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혜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최초로 내한(1884년 9월)한 알렌이
고종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오늘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이 되었다.
순회의료전도반
의료선교사들은 자동차로 지방을 순회하며 진료와 함께 전도에 종사하였다.
아펜젤러(좌)와 언더우드(우) :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척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배재학당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기도 했다.
이화학당
1886년 스크랜톤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대구동산기독교병원
1893년 대구에서 시작된 동산병원은
1931년 현대식 건물을 마련하여 의료선교에 큰 공을 남겼다
한국교회사(50)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선교 정책은 의료 및 교육 선교, 문서 및 성경 번역 선교, 선교지 분할 정책 그리고 성경중심의 네비우스 선교 정책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1) 의료 선교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이 사용한 선교 정책 중의 하나는 의료 선교와 교육 선교였다. 의료 선교는 복음이 한국의 황실과 민중의 심령 속에 파고드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제공했다. 그것은 단순히 병든 환자를 고친다는 차원이 아니라 ‘왕과 왕비로부터 걸인, 나환자, 모든 계층의 민중들’에게 의술을 통해 복음을 전하며 섬기는‘치료 사역’이었다. 1884년 12월 4일에 있었던 갑신정변 사건으로 인한 민영익의 치명적인 상처의 치료가 계기가 되어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이 개설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의 의료 선교는 놀랍게 꽃을 피우게 되었다. 돌이켜 볼 때 이것은 이 민족에게 복음을 여시려는 깊으신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언더우드는 해석하였다.
(1) 광혜원의 설립
현재 재동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위치하였던 광혜원은 1885년 4월 10일 공식적으로 개원하였다.‘ 광혜원’이라는 병원의 명칭은 4월 26일‘제중원’으로 개칭되었다. 광혜원의 설립은 의료를 통한 선교활동의 강화라는 미국 선교부의 이해관계와 서양의학의 수입을 통한 근대화의 달성이라는 한국정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894년 재정문제를 비롯한 여러 난관에 부딪힌 한국정부에 의해 미국선교부로 완전히 이관된 제중원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혜원의 설립은 한국 선교사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놀라운 공헌을 세웠다. 하나는 광혜원이 초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준비할 수 있는 전초기지 역할을 함으로써 후에 한국선교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광혜원이 서양의술의 보급을 통해 왕실과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한국인들에게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2) 왕실과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의료선교
광혜원이나 감리교에서 설립한 상동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래서 의료 선교는 민중과 왕실 양쪽의 마음을 사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사무엘 마펫(Samuel Hugh Moffett)이 지적한 것처럼‘한국인들의 마음에 외국인의 이미지로 지배하고 있는 공포의 분위기가 일소되기 시작한 것은 알렌의 기적적인 치료의 덕분이었다.’알렌 선교사가 미국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광혜원이 개설되고 1년 동안 그곳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20,529명이었다. 휴일과 공휴일을 제외하면 하루에 평균 100여 명을 치료했다는 결론이다. 당시 한국의 인구가 약 1,500만이었고, 한양(서울)의 인구가 30만으로 추산되는데, 광혜원에서 1년 동안 혜택받은 약 2만 명의 숫자는 대단한 숫자다.
전택부는 한국교회발전사에서‘이 중 10,460명의 환자를 병명별로 살펴보면 발진티푸스 등 고열병 환자 1,147명, 소화불량 등 소화기 계통 2,032명, 동맥경화 등 혈액순환 계통 114명, 호흡기 질환자 476명, 성병 등 생식기 환자가 1,902명, 임파선 214명, 신경계 질환자 833명, 안질 환자 629명, 귓병 환자 318명, 암 등 악성종양이 145명, 골격 및 건(腱) 환자 105명, 기형 37명, 부인병 67명 그리고 피부 질환자 814명이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많은 환자를 보는 가운데서도 의료 선교사들은 왕실의 왕자나 고관들의 연락을 받고 새벽 1시에 갑자기 왕진을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저들의 부단한 노력과 희생의 결과로 의료 선교는 기적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모든 외국인들에 대한 전반적인 호의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반면 알렌은 과중한 업무로 심신이 피곤함을 느끼게 되었고, 동료 선교사들과의 마찰로 인해 더 이상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없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887년 8월 주미 한국 공사관 참찬관으로 적을 옮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헤론이 그 책임을 이어 받았으나 1890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헤론 역시도“자신의 일에 대한 강력한 헌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언더우드는 회고했다. 그 후 하디(R. A. Hardie), 빈톤(C. C. Vinton)이 사역하였고, 토론토 의대 교수를 하다가 한국 선교사로 온 에비슨(O. R. Avison)이 1893년 11월 제중원의 책임을 맡으면서 한국의 의료 선교는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았다. 1893년 선교회는 의료 사업을 선교사업의 하나로 결정하고 부산, 평양, 대구, 선천, 재령, 청주, 강계, 전주, 공주, 해주, 안동, 원산, 군산, 목포, 개성, 춘천, 진주, 성진, 함흥 등에 병원을 설립하고 한국 선교를 전국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에비슨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미 명문 토론토 의과 대학에서 서양 의술을 가르치다 온 에비슨 선교사는 1895년 정부로부터 경영권을 이양받은 후 병원을 새롭게 정비했다. 1899년 세브란스로부터 15,000불의 헌금을 지원받아 남대문 밖에 병원을 신축하여 1904년 9월 60개 침대를 갖춘 최초의 현대식 서양종합병원을 준공했으며, 이름도 제중원에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칭하였다. 이어 14개 분과로 확장하고, 세브란스 의학교와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1908년에 7인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의 의료 선교는 환자를 치료하는 단순한 의료 사역만이 아니라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를 양육하여 한국인들 스스로 장차 한국의 의료계를 이끌어가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아서 1931년까지 155명의 의전 졸업생을 배출했다.
(3) 스크랜턴의 상동병원을 통한 선교
한편 제중원이 왕립인 데 반해 한국 최초의 민간설립 병원인 정동병원도 선교사에 의해 건립되었다. 제중원 설립 꼭 5개월 후인 9월 10일, 초기 제중원에서 일하던 북감리교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은 자신의 정동(구 배재고등학교 정문 건너편) 주택을 개조해 병원을 개원하고(개원 8개월 만에 522명의 환자를 치료했고, 그 다음 1년 동안에는 2,000명의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그 이듬해 상동에 병원을 건축하여 옮겨갔다. 고종은 이 병원에 시병원(施病院)이란 이름을 하사했는데, 이는 스크랜턴의 한국 이름인‘시란돈’에서 따온 것이었다.
스크랜턴이 상동에 병원을 세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유는, 정동은 외국인들의 거주지역이어서 한국인들이 드나들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그는 처음부터 서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병원과 같은 병원 겸 수용소같은 병원건설을 원했다. 한국인들의 병은 대부분 영양실조 때문에 오는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조금만 미리 손을 쓰면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도 주고 또 무료로 또는 싼 값으로 가난하고 버림받은 병자들을 따뜻하게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먹여 주는 수용소 시설을 갖춘 병원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역시 정동을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좋은 장소를 그는 상동지역에서 발견한 것이다. 셋째 이유는, 지금의 정동병원은 원래 한옥을 수리하여 세운 병원이지 처음부터 병원용으로 세운 건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어차피 새로 큰 병원을 병원답게 세울 바에는 지금 있는 건물을 헐고 짓는 것보다는 딴 곳에 새로 제대로 지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광혜원이 왕실 병원이라 정부 관리들과 그 가족 그리고 양반계급들이 몰려든 것과는 대조적으로 상동병원에는 스크랜턴의 생각처럼 시내의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광혜원과 마찬가지로 상동병원도 치료비는 받지 않았다. 병원 앞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떤 병이든지 아침 10시에 오시오. 올 때는 빈 약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라는 안내문을 써 붙이고 환자들의 협조를 구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스크랜턴의 의료 활동은 1888년 영아 소동으로 모든 선교 사업이 일시 중단되었을 때조차도 단 하루도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성난 군중도 시병원만은 습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1887년에 ''여성을 위한 여성들에 의한’의료 사역이 감리교 선교부의 여성분과 메타 하워드(Meta Howard)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해 12월에는 현재의 아현동에 시약소를 개설하여 3년 동안 환자들에게 약을 공급했다. 1886년 가을 감리교 여선교사 하워드가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인 보구여관(保救旅館)을 개설하고, 셔우드(Rosetta Sherwood)와 함께 3년간 약 5,500명의 가난한 여인들을 치료해 주었다. 한국교회 여성 사역의 가장 아름다운 모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로제타 셔우드 홀은 남편 제임스 홀과 더불어 평양 지역에 의료 선교를 개척하였고, 박 에스더를 발굴하여 그녀를 훈련시키고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감리교 선교회는 서울에 부인병원을 계속 운영하는 한편, 인천, 평양, 원산, 공주에도 병원을 개설하여 가난한 민중들에게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베풀며 선교에 동참했다.
의료 사역은 한국선교가 진행되는 동안 1930년대까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서양의술의 보급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선교를 위한 전초기지, 의술의 혜택을 통한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호감을 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보건 및 사회사상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서양병원은 한국인들에게 전염병의 예방과 공중위생의 관념을 불어넣었다. 병의 발병을 음양오행, 풍수, 잡귀와 관련 있는 것으로 믿어 오던 한국인들은 서양 의술이 보급됨에 따라 비위생적인 환경이 발병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공중위생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1895년 호열자병이 발생하자 정부는 여기에 대한 방역책을 세울 아무런 선지식이 없어 속수무책이었으나 다행히 에비슨의 지원을 받아 예방, 소독 주의사항 등을 포고할 수 있었다.
천주교가 직접적인 선교를 한 것에 반해 한국의 개신교는 직접 선교와 간접 선교의 병행을 통해서 민중과 왕실 모두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것은 선교의 방법론적인 면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의료 사역은 교육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선교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교회사(51)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2) 교육 선교
의료 선교 못지않게 한국개신교 선교사들이 정성을 기울인 것은 교육을 통한 선교였다. 선교사들은 모든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종교적인 훈련을 수행하여 기독교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교육 선교를 선교 정책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때문에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이어 중등학교,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였으며, 스크랜턴여사는 이화학당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션스쿨의 입학생을 신자들로만 국한시킨 것은 아니었다. 미션스쿨을 불신자와의 접촉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강했다. 해서 실제로 미션스쿨에 믿지 않는 자들을 입학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믿은 자를 입학시키든 아니면 아직 믿지 않는 자를 입학시켜 믿게하든지 간에 학교는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한국인들에게 더 나은 삶, 풍요로운 삶, 민주적인 삶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1) 한국 정부 주도하에 시작된 육영공원
한국 정부는 일찍부터 청과 일본을 통해 서양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외국과의 조약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양의 신문명을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881년 박정양, 어윤중 등 10여 명의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송해 새로운 문물제도를 시찰하도록 한 것과 김윤식을 단장으로 한 69명의 청년학도를 신식기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도록 청국 천진으로 보낸 것도 그때문이었다. 정부는 1883년 10월 1일,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그해 8월 묄렌도르프에 의해 설립된 육영공원(育英公院)의 책임을 일단 영국인 헬리팍스(T. E. Halifax)에게 맡기고, 1885년 봄 미국에 교육법무관 3명을 파송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는 1885년 9월 23일 귀족 자녀 35명의 소년들로 문을 연 육영공원을 육성하기 위해 미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요청에 따라 뉴욕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세 명의 유능한 젊은이,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 벙커(D. A. Bunker) 그리고 호머 헐버트(Homer B.Hulbert)를 파송했다. 이들이 육영공원에 합류하면서 1886년 9월 23일부터 교육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좌우 2개의 반으로 나누어 좌원은 젊은 문무관리 가운데서, 우원은 15~20세의 고관 자제 또는 고관이 추천한 젊은 선비 가운데서 학생을 뽑았다. 폐교될 때까지의 총 입학생은 107명이었다. 공원 운영에 필요한 비용은 처음에는 호조와 선혜청에서 부담했으나, 1887년부터는 인천항의 해관세(海關稅)에서 충당했다. 교과내용은 영어 외에 수학·자연과학·역사·정치학 등이 있었으며, 3년마다 치르는 대고(大考)에 합격하면 졸업을 시켰다. 정부고관이나 그 자제만을 수용하는 신분적 한계와 공원 관리들의 운영비 유용, 정부의 재정핍박 등으로 1894년 폐교되어 영어학교로 바뀌었다.
(2) 스크랜턴 여사에 의해 설립된 이화학당
이화학당이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 선교사의 모친 메리 스크랜턴에 의해 1886년 5월에 설립되었다. 1886년 5월 31일 서울 정동 스크랜턴 여사의 집 사랑방에서 단 한 명으로 시작된 이화학당은 그 이듬해인 1887년 10월 22일 명성황후로부터 황실을 상징하는 순결한 배꽃과 여성의 순결성과 명랑함을 상징하는‘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한국의 여성들을 위한 서양교육의 장을 열었다.
스크랜턴 여사가 처음 이 학교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이 나라 부녀자들에게 행복한 삶을 제공하고 싶은 열망에서였다.
“그해 10월 정동의 초가집 9채와 나대지 6천여 평을 매입했다.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위해 무슨 사업을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달 9일 아펜젤러 부인이 애기를 낳았다. 이 애기는 훗날 이화여전의 교장이 된 앨리스 아펜젤러인데, 그날 밤은 어찌나 추웠던지 애기를 자리에 눕히지 못하고 밤새 스크랜턴 부인이 안고 재웠다. 이때 부인은 이렇듯 추운 방에서 고생하는 한국의 어머니들과 애기들을 위해 이 나라 여성을 가르칠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던 것이다."라고 『이화 70년사』는 밝히고 있다. 이 땅에 근대 여성교육의 싹이 트는 순간이었다.
설립자 스크랜턴 여사는 처음 학교가 시작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 학교 사업은 이 새로 지은 학교로 옮겨가기 여섯 달 전에 스크랜턴 박사 집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학생이 한 사람뿐이었다. 그 학생은 어떤 정부관리의 첩이었는데, 그 남편은 자기 첩이 영어를 배워 후일 왕비의 통역이 되기를 바랐다. 그 여자는 우리와 약 석 달 동안만 같이 지냈다. 제일 처음 재학생으로 입학한 생도는 김생여보다 한 달 늦게 1886년 6월에 왔다. 그 색시는 집안 살림이 몹시 구차하여 우리에게 온 것이 분명했다. 허나 한 달도 못 되어 그의 어머니는 제 딸을 외국 사람에게 맡기느니보다는 가난을 참고 견디는 게 낫다고 느꼈다. 고약한 이웃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나무라며, 이 여인이 어머니답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딸을 노부인에게 맡겼을 것이라고 시비했다. 잘 먹고 잘 입고 살고 있으니 얼마 동안은 좋겠지만 조금 있다가 미국으로 끌려가서 그 신세가 어찌될는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아이들을 절대로 이 나라 밖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 보냈더니 이것이 효과를 얻어 한동안 그의 어머니를 안심시킬 수 있었고, 몇 달이 지나서야 완전히 안심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들어온 생도는 조그만 어린 거지 아이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병자였는데 스크랜턴 박사가 성문 밖에서 발견하여 병원에 데려다가 치료해주던 여인이었다. 한인들은 이 아이들을 경계의 눈으로 주목했다. 그들은 이 아이들이 불행하지도 않고 천대받지도 않는 것을 보았다. 이리하여 다른 어머니들도 차츰 우리를 믿기 시작하여 언덕 위의 새 집으로 이사 갈 무렵에는 학생이 넷이 되고 이듬해 1월에는 일곱 명을 셀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근대 서양교육은 화려하게 시작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화학당은 1888년에는 재학생이 18명으로 불어나 학교로서의 틀을 다지게 되었다.
당시 여성 교육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유난히 남녀유별을 주장하는 한국의 관습이었다. 때문에 남자 교사는 강단에 설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외국 선교사들이 강단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학부모들은 한문 교육을 요구했는데, 여자들 가운데서는 교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화학당은 한문을 가르칠 남자 교사를 초빙하게 되었다. 그나마 남녀유별을 지키느라 할아버지 선생을 고용하였고, 학생과 선생 사이에는 휘장을 치거나 병풍을 쳤다. 조금 발전해서는 교사가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 헛기침을 하면 학생들은 얼굴을 돌리고, 수업이 시작되면 교사는 등을 돌리고 칠판만 바라보고 수업을 진행하였다.
학생이 늘자 1897년, 12년간 공부하던 기와집 교사를 헐고 그 자리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하였다. 이 메인 홀은 당시로서는 서구식 시설에다 규모도 웅장하여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해서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부녀자들의 나들이 날인 초파일이나 단오가 되면, 양국관에 대한 호기심으로 수백 명의 여인들이 이화학당을 구경오곤 했다. 그러나 이 메인 홀은 6·25때 소실되었다.
당시의 교과과정은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있지는 않았고 교사에 따라 가능한 과목을 첨가시키는 형태였으나 성경은 그 자체로도 그리고 국어 독본으로도 줄곧 채택되었고, 생활교육, 가사, 자수, 음악 등을 가르쳤다. 학생들이 만든 수예품 바자회를 통해 학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이경숙이라는 최초의 한국인 교사를 채용하여 언문(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이화학당은 표면적으로는 교육 사업이었으나 이화의 교육은 곧 선교였다. 극심한 내외법으로 아펜젤러나 스크랜턴목사가 할 수 없었던 여성 전도를 도맡아 한 이가 스크랜턴 부인이었고, 사실 정동제일교회의 초대 여성 교인은 거의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스크랜턴 여사는 수원, 오산, 이천 등 여러 곳에서 전도를 하여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09년 10월 8일 소천하여 양화진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교회사(52)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2) 교육 선교
(3)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
배재학당 설립
아펜젤러가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은 서울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아펜젤러가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국 공사관의 무관이었으며 대리공사를 맡고 있던 폴크(George Foulk) 씨가 고종에게, 아펜젤러가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고, 고종이 이를 허락하자 그 내용을 아펜젤러에게 다음과 같이 빨리 전했기 때문이다.
“① 나는 당신이 교육하기 위하여 여기 왔다는 것을 국왕에게 아뢰었다. ② 나는 당신에게 학교와 생도를 모아 주라고 정부에 청구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이렇게 요청한다면 오래 전부터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부탁해 온 선생들이 오는 것을 반대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③ 당신은 당신이 책임지고 가르칠 생각을 하고 있으나, 정부나 일반 대중의 의향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의로 생도의 경험자로서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아뢰었다. 국왕께서는 당신이 한인들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갸륵한 일이며, 당신이 한인들을 가르쳐 준다면 참말로 훌륭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국왕께서는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더 보태지도 않으며, 더 깎지도 않고 그대로 말한다. 국왕께 아뢴 대로 또한 국왕께서 분부하신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이는 곧 당신이 학생들을 모으고 학교를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니 소신대로 하여 보시오.”라고 하였다.
1885년 8월 3일 아펜젤러는 서울 정동 자신의 집 사랑에서 두 명의 학생으로 배재학당을 시작했고, 이 학교는 그 다음해 6월 8일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공인을 받아 한국의 기독교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1886년의 연례보고서에서 당시 학교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는 언제나 대단합니다. 이 새로운 언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디딤돌이 되는 것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영어를 공부하려고 합니까?’라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벼슬을 얻으려고’라고 대답합니다. 일종의 전초전으로 우리 선교부는 6월 8일 학교를 시작해서 7월 2일 첫 학기를 끝냈는데, 이 동안에 등록한 학생은 6명입니다. 오래지 않아 한 사람은 이 나라의 상투적 핑계인‘시골에 볼일이 있어서’나가 버렸고, 또 한 명은 가족 중에 초상이 나서 등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는 1886년 9월 1일 단 한 명이 등교한 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빈 자리는 자원하여 오겠다는 학생들로 일부가 채워졌습니다. 10월 6일 현재, 20명 재적에 18명이 출석하고 있으며, 거의 매일 입학 신청을 내는 학생들로 끊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연말까지는 학교가 붐빌 것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펜젤러가 세운 이 학교는 놀랍게 발전하여 1887년에는 정식으로 정부의 인가도 받았고 고종황제는 이 학교의 이름을 인재를 배양하는 학당이라는 의미에서 배재학당이라고 친히 지어주고, 사액간판(賜額看板)까지 하사했다. 처음부터 이 학교는 기독교 이상을 분명히 하고 시작했다. 배재학당은 이승만을 비롯한 수많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겨레의 지식의 보고가 되었고, 민족정신의 중추가 되었으며 신문화의 선도자가 되었다.”아펜젤러는“감리교가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이 나라 720만의 사람들을 위한 최고 수준의 교양과 대학과정 그리고 신학을 수업할 수 있는 학교를 세워야한다.”는 평소의 이상을 배재학당을 통해 구현하기를 원했다.
배재학당의 교육 방침
1887년 그는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교사를 짓기 시작했다. 벽돌 건물로서 76×52피트의 크기의 르네상스식 1층 건물이었다. 이 건물에는 예배실, 강의실 4개, 도서관 및 산업부를 위한 반 지하실도 있었다. 산업부를두려는 것은 한국인들이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경멸하기 때문에 노동의 숭고함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아펜젤러는 1886년 연례보고서에서 재학생이 63명이며, 평균 최고 출석수가 40명 그리고 보고서를 쓰는 날까지 37명의 어른과 소년들이 입학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는 이해에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학생들이 나오게 된 것을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복음 선교사로서의 아펜젤러가 선교 교육의 진정한 목표를 바로 여기에 두었다고 할 정도로, 유용한 인재는 구원받은 인간이어야 함을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지난 한 해(1887년) 동안 2명의 학생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현재 우리 교회 예배교인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내가 최초로 세례를 준 한국인들이다. 나는 또한 우리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 가운데서 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처럼 개교 첫 해 동안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학생들 가운데서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다.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유용한 인재’는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주의 피로써 구원받지 않고는 ‘양육될’수 없다. 다른 학생들은 길을 묻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기도와 심령의 소원이 이 학교를 특별한 영적인 힘이 넘치는 학교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새 교사의 준공식은 1887년 9월에 워렌(Warren) 감독을 모신 자리에서 행하고, 그 해 11월 1일에 새 교사로 이전했지만 교사가 완공된 것은 1888년이었다. 이 해 가을에 아펜젤러는 학교에 산업부를 설치했는데, 일을 하는 학생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캠퍼스를 돌보고 교사를 청소하고 불을 피우는 일 등을 학생들에게 맡겨, 가난한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이무렵‘출판 일을 시작하게 되면 더 많은 학생을 고용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1885년 후반기부터 시작된 그의 교육 활동은 1889년경에 이르면서 차차 그 틀을 잡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학교의 평판은 서울 시내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알려졌다. 정부에서는 비록 선교사에 의해 경영되는 것이지만, 국왕이 교명을 하사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거기서 공부한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새 교사가 완공됨에 따라 구 교사를 기숙사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1888년에 들어서서 1월에 올린저(Franklin Ohlinger) 목사가 중국의 선교 임지에서 한국으로 왔고, 다음 해 5월에는 미국으로부터 존스(George H. Jones) 목사가 내한하여 아펜젤러의 선교·교육 진용이 보강되었다.
아펜젤러는 학생들에게 자조(自助, self-support)적 훈련을 시키려고 하였다.
“우리는 시작 초기부터 가능한 한 자조를 도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약간의 외부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조 정책의 목적은 생도들로 하여금 대가를 낼 줄 모르는 자에게는 도움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계약을 다 이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에게 주어지는 도움을 즉시 중단합니다.”라고 1886년 미 감리회 선교부에 보낸 연례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훈련은 학생들에게 자조 정신을 길러주었고, 이 자조 정신은 자주, 독립의 정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자조하는 정신뿐만 아니라 자기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는 데 헌신해야 할 숭고한 마음의 자세를 갖도록 하였다. 자기 사회와 나라에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섬기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도성 인신하여 인간으로 오신 것이, 남을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함이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바치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 진리를 한국 젊은이들의 훈련에 적용하였다.
해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을‘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者當爲人役), 즉‘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을 받아야 한다.’로 정하고, 이를 실행하도록 교육하고자 애썼다. 이 당훈은「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는 말씀의 정신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배재학당의 신앙 교육
아펜젤러는“만약 배재가 철저히 기독교적이지 못하다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배재학당을 운영하였다. 그 결과 학교와 학생들 간에는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는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의 증가된 영적 분위기와 기독교 지식에 대한 열망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둘째는 이러한 영적 분위기가 배재학당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명감을 갖도록 했는데, 그것은 크리스천 사역자, 즉 지방의 전임 교역자를 훈련시키는‘숭고한 기회’와‘숭고한 사업’을 갖는 것이었다.
셋째는 위의 교역자 양성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1896년 2월에 신학부를 개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은 1개월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 일을 통해 아펜젤러가 얼마나 강렬하게 신앙 교육을 열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교회사(53)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2) 교육 선교
(4)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된 언더우드 학당
언더우드는 입국 초기 제중원에서 운영하던 의학교를 맡아 운영하였다. 알렌은 어의, 공의 그리고 시료에 바빴고, 또 한국말이 서툴러 초창기 의학 교육에서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한 언더우드만큼 학생들과 접촉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언더우드는 외과 수술 때에 피를 보고는 졸도한 일이 두 번씩이나 있어서, 직접적인 의료 활동보다는 진료소에서 조제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되어 학생들의 영어 교육에 힘쓸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물리학과 화학 강의를 한국말로 하였다.
이러한 제중원에서의 교육 사업 이외에도 1885년 7월부터는 언더우드에게 영어를 배우고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영어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들 학생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이들을 위한 교육이 매주일 주일학교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 사실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일 아침 아이들 서너 명이 찾아옵니다. 저는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학교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만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해도 상당수 학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내 존재가 그다지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 중에 열두 명 정도 사내아이들을 뽑아 가르친다면 제가 어학을 배우는 데 실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들을 키우는 동시에 한국어를 직접 공부하는 데 소비되는 시간도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 시점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인 헐버트(H. B. Helbert)에게 언젠가는 한국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자신의 희망을 털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에서 언더우드는 내한 직후부터 이미 교육선교의 비전을 긴 안목으로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6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오늘의 학교 형태는 아니지만 우선 거리의 고아들을 데려다 먹이고 입혀 주며 가르치는 고아학교의 설립을 구상하고, 이 뜻을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한국 정부의 외부에 전하자, 그 해 2월에 외부 김윤식의 이름으로 학교 설립 허가를 통보해 왔다. 김윤식이 이때 미국공사관 앞으로 보낸 공문 내용을 보면, 당시 한국 정부는 적어도 이와 같은 종교 활동이 아닌 고아나 극빈 아동을 위한 사회사업에 대해서는 매우 협조적이었던 것을 알수 있다. 이때의 상황은 언더우드가 1886년 1월 20일에 본국 선교부에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부에서 학교 사업을 허락해 줄 것 같으니 기도를 부탁합니다. 우선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하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100달러가 미국에서 오게 되어 그 돈을 갖고 헌 집을 수리하여 건물로 사용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1886년 5월 11일에 서울 정동 자신의 집에 붙어 있는 건물을 이용하여 교육과정을 담은 학교로서의 고아원을 개원하였다. 이 고아원은 그 후 새문안교회 내에서 운영되었는데 초기에는‘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구세학당’등으로 불리다가 1893년에는‘민노아학당’으로, 그 후에는‘영신학당’으로, 1901년 미국 북장로교의 목사인 J. S. 게일이 교장으로 부임한 뒤인 1905년부터는‘경신학교’로 발전하였다. 다음의 글은 이 고아원의 설립 경위를 밝히는 내용이다.
“언더우드가 접촉하게 된 일부의 남아들이 처하여 있는 실정으로 보아 그는 고아원 설립의 필요를 느끼게 되고 이 계획을 한국 사람들을 통하여 알게 된 국왕은 이를 승낙하였다.…처음에 들어온 이는 모두 남아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관에서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게 된 어린이의 수효가 40명 이상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언더우드가 신경을 쓴 것은 학생을 모집하는 일이었는데 그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당시 외국 선교사들과 관련된 괴이한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잘 먹여 살찌워 잡아먹는다느니, 미국으로 데려가 노예로 판다느니, 심지어 남색을 즐기기 위하여 사내아이들을 데려가려고 한다는 등 좋지 못한 소문이 돌고 있던 때라 학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고아나 길가에 버려진 걸인들 중에서 학생을 구해야만 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초기 학교가 하나같이 고아 내지는 가난한 학생들로 시작되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어학 선생이 추천한 천주교인 한 명을 특별히 고용해 서울 시내 고아나 걸인 형편을 조사하게 했다. 그 천주교인은 나흘 만에 당장 구호가 필요한 고아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이 고아 한 명으로 고아원이 시작되었다. 감리교의 아펜젤러도 그날 개원 예배에 함께 참여했는데, 언더우드는 고아원 설립 1년 후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고아원 설립 당시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약 1년 전 고아원을 개설했습니다. 1886년 5월 11일에 한 아이를 데리고 그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한 명만의 입학 허가를 받아 낸 상태고, 다른 세 명은 입학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날 저녁 이곳에 있는 선교사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고, 그 사업을 하나님께서 축복하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가르쳐 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사택과 바로 붙어 있는 꽤 넓은 한옥 한 채를 사서 약간 수리했는데 집값은 아주 적당했고 수리비까지 포함해서 약 500달러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고아원 형식의 이 학교는 비록 정식 학교와 같은 기관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교육을 시켰다는 데에서 학교의 성격을 찾을 수 있다. 이후 고아원에 수용되는 아이들은 숫적으로 약간 늘어갔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옥을 구입해 교실로 사용하였다. 당시의 어려운 경제사정과 고아원에서 교수한 교육내용을 언더우드 여사는 1890년 9월 1일에 피어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고아원에는 약 25명의 남아가 수용되어 있다. 그들은 방을 치우기도 하고 자기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도 하면서 학교운영에 필요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몸차림과 방을 잘 정돈해 놓고 8시까지 한문을 공부하고 외국인 선생들과 같이 아침예배를 보고 나서 조반을 먹는다.…조반 후에 영어공부를 조금하고 또 성경공부를 하였다. 이러한 수업시간 사이에 쉬는 시간을 넣었다. 오후에는 놀기도 하고 복습도 하고 한문 공부도 하게 하였는데, 한문 공부는 한국인 교육에 요긴한 과목이다. 선교본부에서는 이 학교에 대한 예산을 대폭 삭감할 수밖에 없게 되어 학교유지가 큰 문제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언더우드는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 일을 너무나 재미있어 했다. 언더우드는 의사 헤론의 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헤론 부인은 그의 청을 쾌히 승낙하여 한동안 그의 일을 도왔다.
“헤론 부인, 제가 하는 일을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하였는데 바로 이 일이 예수의 정신을 닮아 가는 일이라고 믿습니다.”라고 하였고, 헤론 부인은 “네, 잘 알았습니다. 저의 부군도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 의과대학 교수들이 조수로 남아 있으면 교수로 채용하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가난한 조선 사람, 병들고 죽어 가는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왔는데 제가 협력 안하면 누가 합니까?” 라고 하였다. 헤론 부인의 협력은 언더우드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 고아원 학당의 출신으로는 우사(尤史) 김규식과 도산(島山) 안창호 등이 있다. 언더우드는 고아가 된 어린 규식을 고아원으로 데려와 자신의 양자처럼 극진히 돌보며 영어를 가르쳤다. 규식 역시 고아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익히 알려진대로 훗날 한국교계와 민족의 지도자로서 성장 활동하였다. 도산 안창호도 1894년부터 2년간 고아원이 영신학당으로 바뀌어 새문안교회 내에 있던 때에 이곳에서 학생과 접장으로 지낸 바 있다. 안창호는 1894년에 청일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평양성전투를 겪으며 깨달은 바 있어 단신 상경했다가 경희궁(구 서울고등학교 자리) 고갯길을 지나가던 중 우연히 만난 밀러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언더우드 학당에 첫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 후 학당을 다니며 신학문과 기독교에 눈을 뜬 그는, 1896년 11월 서재필의 지도로 배재학당 안에 조직된 협성회에 참여하였으며, 1898년 봄 그곳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회를 조직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청년지사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1905년 경신으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는 그리스도교 전도자와 교원을 양성할 목적으로 국어, 영어, 과학 등 일반 교과목 외에도 성경, 교회사, 미국사 등을 가르쳤다. 1915년 4월 언더우드는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하였으며, 이 대학부를 모체로 2년 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선교 초기부터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인 언더우드의 노력의 결과 1910년대까지 장로교 산하에서 개척 설립한 학교들이 크게 늘어났다. 북장로교 8개, 남장로교 9개, 캐나다장로교 5개, 호주장로교 3개, 미감리교 8개, 남감리교 4개 등 37개였다.
한국교회사(54)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Ⅲ.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4. 개신교 선교 정책
3) 문서 선교 및 성경 번역
(1) 한국성교서회 설립
언더우드의 한국어 실력은 그의 한국어 공부에 대한 열정에 힘입어 그가 입국한 지 2년이 지난 1887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불편함이 없이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렇듯 한국어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언더우드는 곧 한글성경과 외국인을 위한 사전 편찬 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좀 더 본격적인 교육사업과 선교를 위해서였다. 1888년 언더우드는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토론토 전도문서회, 미국 전도문서회 그리고 런던 전도문서회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
선교부로부터 어느 정도 재정지원을 받는 데 성공한 언더우드는 헤론의 제의로 1889년 10월 자신의 집에서 한국성교서회(Korean Religious Track Society, 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하기 위한 준비 모임을 가졌고, 그 후 헤론이 죽기 한 달 전 1890년 6월 25일에‘규칙을 채택하고’정식으로 한국성교서회를 결성했다. 한국성교서회는 1895년 알렌 켄뮤어(Allen Kenmure)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 문서는 문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희생을 통해 개인, 사회 그리고 백성의 삶을 고양하고, 정화하고, 그리고 영성화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언더우드와 뜻을 같이하는 올링거(F. Ohlinger)가 회장을 맡았고, 헐버트(H. B. Hulbert)가 부회장에, 연락 간사는 언더우드가, 서기는 스크랜톤(W. B. Scranton)이 그리고 회계는 말콤 펜윅(Malcolm Fenwick)이 맡았다. 구성원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성교서회는 처음부터 문서 선교를 통한 한국의 복음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파 개념을 넘어서 있었다. 비록 수년 동안 건물도 없고 간사들에게 사례도 지급하지 못했지만,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이들의 협력을 통해 한국성교서회는 날로 번창하였다. 1897년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자 서회 명칭도‘대한성교서회’로 바뀌었고, 1915년 대한성교서회는 다시‘조선예수교서회’로 명칭을 바꾸고, 그 해 출판위원회를 조직했다. 1890년에 창립된 한국예수성교서회는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두 개의 감리교 선교회의 적극적인 협력과 참여를 통해 한국교회 선교 초기는 물론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는 기간 동안 문서를 통해 한국교회의 복음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2) 한국성서번역위원회 구성
1887년 당시 존 로스 역이나 이수정 역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번역, 표준 용어 채택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선교의 실정에 맞는 번역 작업이 추진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887년, 한국에 도착한 지 불과 2년 만에 한국개신교 선교를 대변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초에 출판된 이수정의『신약마가젼복음셔언히. 』를 대폭 개정해 『마가의 젼한 복음셔언히. 』를 출판한 것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이들이“번역 저본(底本)을 로스 역(1884년)이 아닌 이수정 역으로 한 것은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를 담은 지방색 짙은 성서라는 단점을 가지고”있었기 때문이었고, 이수정의 번역본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은 번역상의 오류 때문이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 역에서“예수 그리스도가 귀신의 아들이라는 인상을 한인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오해를 비롯한“몇 가지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이를 염두에 두고 “이수정의 번역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을”시작했던 것이다.
성서번역을 관장하기 위해 1887년 2월 7일에 구성된 한국상임성서번역위원회는 1887년 4월 11일 제3차 모임에서 그 명칭을 한국상임성서위원회(The Permanent Bible Committee in Korea)로 개정하고 그 밑에 번역위원회와 개정위원회라는 분과위원회를 두기로 결정하고 성경 번역 및 개정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런 개정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 만주, 두 번역판은 사투리가 많고 한자말을 풀어쓴 언해식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번역상의 오류도 발견되어 위원회는 말과 글이 일치하며 또 표준어로 된 새 번역판을 만들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해서 기존 번역을 고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새로 번역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3) 신약성경 번역
성서번역위원회는 2년 내에 신약성서번역사업을 끝내기 위해 1890년 6월 11일에 언더우드와 스크랜톤을 특별히 성서번역에 전념하도록 배려해 주었고, 이들은 이 일에 혼신을 다했다. 1891년 2월 가족들의 건강문제로 귀국한 언더우드와 스크랜턴 대신 아펜젤러와 게일이 작업을 대신하는 변화에 따라 성서번역 사업이 예상보다 늦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번역 사업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장로교 공의회가 조직된 1893년 5월, 기존의 상임성서위원회를 해체하고, 상임성서실행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가 결성되어 번역 사업을 지도하고 통제하면서 성서번역 사업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번역의 과정은 선교사들이 한국인 조사의 도움을 받아 개인역을 만들면, 다른 번역자들의 의견과 비판을 참고하여 수정역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모든 번역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표결로 통과시켜 ‘성서번역자회 시험역본’(Tentative Edition of the Board)을 만들었다. 해서 초기 한글 성경 번역은 개인역-수정역-시험역본이라는 세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완성된 시험역본을 발행해 3년 동안 사용하면서 문제가 발견되면 이것을 번역자회의에서 개정하여 최종적으로 공인역본을 만든다는 것이다. 실행위원회는 한글 성경이 시급히 요청됨에 따라 공인역본이 완성되기까지 시험역본을 발행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단계를 거치는 이유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더라도 좀 더 완전한 한글 성경을 만들겠다는 목적에서였다. 실제로 1893년 성서상임실행위원회가 결성되고 1898년까지 4년 동안 번역자회가 31회나 모였고, 이 중 10회는 마태복음의 시험 번역을 위한 회의로 나머지 10여 회는 사도서신 번역문을 토론하기 위해 모인 회의였다. 1895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각 1,500부가 간행되었으며, 이 중에 시험역본은 마태복음뿐이었고, 다른 성경은 개인역이나 수정역 단계에서 출판한 것들이었다. 마태복음은 아펜젤러가 만든 개인역을 수정역 과정과 토의를 거쳐 시험역본으로 확정한 것이고, 그 외 마가복음은 아펜젤러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은 게일이, 그리고 누가복음은 언더우드가 개인역으로 만든 것이었다. 시험역본인 마태복음을 제외한 다른 역본들이 개인 역본임에도 출판을 하게 된 것은 선교단체 및 한국인 교인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못 이겨서였는데, 그 반응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각 1,500부씩 인쇄된 성경은 인쇄되자마자 모두 매진되고 말았다. 당시의 교세로 볼 때나 성경이 무료로 보급된 것이 아니라 판매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와 같은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 성경의 필요성과 놀라운 반응을 체험한 실행위원회는 개인역과 수정역을 시험역본으로 만드는 작업보다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다른 성경의 번역에 착수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하고 번역자회를 통해 나머지 부분의 번역 착수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1897년부터 1900년 사이에 신약성경의 번역은 가속도가 붙어 1900년에 신약성경 번역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출판되던 1900년에는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출판되었던 모든 성경을 하나로 묶어 한 권의 신약성경으로 출판했다.
1900년 9월 9일 완역된 신약성경 첫판이 출판되어 한국인들과 외국인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정동교회에서 출판감사예배를 거행하였다. 이날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열린 기념 예배 때 사무엘 마펫이 사회를 보고,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 언더우드, 그리고 알렌이 연사(演士)로 수고하고, 스크랜톤이 영어로 답사했다. 알렌이 세 성서공회 이름으로 번역위원회 위원들과 한국인 조사들에게 신약성경을 선물했다. 1900년 9월 완역된 신약성경 첫판은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번역자회의 공식적인 의결을 거친 시험역본이었고, 나머지는 개인역이었다. 1900년부터 신약성경의 완전 시험역본의 출판을 위해 아펜젤러, 레이놀즈, 게일에게 이 일을 맡겨 추진토록 했으나 1902년 6월 아펜젤러가 목포에서 열리는 번역자회의에 참석키 위해 제물포에서 목포로 가던 중 목포 앞바다에서 조난 당해 그의 조사 조성규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성경번역의 효율적인 진행과 추진을 위해 1902년 9월 남장로교 선교부는 레이놀즈가 성경번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서울로 파송했고, 북장로교에서도 게일과 언더우드가 이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성경 번역이 완료되기까지 이들 세 사람의 노력과 헌신은 특별했다. 처음부터 성경번역에 전념하고 한국어 사전을 출판할만큼 한글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언더우드, 입국 얼마 후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 출판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대단한 데다 오랫동안 한국문화와 역사를 연구하여 역사와 문학적인 재능을 인정받던 게일, 그리고 한국에 오기 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에서 라틴어 교수를 하다 올 정도로 고전어 지식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레이놀즈, 이 세 사람은 한글 성경 번역이 완성될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개역 작업을 여러 차례 거쳐 좀 더 다듬어진 새로운 번역본을 출판했으며, 다시 이것을 수정하여 1906년에는 한국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간했다. 이 공인역본 ‘신약전서’출간에 세 선교사와 함께 협력한 조사들이 있는데, 언더우드의 조사 김명준(金明濬), 게일의 조사 이창직(李昌稙), 정동명(鄭東鳴), 레이놀즈의 조사 김정삼(金鼎三), 이승두(李承斗)의 헌신은 특별했으며, 이외에도 존스의 조사 문경호(文慶浩), 아펜젤러의 조사 조한규, 그리고 최병헌(崔炳憲), 홍준(洪俊), 송덕조(宋德祚), 송순용(宋淳容)이 성경 번역 과정에서 선교사들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