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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함
[요한복음 9:1~5]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 예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두고 “누구의 죄로 소경이 되었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고 대답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은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서 자신의 일을 하신다.
나면서 소경된 사람에 대해 조금 더 말씀을 드리겠다. 왜 눈을 뜨게 했는가? 물론 소경이니까 눈을 뜨게 했겠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눈을 뜨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런 특수한 경우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한다고 말하셨지만 사실 우리 모든 사람이 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한다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 인생이 훨씬 더 복되고 풍부하게 될 것이다. 밥 먹고 살려고 한다고 하면 좀 그렇다. 또 다른 목적으로 일한다는 것도 좀 그렇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한다고 하면 이것보다 더 좋은 말이나 목적이 또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하는 일에는 다 의도나 목적이 있는데 무엇이 인생을 복되게 하는가? 다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끝이 안 난다. 얼마만큼 하면 내 일이 다 끝나는가? 내 일을 다 해놓고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평생가도 못한다. 자기 일이 안 끝나기 때문이다. 무덤에 가서도 아직도 다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회 없는 무덤도 없고 한이 없는 무덤도 없고 일 다 하고 죽은 무덤도 없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일은 일이 아닌 것 같다. 자기가 살려고 한 일을 가지고 남이 자기 일한 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참 속 모르는 사람들이다. 알고 보면 자기를 위해서 일해 놓고 남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누가 그것을 알아줄 필요가 있는가.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수고라고도 할 것이 없다. 자기를 위해 한 것이니까. 너무 힘들면 조금 쉬었다가 하면 되니까 수고롭고 힘든 일이 아니다. 많이 먹으려고 하다보니까 힘이 드는 것이지 너무 힘들면 적게 먹으면 된다.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일은 그것은 수고라고도 할 수 없고 또 남이 그것을 알아달라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소가 풀을 뜯어먹으면서 나는 수고하고 있다고 하겠는가? 소는 밥통이 크니까 밖에 내놓으면 하루 종일 먹어야 한다. 코끼리는 하루에 풀을 1톤 이상 먹는다고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먹어야 1톤을 먹겠는가. 동물들은 사는 것이 먹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누가 수고한다고 하겠는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수고한다 하면 누구를 위해서 한다고 하든지 이래야 그것이 수고가 되는 것이지 자기 위해서 하면서 수고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어려움이나 고난을 당한다던가 하는 것은 수고도 아니고 고난도 아니고 핍박도 아니다. 하다보면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생존경쟁의 마당에 가서 살다보면 땅이 좁은 곳에서 서로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땅뺏기 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경쟁할 수밖에 없다. 경쟁하다보면 아무래도 강한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고 약한 사람이 적게 가져가기 마련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려서 우리가 땅뺏기 놀이를 해봐도 공산주의처럼 똑같이 가를 수 없다. 똑같이 땅을 갈라서 가지면 아무 재미도 없다. 서로 좀 많이 뺏고 적게 뺏고 하는 것이 재미가 있다.
인생을 생각해 볼 때 대부분의 모든 일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뭉뚱그리면 다 자기 일이니까 일이 간단해진다. 그것을 복잡하고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다보니까 옆의 사람도 다치고 시기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나오게 된다. 다 자기 일이니까 원망할 일이 없다. 내가 불행에 처해도 원망할 일이 없다. 나도 살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 내가 누구를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옛날에 병이 들어 있어보니까 아무데도 할 말이 없었다. 내 사정을 말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고, 나는 지금 이런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해도 누가 그것을 알아주겠는가. 또 알아준다고 한들 무엇 하겠는가. 병이라도 낫겠는가? 그래서 나는 아무에게도 말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어떤 불행이나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누구보고 나 참 어렵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해보았다. 또 해봐야 아무 소용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연(失戀)을 당하고도 나는 남보고 나 실연당했다고 한 마디도 안 해보았다. 나 좋아서 연애하다가 실연당했는데 누구한테 뭐라고 하겠는가. 말하면 나만 더 이상한 사람이 된다. 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고 다 자기가 살려고 하다가 다치기도 하는 것인데 그것을 누구한테 말하겠는가? 아무한테도 말할 것이 없다.
우리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고 한다는 것처럼 복된 것이 없다. 누구의 죄로 이렇게 된 것이냐? 누구의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것이냐? 이런 것을 알았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하니까 다른 판이 생기게 되었고 다른 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우리 인생도 그럴 필요가 있다. 누구 죄로 그랬느냐, 네 잘못이냐 내 잘못이냐는 이런 판에서만 할 것이 아니고 다른 판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는 그 판으로 옮겨보면 내 인생이 단순해지고 간단해진다.
나는 평생을 살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일 수 있다. 왜냐하면 평생 나를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엇다. 이렇게 되면 죽을 때가 되면 누가 뺏어간 것처럼 누가 못하게 해서 안 한 것처럼 허망하고 억울하다. 누구를 위해서 살았으면 뭔가 남았을 것인데 자기만 위해서 살았으니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 인생이 허무해지게 된다. 우리가 인생을 허무하게 살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겠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보내신 이의 일을 하려면 뭐가 필요한가? 빛이 필요하다. 내 일을 하는 데는 빛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빛이기 때문이다. 내 일을 할 때는 외부의 빛이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내가 생각해서 내 머릿속에 빛이 있기 때문에 그 빛으로 한다. 그런데 보내신 이의 일을 하려면 어떤 빛이 필요하다. 심지어는 내가 남을 위해서 무엇을 하려고 해도 내 속에 있는 빛이 아니고 다른 빛이 필요하다. 남을 위해서 사는 세계의 그런 영광의 빛이 보여야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장학재단에 평생을 김밥장사해서 모은 돈을 희사(喜捨)했다면 그것은 자기 빛으로는 하지 못한다. 장학재단에 기금을 넣는 것이 영광스럽게 빛나는 빛을 봤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다른 빛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기 빛만 가지고는 절대로 좋은 일을 할 수 없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빛을 보고 하는 것이다. 평생 그런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지 않는다. 자기 집에 돈이 썩어 자빠져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본 사람은 한다.
우리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히는데 그것은 책속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너도 뭘 하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보고 너도 애국충정을 가지라는 이런 얘기다. 이런 것은 빛이다.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순신 장군이 빛이다. 그 빛으로 보면 나라를 지키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것이 없으니까 하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라는 사람을 놓고 내가 국가에 충성하려고 생각해보면 이순신 장군이 국가에 충성하는 빛이 된다. 우리는 그 빛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일을 하려면 그 빛이 필요하다. 애국을 하려면 애국자의 빛이 필요하고, 사업가가 되려면 사업가의 빛이 필요하다. 왜 사업가가 되려고 하는가? 사업가의 영광이 보이니까 하는 것이다. 멋있다거나 사업가하면 좋겠다는 이런 빛이 보이니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사업은 참 어렵다. 잘못하면 부도나고 부도나면 묶여가고 그렇게 되면 참 비참하고 다 잘되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알아도 빛을 봤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빛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의 일은 빛이 있을 때 해야 하는데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지금은 낮이다. 내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내가 세상의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를 봐야 빛이 보인다. 예수라는 빛을 통해서 보면 이게 보내신 이의 일이구나! 보내신 이의 일은 이렇게 영광스러운 것이구나! 이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연구하고 참선해서 도를 통했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사람의 빛을 보면 그런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보내신 이의 빛을 보면 보내신 이의 일을 하게 된다. 나는 내 일을 하지 않고 보내신 이의 일을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보내신 이의 일을 하려면 보내신 이의 빛이 있어야 한다.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그것을 보고 나도 그렇게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만일 부활하지 못했다면 누구도 예수를 따라가지 않았을 것인데 부활하신 것을 보고서야 다시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왜냐하면 거기서 십자가에서 죽은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 자신을 드린 제물의 빛을 보았다. 그 빛을 보고서야 사람들이 따라 간 것이다. 빛을 보지 못하면 따라가지 못한다.
베드로 같은 사람이 예수를 얼마나 사랑했겠는가. 그래도 그 빛이 보이지 않으니까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내가 세상에 빛이다. 이렇게 말씀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과 그의 일에 대하여 소경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여기서 뭔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하나님의 일은 소경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개안수술을 한다는 내용이 아니고 소경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이다.
*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은 아무 것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아담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본 일이 없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귀한 임명을 받고 하나님의 동산에 있었으나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그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일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나면서 소경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아무 것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빨간지 파란지 아무 것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아담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본 일이 없다. 아예 처음부터 전혀 본 일이 없다.
동산에 있었다가 나왔다. 동산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다. 동산은 봤는데 하나님 나라는 본 일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산에서 살아보았기 때문에 좋은 것에 대한 어떤 그리움은 남아 있다. 옛날 고향이 참 좋았다는 이런 기억이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떤 좋은 것이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나라는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는 아예 인류 가운데 누구도 본 일이 없다.
아담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본 일이 없는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본 일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뭔가 좋은 것이 있어서 만들려고 하면 엉망이 되게 된다.
사실 공산주의도 그런 지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시작했는데, 본 일이 없는 것을 만들려고 하니까 되겠냐는 것이다. 사람 생각 속에서 이것이 가장 좋은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해 낸 것이 공산주의다. 공산주의는 가장 계획적인 나라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시작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지금 자본주의 같은 것은 살아오다 보니까 이렇게까지 흘러 온 것이지 일부러 계획을 해서 만든 나라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아예 처음부터 딱 만들어서 나왔고, 그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실현하려고 한 나라이다. 공산주의는 모델하우스를 먼저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델 하우스를 가지고 실제로 집을 지으려고 했던 것인데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 자기 자신의 표현이 되니까 그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공산주의 국가는 역사 가운데서 가장 악랄한 국가가 되었다. 가장 좋은 정부, 가장 적은 정부를 만들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 때 ‘적은 정부’라는 말을 했다. 이것은 정부의 권력이 적을수록 국민이 살기 편하다. 정부권력이 많을수록 사람이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권력이 적을수록 그 나라 국민들은 편하다는 논리가 된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아예 정부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무정부주의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가 없어도 되는 나라, 집단농장에서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누구의 간섭도 없고 총칼도 없는 이런 나라를 꿈꿔왔다. 그런데 해 보니까 안 되고 정반대의 나라가 되었다. 채찍이 아니면 다스려지지 않고 무력이 아니면 인간을 통제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점점 더 강화되어서 지구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정부를 만들어냈다. 정말로 좋은 것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인데 이것은 아주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항상 좋은 것을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누구는 실패했지만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은 실패했지만 김정일은 할 수 있다. 김정일은 실패했지만 김정은은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담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를 아예 본 일이 없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빨갛다느니 파랗다느니 하면 말만 들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빨간 것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와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장님들은 잔치 집에 가 봤더니 참 잘 차렸더라는 말은 한다. 먹어 봤기 때문에 먹은 맛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차려 놓은 모양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먹어 본 맛을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어쩌면 실제적이긴 하다. 우리가 잘 먹으면 모양보고 잘 먹었다고 하는가? 맛있게 먹었으면 잘 먹었다고 한다. 장님들이 그 집 가 봤더니 정말 잘 차려 놓았더라고 한다. 차려 놓긴 뭘 차려 놓았는가? 자기가 먹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본 일이 없다. 사람은 본 일이 없으면 개념이 없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처음에는 고귀한 임명을 받았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이러이러하게 하자. 이것은 임명(위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잠시 동안 하나님 동산에 있었던 것인데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않고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으니까 당연히 하나님 나라는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미국이 있는 것처럼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일을 해서 나오는 나라다.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니고 일을 함으로써 나타난 결과다. 그러므로 일을 안 하면 나올 수 없다. 일을 안 하는 데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나오겠는가?
일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 눈에 안 보이는 사람은 못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유토피아를 생각했지만 그들은 유토피아를 본 일이 없다. 정말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본 일이 없다. 마음속에서만 그렇게 생각했다. 대구교회라도 와 봤더라면 그 사람들은 참 편안하게 살더라. 평화롭게 살더라. 그렇게 평화롭게 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어떻게 만들어야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이것은 무력으로 되는 나라는 아니구나. 이렇게 알았을 것이지만 전혀 본 일이 없었다. 본 일이 없었지만 정말로 유토피아를 그리고 싶어서 방법을 찾으니까 결국은 총칼이 나오고 말았다.
공산주의도 총칼만 아니라면 괜찮을 수도 있다. 나눠먹고 살자는 데 나쁠 것이 뭐가 어디 있겠는가? 그냥 총칼이 없이 평화롭게 콩 하나를 가지고서도 둘이 서로 나눠먹을 수만 있다면, 빵 한 조각을 가지고서도 세 명이서 공평하게 나눠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나라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무력이 없이는 그것이 안 된다.
일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일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고, 전혀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눈에 보이면 가져 갈 것인데 쓰레기가 있어도 전혀 안 보이니까 안 가지고 가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보면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꼭 위에서 시켜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면 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집에 자매들이 여러 명 같이 살았는데 설거지를 누가 하는가 하면 설거지가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한다. 안 보이는 사람은 아예 자기가 먹은 것도 안 씻고 그냥 가 버린다. 나는 그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하기를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씻어 놓고 가지, 자기 것이라도 씻어 놓고 가면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자기 것도 그냥 두고 가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일이 안 보일까? 저렇게 일이 눈에 안 보일 수가 있나? 그런 생각을 했다. 말을 해서 하려면 억지로 하게 된다. 설거지 하라고 해서 하면 억지로 하게 되어서 재미가 없고 자기가 스스로 하면 보는 사람도 재미있고 자기도 재미있고 그렇다.
교회에서도 일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하는 법이다. 나는 지금까지 시키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할 때까지 기다려 왔다. 그래서 요즘에는 열심히 잘 한다. 그 동안 많이 봐서 눈에 보이는 모양이다. 보이니까 잘 한다. 일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한다.
만들어진 만물은 만들어진 눈으로 다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다.(마6:10) 그래서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1:18) 하였으며, 바울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고전 2:9참) 하였다. 모두가 소경이라는 것이다.
만들어진 모든 물건들이나 만물들은 우리가 다 눈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는 왜 안 보일까? 다른 것은 다 보이는 데 왜 안 보일까? 비근한 예를 들어서 아까 쓰레기가 보이는 사람이 있고, 안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데려다가 빳따(배트)를 한 번 때려 버리면 보인다. 쓰레기가 안 보인다고 하면 엎어 놓고 한 번 쳐 버리면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엎어놓고 쳐도 안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에게 임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임한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지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다. 우리가 창조를 말할 때는 모든 것이 다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만들어진 것이므로 우리가 눈을 뜨면 다 보이는 것이다. 눈도 만들어졌으니까 만들어진 것끼리 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임한다.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에게 임하는 나라다. 그 열매를 안 먹은 사람에게는 안 오는 것이니까 옆에 사람은 왔다는데 자기에게는 안 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하는데 옆에서는 뭐가 왔느냐고 하는 것이다. 안 먹었으니까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그랬다. 또 바울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며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창조된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임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임하지 않으면 못 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모두가 소경이다. 아담은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소경이고, 어떤 사람도 못 봤기 때문에 다 소경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새로운 빛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새로운 빛 안에서 소경이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일단 빛이 있어야 뭐가 시작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있었다하고 나서 진행이 된다. 마찬가지로 빛이 있고 눈이 있어야 뭘 볼 게 아니겠는가? 또 봐야 뭘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첫 번째 일은 사람의 눈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소경은 누구인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소경이다. 선악과를 먹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다 소경이다. 선악과를 먹었다고 해서 뭘 모르는 것은 아니라 세상만사 다 안다. 달나라가 저렇게 먼데 거기에 뭐가 있는지 사람이 알아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것은 귀신도 못할 일인데 사람이 해냈다. 그렇게 사람이 머리가 좋은데 하나님의 일만은 안 보인다.
이것은 임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연구해 봐도 안 되고, 기계를 가지고 봐도 안 된다. 소련의 우주인 가가린이 맨 처음 우주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내가 우주를 다 돌아 봤는데 하나님이 없더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눈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나님의 일은 소경이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인가?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장님에게 뭐니 뭐니 해도 눈 뜬 것만 하겠는가? 어떤 장님에게 너 눈뜨고 살래, 아니면 눈을 감고 삼성그룹 회장이 될래? 그러면 뭘 택하겠는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만큼 눈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눈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90%라든가 95%라든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의 에너지도 눈에서 가장 많이 소모된다고 하니 모든 정력이 전부 눈으로 쏟아져 나간다.
보는 것! 이것이 첫째 일이다. 보려면 빛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사람을 보내시는 분이다. 대통령은 국방을 위해 장군을 임명하고 그를 일하는 곳으로 보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위임하고 세상으로 보내신다.(마28:18,19참)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보낸다.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보낸다. 대통령이 직접 총칼을 들고 일선에 서 있지 않고 국방을 위해서 장군을 임명하고 사단장을 임명하고 대대장을 임명해서 일할 자리로 보낸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사람을 하나님이 일할 데로 보내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고 부르셨다. 아담은 이런 고귀한 위임을 받았다. 왜냐하면 일국의 나라를 지키는 국방장관도 중요하고 참모총장도 중요하고 육군대장도 중요하다.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면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인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를 위임받았으니까 얼마나 고귀한 위임인가! 이 직분보다 더 큰 직분이 없다.
지금 나라가 평안하니까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항상 살고 있으니까 잘 모르는데 적이 침입해온다든가 전쟁이 난다든가 하면 그때 정신이 든다. 요즘에는 이해 못할 일이 정말 많다. 이것은 내가 잘못된 것인지 세상이 잘못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군사기지를 건설하는데 반대한다고 하는데 나라가 얼마나 평안하면 군사기지를 건설하는데 반대할까? 그것은 찬성반대를 물어볼 일이 아니다. 우리의 생사가 걸린 일이고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일인데 그것을 물어보거나 주민투표를 해보고 안 해보고 이런 문제가 아니다.
전시(戰時)면 내 것, 네 것이 없이 무조건 군대가 주둔을 해야 되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학교고 뭐고 소용이 없고 다 징발되는 것이다. 내 것, 네 것이 없다. 네 소유권, 내소유권이 없다. 지금 원체 편안하니까 그런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좋은 시대라는 생각이 들고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들이 정말 골이 비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 같아서는 이런 것은 법으로 정해 놓았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의 생명이 걸려 있는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문제는 특별한 법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을 가지고 데모를 한다든지 싸우는 것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 같은 상황에서 도저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외국의 유명한 학자라는 촘스키가 제주 평화의 섬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써놓았다. 그 녀석은 미국 사람인데 왜 하와이에 미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하와이가 얼마나 아름다운 섬인가. 그 섬에 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있는데 왜 그것은 반대하지 않고 남의 나라 제주도에 군사기지를 세우는 것은 반대하는지 골 빈 놈들이다. 자기네 나라도 아니면서 자기들이 우리나라에 전쟁이 나면 대신 싸워주겠는가? 어림도 없다.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모른다. 나도 소리 한번 ‘와~’ 하고 지르니까 빵하고 죽이는 것을 보았다. 법도 무엇도 아무것도 필요 없다. 전쟁이 일어나면 인간이 인간이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인간취급 자체가 없고 인권이고 뭐고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아무 죄가 없는 사람도 그 순간에 잘못해버리면 죽여 버리는 것을 내가 어렸을 때 직접 봤다. 바로 이 사람을 책임질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고 묻더니 바로 쏴 죽였다. 그 사람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게 비참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데모를 하니 안하니 할 일이 아니다.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평상시에는 잘 모른다. 편안하니까 잘 모른다. 그냥 이렇게 살면 다 편안하고 좋은 것이니까. 그렇지만 항상 우리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그것을 대비하고 있어야한다. 언제 온다하고 오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이 나라를 못 지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아담은 위임을 받았으나 생명의 열매(양식)를 먹지 않아서 보내심을 받지 못했다. 하나님을 대신하려면 그분과의 생명관계가 필요하다. 물고기를 대신하려면 물고기 생명이 있어야 한다.
아담은 위임을 받았지만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보내심을 받지 못했다. 문제는 장군은 장군인데 파송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육군본부에 앉혀놓고 책상도 주지 않고 별만 달고 있는 경우와 똑같은 것이다.
요즘 회사에 가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한다. 직책은 있는데 가면 책상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가서 그냥 놀라는 것이다. 나 같으면 억지로 나가라고는 못하니까 매일 놀면 좋겠던데 그것을 못 견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일하고 있는데 자기는 가서 책상도 없이 왔다 갔다 하고 커피 한잔 마시고 담배 한대 피우고 이것을 하루 종일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니까 파송을 받아야 한다. 너 이 책상에 앉아서 무엇을 해라. 이래야 되는 것이다. 회사에 취직해서 일 없다고 좋아하면 안 된다. 일 없으면 나가라는 뜻이다. 나에게 일이 많이 맡겨져야 오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일이 많이 안 맡겨지니까 참 편하고 좋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은 멀지 않아 나가야 한다.
아담은 위임은 받았지만 보내심을 받지 못했다. 임지(任地)가 없어서 어디로 갈 데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원천적으로 근원적으로 자기 일을 하도록 위임을 했지만 그분과의 생명관계(生命關係)가 없으면 그분의 일을 할 수가 없다. 보내심을 받으려면 생명관계가 있어야 한다.
나라에서는 법을 정해서 만일 국법을 어긴다든지 대통령이나 왕의 명령을 어기면 역적이다. 왜냐하면 만일에 그 명령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라가 망할 것 아니겠는가. 장군이라는 굉장한 직책을 주고 군대를 주었는데 그 사람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문민(文民)시대에는 무관(武官)의 힘은 굉장히 크지만 그 무관을 문관(文官)이 장악을 하고 있다.
우리가 6.25전쟁 때도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맥아더 생각으로는 한국전은 만주를 폭격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트루먼대통령은 폭격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고 한국전쟁을 역전시킨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고시켰다. 트루먼의 말 한마디에 그 엄청난 장군이 그냥 옷을 벗어야 한다. 왜 그런가? 너무나 중요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일 그 사람이 말을 듣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 아니겠는가. 태평양 함대를 장악하고 있고 극동의 사령관인 사람이 만일 NO해서 맘대로 해버리면 미국에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놓았다. 그래서 억울하게 우리가 통일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때 맥아더에게 맡겼다면 희생은 물론 있었겠지만 통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미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관계가 필요하다. 중요한 일일수록 더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 어지간한 일은 조금 잘못되어도 괜찮으니까 남에게 시켜도 되는데 중요한 일일수록, 절체절명의 이런 문제일수록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똑같은 마음을 가지려면 생명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한 것이다. 생명나무 열매는 지식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생명관계다. 보내심을 받으려면 생명의 관계가 필요하다.
왜 누구는 보내고 누구는 보내지 않느냐? 그것은 생명관계가 강하고 약하고 그 차이이다. 왕이 누구는 파송하고 누구는 파송하지 않느냐? 그것은 자기와의 친분의 관계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자기 자신의 일을 위임을 하려고 하면 자신과의 생명의 관계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니까 생명관계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하나님에게 복종할 수가 없고, 본성이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어두워져 있으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다. 또한 빛은 사물을 보게 하고 구별하게 한다. 붉은 빛은 붉게 보이게 하고, 파란 빛은 파랗게 보이게 한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하나님에게 복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복종을 못하는 것이다. 본성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 어두워 있다. 다 어두워 있다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한다. 뭐가 어두워져 있는가? 달나라에 가는 그 머리가 어두워 있는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기 때문에 가장 잘 생각해야 공산주의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적 국가, 그것은 공산주의 국가이다. 본성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 어둡다. 길이 틀리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물속에 사는 고기와 공중에 나는 새는 전혀 길이 다르다. 물속에 사는 고기는 아무리 지혜로운 고기라고 하더라도 공중의 사정에 어둡고 공중에 나는 새는 아무리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물 속 사정에 대해서는 어둡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어둡고, 하나님에게 복종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일을 못한다. 하루 종일 일하면 좋겠지만 일하는 사람을 보면 어두워지면 못하니까 가버린다. 영국의 북쪽에는 백야현상이 있어서 저녁 열시나 열한시까지 아주 대낮은 아니지만 일할 수 있을 만큼 훤하다. 일하고 싶은 사람은 직장에 갔다 와서 자기 집의 일을 또 그대로 할 수 있다. 빛만 있으면 사람은 일하지만 빛이 없으면 아무리해도 일을 못한다.
빛이 있어야 일할 수 있다. 또 빛은 사물을 보게 하고 구별하게 한다. 그래서 붉게 보이게도 하고 파랗게 보이게도 한다. 어떤 빛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파랗게 보이기도 하고 빨갛게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같은 일이라도 어떤 빛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저렇게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의견이 틀리다. 그 빛이 틀려서 그렇다. 파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파랗게 보이고 갈색을 쓰고 있으면 갈색으로 보인다.
연한 갈색을 넣어서 선글라스로 써보니까 장미꽃 같은 것은 색깔이 너무너무 선명하다. 눈으로 그냥 보는 것과 너무나 다르게 훨씬 더 진하다. 그것만 쓰고 다니는 사람은 장미꽃 색깔이 항상 그런 줄 알 것이다. 빛이라는 것은 단지 보게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구별해내기 때문에 어떤 빛을 보느냐에 따라서 어떤 일을 하게 된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순신장군의 빛을 보느냐 아니면 원균의 빛을 보느냐에 따라서 일이 달라진다. 원균의 빛을 가지고 본 사람은 원균의 일을 하게 되고 이순신장군의 눈을 가지고 보게 되면 이순신 같은 일을 하게 된다. 그래서 빛이 그렇게 중요하다.
* 선악과를 먹은 지식의 빛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끝이 났다. 해가 어두워졌다고 했다. 옛 빛이 어두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전에 본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생래적인 빛이 있고, 지식으로 가는 지식의 빛이 있고, 생명의 빛이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생명의 빛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우리의 대표자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보고 따랐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기의 주님을 버려둔 채 심판의 법정을 빠져 나왔던 것이다. 베드로가 소경이었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다 소경이었던 것이다. 안다고 했고 믿는다고 했으나 소경이었다. 물 위로 걸어간 것, 변화산에서 본 것들은 모두 다 십자가에서 끝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베드로는 무식한 사람이지만 우리 인간의 대표자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따랐던 사람이다. 영화배우가 나를 대표하니까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것이다. 탤런트가 우리를 대표하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고 좋아하는 것이다. 대리만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별것 아닌 사람 같지만 우리 모든 인간성을 대표하고 있다. 우리 속에 있던 것을 그대로 다 표현해 낸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랐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러면 우리도 결국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까지 따르고 그렇게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버리고 갔다는 말은 우리도 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그래도 나는 안 그래! 이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베드로는 비겁했어! 그럴 일이 아니다. 베드로가 비겁했으면 우리도 비겁하고 베드로가 부인하면 우리도 부인하고 전혀 다르지 않고 똑 같다. 그러니까 성경에 써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뭣 하러 써놓았겠는가. 자기 혼자 그런 사람 같으면 우리가 뭣 때문에 베드로를 얘기하겠는가.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소경이었다. 우리도 그와 함께 다 소경이었다. 베드로가 소경일 때 우리도 다 소경이었다. 우리는 옛날에 안다고 했고 믿는다고 했지만 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소경이었다. 믿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했지만 하나님 나라를 본 일은 없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믿음은 좋은데 하나님 나라를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간절히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기도를 해서 보려고 한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기도를 하다가 보면 뭔가 보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보이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인 줄로 할지만 그것은 기도하다가 본 것일 뿐이지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기도하다가 보는 하나님 나라 같으면 모든 인류가 다 기도하고만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이 아니다. 기도하다가 본 것은 자기의 환상일 뿐이지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믿는다고 했지만 다 소경이었다는 것이다.
물 위로 걸어가는 것도 봤고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도 봤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는 것도 봤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봤다. 우리도 그 시대에 있었으면 봤을 것이다. 베드로가 봤는데 우리가 못 봤겠나. 우리도 봤을 것이다. 베드로가 놀랬으면 우리도 놀랐을 것이고 베드로가 고백을 했으면 우리도 고백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봤다고 했던 모든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니까 다 끝나버렸다. 뭘 봤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니고 보기는 봤는데 다 없어져 버렸다. 아무 것도 없어졌다.
* 그러나 삼일 후에 다른 눈이 열린 것이다. 죽고 장사된 후에야 눈이 열렸다. 죽은 자가 살아남으로 빛이 온 것이다. 정오 열두 시가 된 것이다. 새 빛이 왔다. 보이던 것들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던 것들은 보이게 된 것이다. 선악과의 빛은 사라졌고 생명나무 열매의 빛이 정오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삼일 후에 다른 눈이 열렸다. 죽고 다시 부활한 후에 제자들의 눈이 열렸다. 죽은 자가 살아나므로 다른 빛이 온 것이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는 캄캄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오 열두시처럼 무슨 새로운 빛이 온 것이다. 정오가 되면 위에서 빛이 비치기 때문에 그늘이 제일 적고 전부 다 보인다. 새 빛이 오고 보니까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던 것들은 보게 되었다. 다른 빛이 오니까 그런 것이다.
이전까지는 선악과의 빛으로 봤다면 지금은 생명나무의 열매의 빛으로 본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봤을 때 우리는 선악과의 빛으로 봤다. 왜냐하면 의로운 사람이 저렇게 죽겠냐는 것이다. 구약 4000년의 역사 속에서 계속 다지고 다져온 사상이 있다. 그 사상은 의로운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굳어져 있고 지금 우리도 그렇다. 그러나 허망하게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 지식의 빛으로는 도저히 저 사람이 왜 죽었는지 해석할 수가 없다. 이 지식의 빛이 그때 허물어졌다. 아무것도 모른다. 이렇게 됐다. 자기 스스로 모른다 할 수도 없고 안다 할 수도 없고 이렇게 돼 버렸다.
생명나무의 빛이 정오처럼 떠오르게 됐다. 무엇인가 새로운 빛이 와서 다른 것이 보이게 되었다. 우리도 교회 안에 와서 이렇게 저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세계가 보이게 된다. 다른 빛이 오게 되니까 지금까지 보인 것이 다 없어지게 되고 지금까지 가치 있었던 것이 아무 가치가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여기에 빨갛게 조명을 해 놓고 빨간 빛이 비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술 취한 사람들처럼 빨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파란 빛이 확 비치게 되면 다들 병든 사람들처럼 보일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빛이 사라지고 나면 다른 빛이 온다.
그때 베드로는 다시 공회 앞에서와 군중 앞에 서서 내가 밝히 보았다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받은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셨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공회 앞에서 ‘공회’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 최고 기관 같은 것으로써 요즘 같으면 총회라고 한다. 그리고 군중 앞에 서서 내가 밝히 보았다고 간증하고 소리쳤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이 밝아진 것이다. 그 눈을 받은 것이다. 베드로는 미친 사람처럼 된 것이다. 전혀 모르겠다고 한 사람이 갑자기 며칠 사이에 변해서 내가 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가 됐으니 미친 사람처럼 된 것이다. 이것이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우리가 옆에 있다가 봤으면 정말 저 사람 미쳤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셨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이다. 소경이었던 베드로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이다.
* 예수는 하나님과 그의 일을 보게 하는 빛이시다. 십자가에서는 옛 빛을 사라지게 하시고, 부활로는 새 빛을 가져오셨다. 본다고 하는 사람들은 심판하시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게 하신 것이다.(요9:39)
예수는 하나님과 그의 일을 보게 하는 빛이시다. 나는 세상에 있을 동안 세상의 빛이다. 내가 있을 동안에 일해라. 이 말은 빛이 있을 동안 일하라는 말이다. 십자가에서는 옛 빛이 사라졌다. 옛 빛을 다 사라지게 해 버렸다.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통해서 옛날에 우리가 안다는 것, 모른다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을 다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은 죽으면 다 끝이다.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인간은 물위를 걸어가도 죽는 것이고, 바람을 잔잔케 해도 죽는 것이고, 별 것을 다 해도 죽는 것이다. 이렇게 전부 원인 무효시켜 버렸다. 그리고 부활로 새 빛 다른 빛을 가져 온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하면 저 사람이 죽겠는가? 하나님이 인정한다면 그냥 두겠는가? 그렇게 했을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길래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있는데도 왜 하나님은 대답이 없는가? 이렇게 했을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옛날에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과 사상과 빛이 싹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대답할 것이다. 대답해야 된다. 안 하면 하나님도 아니다. 이렇게 한 것인데 하나님은 대답이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부활로 새 빛이 왔다. 다른 빛이 온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정했구나! 그때는 하나님이 전혀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진짜 인정했구나. 이렇게 바꿔진 것이다. 원균이 충신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뒤에 암행어사가 왔는데 보니까 이순신이 충신이구나. 이렇게 바꿔졌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생각이 확 바꿔지지 않겠는가? 꼭 그와 같은 것 같다.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말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했느냐 안 했느냐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누구를 인정했느냐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식이 바꿔지게 된다.
우리가 늘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알게 하려고 말씀하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인가? 하나님이 누구를 인정했는가? 이것을 알려는 것이다. 누구를 인정했는가? 하나님은 예수를 인정했다. 우리가 예수를 인정했다는 것만 알면, 사자를 인정한 것이 아니고 어린양을 인정했다는 것을 알면 우리 인생이 바꿔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 종교다. 가인과 아벨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갔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옳은지 그른지 인정을 받으려고 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가인을 인정을 받지 못해 결국 아벨을 죽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궁극적으로 누가 나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 봐도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사는 것 같으면 문제가 별로 없는데 누가 옆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다 나를 인정하면 문제가 안 되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헷갈리는 것이고, 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면 비참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다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만이라도 인정한다면 살겠는데 하나님만이라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온 천하가 다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인정할 것이다. 이랬던 마지막 자리에서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봤으니 얼마나 절망이 되겠는가? 저렇게 살아봐도 헛일이구나! 예수 따라 가도 헛일이구나! 내가 괜히 미친 짓했지. 고기나 잡고 있을 것이지 뭐 해보겠다고 겁쭉대고 다녔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정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인정 한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것이 믿음이다. 병이 나을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신념이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이 인정했다. 내가 인정하지 못했던 사람을 하나님이 인정했다. 이것을 내가 믿는 것이다.
가치관이 바뀌고 눈이 바꿔지니까 본다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되고 보지 못한 사람은 보게 된다. 선글라스가 바꿔진 것이다. 우리 인생도 간단하다. 세상을 잘 못 바꾸겠고 시각을 잘 못 바꾸겠으면 안경을 바꿔 쓰면 그냥 바꿔진다. 사람들 얼굴이 우중충하고 보기 싫으면 빨간 안경 하나 쓰고 다니기 바란다. 이 사람 봐도 좋게 보이고 저 사람 봐도 좋게 보이고 다 좋게 보인다. 안경만 바꿔 쓰면 제일 쉬운 일이다. 눈은 안 바꾸고 괜히 까맣다거나 파랗다고 한다.
아담 안에서 소경 되었던 나는 하나님의 일을 분별할 수 없어서 이것저것 남들이 하는 대로 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눈이 열리자 하나님의 일이 새롭게 보였다. 이제 하나님의 일이 보인다.
아담 안에서 소경된 나는 하나님의 일을 분별 할 수 없어서 이것저것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보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렇게 하면 되는가, 저렇게 하면 되는가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사람이 많다. 지금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많은데 뭐가 하나님 나라인지 분별이 안 된다.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인지 혼에 속한 것인지 한 번도 생각도 안 해봤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했던 일이 혼에 속한 일이네, 이런 생각이 처음 들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나는 이것이 내 생각인지 하나님의 생각인지 생각을 안 해 보았다.
소경들도 소경끼리만 산다면 소경들 하는 대로 산다. 맹아학교에서는 휴식시간에 눈에 안 보이니까 다 각자 자기대로 떠들고 한다. 그 속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새로운 눈이 열리니까 하나님의 일이 새롭게 보인다. 아! 그게 하나님일이 아니고 이게 하나님일이구나! 하나님의 일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이 나를 왜 불렀던가? 그것도 생각 못했다. 나는 그냥 목회자가 되게 하기 위해 불렀다고만 생각했지 왜 불렀는지 생각을 못했다. 나는 목회자 되게 하기위해 불렀던 것이 아니고 나를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불렀다는 것이 알아졌다. 내가 만일 교단에 있지 않았으면 나는 그런 일을 당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누구와 싸우고 할 성질도 아니고 싸울 힘도 없으니 싸울 일이 생기면 피하고 그렇지 내가 누구와 싸우고 대결할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4년 동안 갑자기 싸움쟁이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눈이 열리니까 그것이 하나님일이 아니구나! 이렇게 알아졌다. 그때는 그것이 하나님 일, 정의를 위한 일, 의로운 일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 저들의 마음을 돌이켜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하면 저쪽도 그렇게 기도한다. 그때 비로소 인간들이 하는 기도가 하나님을 대단히 괴롭게 하겠구나! 쌍방이 똑같이 기도하고 있으니까. 교회에서 싸움나면 양쪽이 서로 기도한다. 하나님이 둘이니까 그렇지 혼자라면 견디겠는가? 각자 자기 하나님 따로 있는 것이다.
하나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일이 안 보이고 무엇이 하나님일인지 잘 모른다.
예수의 죽음이 깊이 들어올수록 그의 일은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예수의 죽음이 깊이 들어 갈수록 그의 일이 더 분명하게 보인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생생한 자기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일이 안 보인다. 내가 십자가에 죽음 앞에 깊이 갈 때, 그때 하나님의 일이 보인다. 사람도 세상에 잘 나갈 때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사람이 딱 죽음이 임박해지면 사람의 마음이 달라진다. 저 논에 물꼬 누구와 어떻게 하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죽는구나. 내가 지금 죽어가는구나. 이렇게 알면 그런 쓸데없는 소리 안한다. 지금까지 하던 모든 일이 다 쓸데없는 짓이었구나. 다 소용없는 짓이었구나. 왜 내가 누구하고 싸웠던가? 왜 내가 며느리하고 싸웠던가? 왜 시어머니하고 싸웠던가? 이런 것만 생각난다. 내가 죽은 후에도 기어코 원수를 갚아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 사라져버린다. 죽음이 깊어갈수록 이 사람의 사람은 더 진실해진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더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일이 더 분명해진다. 그러면 다른 것은 다 소용없어지고 딱 한 가지만 필요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빛이 있을 때 일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은 이 일을 위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요9:5) 우리 주님은 선악과로 인하여 보내신 이와의 관계가 어두워진 사람들에 대하여 그 관계를 회복하는 생명의 빛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빛이 있을 때 일하라고 하셨다. 빛이 있을 때 지금 낮이니까 지금 일해라. 어디 빛이 있는가? 내가 빛이다. 내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 내가 세상의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악과로 인하여 보내신 이와 관계가 어두워진 사람들, 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어두워졌냐? 선악과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어두워졌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생명의 빛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일이 보인다. 이것을 회복하는 빛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요1:4) 무슨 빛인가? 선악과로 인해서 관계가 어두워져 버린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관계를 회복하는 빛이다. 이 말이다.
우리가 세균이 있어도 현미경 없으면 못 본다. 세균이 아무리 우글우글해도 현미경을 가지고 봐야지 없으면 못 본다. 또 어떤 균은 현미경으로 봐도 안 보이는 균이 있는데 그 균은 도말염색을 해야 비로소 세균이 보인다고 한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이것을 회복하는 빛이다. 그 말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지만 예수-빛이 없는 것이 문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지만 문제는 예수 빛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빛은 많은데 이 빛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산 이 사람의 빛이 없다. 나라를 위해서 일하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이순신장군의 빛이 없다는 그것이 문제다. 지금 선거철 돌아오니까 다 애국자인데 이순신장군의 빛이 없다. 하나님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 빛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겠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요6:28) 하나님의 일은 그 빛으로 오신 이를 영접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으로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 하겠냐?고 어떤 사람이 질문하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일이다. 이렇게 말씀 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그 빛으로 오신 이를 영접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빛이 일단 와야 무슨 일을 하지 빛도 없는데 어떻게 일을 하겠는가? 빛도 없는데 어떻게 일을 하오리까? 이렇게 질문하니, 예수님이 기가 막혀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빛도 없는 깜깜한 방에서 어떻게 해야 일을 하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머리나 안 부딪히게 조심하라고 하실 것이다. 깜깜한데 뭘 하려고 하면 어디 부딪히게 된다.
하나님은 명하고 보내시며 그와 함께 오는 빛이시다.(마28:20,요8:29) 아담은 고귀한 일을 위해 임명을 받았으나(창1:26,27) 보냄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임명을 받고 보냄을 받아 보내신 이와 함께 오셔서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하신 것이다.(1요1:1,2)
하나님은 명하시고 보내시고 그와 함께 오시는 빛이다. 하나님은 명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보내시기도 하신다. 보내실 때는 또 빛이 있어서 보낸다. 빛을 줘서 보내지 그냥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렇지 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명하시면 보내신다. 보내시면 또 빛이 있다. 장군들이 일을 한다. 계급장만 달아 놓고 그냥 나두지 않고 달아놓고 나면 보낸다. 보내면 다 일 할 수 있도록 다 빛이 있다.
아담은 고귀한 일을 위해서 임명을 받았는데 보냄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임명을 받고 보냄을 또 받아서 보내신 이와 함께 와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이렇게 오신 분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하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지음 받았다. 이것이 임명이다. 그런데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그의 생명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한 생명이어야 한다. 한 생명은 한 눈, 한 생각, 한 마음을 갖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 이것은 임명이다. 그런데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명나무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생명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요즘 이런 문제에 대해서 대답을 어떻게 하는가하면 기도를 열심히 해라, 공부를 많이 해라, 뭘 하라고 한다. 학자들 빼고는 목사님들 서재에 책이 제일 많다. 왜냐면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므로 책 나올 때마다 다 산다. 밥 걸이는 없어도 책은 다 산다. 아주 쪼들리게 사는 전도사나 목사도 책은 가득 있다. 그것이 자기 재산이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열매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생명관계가 있어야한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지만 생명관계가 없이 지식만 많이 가져봐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그의 생명을 표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분과의 관계가 우선 확실해야 그분을 표현할 수 있다. 한 생명이어야 한다. 한 눈이어야 한다. 한 생각, 한 마음을 갖게 한다.
개들끼리 있으면 다 같은 한 마음이고 고양이들끼리 있으면 다 같은 마음이다. 우리 집에 야생 고양이가 몇 마리 있는데 우리도 덕을 보니까 키우고 있다. 왜냐하면 그 놈들이 있으면 쥐가 없다. 고양이가 지켜주니까 나는 거기 가서 아직 쥐를 한 마리도 본 적이 없다. 우리 집을 위해 수고해 주니까 먹다 남은 부스러기 갖다 주고, 식당에 가면 일부러 뼈다귀를 갖다 주는 것으로 보답한다. 이놈들은 다 한마음이다. 어디 가 있다가도 때가 되면 다 같이 온다.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면 다 같이 그 쪽으로 보고 있다. 다 한마음이다. 그리고 문을 열면 쏜살같이 나온다. 한 마음이니까.
한 생명은 한 마음이다. 예수와 한 생명이면 한 마음이 된다.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면 한 생명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만 하면 된다. 그의 죽으심 안에서 나도 거기 죽은 자리구나! 그의 살으심 안에서 이것이 하나님 인정한 자리구나! 이렇게 우리는 인정만 하면 된다. 내가 죽고 안 죽고 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인정만 하면 된다. 다 해놓았으니까 너무 쉬운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누가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지겠는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다 해도 효과가 없다. 인정할 때 효과가 있다. 그분의 죽으심을 내가 인정할 때, 그분의 살으심을 나의 삶으로 인정할 때 그 때 효과가 발생한다.
한 생명은 예수와의 연합이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고, 그의 사심과 합하여 새 생명이 탄생했다. (롬6:4,5) 이 생명은 예수-빛 가운데 있으며 그 빛으로 보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 예수 안에서 보면 하나님의 일이 보인다.
한 생명은 예수와의 연합이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의 살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주와 함께 살 줄을 믿나니라고 했다. 이것은 연합이다. 내가 가서 죽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죽음 안에서 내가 발견되는 것이다. 이것을 발견하게 하려면 말씀이 필요하다.
말씀이 없으면 발견이 안 되니까 자기가 직접 짊어져야 한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 듣기 싫으면 직접 지면 된다. 그것이 더 쉬울 것 같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말씀 듣고 내가 인정하고 깨닫는 것이 쉬우면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말씀도 듣고 간증도 듣고, 그렇게 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면 직접 짊어지면 된다. 십자가 한 번 져 보면 된다.
예수님과의 연합! 죽으심과 합하여 죽고, 그의 살으심과 합하여 새 생명이 이미 탄생했다. 이 생명은 예수 빛 가운데 있다. 이 빛으로 보고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보면 그때 하나님 일이 보인다.
우리가 아는 대로 세상에 하나님 일을 한다는 사람이 많다. 내 경험으로 봐서는 이 빛이 없었구나! 예수 빛이라는 그 빛이 없었구나! 이순신도 있고 원균도 다 있었는데 문제는 예수 빛이 없었구나! 기독교 세계에서 유명한 분들이 많다. 기도해서 5만번의 응답을 받았다는 분도 있고, 그 안에 가면 별 것이 다 있다. 그런 사람들의 빛은 어느 정도 있었는데 그것도 밝았으면 어디 한 군데 나도 해봤을 텐데 그것도 희미했다.
이번에 어느 출판사에서 고아의 아버지라고 하는 죠지 뮬러 생애에 대해서 쓴 두꺼운 책을 무료로 그냥 보내왔다. 그만큼 그 사람은 고아를 돌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한 빛이 되고 있다. 그런 사람이 수없이 많다. 그런 사람들의 책을 보고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 빛 가운데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많다. 믿음이 좋았던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 빛이 부족한 것이 지금 문제다.
오늘 우리 교회는 다른 것은 좀 부족하더라도 이 생명의 빛이 충만해야 한다. 이 빛 안에서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면 저절로 하나님의 일이 된다. 빛이 그러니까 그렇게 보이게 된다. 그렇게 보이면 안 할 수 없다. 보이면 다 하게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렇게 물을 것이 아니고 그 빛 안에 있으면 할 일이 다 보인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할 일이 보이고, 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할 일이 보인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축구 경기장에 가고, 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야구 경기장에 간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 야구 경기장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가 아는 것이 그것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그것이니까 그렇다. 빛을 어떤 빛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축구 좋아할 수도 있고, 야구 좋아할 수도 있다.
나는 축구가 재미있다. 야구도 재미있기는 하지만 좀 늘어지는 반면에 축구는 계속 긴장이다. 계속 뛰어다니니까 나도 같이 뛰어다니는 것 같아 재미있다. 이래서 축구를 보는구나한다. 아마 축구 인구가 제일 많을 것이다. 다른 것도 다 좋지만 내가 보기에 그게 제일 좋은 것 같다. 왜냐하면 축구는 별로 룰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별로 없지만 야구는 보려면 규칙을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코너킥 같은 간단한 것만 몇 개 알면 된다. 재미있으라고 보는 것이니까 간단해야지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
빛이 무슨 빛을 보이느냐 이것이다. 그 빛이 보이는데 따라 축구선수가 되기도 하고 야구선수가 되기도 한다. 이순신 빛이 보이면 이순신 장군 안에 살게 되고, 예수 빛이 보이면 예수 빛 안에 살게 된다.
우리는 다른 것이 부족하더라도 이 생명의 빛 가운데서 우리가 보고 그리고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 기 도 ]
감사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주셔서 주의 귀한 일을 보게 해주시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그 일을 우리가 보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밝히 보이셔서 우리의 빛이 되시기를 원하고, 우리가 옛 것이 다 사라지고 옛날에 알던 것이 사라지고 새롭게 아는 것이 생기도록 주께서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다른 것이 다 부족할지라도 오직 예수 그 빛만 우리한테 환히 비치게 해주시기를 원하고 세상 끝 날까지 그 빛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