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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9일 주일메시지 사도행전 제 20 강 (아산 UBF)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
말씀 / 사도행전 21:1-22:29
요절 / 사도행전 21: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라’ 이것은 1994년에 대전에서 주의 종으로부터 받은 방향입니다. 지금도 저의 삶을 통하여 무엇이 드러나야 하는가? 묻는다면 주의 말씀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야 하는 주의 종이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 깊은 영적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는 생활하고 그런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1.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16)
1절을 보십시오.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한 바울 일행은 배로 고스로 가서 로도를 거쳐 바다라로 갔습니다. 밀레도와 고스는 서해에서 남해로 꺾어지는 곳에 위한 항구들입니다. 로도, 바다라는 남쪽 바다에 접한 항구들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바다라에서 바울 일행은 페니키아로 가는 배를 타고 키프로스 섬을 왼쪽에 두고 항해했습니다. 지금의 레바논인 두로 항으로 갔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바울일행은 두로 항에 도착하여 7일 머물렀습니다. 7일 동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온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주의 제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려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는 제발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들과 며칠을 더 보내며 예루살렘의 상황을 충분히 듣고 배에 올랐습니다. 두로에서 만난 제자들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서로 교제하였고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두로에서 다시 배를 타고 페니키아의 가장 남쪽에 있는 둘레마이에 들려 그곳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 더 있다가 유대 북쪽 도시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사마리아를 전도했던 집사 빌립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 집사의 집에 들어가 유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빌립 집사에게 결혼하지 않은 젊은 딸들 네 명 있었는데 모두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젊은 처녀들은 외모에 대하여 관심 갖거나 다른 자매들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패턴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빌립 집사의 네 딸은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빌립 뿐 아니라 빌립의 자녀들도 성령의 예언하는 영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이곳에 여러 날 머물고 있을 때 유대에서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와서 심각한 예고를 하였습니다. 아가보는 사도행전 11:27,28절에서도 예언한 적 있습니다. 큰 흉년이 찾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그의 예언대로 큰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 사람들이 큰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런 아가보가 바울에게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지고 자기 손을 묶고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길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의 예언이 신뢰받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 일행과 빌립 집안사람들 모두 심각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주의 종 바울이 안전하게 좀 더 많은 시간 활동하며 복음 전파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려가며 말렸습니다. 바울 같은 능력 있는 종이 더 많은 시간을 두고 복음을 널리 전한다면 하나님 역사 편에서 유익이라고 누구나 생각합니다. 그가 핍박의 땅 예루살렘으로 가서 체포되고 투옥되는 것은 너무 허무한 희생이 되리라 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가는 길을 눈물로 만류하는 동역자들에게 바울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1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예루살렘의 형제들과 아가보의 예언은 체포되고 감옥에 갇힌다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는 것 뿐 아니라 죽을 것 까지 각오하였다고 자기 입장을 밝힙니다. 이는 사도 바울에게 고난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핍박과 고생은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훈련소에 갓 입소한 훈련병은 내가 어디에 배치될까? 그것만 생각합니다. 대학교 4학년 학생들은 내가 졸업한 후 어디에 취업할 것인가? 이 생각에 밤낮 염려를 반복합니다.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는 우리 아이들이 혹시 다치지 않을까? 걱정과 염려가 마음에 가득합니다. 이런 관심사는 의미 없는 에너지소모를 불러 옵니다.
사도 바울이 불사조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관심사가 ‘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대단히 창조적으로 선교 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어떻게 될까?’ 이런 이슈에 마음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일컬어진 다윗 왕의 관심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그렇게 하였습니다. 다윗 왕과 비교되는 사울 왕은 내 아들이 나를 저버리고 내 딸도 나에게 마음이 없고 나의 신하들도 나를 속인다며 입만 벌리면 ‘나는’, ‘나에게’, ‘나를’, ‘나에게까지’, ‘나한테 어떻게’, ‘나는 어쩌라고’ ‘나, 나, 나’였습니다. 이런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의 관심사는 ‘예수의 이름’ 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나는 고생을 하든, 감옥에 가든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살면 제한이 없어집니다. 자유롭습니다. 무엇을 하든 두려움이 없습니다. 지치지 않고 도전하는 청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이 좀 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5장 25-2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이방교회에서 전하는 구제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교회에서 보낸 구제헌금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구체적인 열매입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성도들은 가난한 성도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헌금하였습니다. 전에는 자기와 가족밖에 몰랐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중요하게 보는 것은 ‘하나 됨’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예루살렘의 유대인 형제들과 새로 개척된 개척지 교회의 이방인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하여 얼마든지 위험을 무릅쓰고자 하였습니다.
2. 예루살렘 도착과 체포(17-36)
17,18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일행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를 만나고 교회 장로들도 만났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동안 이방인들 가운데 이루신 성령의 역사를 보고했습니다. 이방 여러 지역에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고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일들이 아시아와 유럽 각처에서 일어난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20-26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바울에 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율법과 할례를 지키지 말라 하며 다녔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들은 나실인 서약을 한 네 사람의 형제와 함께 정결예식을 행하라고 바울에게 권고했습니다. 바울은 권고대로 행하고, 나실인 서약한 네 사람의 비용을 바울이 감당하였습니다. 나실인 서약한 사람을 대신해서 돈을 대면 그 사람도 함께 경건하다고 인정하는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유대인 형제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양들을 섬기고 살리고자 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양들의 입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9:20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7-36절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하여 체포되는 바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7일 동안 성전에서 결례 기간을 지키던 바울을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발견하고 무리를 충동하여 붙잡고는 성전을 모독 하였다고 고소하였습니다. 성전에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에서 유대인의 뜰로 가는 입구에는 ‘안뜰로 들어오는 이방인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가 붙어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안뜰로 데리고 들어왔다고 하면 유대인들에게 이것이 큰 문제가 됩니다. 이 거짓에 따라 유대인들은 흥분하여 바울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성전 남서쪽에 성전의 소요사태에 대비하여 로마군 100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던 안토니오 요새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의 소란이 로마군에게 알려져 로마군대가 출동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중단시킬 수 있었습니다.
3. 사울을 부르신 예수님(21:37-22:21)
21장 37-40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의 소요사태에 대비하여 주둔하던 로마군대는 즉시 출동하여 바울을 무리들로부터 분리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위급한 순간에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로마군영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천부장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 하는 것을 보고, A.D. 54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반란을 모의했던 애굽인 선동자인가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며 터어키 길리기아 지방 다소 출신임을 밝히고 유대인들에게 말할 기회를 요청하였습니다. 바울은 항상 예수님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관심과 그의 생각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군 천부장은 유대인 무리들을 조용히 시켜 주어 바울이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 자신의 인생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에게 교리적 설교보다 자기에게 임한 예수님의 은혜를 사실에 입각하여 전하였습니다. 22장 1절부터 21절까지는 사도바울의 인생소감입니다. 1절에서 5절까지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어떻게 살았는지 증언하고 6절부터 15절은 바울을 찾아오신 예수님과 바울의 회심을 증언합니다. 16절에서 21절은 그에게 주신 부르심과 사명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다소는 그리스 철학과 문화, 종교에 대한 학문과 전통이 강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수준 높은 학문을 접하며 성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란 후에는 유대에 내려와서 가장 뛰어난 율법 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고 구약성경을 기초로 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학식과 율법 생활이 그에게 구원을 주지 않았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오실 메시야를 증언한 구약성경을 많이 공부하고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때 그가 죽는 것이 맞다 찬성하며 스데반을 죽이러 가는 사람들의 옷을 맡아 지켜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을 체포 하였고 다마스커스에 가서 신자들을 체포하려고 길을 나선 자였습니다. 그는 그릇된 열정으로 구원의 주 예수님과 그 형제들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일을 할 뿐이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에게 하늘로부터 큰 빛이 비추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빛으로 사울을 찾아와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누구십니까?’ 여쭈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예수님께서 밝히셨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징벌을 받아 마땅하고 여겼습니다. 사울이 잡아 가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끌려 다니시고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잡혀 모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행한 대로 징계하시고 벌 주셔야 마땅합니다. 사울은 무지한 열정으로 주 예수님을 훼방했고 이 행실은 심판과 징계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마치 가시가 박힌 채찍을 맨발로 차는 사람과 같이 어리석은 삶을 살며 심판을 스스로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예수님은 용서의 사랑으로 친히 찾아와 주셨습니다. 9-12절을 보십시오. 그는 앞을 보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다마스커스로 갔습니다. 사울은 주님의 말씀대로 다마스커스로 들어가서 아나니아를 만났고, 아나니아는 사울을 보게 하고 그의 회개를 도왔습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주님의 보내신 종 아나니아에게 자기의 과거 행위를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잘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던 문제를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사울은 예수님의 가라하시는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그는 죄 사함을 받아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순종하던 데서 그를 불러내어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이방 땅에 널리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4. 로마로 가고자(22-29)
22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천부장에게 부탁하여 말을 한 것은 유대인들을 향한 목자의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이루신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을 증언하여 유대인들 가운데 믿는 역사가 더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모인 유대인들은 저주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소리 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 받는다는 대목에서 흥분하였습니다. 더 듣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유대인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유대인들은 집착 하였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로마군대가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어이 바울을 죽이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은 요새 안으로 바울을 데리고 들어가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히브리어로 무슨 메시지를 전했길래 유대인들이 저리 흥분하고 소요하는지 심문하도록 했는데 묶어 놓고 채찍질 하며 심문하라 명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채찍질하기 위하여 가죽 줄로 바울을 묶을 때 곁에 있는 백부장에게 바울은 물었습니다.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 로마 시민은 함부로 채찍질 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시민은 죄가 있다하더라도 확정판결을 받기 전에 매 맞거나 십자가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로마시민임을 밝히자 로마 군인들은 놀랐습니다. 26-28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보고받은 천부장은 “네가 로마 사람이냐” 확인하였습니다.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로마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부모가 로마 시민권자인 경우입니다. 둘째는 로마에 크게 기여하고 봉사한 경우입니다. 셋째, 거금을 주고 시민권을 사는 경우입니다. 천부장은 비싼 돈을 주고 로마시민권을 샀지만, 바울은 부모가 모두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VVIP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을 노예와 같이 내놓았습니다. 체포당할 줄 알면서 굳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바울은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불사조와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굳이 들어와서 체포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위험천만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꼭 오고자 한 구체적인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서로 하나 됨을 위하여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전하게 지내다가 다시 여러 지역을 개척하고 많은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도 굳이 예루살렘에 와서 이방교회 형제들이 준비한 헌금을 전하고자 한 것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교회의 열매를 기쁨으로 맛봄으로써 세계선교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나이시고 우리의 구원자께서 하나이신 그리스도 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시대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나라,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뻗어나가는 초기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유대의 형제들이 차별하고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심각한 죄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나라, 많은 지부를 개척하고자 뛰어다니는 것보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의 열매인 이방인 형제들을 영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사람은 하나 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뜻을 실현하려는 사람은 모임을 갈등에 빠지게 하고 분열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런 저런 일을 저지릅니다. 관심이 자기 뜻 실현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꿈을 사랑하고 이루려는 사람도 하나 되는 것에 관심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자기 계획, 예수님보다 자기 가족이 더 중요한 사람은 왜 굳이 하나 되어야 하나요? 반문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체포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을 수도 있다고 각오하며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하나가 되도록 나실인 서약의 비용을 대고 결례에 참여하였으며, 그러다 끝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성과 중심인 사람은 사도 바울이 비효율적으로 활동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교회가 하나 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하나 된 교회 위에 힘 있게 역사하십니다. 에베소서 4:3~6절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렇다고 우리가, 내가 교회를 하나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우리는 하나 됨을 위하여 나를 기꺼이 버리는 것이고, 하나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이름 앞에 자기를 버려 순종하면 하나 됨은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하나 됨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계가 상하관계와 수평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대학 후배는 윗사람과 관계는 좋은데, 친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들은 많은데, 나이든 사람, 자기보다 젊은 사람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 됨을 풀어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하나 되기 원하는데,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봅니다. 관계는 사람과의 문제이니까 사람이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랑하면 관계의 문제는 풀립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은 위험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성과중심인 사람은 무의미하게 체포될 것이며, 선교역사도 지체될 것이라며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앞세우고 이방교회와 예루살렘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고난 받은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간 지 12일 만에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가이사랴에서 2년간 구금됩니다. 사도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을 약 2년으로 봅니다. 이 기간 동안 실루기아, 살라미, 바보,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버가, 앗달리아를 다녔습니다. 2차 선교여행은 3년 정도 걸렸을 것으로 봅니다. 더베, 루스드라, 브루기아, 무시아, 드로아,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에베소를 다녔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더 많은 지역을 개척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 됨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갔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계의 중심, 모든 길이 통하는 로마로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보내십니다. 로마에서 최고 좋은 양들 로마제국의 핵심 인재들인 황실 근위대 엘리트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 됨을 위하여 고난 받는 사도 바울을 더 크게 쓰시고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배우고 우리가 성령의 지혜를 따라 하나 되기를 힘쓰고 예수님의 뜻을 이루려는 목표를 가지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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