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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봄집회
신령한 복
2.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후사가 됨
<에베소서 1:7~23>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에베소서 2:1~10>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이다. 이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이 된다는 말씀을 하겠다. 기업은 후사라는 뜻이다. 상속자, 후계자, 계승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 영광의 찬송이 되기 위해서 후사가 된다. 이 제목만 들어도 우리에게는 축복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계승자요, 그 유업을 이을 자라는 것은 창세기 1장 26절에서 이미 예정된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하는 이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땅위에서 하나님의 계승자가 되게 하자는 말씀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어지기 이전부터 예정되었던 일이다.
이런 복을 놔두고 모르니까 口(입구) 밑에 田(밭전)자가 있는 복(福)만 찾고 있다. 이것이 안타까운 일이고, 오늘 우리가 이 세대 가운데서 분명하게 후사로서의 영광을 선포하고 전시해야 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한다.(엡1:7) 여기서 말하는 죄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죄가 아니라 ‘허물’을 이야기한다. 발이 미끄러졌다, 실족했다, 실수했다, 잘하려고 했지만 잘 못됐다는 것이 허물이다. 구속 곧 허물의 사함을 받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바울은 일부러 허물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 같다. 왜 그런가? 우리 조상 아담에 대해서 너무 가혹하게 말하기가 그러니까 실수했다는 표현을 한 것 같다. 그보다도 하나님의 이 영광스러운 은혜의 예정을 이야기하면서 죄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좀 그랬기 때문에 허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거룩하고 너무나 신성하고 너무나 흠이 없고 너무나 완전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너무나 나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그런 것 같아 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허물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 같다.
여기서 ‘사한다’는 말은 해방된다는 뜻이다. 허물의 잘못에서 해방된다는 의미이다. 이 해방한다는 말은 또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뜻이 있다. 포기한다, 허락한다는 말이 된다. 허물을 가지고 단단히 붙들어 매어 여죄를 추궁하려면 끝이 없지만 하나님이 이것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냥 내버려 둔다, 포기한다, 간과한다는 뜻이다. 허물을 사함 받았다.
‘구속’이라는 말도 비슷한 뜻이다. 이 말은 해방한다는 말이다.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팔려간 사람의 몸값을 대신 지불해 주고 찾아오는 것을 구속이라고 한다. 무엇 무엇으로부터 풀어낸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안에서 후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자기의 상속자가 될 사람이 지금 어디에 끌려갔는데(팔려갔는데) 후사를 이어야 되기 때문에 가서 돈을 주고 빼온 셈이 되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팔려갔으니까 돈을 주고 사온다는 뜻이다.
인간은 결국 선악과라는 그럴 듯한 상품에 홀려서 팔려갔다. 선악과와 자기 자신을 바꾼 셈이다. 자신의 영광스러운 신분과 선악과를 바꿔 버렸다. 하나님의 후사가 될 후사의 직분과 선악을 아는 지식을 바꾼 셈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잘못알고 집문서를 맡기고 과자를 사먹은 것과 똑같은 것이다. 옛날에는 등기문서가 재산이었다. 요즘에는 그것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다. 등기소에 다 있기 때문에 3만원만 주면 새로 만들 수가 있다. 문제는 등기소에 등기가 되어있는가, 안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 지금은 문서가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지 않는데, 옛날에는 문서를 가지고 사고팔고 했다. 등기소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름판에서 그것을 내놓고 팔아먹고 노름을 했었다. 집문서, 논문서를 내놓고 돈을 빌려서 노름을 했었다.
선악과의 매력에 이끌려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자기의 신분을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신분을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결국은 그 논과 밭을 다시 찾아오려면 내가 빚쟁이에게 돈을 주어야 찾아 올수 있는 것이다. 구속은 그런 개념이다.
상속하고 계승할 자인데 그만 잘못해서 그 권리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이 권리를 그냥 가지고 올 수 없으니까 돈을 주고 사온다는 뜻인데,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왔는가? 법적으로만 생각하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의 신분을 놓고 거래를 했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진 일은 무엇인가? 선악을 아는 지식이 너무너무 매력적이어서 팔려갔다. 그래서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소망, 야망에 매혹되어 있었는데, 십자가 안에서 예수께서 죽으심을 보이심으로써 그것이 매력적인 것도 아니고 그것이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헛것이었음이 보여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후회하게 된 것이다. 내가 잘못 팔아먹었음을 헛것을 보고 팔아먹었음을 생각하고 우리가 돌아오게 되는데, 돌아오게 될 때는 그분은 이미 그 값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값을 지불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구속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두 법적으로만 생각하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구속하셨고, 사랑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구속하셨다고만 생각한다. 물론 사랑이 많으시니까 구속하셨지만 구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것은 그의 죽으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피로 우리가 구속 받았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제대로 봐야 된다. 그것을 못보면 아무리 법리적인 것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교리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자기는 여전히 팔려간 상태에 있으면서 여전히 선악과를 좋아하고 여전히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셔서 나를 위해 건져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율배반이다. 생각 속에는 그렇게 있고 실제로는 다른 세상에 가 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의 상태이다. 교리상으로는 맞는데 실재는 없다.
십자가는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인생을 거기에 폭로한 자리이니까 선악을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인생을 폭로하는 것이다. 네가 무엇이냐를 폭로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폭로할 수도 없고, 내가 나를 폭로시킬 수도 없다. 왜? 내가 그것이 좋은데 어떻게 폭로하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나 대신 폭로하셔서 그 폭로하신 분 안에서 보니까 내가 폭로된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될 줄로 알았던 내가 나 아닌 그분에 의해서 드러나 버렸다.
여기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왔나니라고 하는 것과 같이 한 사람 안에서 우리는 다 하나님 같이 될 줄 알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또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하고 그리스도라고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분명 베드로가 말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 말을 했다. 단순히 변화산에서의 그것만 보고 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전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봤기 때문에 저가 누구길래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느냐고 감탄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을 뵌 태가 복이 있다고 찬송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를 들면서 호산나 주여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고 찬송을 했던 것이다. 이런 모든 과정들을 다 본 사람이다. 그러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의 그 모습을 보니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것이다. 흙으로 지어진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죽은 한 사람에 불과했다. 여기서 모든 인류가 다 폭로된 것이다. 일부러 외면하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폭로돼버렸다. 이미 우주적인 이 큰 마당에서 우리를 대표한 한 사람에 의해서 모든 인류는 이미 폭로돼버렸다. 내가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이제 안되는 것이다. 감추려고 해도 안되고 감싸려고 해도 안되고 위장하려고 해도 안된다. 이미 폭로가 돼버렸다. 이것을 구속이라고 한다.
거기서 내가 정신을 깨닫고 돌아오는 것이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다. 탕자가 돈이 끝없이 나올 줄 알고 있다가 끝없는 돈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쓰다보니 곶감 빼먹듯이 없어졌을 것이다. 빈털터리가 되어 돼지우리 청소를 하고 살면서 자기 신세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임을, 아버지는 부자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돌아갔다.
모든 인류는 예수 앞에서 나는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는 자구나, 선악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그분이 대가를 지불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이것은 때가 찬 경륜을 위해서 예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에 통일되게 하심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람이 구속되면 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되는가? 이것은 인권회복을 의미한다. 우리가 구속받은 것은 인권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후사가 될 수 있는 내 권리를 회복한 것이다. 이것이 내 인권회복이다.
인권회복이 곧 우주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주질서는 인권에 의해서 축을 이루어 움직이게 되어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위치를 잃어버리니까 축이 없어져버리니까 이것이 그만 어디로 돌아가는지 모르고 돌아갔다. 천지만물을 보면 그렇고 우리 안에 있는 질서를 봐도 그렇고 모든 것을 보면 사람이 올바른 위치에 있으면 우리 주변이 다 올바르게 돌아간다. 내가 위치를 이탈해버리면 집안이 엉망되어 버리고 만다. 가장은 가장의 위치가 있고 엄마는 엄마의 위치가 있다. 에를 들어 가장이 가장의 위치를 이탈하여 가장 노릇을 못한다면 집안이 엉망이 돼버리는 현상이 생긴다. 질서가 없어져서 뒤죽박죽이 돼버린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대들고 욕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그렇게 못하는데 아버지가 없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해버린다.
이 우주 안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이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에 사람이 제 자리에 있어야 이 우주 질서가 온전하게 움직여 나간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나 천사들이나 땅에 있는 만물들이나 이것들이 모두 사람의 중재를 통해서 사람의 중추적인 역할을 통해서 중재가 되게 되어있는데, 사람이 그 위치를 이탈해버리고 말았다.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질서가 없어진 것이고, 대 혼란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하늘로 올라갈까 땅으로 내려갈까를 늘 혼란하고 있다. 역사 안에서 인류의 정신사를 보면 한 때는 땅속으로 기어내려 가다가 지렁이 같이 되면 인간이 지렁이 같아서야 되겠느냐 하고 올라간다. 올라가다 보면 천사같이 되는데 인간이 천사같이 되는가? 안된다. 지렁이 같이 되었다가 천사같이 되었다가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서도 그렇고 인류사에서도 그렇고 전부 그렇다. 왜냐하면 축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몸에 문제가 생기면 어떤 문제인가 하면, 위아래가 서로 교통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한방으로 이야기하면 위에는 불이고 밑은 물이라고 한다. 물과 불이 교통을 해야 따뜻해지는데 교통을 못하면 불은 불대로 타버리고 물은 물대로 얼어버리니까 한쪽은 북극이고 한쪽은 남극이 돼버리면 병이 생긴다. 너무 차니까 병이 생긴다. 너무 뜨거우니까 병이 생긴다.
이 죄가 누구에게 있는가? 중간에서 중재하는 놈에게 있다. 중앙에 土(토)라는 놈이 있는데 이 놈이 중재를 잘하면 잘 돌아가고 이 놈이 중재를 못하면 제각기 노는 것이다. 흙이 있으니까 물과 태양이 거기서 생산을 하게 된다. 태양 빛이 비취고 습기가 있으면 적당한 온도에서 생물이 생성한다. 그런데 그것이 안되어 버리면 불은 불대로 내리쪼여 불덩이를 만들어버리고, 물은 물대로 내려와서 홍수가 돼버려 병이 나게 된다.
중간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몸은 위가 중간에 있다. 위장이 나쁜 사람은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병원을 가거나 한의원을 가면 누가 뭐라고만 해도 다 맞는다. 어디 아프냐고 하면 그것도 맞고 이것 아프냐고 하면 이것도 맞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이 다 나쁘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사람이 맞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이 맞다. 어떤 사람은 맥을 짚어보고 신이 허하다고 하면 그것도 맞고, 어떤 사람은 폐가 허하다고 하면 그것도 맞다. 어떤 사람은 간이 허하다고 하면 그것도 맞고 다 맞는다.
왜 이 모양이 됐는가? 그것은 중재하는 중심부가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제각기 놀아버린다. 이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중심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중심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제 자리에 없으니까 다 흔들려서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인권이 회복되면 우주 질서가 회복된다. 내 위치가 제대로 되면 내 주변이 다 회복된다.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다. 때가 차서 이제 하나님께서 우주 질서를 회복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구속을 한 것은 하나님이 이 우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사람이 자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자기 자리로 돌아오게 해야만 우주 질서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은혜의 풍성을 따라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함이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은 것은 우리의 어떤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그분이 우리를 대표하여 자기를 희생하여 우리를 폭로함으로써 비로소 내 신분이 무엇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내 신분은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이고 내 신분은 흙으로 지어진 자고 하나님이 없으면 안되는 자고 그분의 생명을 통해서 통치될 자라는 우리의 정체성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알면 되지 더 이상 어떻게 자기를 알려고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 이 정도 알면 된다. 더 알아서 물속을 뛰어다니겠는가 아니면 공중을 날아다니겠는가? 아니면 100년 살 것을 200년 살겠는가? 더 알아보았자 아무 소용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더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것만 확실히 알면 된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발견되면 이 정도 알면 다 아는 것이다. 더 알 것도 없다. 더 아는 것은 자기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 정체성을 알면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무엇을 하는 그분을 통해서 대리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 영광의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행하지만 그분의 생명을 통해서 대리권위를 행사하기 때문에 찬송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그분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했기 때문에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했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께로 영광이 돌아간다.
우리가 예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은 결국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이다. 영광의 찬송이 되게 했다. 우리가 영광의 찬송이 되면 하나님이 당연히 영광의 찬송을 받으시는 분이 된다. 구속하신 이가 영광을 받게 되고 우리를 창조하신 이가 영광을 받게 된다.
이것은 때가 찬 경륜을 위해서 예정하신 것이다.
2장에 가니까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한다. 죄가 추가되었다. 너희는 그때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다. 그 영을 따랐다는 것이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한다. 그때는 언제인가? 구속받기 전이라는 말이다. 구속받기 전에 우리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갔던 사람들이다.
처음에 우리는 허물이었지만 허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죄가 되었다. 처음에는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속은 것까지는 큰 잘못이 없다. 단수가 낮으니까 속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를 단수를 낮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천사보다 단수가 낮으므로 당연히 속을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아까 죄를 사했다고 할 때 내보내준다, 그대로 둔다, 포기한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도 어떤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연약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바둑 9단자에게 1단인 내가 어찌 속지 않겠는가. 방법이 없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각성제를 먹고 노력을 해도 단수가 낮으면 속게 되어있다. 속지 않을 수가 없다. 진짜로 사기꾼을 만나면 속지 않을 방법이 없다.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속지 않겠지 하겠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을 줄 알고 속이는데 어떻게 속지 않겠는가. 방법이 없다. 만나지 않아야 되지 만나면 속는다. 그러므로 거기까지는 큰 문제가 안된다.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허물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서 추가된 것이 사탄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그것이 죄가 된 것이다. 실수는 했지만 실수까지는 봐줄 수 있지만 사탄을 따라 가버렸기 때문에 피해가 막심한 것이다. 하나님 경륜의 피해가 막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게 된 것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기 때문이다.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우주 경영이 망가지고 만다. 큰 문제가 생긴다. 용서를 해주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이 이미 망가져버려다. 그러니까 이것은 죄 값을 받아야 된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한다. 죽은 자라는 뜻이 여기서도 분명하다. 우리가 육신으로 죽은 것이 죽은 것인가? 어떻게 죽은 것이 죽은 것인가? 하나님에 대해 끊어져버린 것이 죽은 것이다. 발이 미끄러져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과 멀어져 버렸다. 이것이 바로 죽은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떠나 버린 것, 하나님의 경륜에서 떨어져버린 이것이 바로 죽은 것이다. 아무리 내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내 손에서 떠나버리면 나에게는 죽은 것이다. 지금 필요한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이 지금 남의 손에 가버렸다면 다른 곳에 놓아두고 지금 없다면 죽은 것이다. 새로 사야 된다. 미국에 내 물건이 하나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 물건을 사용하려면 당장 가져올 수 없으니까 사야 된다. 그 물건은 지금 나에게 죽은 물건이다.
하나님에게 죽은 것이 죽은 것이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말이 그 말이다. 절대로 목숨에 관계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은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자기의 주님으로 따랐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했고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살리는가? 바울은 이 심각한 문제를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했다. 내가 아무리 하지 않으려고 해도 내 속에 거하는 어떤 것이 그것이 나를 사로잡아 간다고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절묘한 하나님의 대책이 없이는 살아날 수가 없다. 도저히 가망성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살리는가? 성경에 보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한다.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사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한다. 이 ‘함께’라는 말에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한다. 나를 어떻게 따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나를 깨닫게 하려면,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해버리면 되는데 깨닫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깨닫게 해버려서 사탄에게서 돌아서면 될 일인데 하나님도 스스로 나 혼자 깨닫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이 자기가 깨닫겠다는 것인데, 하나님도 못한 일인데 얼마나 어렵겠는가? 하나님도 못한 일을 자기가 한다는 사람은 참 똑똑한 사람들이다.
아담도 매우 똑똑했던 모양이다. 온 인류 가운데 제일 똑똑한 사람이 아담 같다. 그 똑똑한 사람이 속았다. 아담은 우리 모든 인류를 대표한 사람이다. 인류 중에 가장 나은 사람이라는 말도 된다. 첫 열매다. 그런데 그 사람도 속았는데 그 나머지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엄감생신이라고 감히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담이 속고 싶어 속았겠는가? 속을 수밖에 없어 속았을 것이다. 그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을 어떻게 내가 속지 않겠는가? 아담이 이웃사촌이라면 모르지만 아담이 나 자신이다. 내 자신 중의 최선이 아담이다. 내 자신 중의 최선이 속았는데 내가 또 최선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면 또 나의 최선의 최선의 최선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은 스스로 타락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업보를 얻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 업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보다 큰 자가 나보다 나은 자가 와서 뒤집어 씌위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나보다 큰 자가 있기 때문에 속은 줄도 모르는 것이다.
너무나 유명하게 사기를 치면 내가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고 아주 행복하고 즐겁게 사기를 당한다. 이번에 어떤 사람이 사기를 쳐서 12년 징역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따라 다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무너무 황홀하고 행복하고 미쳐있다. 그 사람에 대해 너무나 위대한 사람이고 너무나 대단한 사람이고 너무나 진실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우리 민족의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앞날에 희망의 길이 열려 자나깨나 그 생각뿐이다. 드러날 때까지 아주 즐겁게 행복하게 속은 것이다. 이번에 나온 것을 보니까 20만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20만명이 행복하게 즐겁게 사기를 당했다. 오늘 거짓말하고 내일 탄로가 날 사기는 아주 최하위 사기꾼이다. 진짜 사기꾼은 행복하게 속이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보다 사탄은 얼마나 단수가 높겠는가?
아담은 즐겁게 먹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자기도 먹고 자기와 함께 하는 아담에게도 주었다. 얼마나 좋으면 자기의 가장 좋은 사람에게도 주었겠는가. 이렇게 우리가 덮어씌워졌는데 자기 힘으로 벗는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지혜를 얻어 지혜로 깨닫는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아담 중의 더 아담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도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도 나를 개별적으로 벗어나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함께 밖에는 안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 우리는 죽지도 않았는데 죽어버린 것이다. 나는 죽은 일도 없는데 죽어버린 것이다. 나는 갈보리(골고다)에 간 일도 없는데 죽어버린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살게 만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묘한 대책이다.
우리에게 공부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깨달으라는 것도 아니고 노력하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한 사람을 세워놓았고 그 안에 우리 자신이 다 포함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남을 폭로하다가 안되면 자기를 드러낸다고 온갖 이야기를 다 한다. 부정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다 한다. 그러면 자기는 완전히 옷을 벗었고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발가벗은 것이 아니다. 발가벗은 것 뒤에 또 숨어있다. 그 뒤에 숨으려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진짜로 자신이 그러하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 그 뒤에 숨으려는 것이다. 자기를 위장하는 것도 그 뒤에 숨으려는 것이다. 자기를 벌거벗기는 것도 그 뒤에 숨으려는 것이다. 참 교묘하다.
사람은 살기 위한 노력이 최후까지 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는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를 위장할 때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고, 나를 폭로할 때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 자기가 없어지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찌해도 항상 그 뒤에 숨어있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했을 때 나무 뒤에 숨었다고 했다. 내가 두려워 숨었다고 했다. 자기가 폭로되는 것은 최후까지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죽지 않을 만큼만 폭로하는 것이다. 다 폭로하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바늘로 내 살을 찌를 때 죽지 않을 만큼 찌르지 완전히 죽을 정도로 찌르는 사람은 없다. 할복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만 심장을 찔러서 자살을 한 사람은 별로 없다. 할복자살을 하면 다 죽지는 않은 것이다. 할복한 결과로 죽는 것이지 그 자체가 바로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끝까지 자기를 지키려고 한다. 악한 것이 아니고 생존(생명)의 본능이다. 어떻게 자기를 폭로해놓아도 자기는 그대로 존재할 뿐 아니라 숨을 자리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아담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떻게 가리겠는가? 못 가리겠지만 나무 뒤에 숨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구제불능이다. 내가 나를 해결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나를 해결해준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나님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밖에 나를 살리실 수가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일으키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한다. 살렸다는 alive라는 말은 생명에 관계된 말이고, 일으켰다는 말은 잠자는 것을 깨웠다는 뜻이다. 하늘에 앉혔다는 이 말은 같이 동석했다는 뜻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만들어버렸다. 아담 안에서 저절로 우리가 하나 되었다. 노력해서 하나 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하나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도 저절로 하나 되게 만들어놓았다. 아담의 하는 일이 너무나 위대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뜻을 반대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먹은 아담이 우리 눈에 잘못했다고 보이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고 그것은 너무나 위대한 선택이다. 모든 인류가 볼 때 그 선택은 너무나 위대한 선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가 거부할 수가 없다. 한 사람 안에서 우리가 정죄된 것처럼 한 사람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바로 그래서이다. 우리는 아담도 거부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속을 때도 거부할 수가 없어서 속았고, 구원받을 때도 거부할 수가 없어서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된 일이 아니다. 우두머리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아담이라는 우두머리에 의해서 우리는 죄인이 되었고, 그리스도라는 우두머리에 의해서 우리는 의인이 된 것이다. 의인이 별 것이 없다. 예수를 보고 ‘당신이 진실합니다’하면 의인이 된다. 다른 것이 없다. 그 옆에 있던 죄인이 당신이 행하신 일이 옳지 않은 것이 없다는 한 마디를 했는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간단한 일 같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고, 그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아담을 보고 위대한 선택이라고 하면 우리는 죄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보고 ‘당신은 진실합니다’하면 의인이 된다. 아주 간단하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십자가에 죽은 그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음을 받을 만한 그 사람도 십자가에 매달으니 저렇게 죽는 것임을, 저것이 바로 내 인생임을, 인류는 다 똑같은 것임을 시인하면 우리가 의인이 된다. 왜 우리가 불의해졌는가? 그것을 부인했기 때문에 불의한 자가 되었다. 다른 것을 해서 불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 내가 깨달으면 구원받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지혜를 가지면 구원받는가? 그렇지 않다. 지혜도 육신으로 살기 위한 것이다. 밥이 우리 육신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지혜와 지식도 살기 위해 필요하다. 멍청하면 안되기 때문에 지혜와 지식이 필요하지 이것이 우리 인생을 회복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을 회복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참으로 회복되려면 그분 안에서 밖에 안된다.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지 않는 한은 안된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것을 떠나면 멸망이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며 이 ‘함께’라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이 없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것이 없다. 내가 스스로 지혜를 알아서 우리 조상 아담, 다시 말해서 인류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자가 속았던 것을 깨닫고 벗어나오는 일이 과연 우리 인생에서 가능하겠는가? 나보다 최선인 아담(인생)이 나의 최선의 최선의 대표자인 아담이 속은 것을 내가 오늘 지혜를 가지고 뒤바꾼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하나님도 못한다. 하나님도 율법을 통해서 깨닫게 하려고 얼마나 이야기를 했는가? 알고 보면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이 그 말씀이다. 너는 속았으니까 깨달아야 된다는 말씀이다. 아무리 해도 안됐는데 이제 와서 되겠는가? 내가 스스로도 안되고 하나님도 스스로 나를 독립적으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그 한 사람이 필요했다.
이 한 사람! 대표자인 한 사람이 필요했다. 아담 한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한 사람이 필요하다. 완전하게 죽은 한 사람이 필요하다. 완전하게 죽고 완전하게 산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면 이 사람 안에 함께 들어가니까 다 쉽다는 것이다. 사실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보니까 나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노력할 것도 없다.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십자가 앞에 가서 죽은 사람을 보고 무슨 노력을 하겠는가? 기도를 하겠는가? 찬양을 하겠는가? 사정을 하겠는가? 무슨 노력을 하겠는가?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 오직 그 한 가지가 내 눈에 보이면 된다. 이보다 쉬운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 자기의 참 자기를 알기 위해서, 자기의 자아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10년도 좋고 20년도 좋고 일생도 좋고 일생에서 안되면 내생에 가서 한다. 90세쯤 된 어떤 스님이 왜 극락에 가려고 하는가 하면 극락이 최종적인 종점이 아니라 극락에 가야 인도환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으로 환생을 해야 또 공부를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혜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을 왜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분들에게 복음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된다. 함께 갑시다, 내 아버지에게로 가자는 복음을 전해야 된다. 그런데 함께 하지 않으려니까 그렇게 한다. 나는 나지 왜 함께 하냐는 것이다. 함께 하면 왜 안되는가? 내 공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포함되면 내 공은 하나도 없어져 버린다. 내가 한 것이 없으니까 내 공이 없다. 사람들은 자기의 공을 세우려고 기어코 자기가 하겠다고 한다. 어린 아이들도 도와주겠다고 해도 기어코 자기가 하겠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공을 세워보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성장과정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가 내 인권을 회복하는 길에는 나 혼자 안된다는 것이다. ‘함께’여야 한다.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한다. ‘함께’만 되면 모든 것이 다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한다. 왜 이렇게 하게 되었는가? 그분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마다, 20세기이면 20세기 세대마다 21세기이면 21세기 세대마다 자본주의 세대이면 자본주의 세대마다 공산주의 세대이면 공산주의 세대마다, 모든 세대에 나타내려 하게 한다는 것이다. 세대는 이런 세대도 있고 저런 세대도 있다. 오는 여러 세대이니까 앞으로도 또 세대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세대에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게 하려 하심이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은 무엇인가? 은혜는 하나님이 사람 안에 오신 것, 그리스도 안에 오신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은혜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한 이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오는 여러 세대에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그분이 우리 생명이 되는 것이다. 생명나무를 통해서 우리 생명이 되는 것이다. 생명나무를 통해서 우리 생명이 되면 그것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오는 여러 세대에 보이려고 한 것이다.
사람이 메마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은혜가 없어서 메마른 것이다. 은혜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어서 메마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 없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생명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통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메마른 것이다. 땅이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씨가 없으면 메마르다. 황토에서 원적외선이 나온다 하더라도 씨가 없으면 메마른 것이다. 황토가 좋은 흙이라 하더라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 고구마를 심든지 무를 심든지 해야 황토 고구마, 황토 무가 되어 맛이 훨씬 좋다. 서울에 가면 무에 전부 황토를 발라놓았다. 황토밭에서 나온 것이라고 황토를 발라놓았다. 서울 사람들은 황토에서 나온 줄 알고 사먹는다. 사실은 모래땅에서 나왔는데 황토를 발라놓은 것이다. 황토밭에서 나온 것과 모래밭에서 나온 것은 먹어보면 맛이 다르다. 고구마도 황토밭에서 나온 것과 그냥 밭에서 나온 것이 맛이 아주 다르다. 황토밭이 좋다. 고구마가 다른 곳도 있겠지만 전라도 해남 산삼 고구마가 유명하다. 거기에 가면 땅 전체가 다 황토다. 산이고 밭이고 다 황토다. 그렇게 땅이 좋지만 고구마를 심지 않으면 소용없다.
사람은 왜 메마른가? 씨가 없어 메마르다. 씨가 들어와야 풍성해진다. 그런데 씨가 들어오면 얼마나 풍성해지는 것이 밭인지! 자그마한 밭 하나만 있어도 채소는 사먹지 않아도 된다. 3평만 있어도 채소 사먹지 않고 농사지어 먹을 수 있다. 가지, 고추, 배추 등등 다 농사지어 먹을 수 있다. 제주도에서 채소농사를 했는데 항상 남는 것이 문제이지 모자라는 법이 없다. 그렇게 땅이 풍성하다. 땅이라는 것은 씨만 뿌려놓으면 그렇게 풍성할 수가 없다.
우리 인생도 씨만 뿌려놓으면 한없이 풍성하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했다. 무엇이 될지는 모른다. 무를 심으면 무가 나온다. 무를 심으면 무가 나온 땅에 배추씨를 심으면 배추가 나오는 것은 너무너무 이상한 일이다. 배추가나오던 땅에서 왜 가지가 나오는지 생각해 볼수록 이상하고 기이한 일이다.
사람 속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냥 들어올 수는 없다. 꼭 그리스도로 걸러야 된다. 십자가를 통과한 그리스도를 꼭 걸러야 된다. 왜 그런가? 거기서만 하나님이 사람과 상면할 수가 있다. 옛날의 예표에 의하면 지성소 안에서만 그 피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사람은 대면했다.
꼭 같은 원리로 십자가 안에서만 하나님과 사람은 대면한다. 왜? 그것이 진실이다. 진실이 없는 사람과 어떻게 대면하겠는가? 우리가 양심으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도로 대면하는 것도 아니고, 진실로만 대면한다. 거기서 밖에는 하나님을 만날 곳이 없다. 하나님은 거기서만 사람과 관계를 하신다. 거기서 내 안에 들어오지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다. 밖에서 도와줄 수는 있지만 내 안에 들어올 수는 없다. 밖에서 돕는 것과 내 안의 생명이 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이다. 보통 종교적인 문제는 밖에서 돕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도와주었다거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해주었다는 문제이다. 생명이 되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분이 도와줄 때는 십자가는 없어도 된다. 지성소가 아니라도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지성소에 가서 도와주었는가? 불쌍하니까 도와주고 안타까우니까 도와준 것이다. 애굽에서 너무나 고생하는 백성을 보고 내 마음이 동했다고 모세에게 말한다. 마찬가지로 불쌍하면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것은 꼭 지성소를 통해서 밖에는 안된다.
거기서 우리 생명이 되는 것은 우리 안에 풍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광야에 사는 동안 이스라엘은 많은 혜택을 누렸다. 그렇지만 풍성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만나도 주고 메추라기도 주고 물도 주고 다 주었지만 풍성하다는 말이 없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풍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왜? 그 땅에서 농사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받아먹었지만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광야는 풍성하지가 못하다. 만나가 내려오면 그만이다. 메추라기가 내려오면 그만이다. 메추라기 내려오는 곳에서 닭고기도 내려오고 꿩고기도 내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메추라기만 내려오면 메추라기만 먹어야 된다. 그래서 하도 오래 먹으니 진력이 나서 애굽에 살 때는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굉장히 유명한 것을 들먹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시시한 오이, 참외, 부추, 마늘, 이런 것을 들먹이고 있다. 왜? 광야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는 메추라기하면 상당히 고급 음식 같고, 만나하면 대단히 신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진력이 나서 원망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가면 그것이 아니고 땅에서 열매가 나오므로 풍성하다는 말이 나온다. 비로소 그 땅의 소산을 얻을 때, 너희가 그 땅의 소산의 처음 익은 열매로 혹은 1/10로 여호와께 드릴지니라고 나온다. 광야에서는 만나를 거두어서 드리라는 말이 없다. 메추라기를 거두어 드리라는 말이 없다. 풍성하지 못한데 무엇을 드리겠는가? 가나안 땅에 가서야 비로소 여호와께 드릴 것이 있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아무리 혜택을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도 혜택을 받는 것으로는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시고자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고, 우리 생명 안에서 나오는 풍성을 원하신다. 그래야만 후사가 되고 계승자가 된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게 하려고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하늘에 앉히셨다는 말은 높이 올렸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좋은 일을 위해서 지은 자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풍성하심을 오는 여러 세대에 선전하고 나타내기 위한 이 선한 일에 우리가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허물과 죄로 사탄에게 노예되어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이다. 나오려고 해도 나올 수가 없고,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갈 수가 없고, 하나님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절망 속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절묘한 대책 안에서 부름 받았다.
왜 그동안 못했는가?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이미 하고 싶었겠지만 그런 사람이 없어서 못했다. 온 인류를 대표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못했다. 제사를 드리면 되겠지만 제물이 없어서 못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시고 싶지만 제물이 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안됐다.
예수가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우리와 함께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그 안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되었다. 완전하게 죽은 사람 안에 모든 인류가 포함되고, 완전하게 산 사람 안에 모든 인류가 사는 것이다. 함께 살리심을 받고 함께 일으키시고 받고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사실 씨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 씨의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낸다는 이 축복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흙에 있어서 씨를 번성시키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 흙이 벽돌도 될 수 있고 무엇도 될 수 있고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지만 씨를 가지고 열매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 밭에 있는 흙이 제일 복 있는 흙이다. 길바닥에 있는 흙도 복이 있지만 그것은 흙의 본분을 다 했다고 할 수 없다. 벽돌에 있는 흙도 물론 좋은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흙의 본분을 다했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밭에 있는 흙만 흙으로서의 본분을 다한다. 무궁무진하다. 우리나라에 있는 밭들을 보면 몇 년 정도 된 밭인지 모르겠다.
내가 살던 섬을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이 몇 백년이 된 것 같다. 왜냐하면 묘지들이 있고 묘지에 엄청나게 큰 소나무가 있는데 그 소나무가 적어도 400~500년은 된 것 같다. 그것을 보면 그 섬에 들어온지가 400~500년이 됐다는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 땅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어 수백년 동안 씨를 심고 있는데 요즘은 비료를 사용하여 땅이 나빠졌다고 하고 산성화됐다고 한다. 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퇴비만 사용하든지 아니면 사용하지 않고 아예 쓰레기만 버리더라도 100만년이 가도 밭은 밭이고 아무리 오래가도 밭이다. 섬이 500년 정도 되었으니까 육지는 1000년 된 밭도 있고 2000년 된 밭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생기면서 밭이 생겨났으니까 밭이 너무 오래돼서 못쓰겠다는 것은 보지 못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오래되면 재개발을 해야 된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밭은 재개발 한다는 말이 없다. 갈수록 밭은 좋아지는 것 같다. 생땅을 일구어놓은 것보다도 오래 쓴 밭이 훨씬 농사가 잘된다.
인생을 흙으로 지었다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내가 나를 흙으로 여긴다고 하는 것이 복이다. 그런데 그 영원한 복을 내가 버렸으니까 남는 것은 저주밖에 없다. 복 빼고 나면 저주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을 했다. 그 다음에 에서가 와서 아버지 내가 큰 아들이니 축복해달라고 했더니 이삭이 내가 다 주어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 같으면 또 해주면 될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다. 말로만 한 것인데 내가 줄 복을 다 주어서 없다는 것이다. 한 상자에서 복을 다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저주밖에 없다. 우리 인생에서 복을 빼버리고 나니까 저주만 남은 것이다. 일부러 저주를 만들었겠는가? 복을 제쳐버리고 나니까 남은 것은 저주이다.
인권이 회복되면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이다. 내 인권과 하나님의 후사는 하나이다.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인권을 되찾는 것은 후사로서의 직분을 되찾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없는데 앉아서 주시옵소서를 하는지, 이미 주었는데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인지, 준 것은 가져가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은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주신 것은 마다하고 안주신 것을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속상하시겠는가.
이 선물을 받은 우리! 이것이 바로 최상의 복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복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허물과 죄로 어찌할 수 없었던 저희를 하나님께서 절묘한 대책을 세우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심으로 당신의 영광스러운 후사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게 알게 하려고 우리를 택정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영광스러운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에게 주시고 창세 전에 마련했던 이 영광의 풍성을 오늘 우리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인권을 회복하는 이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 없고 이 복보다 더 높은 복이 없습니다. 주님! 전에 우리가 모르고 이것을 버리고 간 사람들이지만 이제 우리는 이것이 귀한 것을 알고 이것을 우리가 되찾고 이 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게 주께서 인도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현혹되었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명백하게 보여진 이 사실 앞에 우리가 돌아서게 되기를 원하고 긍정적으로 시인하고 동참하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