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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왕후 [貞聖王后, 1692~1757]
성은 서씨(徐氏)이며 존호(尊號)는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 휘호(徽號)는 단목장화(端穆章和)이다.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692년(숙종18)에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 연잉군(延仍君)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책봉되었고, 1721년(경종 1)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되었다. 1724년 왕세제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며 이때 영조의 나이는 31세, 정성왕후의 나이는 33세였다. 정성왕후는 당쟁으로 인해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소생까지 없었으나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思悼世子:장헌세자)를 매우 아꼈다.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중 병을 얻어 창덕궁 관리각(觀理閣)에서 66세로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고양(高陽)시 용두동 서오릉 능역(陵域)의 홍릉(弘陵)이다 [출처] 정성왕후 [貞聖王后 ] | 네이버 백과사전 |
영조는 양반사회에서 천민의 어머니에서 태어났다는 태생적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강지처인 정성왕후는 항상 웃는
낯으로 시어머니 최무술이와 영조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한다.
그런 부인이 먼저 죽자 영조는 훗날! 원비 정성왕후 옆에 묻고져 묘를 조성 할때
옆자리를 비워두었지만
정조는 신하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 역정까지 부리면서 끝끝내 뜻을 따르지 않고.
(동구릉 그것도 효종의 파묘)에 영조의 릉을 조성하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할아버지가 미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살아서 못한 정분을 죽어서라도 나눌수 있게 정성왕후 옆에 모셔야 옳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성왕후 빈자리를 보면서........겨울눈이 쓸쓸함을 더해준다...
무인석의 웃는 표현이 생전의 정성왕후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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