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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공통용어, 기호, 풀림(설명)
스피노자(Spinoza, 1970)(PUF); [III] 「윤리학(Ethique)의 주요 개념들의 색인」에서
들뢰즈, Sup “Philosophes”: PUF, 1970, pp 39-99(P. 128)
-[이 내용은 수정 및 첨가를 하여, 스피노자: 실천 철학(Spinoza: philosophie pratique, 1981)(P.177)에 있음,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민음사, 1999) 속에 들어 있음]
*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에서 선전제로서 사용하는 시간(운동)과 공간(정지)라는 추상개념을 따로 다루지 않았고, 또한 보편이라는 개념도 따로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 공통용어(notiones communes, les notions communes, 공통관념) 안에서 다루었다. 이러한 의미는 스피노자의 철학적 사유가 선전제를 가정하지 않고, 실재적으로 흘러나오는 또는 발생하는 자연의 자기생성으로부터 또는 자발성으로부터, 즉 작동하는 권능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카발라 전통에서 표현할 수 없는 대상 즉 신의 모습을 대상화(pragmata)하지 않는데서 오는 것이리라. 그러고 나면 그의 중요한 발상을 보게 될 것인데,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권능”과 대상화의 상징 사이에서, 생성과 원본의 차이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들뢰즈는 스피노자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사유의 과정에서, 차이에 대한 이중성을 어떻게 구출해 냈을까? 아페이론이 생산하는 차히들과 이데아와 잘 닮지 못하는 차이는 분명히 다르다. 생물학적으로 발생의 차히와 물체적인 구별에서 차이를 생물학과 물리학에서부터 생각하는 단초를 가졌을 지라도, 철학사에서 어디에 찾아냈을까?
그의 연구 순서로는 물론 벩송에서 시작하였는지 흄에서 시작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 그리고 자연주의에 관한 연구로서 루크레티우스를 거쳐서, 니체에 오래 빠져있었다. 벩송에 관한 정리를 마칠 때 쯤에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시행하면서 니체에 대한 마무리 작없을 한 것 같다. 그리고 국가 박사 학위 논문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9)(PUF)은 동일성 대 이질성(이데아 대 아페이론)을 철학사적으로 정리하면서 주지주의를 비판하였고, 학위 부논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9)에서 신체의 권능과 감화(감응과 감동)에 대해 다루었다. 학위 논문의 보조로서 쓰여진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에서는 형상형이상학(플라톤주의) 전복에 대한 사상사를 개관하였다. 이때 가타리를 만나면서 부터 그는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철학에서, 자연과 인성을 다루는 철학의 확장으로 나간다. 문학, 회화, 영화 등등을 다루면서 사회와 역사에서 뿌리깊게 박힌 주지주의를 비판한다. 두 철학자는 주지주의에 근거한 자본 제국, (현대판 사제들의 이상인) 정신분석, (국가를 떠받힌다고 믿는 통칭 과학자들의) 과학주의의 암묵적 결탁을 해부하고 비판하는 안티 외디푸스(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72)와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1980)을 내 놓는다. 말년에는 철학을 그리스적 사유에서 길어 올려야 한다고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1991)쓰면서, 죽기 전까지 다룬 것은 철학의 최종심급이 누가 뭐래도 생명이라는 “내재성(고른평면)”이라 한다.
철학사적으로 우선 들뢰즈에게는 그의 저술 전반의 밑바탕에 흐르는 그리스 사유 또는 플라톤 사상이 있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아페이론의 이중성과 플라톤의 “소피스트”편의 분류에서 자기 생각을 구해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 다양성 중에서 원인의 이중성을 철학사 속에서 구현하기 어렵다. 둘째로 “플라톤주의”를 전복하기 위하여 하나는 「루크레티우스와 자연주의(Lucrèce et le naturalisme, 1961)」와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다(Renverser le platonisme: Les simulacre, 1966)」을 다루면서 시뮬라크르 개념의 이중성을 끌어냈을 것이다. 셋째로 스피노자의 자연의 이중성 중에서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권능”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9)와 스피노자(Spinoza, 1970)을 썼으리라. 넷째로 흄의 경험론(경험주의와 주관성(Empirisme et Subjectivité, 1953))과 루소의 자연주의(「카프카, 셀린, 뽕쥬의 선구자, 쟝-자끄 루소(Jean-Jacques Rousseau précurseur de Kafka, de Céline et de Ponge, 1962)」)를 거쳤으리라. 다섯째로 작동하는 권능의 실재성이 드러나는 도덕학을 니체의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 1962)에서 구해냈을 것이다. 다섯째로 베르그송: 기억과 생명(Bergson: Mémoire et Vie, 1957)과 베르그송주의(Le Bergsonisme, 1966)를 통하여 벩송의 기억과 생명의 자기 생성 또는 자기되기의 영역을 확보했으리라. 그는 자신의 영역의 확보를 알리는 학위논문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9), 부논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9), 그리고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를 출판하였다.
그에게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공산주의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를 만났다. 그의 확장의 시기에, 이 두 철학자들은 안티 외디푸스(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72), - 들뢰즈의 논문 「유목적 사유(Pensée Nomade, 1972)」를 주목하자 - 카프카: 소수문학을 위하여(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1975), 리좀(Rhizome, 1976),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1991)까지 같이 작업할 것이다. (53OMA)
** 읽는 순서로서, “인식(인식 3종류)”(cognitio-genus cognitionis / connaissance-genre de connaissance), 다음으로 “공통용어들”(notiones communes / notions communes)을 꼭 읽어야 할 것이다. 기호(signum, la signe) 그리고 설명하다 함축하다(explicare-implicare expliquer-impliquer)를 읽어야 할 것이다. (53OMI)
14) 공통용어들 (notiones communes, notions communes) 126 /140
15) 기호 (signum, le signe) 143 /158
16) 고유성 (propria, les propres) 132 /146
17) 설명하다 함축하다 (explicare-implicare expliquer-impliquer) 103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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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공통용어들 (notiones communes, notions communes) 126, 140
공통 개념들(E, II, 37-40)이 이와 같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 개념들이 모든 정신들에게 공통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선 신체들에게, 즉 모든 신체들에게든지(너비, 운동, 정지) 어떤 신체들에게든지(최소한 둘, 나의 신체와 다른 신체), 공통하는 어떤 것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통개념들은 전혀 추상 관념들(les idées abstraites)이 아니며, 오히려 일반 관념들(les idées généralesabstraites)이다(공통 관념들은 어떠한 단일한 사물의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 E, II, 37). 그리고 그 개념들의 외연에 따라서, 즉 그것들[공통 개념들]이 모든 신체들에 또는 몇몇 신체들에 적용되는지에 따라서, 그것들은 보다 일반적이거나 덜 일반적이다(신학 정치론, 7장).
현존하는 각 신체는 운동과 정지의 어떤 연관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두 신체에 상응하는 연관들이 구성될(se composer) 때, 두 신체는 보다 우월한 권능을 갖는 일체[집합]를, 일체의 부분들 속에 현재의 전체를 형성한다(이처럼, 혈액의 부분들로서 유미액과 림프액, 참조: 편지 32, 올덴부르크에게). 간단히 말하면, 공통 개념은 둘 또는 여럿 신체들 사이의 구성(composition)의 표상이며, 이 구성의 통일성의 표상이다. 이것의 의미는 수학적이라기보다 생물학적이다. 공통개념은 현존하는 신체들의 적합성 연관 또는 구성 연관을 표현한다. 적합성과 구성(이것들)이 정신들[정령들]에게 공통이라는 것은 부차적일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더 많이 더 적게 공통적이라는 하는 것도 부차적인데, 이것들은, 신체들이 이미 고려되었던 구성과 구성의 통일에 의해서 연관되었을, 정신들에만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신체들은, 심지어 서로 적합하지 않는 신체들(예를 들어, 독물과 중독된 신체)조차 공통적인 어떤 것을 갖는다. 즉 너비[길이], 운동, 정지. 모든 것은 매개적 무한 양태의 관점에서 보면 서로 구성되어 있다(se composer). 그러나 그것들이 적합하지 못한 것은 그것들이 갖는 공통적인 어떤 것에 의한(par) 것이 결코 아니다(E, IV, 30). 가장 일반적인 공통개념들을 고려하면서, 사람들은 어디에서 적합성이 끝나고 어디에서 부적합성이 시작되는지, 어떤 수준에서 “차이들과 대립들”이 형성되는 지를 내부로부터(du dedans) 본다(E, II, 29, 주석).
공통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적합한 관념들이다. 실재로 그것들은 구성의 통일성을 표상하기 때문에, 부분과 전체에 모두 들어 있으며 따라서 적합하게만 생각될 수 있다(E, II, 38과 39). 그러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들을 형성하는 데 이를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공통 개념의 더 큰 또는 더 적은 일반성이 그것의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여러 곳에서 마치 우리가 보다 일반적인 것들로부터 덜 일반적인 것들로 나가고 있는 거처럼 쓰고 있기 때문이다(신학정치론, 7장; E, II, 38과 39). 그러나 그때에, 중요한 것은 적용의 질서이다. 그 질서[순서]에서 우리는 보다 일반적인 것들로부터 출발해서 덜 일반적인 수준들에서 부적합한 것들의 출현을 내부로부터 이해한다. 따라서 공통개념들은 여기에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가정된다. 개념들의 형성 질서는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체와 적합한 어떤 신체를 만날 때, 비록 우리와 공통적인 것을 아직 적합하게 인식하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기쁨-정념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신체와 적합하지 않는 어떤 신체와 만남으로부터 생겨나는 슬픔을 통해서는 결코 우리는 공통개념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동하는 권능과 이해하는 권능의 증가로서 기쁨-정념을 통해서 우리는 그렇게[공통 개념을 형성하는 것] 할 수 있다. 기쁨-정념은 공통 개념의 유발적 원인이다. 온이성(la Raison)이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어떻게 그 인간이 이성적이 되는가를 지적해 준다: 1) 좋은 만남들을, 즉 우리와 결합되고 우리에게 기쁜 정념들(이성과 적합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양태들과의 만남들을 선택하고 조직하려는 노력(un effort). [노력 이 필요하고]. 2) 공통 개념들에 대한 지각과 이해, 즉 이런 구성(cette composition)으로 들어가는 연관들의 지각과 이해. [지각과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연관들부터 우리는 다른 연관들을 연역해 내고(추론) 또 이 연관들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감정들, 즉 일단 능동적 감정들을 느낀다(감정들은 이성(la raison)으로부터 생겨난다).
스피노자는 제5부에 도입에서 공통개념들의 형성과 발생의 질서를 설명하는데, 이는 논리적 적용의 질서에 만족하는 제2부와는 대립되어 있다.
1) “우리가 우리의 본성에 반대되는 감동[감화]들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만큼이나 오랫동안‥… ”, 즉 슬픈 감동[감화]들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 한, 그만큼 오랫동안 우리는 공통 개념들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참조: E, V, 10, 이 명제는 선행하는 명제들만큼이나 명시적으로 공통개념들을 불러온다). 따라서 초기 공통 개념들은 가장 덜 일반적 개념들이며, 이 가장 덜 일반적인 개념들은 나의 신체와 나를 기쁨-정념으로 감화시키는 다른 신체와 사이에서 공통적인 어떤 것을 표상하는 일반 개념들이다.
2) 이 공통 개념들로부터 더 이상 정념들이 아닌 기쁨의 감정[감동]들, 즉 한편으로 최초의 정념들을 능가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 대체하게 되는 능동적 기쁨으로서 기쁜 감정이 나온다.
3) 이 최초의 공통 개념들과 그것에 의존해 있는 능동적인 감동들은 우리에게 보다 일반적인 공통 개념들을 형성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이 보다 일반적인 공통 개념들은, 심지어는 우리의 신체와 이에 맞지 않는 신체들 사이에서, 즉 이에 반대되는 신체들 사이에서, 우리의 신체에 슬픔으로 감화하는[힘이 줄어드는] 신체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동네의 다른 나무들, 동네의 다른 개들]
4) 그리고 이런 새로운 공통 개념들로부터, 슬픔들을 능가하고 슬픔으로부터 나오는 정념들을 대체하게 하는 새로운 능동적 기쁨의 감정들이 나온다. [우리 동네, 고향, 등굽은 나무가 지키는 고향.]
공통 개념 이론의 중요성은 여러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1) 이 이론은 윤리학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온이성에 관한 스피노자의 모든 개념작업을 변형시키고(tranfomer), 제2종 인식의 지위를 정립시킨다. [삶의 터전에 관한 공감과 공명(조화)에 대한 감화에서 비롯된다. 세파라드 유대인의 공동체 특성은 공화정이지, 민족(인종)주의나 국가(왕권)주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2)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우리 지각의 자연 조건들로 인하여 우리가 부적합한 관념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질서로 우리는 적합한 관념들을 형서하기에 이르게 되는가?
3) 그것은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수정을 이끌어낸다. 오성 개선론이 여전히 허구를 담고 있는 기하학적 관념들로부터 출발해서만 적합한 것에 이르는 반면에, 공통 개념들은 현재적인 것 또는 구체적인 것에 대한 수학을 형성한다. 그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수학 덕분에 기하학적 방법은, 그것[방법]의 실행(l’exercice, 훈련)을 제한하는 허구들과 추상들에서 벗어난다.
4) 그것은 공통 개념들이 일반성들이라는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공통 개념들은 현존 양태들에만 관여할 뿐이며, 그것들의 본질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도 구성하지 않는다(constituer)(E, II, 37). 그러나 공통개념들은 허구적이 또는 추상적이 전혀 아니다. 그것들은 현존 양태들 또는 현존 개체들 사이에서 실재적 연관들의 구성(la composition)을 표상한다. 기하학이 연관들을 추상적으로(in abstracto)만 파악한다면, 공통 개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연관들]을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즉 살아있는 존재들[생명체] 속에서 필연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그대로, 그것들이 성립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관계 항들과 함께, 파악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 개념들은 수학적이라기보다 생물학적이며, 온자연 전체의 구성적 단위(l’unite 통일성)를 형성하고, 이런 단위의 변이 양태들을 형성한다.
공통 개념의 중심적 지위는 제1종 인식과 제3종 인식의 사이에 있는 제2종 인식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대칭적이지 않은 아주 다른 두 방식을 통해서 이다. 제2종 인식이 제3종 인식과 맺는 연관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나타난다. 적합한 관념들이기 때문에, 즉 신 안에 있는 방식과 동일하게 우리 안에 있는 관념들이 때문에(E, II 38, 39), 공통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신의 관념을 부여한다(E, II, 45, 46, 47). 신의 관념은 가장 일반적인 관념에 상응하는 가치를 갖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현존 양태들에 가장 공통적인 것, 즉 그것들이 신 안에 있으며, 신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E, II, 45, 주석; 특히 V, 36, 주석. 이 후자는 윤리학 전체가, 제3종 인식에 관련된 5부 명제들까지, 공통 개념들의 관점에서 씌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마치 공통 개념처럼 기능하고 있는 신의 관념은 제2종 인식에 고유한 감정의 대상이자 종교의 대상이기도 하다(E, V, 14-20). 신의 관념은 그 자체로는 공통 개념이 아니며, 스피노자가 그것을 공통개념들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E, II, 47, 주석). 정확하게, 그 이유는 신의 관념이 신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고, 현존 양태들의 구성과 연관해서만 공통개념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 개념들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우리가 신의 관념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전복되는 한 지점에, 제3종 인식이, 신의 관념의 새로운 의미와 이 제3종 인식을 구성하는 새로운 감정들의 의미와 함께 신의 본질과 실재적 존재들의 단일한 본질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한 지점에 이르게 된다(E, V, 21-37). 따라서 제2종 인식과 제3종 인식 사이에 단절이 아니라, 신의 관념의 한 사면(斜面, un versant)에서 다른 사면으로 통로(un passage, 통행)가 있다(E, V, 28). 우리는 공통 개념들의 능력(facluté)으로서 온이성을 넘어서, 또는 현존에 관한 영원한 진리들의 체계로서 온이성을 넘어서 통과하여, [또한] 우리는 본질적 진리들의 체계로서 직관적 오성(l’entendement intuitif) 속으로 들어간다(가끔 [직관적 오성은] 의식으로 명명되기도 하는 데, 왜냐하면 거기서 관념들은, - 마치 그 관념들이 신 안에 있는 것처럼, 또 마치 관념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가 영원하다고 표현하게 하는 것처럼 - 우리 속에서 이중화되고 반성되기 때문이다).
제2종 인식과 제1종 인식의 연관에 관한 한, 그 연관은 단절임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제시 된다: 공통 개념들이 오직 현존하는 신체들에만 적용되는 한에서, 공통 개념들은 상상 될 수 있는 사물들에 관련이 있다(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신의 관념은 그 자체로서는 공통 개념이 아니다, E, II, 47, 주석). 실재로 공통 개념들은 연관들이라는 구성들(des compositions)을 표상한다. 그런데 이 연관들은, 신체들이 서로 적합한 한에서, 즉 그것들이 전체를 형성하고 서로 서로 감화되는 한에서, 신체들을 특징지운다. [서로 감화될 때에] 신체들의 각각은 다른 신체 안에 “이미지들(images)”을 남기며, [이에] 상응하는 관념들이 상상작용들(des imaginations)이다.
물론 공통 개념들은 이미지들이나 상상작용들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공통 개념들은 적절성[알맞는]의 근거들(des raisons de convenance)로부터 내적 포함(une compréhension interne)으로 고양되기 때문이다(E, II, 29, 주석). 그러나 공통 개념들은 상상작용들과 이중 관계(une double relation)를 갖는다. 한편으로 외재적인 관계(une relation extrinsèque)이다. 왜냐하면 상상작용 또는 신체의 감응[감화]의 관념은 적합한 관념은 아니지만, 오히려 상상 작용이 우리 신체에 알맞은 어떤 물체에 대해 우리에게 효과[결과]를 표현할 때, 그 상상작용은 공통개념의 - 즉 내부로부터 또 적합하게 적절성 이해하는 공통개념의 - 형성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내재적인 관계(une relation intrinsèque)이다. 왜냐하면 상상작용은, 공통 개념들이 구성적(constiutif)인 내적 연관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을, 신체들의 서로 서로 외적인 결과[효과]들처럼 파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상작용의 특성들과 공통개념들의 특성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근거 지워진 조화(une harmonie)가 있다. 이 조화는 공통 개념이 상상작용의 성질들(les propriétés)에 지지받게 한다. (53OME)
# 15) 기호 (signum, le signe) 143 /158
첫째 의미로 기호는 언제나 결과를 그 원인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조건에서 파악된 결과의 관념이다. 우리 신체 미친 한 신체의 결과는 우리 신체의 본질과 외적 신체의 본질에 연관하여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가변적 구성의 순간적 상태에 따라서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의 본성을 모르는 사물들의 단순한 현재에 따라서 파악된다(E, II, 17). 그러한 기호들은 지시적(indicatifs)이며, 이것들은 혼합의 결과들(des effets de mélage)이다. 그런데 기호들은 일차적으로 우리 신체의 상태를, 이차적으로 외적 신체의 현재를 지시한다. 이런 지시작용들(ces indications)은 협약적인 기호들의 질서 전체(언어 langage)에 토대를 놓는다. 이 질서[언어]는 이미 자신의 다의성에 의해, 다시 말하면 기호들이 들어있는 연합적 연쇄의 가변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E, II, 18, 주석).
둘째 의미로 기호는 원인 자체이다. 그러나 [그 기호는] 사람들이 그것의 본성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효과와 연관도 이해하지 못하는 조건들에서 파악된 원인이다. 예를 들어 신은 아담에게, 과일이 그를 중독 시킬 것이라고. 계시한다. 왜냐하면 과일은 그의 신체와 연관을 해체하면서 그의 신체에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은 미약한 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 결과를 처벌[제재(制裁)]로서, 원인을 도덕적 법칙으로서, 말하자면 그 원인을 마치 계율과 금지에 의해 진행하는 목적인처럼 해석 한다(편지 19, 블레이은베르흐). 아담은 신이 자신에게 기호를 통해 알리고 있다고 믿는다. 이와 같이 도덕은 법칙에 대한 우리의 개념작용을 위태롭게 하며, 오히려 도덕법칙은 영원한 원인들과 진리들에 대한 올바른 개념작업을 훼손한다. 법[법률]이란 단어는 그것의 도덕적 기원에 의해 심각하게 위험에 처해 있으며(신학 정치론, 4장), 따라서 사람들은 거기에서 발전의 규칙 대신에 권능의 한계(une borne)를 본다. 그래서 영원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진리를 정언명령으로서 해석하기 때문에 연관들의 구성(une composition des rapports)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둘째 기호들은 정언명령적(impératifs)이며, 이것들은 계시의 결과들(des effets de révélation)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복종하게 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신학의 가장 심각한 잘못은 복종과 인식 사이의 본성적 차이를 무시하고 감추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인식의 모델들로서 복종의 원리를 취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 의미로, 기호는 원인에 대한 이러한 변질된 관념과 법칙에 대한 이러한 신비화를 외부로부터(du dehors) 보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 법칙으로 해석된 원인은 그 해석과 그 거짓(사이비) 계시를 그럴 듯한[진지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외재적인 보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기호들은 각각의 사람에 따라 변한다. 각 선지자는, 자신들이 상상하는 명령들과 금지들이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의견들과 자신의 기질들에 맞춘 기호를 요청한다(신학 정치론, 2장). 그러한 기호들은 해석적(interprétatifs)이며, 미신의 결과들(des effet de superstition) 이다. 모든 기호들의 통일성은 이와 같은데, 즉 그 기호들은 본질적으로 다의적인 언어를 형성하는데, 그 다의적 언어는 일의적으로 형성된 철학의 자연적 언어와는 대립된다. 또한 기호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기호들은 현존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오성 개선론, 36문단; 윤리학, I, 10, 주석 1). 해석 작용들과 상상 작용들을 간청하는 기호들이 있다는 것은 부적합한 관념들의 고유함(le propre)이며, 살아있는 오성의 설명들(des explications)에 대해 정당화할 수 있는 표현들(des expressions)이 아니다(설명적 표현들과 지시적 기호들에 대한 대립에 관하여, E, II, 17, 주석 그리고 18, 주석). (53OME)
# 16) 고유성 (propri, les propres) 132 /146
[자신(en soi), 자기(soi)로서 자기 동일성이란 의미일 것이다. 즉 자기 자체. 자체성과 같은 뜻이 아닐까?]
고유성[고유함]들이란 본질과 구별되고 동시에 본질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성질들, 귀결들 또는 결과들)과도 구별된다. 한편 고유함이란 본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고유함은 사물의 어떤 것도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우리로 하여금 사물로부터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다. 그러나 고유함은 본질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 고유함은 본질 자체의 양상이다. 다른 한편 고유함은 본질로부터 흘러나온 것[속성과 양태?]과 혼동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질로부터 흘러나온 것, 그것은 성질이라는 논리적 의미에서든지, 또는 결과라는 물리적 의미에서든지 간에, 그 자체로서 본질을 갖는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세 가지 고유함을 구별한다(소론. 1부, 2-7장). 신적 본성의 양상들이라는 첫째 의미에서, 고유함들은 모든 속성들에 대하여(자기원인, 무한한, 영원한, 필연적‥…) 또는 어떤 규정된 속성에 대하여(전지적인, 편재적인) 일컬어진다. 둘째 의미로, 고유함들은 신을 그의 생산물들과 연관하여 성질(자격)을 부여한다(모든 사물들의 원인). 셋째 의미로, 고유함들은 단지 외재적인 규정들을 지시할 뿐이다. 이 외재적 결정들은, 신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신을 상상하는 방식으로 표시하고, 또 우리에게 삶의 규칙들과 복종의 원리들로 쓰인다(정의, 사랑charité…).
신의 본질, 다시 말하면 신의 본성은 한결 같이 알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그러한 것은, 왜냐하면 신의 본질이 그 고유함들과 혼동되어 왔기 때문이고, 또 사람들이 고유함들과 속성들 사이에서 본성적 차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학 전체를 위태롭게 했던 것은 신학의 근본적인 잘못이다. 이처럼 거의 모든 계시 신학은 셋째 종류의 고유함들에 기인하며, 신의 진정한 본질 또는 속성들을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신학 정치론, 2장). 그리고 합리적 신학도, 둘째와 첫째 종류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 나은 것은 결코 아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신의 본성을 무한한 완전성으로부터 정의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일반적인 혼동은 탁월함들과 유비들의 모든 언어를 관통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인간학적이고 신인동형적인 특성들을 - 그 특성들을 무한에까지 고양시킨다고 하더라도 - 신에게 부여한다. [계시 신학은 무지하고, 합리 신학은 추론의 오류로 신의 본성을 모른다. 이 둘 다 신을 에이도스로 또는 최고 류로 두고, 유클리트의 공리처럼, 자기 동일성만을 지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둘의 신은 부동이기에 실재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않고, 현존하지도 않는다. (53OMF)]
# 17) 설명하다 함축하다(펼치다-감기다) (explicare-implicare / expliquer-impliquer) 103 /115
설명하다(expliquer, 펼치다)라는 단어는 스피노자에세서 “강한”(fort) 의미를 갖는 용어이다. 이것은 사물의 외적인 지성의 작용이 아니라, 지성에 내적인 사물의 작용을 의미한다. 심지어 증명들은 정신의 “눈들(des yeux)”이라고 말해지고, 다시 말하면 증명들은 사물 속에 있는 운동을 지각한다. 펼침은 자기-펼침, 전개(un développemmet), 흘러보냄(un déroulement), 역동성(un dynamisme)이다. 사물은 스스로 펼친다(설명된다). 실체는 속성들 속에서 펼쳐지고(설명되고), 속성들은 실체를 펼친다(설명한다).
그리고 감김(함축)은 설명과 반대가 전혀 아니다. 펼치는 것은 바로 감기는 것과 동일하며, 전개하는(développer) 것은 감싸는(envelopper) 것이다. 온자연 안에서 모든 것은 이 두 운동들의 공존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자연은 펼침들과 감김[접힙, 함축]들의 공통적 질서이다.
펼쳐지다와 감기다가 분해되는 유일한 경우가 있다. 그것은 부절적한 경우의 관념이다. 이 관념은 이해하는 우리 권능을 함축하고 있지, 그러나 관념에 의해서 펼쳐지지는 않는다. 관념은 외적 사물의 본성을 감싸고 있지, 그러나 그것을 풀어가지 않는다(E, II, 18 주석). 부적합한 관념은 항상 사물들의 혼합에 관한 것이며, 한 물체를 다른 물체에 미친 결과[효과]만을 유지할 뿐이다. 그것[부적합한 관념]에는 원인들에 근거하는 “내포(comprehension, 이해)”가 부족하다.
실제로, ‘내포하다(이해하다)’는 두 운동들, 풀리다와 감기다를 고려하는 내적 이유(la raison, 근거)이다. 실체는 모든 속성들을 내포한다(comprendre)(또는 허용한다 comporter). 속성들은 모든 양태들을 내포한다(comprendre)(또는 포함한다 coentenir). 내포가 풀림과 감김의 동일성의 토대이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접힘(complicatio, 얽힘, 복잡)”에 의해 정의 되었던 중세와 르네상의 전통을 재발견 한다. 신은 모든 사물을 얽히게 하며(compliquer), 동시에 각각의 사물이 신을 펼치고 또 감는다.
그래도 역시 내포, 펼침, 감김은 오성의 조작들을 지칭한다. 이 조작들의 객관적 의미(leur sens objectif)란, 즉 오성이 속성들과 양태들을 “이해한다”(comprendre, 포함하다) 것이고, 적합한 관념은 사물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객관적 의미는 형식적 의미(le sens formel)로부터 흘러나온다.: 즉 “오성 속에 객관적으로 함유되어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연 속에 주어져 있어야한다”(E, I, 30; II, 7, 보충). ‘이해하다(comprendre)’, 이것은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해하다’는 어떤 것을 가능 한 것으로 생각하는(consevoir) 것에 대립된다: 즉 신은 가능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신은 자신이 현존하는 대로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이해하며, 그는 자신이 스스로 이해하는 대로 사물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는 형식을 생산하는데, 그 형식 하에서 그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모든 사물들(과 관념들)을 이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물들은 신의 펼침과 감김이며, 동시에 형식적으로 또 객관적으로(objectivement) 그러하다. (53OMI)
(10:30, 53O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