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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번 심포에서 나는 강내희 발표문에 대한 토론문에서 ‘상황’을,
또 우연하게도 주전안은 그의 발표에서 알튀세를 인용하며 ‘형세’를 거론했다.
또 심광현의 발표문은 “20세기 혁명의 변증법적 리듬 분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B.
나는 문화연구에 관한 한, 진보-좌파의 합리적 핵심이 다음 두 가지라고 말했다.
B.1.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
(die rucksichtslose Kritik alles Bestehenden, 对现存的一切进行无情的批判)”
(Marx Engels Werke 1:344, 马克思恩格斯全集 舊版 1:416)
B.2.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
(die konkrete Analyse einer konkreten Situation, 对具体情况作具体分析)”
(Lenin Werke 41:154, 列宁全集 39:128):
청년 맑스 (훈남!)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해방투쟁동맹 사건의 경찰 서류에 들어있는 레닌의 머그샷(1895)
C.
주전안은 1940년대 초 연안 철학계가 장개석의 역행철학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는 과정,
그리고 중국 맑스주의의가 ‘탈이론적 경향’을 갖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빼놓지 않고 모택동의 <실천론>을 언급했고,
뒤이어 이론과 실천의 문제를 소위 “정세” 내지는 “형세”와 연결시켜 설명하는 맥락에서
알튀세(阿尔都塞)의 마키야벨리 독해와 관련된 글들을 인용했다.
D.
심광현의 발표문은 러시아과 중국의 ‘혁명적 리듬 분석’이다.
제목만 봐서는 ‘혁명의 시학(poetics)’을 다루려는 듯하다.
하지만, 심광현이 실제로 한 것은 혁명과 전쟁, 개혁과 독재의 <주기> 분석이고,
주기의 분석이라는 점에서, 아날학파 브로델의 개념에 기대자면,
콩종크튀르(conjoncture) 수준에서의 혁명의 주기를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포메이션 그래픽에 의한, 런던 교통 흐름의 리듬 분석
그런데,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마키야벨리에 관한 알튀세 글에서 ‘형세’란 말로 번역된 불어 원어가 바로 conjoncture라는 점이다.
오늘 음미하려는 단어/개념이 바로 이 conjoncture다.
E.
프랑스의 <텍스트 및 어휘 자원 국립 센터(Centre National de Ressources Textuelles et Lexicales)>의 데이터베이스 망에 의하면,
불어 conjoncture의 어원적 용례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다(영어 및 한국어는 내 발번역들).
E-1. situation resultant d'un concours de circonstances
[영어] situation resulted from a combination of circumstances
[한국어] 사정들의 경합으로부터 귀결된 상황
E-2. ensemble des elements dont depend la situation economique, demographique, politique ou sociale a un moment donne
[영] ensemble of elements which depend upon the economic, demographic, political situation at a given moment
[한국어] 주어진 시기에서 경제적, 인구학적, 정치적 상황에 의존하는 요소들의 앙상블
F.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불어 어원 E-1에서 <concours>란 바로 <콩쿨 대회>의 바로 그 콩쿨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사정”들이 “상황”이라는 “콩쿨 대회에서 서로 경쟁하면서 모여 있다”는 얘기다.
또, 어원 E-2에서 ensemble은, 적비(赤匪)인 내게는,
맑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을 바로 연상시킨다.
In seiner Wirklichkeit ist es das Ensemble der gesellschaftlichen Verhaltnisse.
그것[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성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總和]다.
잠시 새자면, 내 생각에, 맑스가 Ensemble이라는 불어 단어를 여기서 쓴 까닭은
그가 알고 있고 써 온 다른 독일어 단어로는
이 대목에서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기 힘들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바로 이런 어원적 의미를 감안한다면,
알튀세 글의 conjoncture는 당연히 형세 내지 정세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이 쉽게 잘 이해될 것이다.
터키의 conjoncture 이집트의 conjoncture
G.
더 거슬러올라가면 불어 conjoncture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이것은 영어나 독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conjonction/ conjoncture/ conjugale(불)
conjunction/ conjuncture/ conjugal(영)
Konjunktion/ Konjunktur/ [?] (독)은
두 라틴어 단어로,
그러니까 “con(together, with) + jugum(yoke; 굴레, 멍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굴레/멍에를 이용해서 두 개를 합쳐놓거나 붙여놓거나 이어놓았다는 뜻이다.
또, jonction/ joncture(불) 및 junction/ juncture(영)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것들은 joint(불, 영)와도 그 어원이 같은 것이다(즉, jugum).
이런 점에서 더 나아가면, subjunctive(가정법의)란 말의 어원적 함의도 금방 이해된다.
여기서 sub는 “아래에(깔려 종속된다, 봉사한다)”라는 뜻이다.
즉 어원적으로 "serving to join"라는 의미다.
결국, 가정법이라는 것은, 조건절(종속절)과 귀결절(주절)이 서로 묶여 있되(junct, joint),
하나가 다른 하나의 밑에(sub) 깔려 있는 것이다.
“Damn the subjunctive. It brings all our writers to shame.”(Mark Twain)
아무튼, conjonction/ conjoncture(불어)의 뉘앙스를 익히고 확인하기 위해서
이 단어들 주변의 프랑스 언어밭을 슬쩍 훑어보자.
conjonction 1.결합, 제휴 2.접속사 3.합, 회합
conjonctif/ conjonctive [형용사] 1.결합의, 결합성의 2.접속의 3.결막
conjoncteur 1. (전기) 차단기, 폐로장치 2. (전화교환대의) 투입개폐기
conjoncturel [형용사] 경기(景氣) 변동의
disjoncter (전류, 전화를) 1.끊다 2.(차단기가) 작동하다
disjoncteur 자동차단기, 안전판
disjonction 1.분리 2. (논리학) 선언명제 3.일부 보류
adjonction 1.부가, 첨가 2.부가물
H.
conjoncture의 한자 번역어로는 형세, 정황, 정세 등이 다 가능한데,
내 한자어 감각으로는 정세가 젤 나은 것 같다.
한국/일본 공통의 한자어 감각에 의하면 특히 그러하다.
특히, 정세 분석, 정세적 실천, 정세적 사고 등과 같은 어법을 염두에 두면 그렇다는 얘기다.
I.
정세의 세(勢, 势)는 형태상으로는 埶과 力을 합쳐 만들어진 글자인데,
埶은 한국 옥편을 보면 “재주 예/심을 예, 형세 세”라고 되어 있다.
勢는 <설문해자>를 보면 “盛力權也。从力埶聲。經典通用埶。”라고 되어 있다.
“힘을 키워서 권세로 만든다”는 뜻이며, 의미소는 力이고 埶이 소리를 나타내며, 경전에서는 埶로 통용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權(권세 권)이란 글자는 원래 나무로 만든 저울대를 뜻했다.
이런 딱딱한 설명보다는, 아주 옛날의 글자 모양을 보면 이 글자들의 어원상 함의가 한눈에 추정된다.
勢의 小篆體 權의 小篆體 埶의 金文體
*** 勢와 權에는 뭔가 무기랄까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 같이 생긴 게 보인다[???].
埶는 두 사람이 마주서서 예식을 거행하는 모양이다[!].
J.
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정세>란 단어에서의 <정(情)>이란 의미 성분이다.
어째서 <정>이란 글자가 <세>란 글자와 합쳐져서,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바의 <정세>란 단어를 만들게 되었을까?
이것은 <정상 참작>이라고 할 때의 <정상(情狀)>에서도 나타난다.
<情狀>은 영어로, <extenuating circumstances>이고 <정상 참작>은 그저 <extenuation>다.
extenuate란 단어는 한눈에 봐도, tenure(재임 기간, 즉 이 경우는 복역 기간)을 줄인다는(ex = out) 뜻이다.
정(情)에 해당하는 의미성분이 없다. 드라이하고 쿨하다.
죄인의 형기를 줄일만한 사정, 형편을 가리키는 글자가 왜 정(情)인가는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자어 문화권은 정이 많아서? 인정이 넘쳐서?
내 짐작에는 결코 그게 아니다.
예컨대 <논어>를 보면, “如得其情,則哀矜而勿喜”란 표현이 있다.
발로 직역하면,
“만약 [네가] 그 정을 얻을 때, 그런즉슨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로되, [네 권력을] 기뻐해서는 안된다.”
이 표현은 어떤 사람이 법관 벼슬자리를 얻은 뒤, 증삼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증삼이 답해준 것이다.
실상은 “그 정을 얻는 일”도 거의 없었고, 또 백성들을 불쌍히 여긴 적도 거의 없었고,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기쁘게 즐기는 일만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정(事情)이란 말도 결국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말일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情狀이나 事情에서의 情이란,
우리의 입장에 보자면야, 일단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세부 관계나 형편을 가리키는 것이야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라고 쓰고 “놈덜”이라고 읽는다)이 본디 늘 개무시할 수 있었던 그런 것이다.
즉, 실상에서는 <不得情而喜>와 같은 것만이 횡행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외국인이 촬영한 청 나라 시기 처형 장면
판관 포청천은 단지 이야기 속에서만 환상으로서 존재했던 것이고
사정을 있는 그대로 봐주거나 정상을 제대로 참작하는 일이 현실에서는 거의 없었다.
뇌물을 줘야만 정상이 참작되는 것이다.
뇌물을 받아야만 사정을 들어봐 주는 것이다.
뇌물을 주고받는 것은 중국 사회의 <“초”장기지속>의 제도가 되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1949년 이후의 중국 사회에서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如得其情,則哀矜而勿喜”의 과제는 소설가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장애령이 《張愛玲小說集》(195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不記得是不是《論語》上有這樣兩句話:“如得其情,哀矜而勿喜。”這兩句話給我的印象很深刻。我們明白了一件事的內情,与一個人內心的曲折,我們也都“哀矜而勿喜”吧。
K.
단어와 개념의 차이가 뭘까.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구라를 풀어댈 수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본다.
개념이란, 어떤 학삐리가 잘난 척하기 위해서,
이미 있는 어떤 단어에 자기만의 이론적 숨길을 불어넣은 것이다.
자기 나름의 이론 체계를 세운 다음에, 혹은 세우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조물주가 흙더미에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하다.
L.
콩종크튀르란 이미 있던 단어에 브로델 특유의 입김이 들어간 게 바로,
브로델을 약간 공부한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바, “[중기적인] 주기/경향/국면”란 개념이다.
하지만, 이것은 브로델만의 개념인 것이고, 앞서 보았듯이, 콩종크튀르의 통상적인 의미는 아니다.
나는 불어본은커녕 한국어 번역본으로도 브로델을 읽어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짐작한다(견적낸다).
즉, 브로델의 경우, “장기 지속”이나 “사건”은
이미 있던 단어들을 그대로 갖다가 자기 나름의 개념으로 쓸 수가 있었다.
반면에 이 둘과는 다르면서, 둘 사이에 있는 현상들을 개념화해줄 수 있는 단어는 없었다.
따라서 브로델은 conjoncturel(콩종크튀르 + 접미사 el)란 말을 염두에 두고서,
<경기 변동의>라는 말의 뿌리를 찾아쓴다는 취지에서 콩종크튀르라는 말을 채택한 다음에,
그 말에 자기의 이론적 입김을 불어넣은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나는 짐작한다.
닛케이 지수로 본 일본의 conjoncturel
80년대말의 거품이 꺼진 후 "잃어버린 20년"에 돌입
아무튼, 브로델처럼 콩종크튀르란 개념을 쓰는 것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의미론적으로 일종의 사투리를 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히려, 알튀세가 썼던 것처럼, 콩종크튀르는 정세/형세/상황의 의미가 더 일반적이다.
콩종크튀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무조건, 브로델 식의 개념적 함의에 기대서만 이해한다면,
혼란이나 오류가 생길 수 있다.
M.
이제까지 내가 해놓은 것은 지식 자랑이나 지식 놀음이 결코 아니다.
위에 적어 놓은 것을 내가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어떤 단어나 개념을 만났을 때, 의문/호기심/탐구심을 갖고 스스로 찾고 탐구/공부하는 법의 사례를
내 나름대로 보여준 것이다.
다음은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이용한 인터넷 공구 목록이다.
불어 어원사전 http://www.cnrtl.fr/etymologie/
영어 어원사전 http://www.etymonline.com/
라틴어 사전 http://athirdway.com/glossa/
한자 사전 http://www.zdic.net/
중국 고전 DB http://ctext.org/zh
그밖에 구글 번역기; 네이버 불어, 독어, 영어 사전들
N.
라틴어 jugum은 한국어로 표기하면 [주굼]으로 발음된다.
그렇다, 멍에/굴레는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맑스 형님도 <공산당선언>에서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계급적-사회적 멍에를 떠나서,
개인적-사적 멍에의 차원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중에서도 정서적-아비튀스적 멍에는 어쩔 수 없다. 벗어나기 힘들다.
예컨대, 가족 관계의 멍에, 애정 관계의 멍에 등이 그러하다.
특히, 봉건적/유교적 인간관계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한/중/일에서는 선후배 관계라든가 스승-제자의 관계도 그렇다.
정도의 차가 있다 뿐이지, 모든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섹스, 돈, 권력...요즘 같으면, <신상> 및 <기변>에 대한 강박적 욕망도 결국 인간의 굴레다.
하지만, 지적-사상적 멍에는 우리가 노력하면 벗어던질 수 있다.
그리고 지적-사상적 차원에서 반복적, 지속적으로 노력을 하고나면,
점차 어느새 정서적-아비튀스적 멍에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하고자 했던 얘기의 대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첫댓글 독일어는 움라우트가, 불어는 악상 기호가 달아나 버렸다. 링크를 참조하시라.
물론, 어떤 학삐리들은 개념 땜에
새 단어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혹은 이미 있던 단어들을 조금 비틀어 변형시키거나 합성시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