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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신의 도성
1.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2.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3.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
4. 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
5. 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
6. 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
7.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8.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
9.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10.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11.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12.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13.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14.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인 시온을 노래한 시이다. 시온은 ‘요새’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은 그 이전부터 시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원래는 여브스 족이 차지하던 땅이었는데 다윗이 점령한 후로는 다윗성으로 불리다가 오늘까지 예루살렘 성으로 불려서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고 성지가 되었다. 포로기 이후 요새라는 의미의 ‘시온’이 이스라엘에게는 더 중요한 말이 되어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시온의 딸들’은 그 백성을 시적으로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시온이나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은 동의어로
쓰일 만큼 그들에게는 핵심적인 말이다.
터가 높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터가 높고 아름답다고 하였다. 예루살렘 터는 삼면이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의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다.
시편 125편 2절에는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라고 했는데 시온산, 모리아 산, 갈보리 산, 감람산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다. 적이 어디로 오든지 높은 산을 넘거나 기드론, 힌놈의 골짜기로 기어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도 예루살렘은 점령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윗에 이르기까지 약 사백 년의 기간이 흘렀음에도 이 성을 점령하지 못하다가 다윗에 와서 비로소 점령하게 되어 그때부터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사백 년을 점령하지 못했다는 것은 여브스 족이 강해서가 아니라 지형적으로 그만큼 난공불락의 성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이 성을 침략할 때도 여부스족은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라며 큰소리를 쳤다(삼하5:6). 다윗이 그 성을 점령하자 “이 성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로 이스라엘은 계속 침략을 받았다. 앗수르가 일어날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다 망했고 산헤립 왕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다른 도시들은 다 점령당하고 예루살렘만 남은 상황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하루 아침에 갑자기 18만 5천의 앗수르 군사가 다 송장이 되었고 산헤립은 돌아가는 길에 암살당했다.
그렇게 예루살렘은 또 백년 이상을 지탱해서 다윗 이후 사백 년간 점령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대한 믿음, 사랑이 그들에게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만큼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곳이다. 하나님이 내리신 땅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주인이 잘 바뀌지 않는 천혜의 요새다.
역대하 3장 1절에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하였다.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곳으로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다음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오르난의 타작 마당을 사서 거기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던 곳이다.
그 장소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이것이 예루살렘이 있는 성전터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구심이 되는 뜻깊은 곳이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이 세상에서 가장 골치아픈 곳이다.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 자치지구가 있고 성전터에는 회교의 성전이 서 있다. 복잡하게 얽혀서 건드리면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 되었다.
우리는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고 알고 있지만 코란에는 이스마엘을 바치던 장소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회교도들도 꼭 그곳에 성전을 지어야만 하는 곳이다. 지구에서 해결될 수 없는 불씨를 가진 골치아픈 곳이다.
종교 전쟁은 한쪽이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새 예루살렘이라 하여 오랫동안 이상향으로 알고 좋은 뜻으로 알지만 지구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골치 아픈 이름으로 여겨지는 곳이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라고 찬양하고 있다.
성지 순례를 우리 중에는 가본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오래전에 목사님 회갑 때 함께 가자고 비용을 모으기도 했는데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성지 순례를 다시 가자고 하는 분이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새예루살렘, 인격으로 된 예루살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된 새 예루살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하였다. 육신적이고 물질적이며 지리적인 예루살렘은 영구한 성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보존할 것이라고 알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지 않고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고 선포하였다. 그래서 장차 올 것을 찾는다고 하였다.
장차 올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된 새 예루살렘이다. 이에 대한 예표로써 예루살렘은 유지해 왔던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지리적인 땅이 아니라 인격인 줄 알았다면 지금처럼 저렇게 싸울 일이 있겠는가. 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결코 빼앗길 수 없고 이슬람도 마찬가지여서 싸움이 끝이 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 땅은 지리적인 땅이 아니라 인격이다.’ 이것이 알아져야만 세상의 싸움이 끝난다.
‘성경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 완성이 인격으로 된 새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우리는 장차 올 것을 기다린다.’ 우리는 여기 소망을 두고 있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필요는 함께 살 사람이다. 내 옆에 정말 마음에 기쁨을 주고 함께 할 사람이 있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여긴들 어떠하며 저긴들 어떠하리 하며 살지 않겠는가.
함께 할 사람,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하고 그것을 배필이라고 했고 가정이라고 했고 교회라 한다. 다 함께 할 사람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다. 함께 할 돕는 배필, 이것이 인간이 사는데 가장 기본적인 필요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가정을 주셨고 신약에서는 교회를 주셨다.”는 말이 있다. 육신적으로는 가정이 일차적으로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 이유를 제공한다.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인간에게 참된 평화와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가정,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장차 올 새 예루살렘 성의 현재적인 모습이다.
온 세계가 즐거워할 시온
2절에는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이 성을 보고 즐거워할지 모르지만 왜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라 했는가?
1절에서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성 자체를 보고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성이기 때문에 온 세상, 온 인류가 즐거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기들만의 요새였다면 그들만 좋아하고 말 일이지만 하나님이 거하는 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라고 한 것처럼 그의 통치가 미치는 곳에 다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가나안 땅을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했는가? 가나안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넓게는 가나안이지만 한 점을 찍으라면 그 약속의 땅은 헤브론이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을 향해 가서 거기서 거주했고 막벨라 굴을 사서 사라의 매장지를 삼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까지 매장지로 삼았던 곳이 헤브론이다.
헤브론은 목적지다. 헤브론은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이다. 왜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는가? 객관적으로 봐서는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다. 광야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그렇게 이름붙일 수 없는 곳이다. 그렇지만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간 하나님과 교통하는 훈련을 했던 것이다. 만나를 주신 것도 그렇다 했다. 신명기 8장 2-3절에는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만나를 먹고 생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백성, 하나님과 교통하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사십 년 광야길을 걷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 훈련 후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헤브론의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에덴은 기쁨의 곳이다. 혼자 있으면 무슨 기쁨이겠는가. 누가 있어서 기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어서 기쁨의 곳이다.
이스라엘은 광야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양식이다. 에덴에서는 생명나무를 먹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양식, 관계에서 발생하는 양식을 먹고 산 것이다. 그 반대가 단절이다. 죽음은 단절이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뭔가 단절이 생기는 곳에는 반드시 선악과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온 세계가 즐거워할 시온, 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해서 관계의 축복을 누리는 세계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세상이 버린 예수,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올 수 없는 예수, 모든 사람이 조롱했던 이 사람 안에서 내가 발견되려 하는 것은 그가 계신 곳이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을 때만 사람이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하게 되고 욕을 들어도 상관이 없어진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오히려 그것이 거기서 떠올라지는, 거기서 생각나는 한 사람 때문에 오히려 소망이 있게 되는 것이다. ‘아, 내가 저 사람 안에 있구나!’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그것이 없으면 그 자리는 모든 사람에게 절망이다. 누가 그 자리를 원하겠는가. 멸시, 비난, 조롱받는 것을 아무도 원치 않는데,
그 자리에 가 보면 우리에게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게 된다. ‘내가 그 사람 안에 있구나. 그가 계신 곳에 내가 있구나!’ 그래서 그가 높이 올리워지신 것을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배필로서, 그리고 형상으로서 이 사람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체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관계다. 이 관계가 온 세상이 즐거워할 축복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람으로 세상에 가게 되면 어떤 사람도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게 된다. 사람이 가장 필요한 것이 관계를 가질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될 자산이다.
온 세계가 즐거워할 시온,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과도 살았는데 누구와 못살겠는가! 남자들은 지갑에 아내의 사진을 넣고 다니다 힘들 때마다 꺼내 보면서 ‘내가 이 사람하고도 사는데 누구와 못살겠는가.’ 하며 힘을 낸다고 한다. 여자들도 그렇다고 한다. 남편 사진을 갖고 다니다 힘들 때마다 꺼내 보면서 ‘내가 이 인간도 사람 만들었는데 누군들 못 만들겠는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도 살아보았는데 어느 누구와 못 살겠는가! 레위기에는 번제와 소제를 드리라 했고 그것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향기로운 냄새라 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이 인격으로 보이면, 우리가 그 인격이면,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인격이라면 누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겠는가. 어디를 간들 누구를 만난들 문제가 되겠는가. 모든 관계를 푸는 열쇠가 레위기에 있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다.’ 이 표현이 막연하고 멀 수 있지만 사람다워져서 참사람의 향기를 내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상태가 되면 누구하고라도 살 수 있다.
시온, 예루살렘,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기쁨의 곳 에덴,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할 수 있기에 나오는 기쁨이고 만족이다. 그래서 ‘온 세계가 즐거워할 시온’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
실제로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 온 세상이 즐거워할 만한 사회가 어디 있는가?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본다고 하였다.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 새 예루살렘인데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사람 옆에 하나님의 장막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장막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되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담겨지는 그릇, 보화를 가진 질그릇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이 사실밖에 없는데 그 다음 4절에는 모든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하시고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있지 않다 하였다. 5절에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신다. 어떻게 새로워지는가? 물건이 바뀌거나 장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위치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위치가 바꾸었을 뿐인데 용도가 바뀌고 가치가 바뀌고 내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뀌고……, 그래서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쓰레기인 줄 알았던 것이 보화로 보이면 인생은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행동방식이 바뀌고 가는 길이 바뀌고 다 바뀌게 된다. 그래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신다는 것이다. 시작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인데 이것이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는 데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다. 이것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의 눈이 바뀌고 길이 바뀌고 사는 모든 것이 바뀔 수밖에 없다.
장막이 되었다는 말이나 그릇이 되었다는 말이나 비유는 다르지만 같은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장막이 되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담는 그릇이 되면 우리에게서 온 세상이 기뻐할 것이 흘러넘치게 된다. 이 복된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살게 되면 우리 인생에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축복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 이것이 새 예루살렘 성의 소망이다.
우리도 좀 먼지도 나고 소음이 나더라도 결국 이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될 줄 믿는 것은 우리 중에 누구도 크고 위대하고 잘난 것에 소망을 두거나 그런 것을 보러 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어린양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맛본 사람들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 조롱받는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광을 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그리로 가게 되어 있다. 비록 지금은 다소 나와 코드가 안맞더라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사람들이다.
어찌 다 나와 같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예수 안에서 보면 우리는 다 한 사람이다. 우리 중에 누가 누구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너는 나와 종이 다르다.” 이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나는 주님을 따라간 것밖에 없는데 교회가 이렇게 나타났다.”고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교회 교회”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군지 알고 인생의 올바른 위치에 서 있는데 함께 할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같은 가치를 가지고 보니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보이는 것이다.
적어도 여기 들어온 사람들은 다 바벨이 아니라 어린양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다소 옛 습성이 남아서 다른 것을 보고 좋아하더라도 그것은 ‘공사 중’ 간판을 써붙인 것과 같으니까 ‘지금은 좀 그렇지’ 하고 봐 주면 여유롭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다 예수 안에서 한 운명으로 보여 줄 사람이다. 그 운명 밖에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올 수 없는 이 운명밖에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다리면 그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올바른 위치를 발견하는 사람으로 살 때 참 교회 생활, 참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생활을 누리게 된다.
교회는 역사의 과정 속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이다. 이 성은 우리가 함께 살아갈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나님 앞에 올바른 위치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함께 살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를 발견한 사람으로 있을 때 참 교회 생활, 새 예루살렘 성안에서의 생활을 누리게 된다.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
14절에는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인도하셔야 하는가. 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와 연합하고 동행하는 사람으로 있어야 하는가?
사람은 늘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란다. 상태가 불완전할 때는 변치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활이 안정되면 하나님이 없어도 내 터가 안정되니까 하나님이 필요없게 된다. 소득 3만 불이 넘어가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한참 부흥할 때 공교롭게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맞물려서 경제가 성장하면서 교회에서는 삼박자 구원을 외쳤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삼박자 구원이 되었는지 경제개발이 잘된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런데 교회가 많아지다 보니까 산업화의 다른 문제들이 생겨날 때 교회는 산업화와 함께 문제의 온상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셔야만 하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길을 갔더라면 그것과 전혀 다른 양상이 되었을 것이다. 변치 않는 것, 이것이 사람의 갈망이다. 왜냐하면 나도 변하고 내 환경도 변하기 때문이다.
20대 때는 방향을 잡지 못해 고민하고 시행착오도 겪는다. 모호한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 방황의 시기다. 그렇지만 20대 때가 가장 생동감이 있고 창의력이 있는 때다. 모호함이라는 것이 창의력의 원동력이 된다. 기업에서 중요시하는 것이 창의력이다.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Facebook을 가보니 직원들이 대학생들 같았다. 백팩을 메고 아무데나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사무실은 마치 카페나 최신대학 같은 분위기고 평균 연령이 25-26세 정도였다. 서른이 넘으면 매니저급으로 가지 않으면 있을 자리가 없을 정도라는데 그것은 회사가 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서 창의력이 나오기 때문이다. 모호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들인데 거기서 새로운 것들이 나온다. 그래서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는 이십 대들에게 “사실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무엇을 해도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이것을 기억하면 훗날 편하게 결정하지 않겠나.”라고 말해 준다.
그런데 사십만 넘어가도 실수나 실패가 두려워진다. 확실한 것만 하려고 하고 안정 지향적이 된다. 그러다 보니 생활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되어 버린다. 한 바퀴 돈 것과 열 바퀴 돈 것이 똑같은 패턴이니까 일 년이 지나도 하루가 지난 것 같고 십 년을 살아도 일 년을 산 것 같이 되는 것이다.
똑같은 날이 반복되니까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게 된다. 아이러니다. 안정되면 좋을 것 같은데 사실은 움직이지 않으면 생명은 굳어진다.
나는 내 어깨를 만져보고 ‘아직도 내 근육이 살아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물리치료사가 만져보더니 왜 이리 딱딱하냐고 했다. 나는 근육이 좀 많아서 딱딱한 것 같은데 그것이 근육이 아니라 굳어서 그런 것이지 근육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굳어진 것을 근육으로 착각하고 살기 쉽다. 근육이 남아야 되는데, 근육이 삶을 기억해야 되는데 우리도 삶이 익숙해지면 굳어져서 그렇게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세상(코스모스, κόσμος)이라는 헬라어의 원래 의미는 질서, 규칙성이다. 꾸며 만든 것, 인공적인 힘이 가해져서 규칙적이 되고 질서가 잡힌 것을 세상(코스모스)으로 번역했다.
코스모스의 반대말이 카오스다. 옛날에 카오스 세탁기라는 것이 있었다. 규칙적으로 도니까 때가 안빠진다고 불규칙적으로 움직여서 때를 속속들이 뺀다는 뜻이다. 카오스의 의미는 ‘혼돈, 불규칙’이지만 혼돈이라 해서 무질서가 아니라 다른 질서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질서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이 “이 교회에 와 보니 질서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도 질서가 있다.”고 한다. 무질서한 그 속에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카오스의 힘이다.
어느 책에서 “카오스의 생명력은 무질서다. 그런데 카오스가 질서를 가지려고 하는 순간 생명은 사라지게 된다.”라는 깜짝 놀랄 문구를 보았다. 나도 보자마자 ‘아, 그렇구나.’ 싶었는데 우리 형제들이 어려운 말을 다 알아듣는다는 것이 놀랍다. 심오한 철학책이 아니라 경제학 책에 나오는 문구였는데 깜짝 놀란 것이 이 세상도 경제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이런 생명의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질서정연하고 규칙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순간 그 속에 있는 생명력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이다. 우리가 무질서한 것 같지만 그 속에 생동감이 있고 살아있는 것이 있다.
어떤 교파, 어떤 종교든 이 모든 분야에서 어떤 질서를 가지려고 하는 순간 코스모스가 되어 버린다. 예수 이후에 초기 교회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가졌던 생명력, 사도행전에 나오는 생명력이 어디로 갔는가? 이것이 의아한데 그것은 확실하게 무엇을 붙잡아 두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믿는다.’ 하고 확실하게 붙잡아 두려고 하니까 교회가 코스모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하고 교리화하고 지식화, 제도화하면 안정되고 커질 수는 있어도 생명력이 사라진다. 고정되고 굳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교파나 어떤 종교도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어느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불교의 지난 역사를 말하면서 부처님이 설법을 베푸셨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지식화 되었고, 대승불교가 나와서 새로운 것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또 교리화 되었다고 하였다. 기독교만 그런 줄 알았는데 불교에서도 그렇게 교리화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데서든 굳어지게 되면, 질서와 안정을 가지려고 하면 그렇게 되어 버린다. 코스모스의 질서를 가지려고 하면 카오스의 생명력을 잃는다.
하나님은 무엇에도 고정되실 수 없는 분이다. 오늘 저주를 내리겠다고 하셨을지라도 내일 회개하면 복을 주시는 분이다. 땅에 있는 무엇으로도 형상을 만들 수 없는 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에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분을 시인하고 그분 앞에 굴복하고 따르는 것밖에 없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이는데 우리가 무슨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자고 할 수 있겠는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십사만 사천은 어린양이 어디로 이끌든지 따르는 자들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다 하셨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바람이 어디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내일 어디로 갈지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른다. 내가 나를 모르는 사람으로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으로 서 있는 것이고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사람이 굳어지지 않자면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셔야만 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했다고 ‘이제는 됐다.’고 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이 인도 앞에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내 제한을 깨닫는 것이다. 내 제한, 이것은 공간적인 제한일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제한이고 앎의 제한이다. 우리는 다음 순간을 모르는 이 제한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절대성과 영원성은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은 상대적이고 제한 속에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자리에 두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그 이끄심 안에 있는 사람, 그와의 연합이 인생의 시작이 되고 마침이 되는 사람으로 있게 될 때 우리는 왜 그 자리에 있어야 되는지, 예수 안에 있어야 되는지 명백해지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셨다. 마지막까지도 모르셨던 것이다. 자기가 굳게 믿었던 모든 것이 다 내려놓아지는 자리였다.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다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하는 굳은 믿음, 하나님에 대한 굳은 믿음,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 하신 이 굳은 믿음조차도 다 내려놓아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안에 포함되게 되었다.
우리가 이 사람으로 산다는 것, 어제까지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했을지라도 오늘은 또 다시 시작하는 사람, 이것이 굳어지지 않은 사람이다. 견고함이나 확고함을 새 예루살렘 요새 같은 곳에서는 찾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안에서 이 사람을 찾아서 이 사람 안에서 안식하고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안식과 축복을 누리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 기 도 ]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늘 견고한 터를 바라고 요새를 바라지만 이 땅에 영구한 도성이 없고 장차 올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이끄시든지 우리가 이끌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것만으로 우리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동으로 이끄든지 서로 이끌든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이끄시는 이끄심 안에서 우리의 모든 굳어진 것이 풀어지고 하나님 앞에 갈 바를 모르는 사람으로 있기를 원합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을 통해서 허다하게 생육하고 번성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