하냐는 것이다. 주지도 않으면서 자랑하는 것은 배고픈 사람 앞에 가서 스테이크 먹고 왔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도 1만원짜리가 아니고 6만원짜리 스테이크를 먹고 왔다고 하면 듣는 사람은 얼마나 속이 상하겠냐는 것이다. 자기 자랑하는 것은 남을 골리는 것이다. 돈 있는 사람이 돈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옛날에 들으니까 여기서 어떤 호텔이 있다. 그 호텔 주인이 돈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늘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저렇게 부자인데도 저분은 저렇게 겸손하다고 생각하지 싶은데 그렇지 않다. 돈이 그렇게 많은데 뭐 하러 고무신을 신고 다니느냐고 욕한다. 돈이 있는 사람이 가난한체해도 욕을 얻어먹고, 돈이 있는체해도 욕을 얻어먹는다. 이래도 욕을 먹고 저래도 욕을 먹는다. 돈이 있다고 남에게 베푸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남에게 돈을 베풀어야 좋다고 하지 자랑만 하고 다니면 좋다고 하지 않는다.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것도 자랑이다. 나는 부자니까 고무신 신고 다녀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자랑하는 맛에 살고 있다. 그런데 자기 자랑이 남을 죽이고 있다고 알아야 한다. 혹시 하나님께 입은 은혜도 잘못 자랑하면 남을 죽이게 된다. 잘못 자랑하면 안 된다. 제대로 자랑하면 그렇게 안 된다. 만유에게 복을 주지 못한다. 이것이 죽음이다. 하나님에게 끊어지면 죽음이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7) 왜 우리가 유린되었을까? 하나님과 단절된 이유가 인간 위에 또 뭔가를 바라보았다. 인간은 한계가 있다.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다. 모든 한계를 다 초월한다고 하더라도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다. 해탈은 모든 곳에서 자유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죽으면 자유할 수 없다. 생각으로만 자유한 것이다. 그런데 나보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천사다. 천사는 안 죽는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사는 길만 있다면 뭘 못하겠는가? 아담이 시원찮아서 선악과를 먹은 줄 아는가? 아니다. 우리 인류의 대표자이다. 죽지 않고 산다고 하니까,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하니까, 안 먹을 수 없다. 지금 우리도 그렇다. 만일 죽지 않고 산다면 안 먹을 수 있겠는가? 우리 조상이 멍청한 것이 아니다. 아주 머리가 최고로 좋은 사람이다. 대표자니까 인류 중에 가장 머리가 좋고, 가장 사려 깊고, 가장 우수한 사람이 아담이다. 사람은 자기 위치에 만족이 안 된다. 그래서 끝없이 위치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결국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그렇게 된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부러운 것이 없어져버린다. 그런데 하나님과 끊어지고 나니까 부러운 것이 생긴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도 고민을 많이 하지 않으시겠는가? 사람은 전혀 고민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고민하신다. 우리가 해봐도 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고민하는가? 믿는 사람이 고민하는가? 하늘의 보화를 맛본 사람이 고민하겠는가? 맛보지 않은 사람이 고민하겠는가? 하늘의 보화를 맛본 사람은 고민을 하게 된다. 자기 가정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자기 집안에 밭에 묻힌 보화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고민이 되지 않겠는가? 나 혼자 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누가 고민을 하는가? 복을 가진 사람이 고민을 한다. 그것이 정말 할 말한 고민이다. 내가 천사같이 되려고 하는 고민은 죽을 고민이고 망할 고민이다. 내가 받은 복을 어떻게 주어야 하나? 이것을 고민하는 사람이 진짜로 참된 고민을 하는 사람이다. 여러분 좀 차원을 달리 해보라. 남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한번 고민해 보라. 그러면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알게 될 것이다. 줄 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검사해보면 내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알게 된다. 돈이 있다고 줄 수 있는가? 지식이 있다고 줄 수 있는가? 뭘 줄 수 있는가?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것이 돈인데, 그 가장 좋다는 것은 남에게 줄 수 없다. 내가 돈이 없어서 구하러 다니다가 보니까 다른 것은 다 좋아하는데, 돈 달라는 소리를 제일 싫어하였다. 형님과 나 사이는 이복형제니까 나이 차이가 굉장히 많아서 부모 나이가 같다. 평소에는 굉장히 사랑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돈 문제가 나오니까 얼굴이 대번에 새카매졌다. 무서웠다. 돈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나한테 돈 한 푼이라도 준 사람은 너무 감사한 사람이다. 작은 일이 아니다. 자기가 귀중하게 여기는 돈을 준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이니까 세상을 다 주는 것이다. 사람의 양심을 측정해 보려면 돈을 앞에 두어 본다고 한다. 정말 나는 항상 양심적이라고 했던 그 사람이 돈을 보면 자기 본색이 드러난다. 사람은 돈 앞에서 꼼짝 못한다. 형제간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형제간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절대로 기대하면 안 된다. 돈을 기대하면 형제간이라도 원수가 된다. 생각해봐라. 나는 옹색해서 할 수 없이 구했는데, 안 주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자기도 알고 보면 그런 사람인데 짐승같이 생각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그것을 경험을 해 보았다. 내가 다시는 이 동네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과 단절된다는 것은 이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는 걱정하지 않는다. 누가 걱정하겠는가? 그 사람을 만드신 이가 걱정하지 않겠는가? 내가 저러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데, 내가 저런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닌데, 이렇게 걱정하지 않겠는가? 힘이 있다고 폭력을 쓴다. 그러면 누가 걱정하겠는가? 그를 지으신 이가 걱정하지 않겠는가? 내가 저러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데, 저것 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데, 이렇게 걱정한다. 격투기 하는 것을 보면 완전히 죽자 살자 하고 한다. 스포츠라고 만들어 놓으니까, 스포츠라고 하니까, 미화되어 있다. 만일 실전이라고 하면 완전히 짐승이다. 같은 인간인데 저렇게 해서 먹고 사는구나. 타이틀을 달면 날아갈 것 같은가 보다. 한방에 때려 눕혀야 된다. 나도 자꾸 보다보니 한방에 때려눕힐 장소를 안다. 아는데 때리지를 못한다. 어디를 때리면 넘어가는 것을 안다. 나 같은 사람은 때려도 안 넘어갈 것이다. 그 억센 주먹으로 때리니까 넘어가는 것이다. 그 큰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을 보니까 인간을 저러라고 만들어 놓았는가? 이 생각이 자꾸 든다. 저러라고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것인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려고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겠는가? 치고 박는데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겠는가? 서로 욕하고 미워하는데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겠는가? 교회 안에서 저 사람이 꼴 보기 싫어서 못 보겠다고 하면 그런 데서 하나님을 보겠는가? 우리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면 얼마나 영광인가! 그런데 우리를 통해서 오히려 마귀를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도 행동을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 좋다고만 마음대로 행하면 다른 사람에게 욕 얻어먹는다. 그 욕 얻어먹는 그것이 무엇인가? 내가 욕을 얻어먹는 것이 아니고, 나를 지으신 이가 욕을 얻어먹는 것이다. 옛날에 부모가 욕을 얻어먹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적으로도 부모가 욕을 얻어먹는다. 더 멀리는 더 깊게는 나를 지으신 이가 욕을 얻어먹는 것이다. 남이 싫어하는 일은 안해야 된다. 남이 싫어하는 일은 할 수 있는 한 안 해야 된다. 남이 싫다고 하는데 기어코 하는 사람이 있다. 무슨 배짱으로 하는지 모르겠다. 빤히 보고 있는데, 하나님이 없으니까 그렇지 하나님이 있으면 그렇게 하겠는가. 그런 사람을 위해서 고민하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다. 사람이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고민한다. 내가 어디 가서 싸우고 있으면 하나님이 고민하신다. 내가 어디서 욕 얻어먹을 짓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고민하신다. 나는 당연하게 네가 그러니까 내가 그렇지, 한다. 다 그렇다. 네가 그러는데 내가 안 그럴 수 있어? 다 이렇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민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이 고민하신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부른 것이다. 바벨로 막 가고 있는데, 그 대열에서 한 사람을 불렀다. 그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꼭 아브람아 나오라고 했겠는가? 그 대열바깥에서서 가는 사람마다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람만 그 소리를 듣고 따라온 것이다. 베드로에게만 예수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겠는가? 거기 나오는 사람에게 다 그 말을 했다. 그런데 베드로만 그 말을 들었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부름 받아 온 사람이다. 아담은 지음 받은 사람의 조상이다. 그런데 그 지음 받은 사람에게 결함이 하나 있다. 무엇이든지 받아들여야 하는 결함이 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았다. 이것을 바꾸는 방법은 이 생명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낸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든지 어디서든지 사람을 불러내야지 들어가서 어떻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들어가면 나도 동화되어 버린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그런 때가 있었다. 세속화 운동이 있었다. 우리가 예배당에서만 ‘주여! 주여!’ 할 것이 아니고, 현장에 나가서 그 사람들과 같이 부벼 보자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주일날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여름 같으면 해변 가로 가서 피크닉 선교를 하자고 한 때가 있었다. 다방 목회 등 별것이 다 있었다. 심지어는 창녀촌에 가서 목회를 하자는 운동까지 나왔다. 세속화 운동이다. 구별해서 우리가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론적으로는 그럴 것 같지만 안 된다. 간 사람들은 다 먹혀서 피똥 싸고 나왔다. 얻어먹을 것이 뭐가 있는가? 오히려 거기 다 물들어서 오고 말았다. 그 운동을 하다가 교회만 안 되고 말았다. 항상 하나님은 사람을 불러내신다. 그 어떤 세계에서 불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C.C.C.에 있을 때 나는 정말 이름도 성도 없는 간사였다. 그런데 어떻게 우연한 기회가 와서 이름이 나게 되었다. 말씀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이 단체도 변화가 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니다. 그중에 누군가가 못 마땅해서 나를 밀어내 버렸다. 그 안에서 그것을 변화시킨다면 하나님이 뭐 하러 불러내시겠는가? 이스라엘을 애굽에 놔두고 변화시킬 수 있다면 뭐 하러 불러내시겠는가? 거기서는 불가능하다. 바로의 치하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불러내는 분이다. 우리는 지금 부름 받아 나온 사람들이다. 교회는 에클레시아, 소집되었다는 뜻이다. 알고 보면 불려서 나온 사람들이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옛날 시골에 가면 동민들이 회의를 할 때는 동네에 그런 것을 맡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징을 치며 돌아다니면 동네 사람들에게 모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에클레시아이다. 희랍사람들은 모여서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래서 모인 것이 에클레시아이다. 우리는 지금 누군가가 나를 불러서 온 것이다. 내가 그냥 온 것 같지만 누군가가 불러내서 왔다. 부르심이 먼저이다. 불러낸 사람이 없으면 못 온다. 저절로 스스로 교회를 왔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어디선가 부름을 받았다. 구체적인 인도자가 없다는 뜻이지 어디선가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불러내야 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본만 보이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좋은 사람으로서 인식만 주면 된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불러내야 한다. 물론 나쁜 인상을 주면서 불러낼 수는 없다. 따라 오겠는가? 좋은 인상을 준다면 그 목표는 어디 있는가? 불러내기 위해서이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고후6:17)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불러내듯이 바벨로 가는 사람 속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낸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름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뭘 하러 불렀는가? 부르기를 왜 불렀는가? 한국 사람을 갖다 놓으면 미국에 가도 한국이다. 중국에 가도 한국 사람들이면 한국이다. 코리아타운은 한국이다. 거기가면 다 가게고 뭐고 다 한국 사람들이니까 미국말 못해도 상관이 없다. 개는 어디다 갖다 놓아도 개다. 소는 아무데 갖다 놓아도 소다. 안방에 앉혀 놓고 옷 입히고 화장시키고 별짓을 다해도 개는 개다. 할 일 없으니까 그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이다. 너무 심심하고 답답하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사는 것이다. 오죽 답답하면 그러겠는가? 오죽 할 일 없으면 그러겠는가? 개 병원에 한번 가면 3만원이다. 사람은 병원에 가면 몇 천원인데 개는 가려고 하면 최소한도 3만원은 가져야 한다. 수술 한번 하면 몇 백 만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돈 아까운줄 모르고 한다. 다른 데 마음 쓸데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그렇게 받아줄 데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개처럼 자기를 좋아하겠는가? 키워봐라. 너무 사람을 좋아한다. 어떻게 그렇게 생긴 동물이 있는가 모르겠다. 열 번 보나 스무 번 보나 항상 좋아한다. 하루에 열 번을 봐도 항상 꼬리치고 좋아한다. 항상 새롭다. 언제나 새롭다. 사람은 하루에 열 번 보면 진력날 것이다. 진력나서 이것이 또 왔네, 또 왔네, 이럴 것인데 이 개는 아무것도 없다. 볼 때마다 좋다. 꼬리 흔들고 와서 비빈다. 참 특이한 동물이다. 키우다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버릴 수 없다. 버리지 못 한다. 차라리 안 키우는 것이 낫지 키우다 버리려면 너무 어렵다. 나는 한번 키워보고 다시는 안 키운다. 정을 떼기가 못할 짓이다. 정을 두고 가지를 마오 한다더니 그 식이 된다. 부르신 것은 다른 세계로 부른 것이다. 다른 세계가 있기 때문에 부른 것이다. 똑같은데 부르겠는가? 내가 테니스 클럽에 있다가 탁구 클럽에서 불렀다면 다른 데로 부른 것이 아니다. 다 운동하는 데로 부른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까우니까 부르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 살자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는 사람은 참 복 있는 사람이다. 불러놓았는데도 항상 버르장머리를 못 고치고 있다면 그것이 참 골칫거리이다. 같이 살려고 불러놓았는데 아무리 해도 목욕을 안 한다면 참 골치 아픈 일이다. 바깥에 돌 때는 목욕을 안 해도 되는데, 남과 같이 살려면 목욕하고 깨끗이 해야 한다. 그래야 이불도 더럽히지 않는데 아무리 해도 목욕을 하지 않는다면 같이 못산다. 냄새 풀풀 나고 하면 같이 살겠는가. 늙기만 해도 몸에서 늙은 냄새 난다고 아이들도 싫어하고, 아내는 더 싫어한다. 여러분은 늙으면 목욕을 더 자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젊으면 냄새가 별로 안 나는데, 늙으면 조금만 안 씻어도 냄새가 난다. 누가 제일 싫어하는가? 아내가 제일 싫어한다. 구박을 받지 않으려면 남자들은 목욕을 자주 해야 한다. 부름 받았으면 다음 단계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다. 불러 놓고 말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부름 받은 후에 많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그 약속을 실현한다는 것이 이스마엘을 낳는다. 간단한 것 같지만 그 안에 많은 과정이 있다.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했는데, 주님 뜻대로 산다고 살았는데, 자꾸 이스마엘이 나온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의 문제들이다. 최선을 다한다. 목숨 바쳐 일한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나온다. 이삭이 안 나온다. 왜 이삭이 안 나오는가? 부름은 받았는데 구속이 안 되어서 그렇다. 니고데모에게 말할 때는 거듭난다고 말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말했다. 니고데모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천주교로 말하면 추기경 같은 사람이다. 아주 놀라운 사람이다. 생활이나 품행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모범이 된 사람인가! 그런데 그 사람을 놓고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다고 하니까 기가 막힌 일이다. 어찌 그런 일이 있느냐고 이야기했다. 거듭 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구속이다. 확실하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면 자꾸 이스마엘만 낳는다. 이상하다. 나는 최선을 다하는데 자꾸 이스마엘만 나온다. 내가 한 교회에서 8년간 있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면 거기서는 이스마엘도 못 낳은 것 같다. 아무것도 낳아놓고 온 것이 없다. 나는 나대로 열심히 했다. 어떤 교회는 사람이 많이 늘었는데 그것이 이삭인지 이스마엘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이 다 이삭이 아니다. 불러 놓으신 것은 구속하기 위한 것이다. 구 속은 내가 늘 말했지만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의롭다 함 받는 것도 그냥 믿음만 있으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생각하니까 피상적인 문제가 된 것 같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 그 구속 안에서 의로워지는 것이지 구속이 없으면 의로워질 수 없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 무엇인가를 또 생각해야 한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구속해 주었는가? 자기 안에 있는 구속으로 나를 구속해 준 것이다. 자기 안에 있는 구속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준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 법적인 개념이 아니다. 자기 안에 있는 생명으로 나를 구속했다는 말이다. 예수 안에 있는 무엇이 나를 구속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내가 왜 그렇게 자꾸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무엇으로 나를 구속했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렸으면 나를 구속했겠는가? 내가 구속이 되겠는가? 뛰어내릴 수 있는데 참았으면 내가 구속이 되겠는가? 뛰어내릴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구속된 것이다. 우리는 사탄을 이기려면 사탄보다 더 큰 능력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능력을 가진다고 사탄을 이기겠는가? 옛날에 그런 문제 때문에 기도를 해보았다. 역부족이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내 위치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에 있는 것이 승리이다. 내가 기도해서 쫒아내는 것이 승리가 아니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쫒아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에 있는 것이 승리이다. 예수님에게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것이 붙어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4:6)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이겼는가? 돌로 떡을 만들어서 이겼는가? 아니다.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사람으로 이겼으니까 우리를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마귀를 물리쳤다면 우리는 소용이 없다.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 안에서 구속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사람으로 승리했기 때문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나도 그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 지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마귀를 이기려고 엄청나게 기도하고 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면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교회만 다닌 사람들은 모른다. 다른 교회에 다녀본 사람들은 그것을 안다. 사탄을 이기려고 얼마나 애써서 기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기도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슨 능력을 받아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사탄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사탄은 기도할 필요도 없다. 능력을 구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사탄을 사탄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이기려고 생각하면 절대로 실패한다. 백전백패다. 내가 원숭이를 이기는데 원숭이보다 더 나무를 잘 타서 이겨지겠는가? 내가 원숭이보다 더 재주가 많아서 그 나무를 타겠는가? 그러면 원숭이들이 와서 ‘존경합니다. 경배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하겠는가? 서커스에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을 보고 원숭이들이 저 사람을 우리 왕으로 삼자고 하겠는가? 줄타기 하는 것을 원숭이는 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사람이 줄타기를 하는 것을 보니까 신기하다. 그것을 보고 원숭이들이 감탄을 하겠는가? 아마 뒤로 돌아서 웃을 것이다. 저것이 재주 부리고 있다고 하고 웃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원숭이 능력으로 원숭이를 이기려고 하는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사람으로서 원숭이를 지배하는 것이지 원숭이보다 나무 타는 능력이 많아서 왕이 되겠는가?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도 그렇다. 세상보다 더 힘이 있어서 세상을 이기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우리 정체성에 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구속이다. 그러면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 무엇인가?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람됨이다. 인간됨, 제한됨이 나를 구속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내 자리가 저기구나. 인생의 원래 위치가 저 위치구나. 그렇게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 왜 하필 예수인가? 예수가 아니면 그것이 또 안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그런데 안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죽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던 사람이 죽었다. 하나님 같은 사람이 죽었다. 아무리 하나님 같아도 역시 사람이더라는 말이다. 우리가 마귀에서 속아서 하나님 같이 되어 보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나님 같이 되어도 죽는다. 어차피 사람은 사람이다. 우리가 이제 내 위치를 발견해서 내 위치를 알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다 나온다. 사랑 따로, 믿음 따로, 인내 따로,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 저절로 나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한 자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문제는 남들은 몰라, 나만큼 고통스러운 사람이 어디 있어, 이런 사람은 평생 똑 같다. 평생 안 고쳐진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 있어야 사람이 고쳐지지 무슨 방법으로 바꿔지겠는가? 아들이 죽었는데 또 다른 아들을 낳았다면 해결이 되겠는가? 아니다. 죽은 아들은 죽은 아들이다. 또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내가 무엇인가? 예수 안에 있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언제 태어날 때, 하나님이 나를 지으실 때, 내가 무엇을 가지고 나왔는가? 무엇을 가지고 나왔는가? 아무 것도 없다. 생각해 보면 자식을 키우는 것도 키울 때 좋은 것이다. 키우면서 나는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안 그러면 그런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친구 목사님이 완전 불구자 아들이 둘 있다. 지금은 50이 넘었는데, 걷지 못하고 집 안에서도 무엇을 잡고 다닌다. 지능은 7~8살 먹은 아이밖에 안 된다. 부모가 잠시도 떨어질 수가 없으니까 목사님이 일을 못한다. 많은 재주가 있는 분인데 아이들에게 붙잡혀서 아무 것도 못한다. 그것을 아깝게 생각하기에 내가 그렇게 말했다. 남의 이야기니까 이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목사님 지금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게 복입니다. 하나님의 일, 다른 것 안 해도 됩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돼지 같은 인간 어디서 나오겠는가? 그런 일이 없으면 안 나온다. 나올 수가 없다. 자식이니까 사랑이 나온다. 그래서 키울 때 너무 아이에게 큰 기대를 걸어도 안 된다. 그것이 아이를 버린다. 내가 키우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된다. 부모가 되어 봤다는 것을 감사해야 된다. 자식 때문에 나는 부모가 되었구나. 자식 때문에 어버이 사랑을 알게 됐구나. 자식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도 알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 그래야 감사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식을 키워놓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지금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이것이 노인들의 슬픔이다. 노인들이 모이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그러면서 섭섭하게 생각한다. 섭섭하다. 골골이 자기가 한 일만 생각나고, 그 아기를 키우면서 즐거웠던 일은 싹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고생과 수고만 많이 했지 얻은 것이 뭐가 있는가? 사람은 언제든지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야 된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지, 꼭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꼭 없어야 되는 것도 아니다. 자식이 꼭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꼭 없어야 되는 것도 아니다. 주시면 가지는 것이고, 안 주시면 없는 것이지 그것을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하겠는가?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감사하고, 없는 사람은 또 없는 대로 감사하면 된다. 없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신부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혼자 사니까 참 좋겠다. 왜냐하면 걸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식이 없지만 걸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가정이 있으니까 나 혼자 천국가자니 그것도 미안하다. 데리고 가자니 힘들다. 그런데 신부들은 그럴 염려가 없다. 자기만 잘 살면 되기 때문이다. 구속이 왜 필요한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 사람답게 살면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진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진다. 인생 문제가 다 사라지고 없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답게 살면 만족해진다. 그래서 구속이 필요하다. 그 자리에서 연합이 가능하다.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자리에서, 연합이 가능하다. 뛰어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연합이 불가능하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과 연합이 안 된다. 뛰어 내리면 나도 하나님 같은데 연합이 되겠는가? 여자는 남자가 아니니까 남자가 필요하지, 자기가 남자도 될 수 있으면 무엇 때문에 남자가 필요하겠는가? 요즘에는 삼식이가 제일 문제꺼리라고 한다. 집에 앉아 하루 세끼 밥 먹고 있는 사람은 머리아프다고 한다. 우리 집 사람도 세끼 밥해주려고 하니까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하나님께 쓰이지 않으면 다 귀찮은 존재이다. 구속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연합이 가능하다. 예수 같은 사람 안에도 내가 포함된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품 안에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에게 포함되니까 그 예수에게 포함이 안 되면 나는 그 누구 안에도 포함이 안 된다. 예수님도 잘못 알면 포함이 안 된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예수 안에 내가 어떻게 포함되겠는가? 거기서 내 그림자라도 발견할 수 있는가? 없다. 거기는 내가 없다. 멀고도 먼 당신이고, 우러러 봐도 잘 안 보이는 당신이다. 나와 연합할 수가 없다. 딱 한 자리에서만 연합이 가능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데 이것을 가볍게 넘어갔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구속은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와 연합이 되면 하나님과는 자동적으로 연합된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된다. 교회는 연합이다. 나만 독특하면 연합이 안 된다. 나 혼자 슬프다고 해도 연합이 안 된다. 나 혼자 기쁘다고 해도 연합이 안 된다. 나 혼자 올바르다고 해도 연합이 안 된다. 구속 안에서 밖에는 연합이 안 된다. 여기는 구속이 쇠고랑 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쇠고랑 차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어디에 포함되는가? 뛰어내릴 수 없는 그 자리에 포함되는 것이다. 다른 데는 포함이 안 된다. 겟세마네 동산에 포함되기는 어렵다. 그 자리에 가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가 쉬울 것 같지만 어렵다. 하물며 골고다에 가서는 연합이 되겠는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할 때만 해도 우리가 완전한 연합이 불가능하다. 그 말은 예수 밖에는 할 수가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우리가 그 말을 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그에게 그만큼 충성을 했는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할 자신이 없다. 그럴 자격이 없다. 그런데 어디서 자격이 있는가? 뛰어내리지 못한 자리에 자격이 있다. 거기는 내가 함께 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가면 이의가 없지 않은가? 아무 조건도 없다. 그래서 내가 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참 어려운가 보다.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살다 보니까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살다 보니까 이렇게 쉬운 것이 어렵게 들린다. 의롭다 함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과 연합하니까 의로운 것이지, 연합할 수 없는 데 의롭다고 하겠는가? ‘의’라는 것은 관계이다.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가 의로운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면 의로워질 수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 동산의 경작자가 되었다. 아담에게 준 것이 동산을 지키고 경작하라는 것이었다. 동산을 지키고 경작하는 것이 무엇인가? 밭에 씨를 뿌리면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게 된다. 그것이 경작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 이것이 남녀 관계이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이것이 다 주어져 있다. 동산을 경작하라. 그런데 그 동산이 어디인가? 땅인가? 땅이 아니다. 하나님이 놀고 쉬는 곳이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역을 개발하는 자다. 하나님의 영역을 농사짓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런데 볼 수 있게 경작하는 것이다. 씨는 보이지 않으나 열매는 보인다. 하나님은 씨고 우리는 흙이다. 흙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씨를 30배 60배 100배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흙의 가치이다. 좋은 것도 그렇게 할 수 있고, 나쁜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그것이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을 경작한다면 우리는 비록 흙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성품을, 풍성한 성품을 우리가 경작해 낸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풍족해지겠는가! 밭이 굶을 수 있겠는가? 밭이 배고픈 밭이 있겠는가? 항상 곡식이 있다. 항상 생명이 거기에 있다. 밭은 배고플 일이 없다. 내 것은 아니지만 배고플 일은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경작해서 30배 60배 100배로 생산할 존재이다. 이것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 좀 더 가깝게 말하면 아담과 하와로 대입해서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산해내면, 하나님의 성품을 생산해내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겨자씨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한 알이 눈에 보일락 말락 하다고 한다. 그 앞에서 숨을 한 번 잘못 쉬면 날아가 버린다고 한다. 손바닥에 두고서 보라고 했는데, 앞에서 숨을 쉬다가 보면 날아가 버린다고 한다. 그렇게 작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나무가 되면 새들이 와서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된다고 한다. 흙이 아니면 누가 그렇게 만들어 내겠는가? 흙이 아니면 누가 씨를 그렇게 만들어 내겠는가? 그 자리가 바로 사람의 자리라고 생각하면 사람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자리인가! 그러면 자기 자랑을 할 필요가 없다. 소득이 막 나온다. 막 과일이 나오고, 열매가 나오고, 곡식이 나오는데 자기 자랑은 뭘하러 하는가? 자기 자랑이 곧 하나님 자랑이 되는 것이다. 나는 콩 하나를 심었는데 30배 60배 100배가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지 않은가? 자랑해도 된다. 얼마든지 자랑해도 된다.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주인이 가져가 버린다. 그러면 또 빈 밭이다. 그런데 내 년에 심으면 또 난다. 얼마나 그것이 축복인가! 끝없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할 수 있다. 하나님 동산의 경작자가 된 사람은 이것보다 넘치는 것이 없는데, 한 가지 제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버리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안 된다. 동산을 버리고 나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농사지어 개발해 낼 수 없게 되었다. 씨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씨를 막 생산해 내게 되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씨를 생산해낸다. 하나님의 성품을 경작하고 확산해서 분배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우리가 만일에 하나님 동산의 경작자가 된다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한 성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된다. 성품의 분배를 생명의 분배라고 할 수 있다. 성품의 분배는 곧 생명의 분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생명의 분배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람이 너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면 분배할 자가 없다. 경작할 자도 없고 분배할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신 모든 축복이 회복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인생의 자리로 돌아올 때, 내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 다 내게로 돌아온다. 내 위치에 오니까 그렇다. 내가 내 위치를 벗어나니까 아무 것도 없었다. 축복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세상에서 얻은 것은 복인 것 같았는데, 조금 있으면 부족해지고 조금 있으면 부족해졌다. 세상에는 이제는 그만이라는 것은 없고,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서 더 가져야 된다. 가진 사람이 더 가지고 싶어 한다. 돈이 많은 사람이 늘 돈이 없다고 한다. 얼마나 없느냐고 물으니까 상상도 못할 만큼 돈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돈이 없다고 하면 만원이 없다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말이 만원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몇 억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자는 더 가난하다. 차라리 돈이 없을 때가 더 부유하다. 돈이 만원밖에 없을 때는 만원을 헌금하기가 쉽다. 10만원 있으면 훨씬 더 해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된다. 10만원 있는데 만원을 헌금하려면 귀퉁이가 나가 버리는 것 같아서 하기가 어렵다. 100만원 있어도 또 마찬가지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돈이 있는 사람은 헌금도 많이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 과부가 엽전 두 푼을 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겠는가? 과부는 그것 밖에 없다. 내 봐야 엽전 두 푼이니까 내기가 쉽다. 하나님 나라는 참 공평하다. 많이 가진 사람도 부족하고, 적게 가진 사람도 만족한다. 공산주의를 할 필요가 없다. 저절로 공산주의가 되어 버리는데, 무엇 때문에 공산주의를 하겠는가? 다 만족하면 된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먹어보지도 못했던 것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살아 보면 안다. 이것은 살아봐야 알지 그냥은 알 수가 없다. 그의 나라가 되고, 그의 왕국이 되고, 그와 함께 왕 노릇한다. 성경에 보면 그와 함께 왕 노릇한다는 말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예수와 함께 왕 노릇 하겠는가? 무슨 수로 내가 예수와 함께 왕 노릇 하겠는가? 예수 안에 있어야 같이 왕 노릇하는 것이다. 부인은 그냥 남편과 같이 올라가 버린다. 계단을 밟을 필요가 없다. 남편이 장군이 되어 버리면 아내도 장군이 되어 버린다. 남편이 임금이 되어 버리면 아내는 저절로 왕비가 되어 버린다. 무슨 수속이 필요가 없다. 세조의 아내는 세조가 왕이 되면서 왕비가 되어 버린다. 대군의 아내였는데 왕비가 되어 버린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왕 노릇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질은 굶어 죽지 않으면 된다. 그렇다고 굶어 죽으라는 것은 아니다. 굶어 죽지 않으면 되니까 여기는 굶어 죽을 사람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마음 놓고 하는 것이다. 굶어 죽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여러분들을 보니까 굶어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함께’ 나라가 되고, ‘함께’ 왕 노릇하게 되고, 그 ‘함께’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살아 보면 내 인생이 참 귀하구나. 내가 꼭 있어야 될 존재구나. 부모는 자식이 어렸을 때는 자식에게 내가 꼭 있어야 될 존재구나. 나 없으면 저 아이가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한다. 그만큼 귀중하다. 아기 때문에 귀중해진 것이다. 내가 귀중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젖 먹은 아기를 앉고 차에 오르면 다 자리를 비켜 준다. 아기 때문에 다 자리를 비켜 준다. 우리는 누구 때문에 귀해지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귀해지는 것이다. 내 스스로 귀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는 동물과 똑 같다. 뭐가 다른가? 내가 다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이 뭐가 틀리는가? 아무 것도 다른 것이 없다. 하나님이 쓰시면 달라지는 것이다. 가치가 달라진다. 창조의 목표가 이래서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실 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창조했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해서, 씨와 밭이 연합해서, 남자와 여자가 연합해서, 뭐가 되는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고 지어 놓았다. 사람을 위대하게 하려고 지어놓은 것이 아니다.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지어놓은 것이 아니다.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을 지어놓았다. 그런데 우리는 특별하려고 생각한다. 기독교 안에 들어가서도 특별하려고 생각하니까 힘들다. 피곤하다. 기도도 왜 하는가? 특별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후2:9) 우리는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을 우리는 만나게 되고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있는 것 중에서 누리는 것이 아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었다. 생각해 보라. 자기가 애쓰고 힘써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이삭을 얻었을 때와 뭐가 틀리는가? 이삭은 자기가 전혀 생각지 못한 아들이었다. 생각에도 없던 일이고, 한 번도 그런 일은 본 적이 없는데, 이삭을 얻었다. 이스마엘을 내 보내라고 할 때는 밤새도록 고민했다. 성경을 읽어보면 잠을 못 자고 고민한 흔적이 나온다. 그런데 이삭을 모리야 산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니까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이삭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사람이 이렇게 달라진다. 그런 세계로 부른 것이다. 우리를 부를 때, 그런 세계로 부른 것이다. 억지로 하는 세계로 부른 것이 아니다. 이스마엘을 내놓으라고 할 때는 고민이 많았다. 자기의 노력도 들어가 있고 자기의 약속도 들어가 있다. 인간의 체면도 있다. 그것을 무시하려니까 너무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내 보내라. 사라의 말대로 하라. 그래서 나갔다고 한다. 그 말은 그만큼 아브라함이 어려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할 때까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도 그렇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고 고민할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실지 기다려 보자고 한다. 그 말은 지금 내가 싫다는 말이다. 내가 원치 않는 길인데,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내 보내려니까 양심이 괴롭다. 약속했던 것인데 하갈이 시집오겠다고 했는가? 종이라서 오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온 것이다. 최선을 다한 것이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13년을 그냥 캄캄한 곳에서 살았다. 아무 것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100살이 되었을 때,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아들이 왔다. 모리야 산으로 데리고 오라 하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나갔다고 한다. 사람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다. 보통 달라진 것이 아니다. 애착은 이스마엘에게 더 있었을 지도 모른다. 자기 작품인데 더 애착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것은 내놓기가 쉽다. 내가 만든 것은 내놓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억지로 뭘 가지고 가시는 분이 아니다. 억지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 자기가 주신 것을 자기가 가져가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면, 구속이 이루어지면, 창조의 목적(목표)가 이루어진다. 원래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망가진 것이다. 원래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사탄이 와서 방해한 것이다. 이것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회복해야지 다른 방법은 아무리 해도 될 수가 없다. 위치를 바꾸지 않고서는 무엇을 해도 안 된다. 위치가 바꿔져야 한다. 간첩은 자수한 후에 나라를 위하든지 말든지 해야 한다. 자수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능하겠는가? 오늘 이렇게 청년부 때문에 현충일 집회를 하게 되어서 여러분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좋다. 여러분도 좋은지 안 좋은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좋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