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은..
위에서 등장한.. 회사의 독실한 특신급 기독교 신자와의 점심시간 대화 이후
제가 너무너무 충격을 받아서 며칠에 걸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기독교와 원불교는 분명히 신앙과 수행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원불교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흡인력이 없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데요..
그러지 말고, 우리만의 강력한 교화방법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요?
전 정말 충격받았거든요..
기독교인들의 순수성과 헌신성에 대해서..
그리고 기독교가 강력한 것은..
그 신앙이 단순하고 쉽기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로 혈심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어요. 원불교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한참 먼 것 같아요.
-----------------------------------------
050809 22:00 ~ 23:00
050811 14:30 ~ 16:30
제목 : 기독교인과 원불교인의 신앙과 교화
지난 금요일에 우리 회사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직원 한 사람과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그 만남이 너무나 인상깊고 느끼는 바가 많아서 다른 원불교인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나는 직장을 다니는 청년 원불교 신자입니다.
나는 대종사님 제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지 크신 은혜에 대해 배워 알고, 이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나는 수행을 통하여 나도 진급하고 다른 사람도 진급케 하고 싶습니다.
나는 가까운 교당을 꾸준히 다니면서 때때로 교당과 교단과 세계를 걱정하고 기도합니다.
나는 이번 생을, 원기 100년 안에 먼저 주세회상을 만난 특별한 인연으로 지금 시대적으로 필요한 역할을 찾아서 충실히 이행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는 직장과 학업, 종교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어렵지만 조화를 이루며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철든 원불교 신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난 금요일 한 기독교 신자와의 만남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정보처 송대리님!
송대리님은 나와 입사동기(2005년)인 여성으로, 나보다 2살 많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예전에 제가 원불교 음악을 듣다가 기독교 음악이 궁금하여 CCM을 보내달라고 하자 기꺼이 많은 음악들을 주었고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기독교 음악을 들으면서, 역시나 긴 역사 속에서 탄탄하게 다져진 문화적 깊이와 다양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음악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함과 찬양, 구원의 기쁨,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승리의 희열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기에 집중력있고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 음악을 들으면 저도 함께 기쁨에 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음악들이 어우러진 기독교인들의 예배도 또한 그럴 것입니다.
나는 왜 우리 원불교 음악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이 궁금하여 교무님께 여쭤보았습니다.
교무님께서는 우리는 우선은 역사가 짧기 때문에 다양한 음악적 시도들이 아직 부족했다는 것과 동시에,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한 신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집중력이 높지만 우리 원불교는 신앙과 수행을 병진하고 신앙도 유일신이 아닌 사은으로 넓혀 주셨으므로 처음에는 느낌이 금방 다가오지 못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기독교의 예배는 감성에 호소하여 신앙을 일깨우는 측면이 많지만 원불교 법회는 조용히 맑혀서 자성이 떠오르게 하는 이성적인 측면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원불교의 강점은 문화도 아니고 건물, 역사도 아닌 바로 교법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납득이 되었습니다.
송대리님에게 CCM을 얻어들은 다음에 일주일 쯤 후 점심시간을 이용해 한번 더 만남을 가졌습니다.
송대리님은 작은 기독교 교재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기독교의 대체를 자연스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4영리를 아십니까?”라는 16쪽짜리 교재였는데 송대리님은 그것을 코팅해서 가방에 넣어다녔습니다. 더 할 것 없이, 그 책에 씌여져 있는 문장을 함께 읽어주기만 하면 기독교의 대체에서부터 기독교 신앙의 시작인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까지 2~30분이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교재의 디자인은 단순했지만, 매우 다듬어진 구성과 문장으로 되어있어서, 마음을 열고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있었습니다.
나 또한 송대리님의 인도에 따라 “예수님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고 내 안에 거하시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그러면서, 나의 행동이 진리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송대리님의 의도와 일치하는 부분과 배치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여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전제로 거부감없이 다가오는 송대리님의 교화방식에 대해서 놀랐고, 기독교의 완비된 교재와 체계적인 시스템에 대해서도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교화는 단순하다,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것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송대리님은 직장인 기독교 선교회인 BBB(Business Bible Belt)의 일원이었습니다. 직장내 선교를 위한 초교파적 BBB는 서울에서만 8000명의 회원이 있는데, 지역별로 매주 월요일에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BBB에서 일정한 훈련을 받고 나면 “순장”이 될 수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을 “양육”하며 모임을 이끌 수 있는 리더를 말합니다. “양육”이란 성경공부를 함께하며 1대 1로 멘토링하는 것을 말합니다.
송대리님은 우리 회사에서만 2명의 자매를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그날 점심때 약 40분 가량 송대리님과 함께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아래에는 편의상 “송”이라고 적겠습니다.
송 : 요즘도 많이 바쁘지요?
박 : 요즘은 괜찮아요, 하지만 대학원 다니느라 병행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송 : 학교는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박 : 네. 월 화 토 이렇게 수업있어요. 은미씨야말로 계속 신앙생활 하느라고 바쁘지요?
송 : 네.. 저는 늘 같지요^^ 요즘도 성경책도 읽고 음악도 들어요?
박 : 예, 가끔씩 보는데 너무 좋아요. 음악은 출퇴근하면서 듣고 다녔었고요.
송 : 네...
박 : 직장생활하고 신앙생활 병행하기 쉽지 않을텐데 비율이 어떻게 되나요.
송 : 저는 직장을 제외한 모든 생활은 신앙생활에 쓰고 있으니까요. 순명씨는 어때요
박 : 전 직장과 학교, 그리고 주말엔 교당생활이요..
송 : 네. 동생은 대학원에서 불교 쪽 전공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원불교 다니시고..
박 : 네. 불교 쪽을 공부하고 싶어했거든요. 상당히 열심히지요^^
송 : 순명씨도 그렇게 열심히 하겠네요?
박 : 예, 예전에는...
송 : 지금은요?
박 : 직장 안 다닐 때는 교당 활동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동생만큼은 시간을 들이지는 못하고 있어요.
사실은 예전보다 지금 오히려 더 교당활동에 투입하는 비중이 많은데 차마 얘기를 못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내 머릿속은 송대리님의 심경을 상상하면서 복잡하게 돌아가는 중입니다.
나도 교화를 할 때 먼저 그 사람에게 다른 종교가 있는지를 물어보고, 만약 있다면 그 종교에 대한 신심은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지요. 그리고 기독교를 아주 열심히 다닌다 하면 당연히 원불교에 대한 권유를 접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릴 것입니다. 때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할지라도, 혹시 공부내용 중에서 풀리지 못하는 의문이 있는지 물어봅니다. 그 내용을 원불교에서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송대리님 또한 지금 머릿 속에서 그런 것을 파악하는 중이 아닐까요?
교화를 할 때, 상대방이 딱 잘라서 거절하면 사실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조금이라도 여지가 보인다면 기도라도 해 줄 수 있지만. 그냥 마음을 닫아버리면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내가 송대리님에게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송대리님의 뜻을 인정하고 그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그렇다고 송대리님이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송대리님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송대리님과 같이, 정기적으로 예배모임에 참석하고, 기독교 전도활동에도 동참하며, 신앙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겠지요.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을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내가 원불교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대화를 나눌 때도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나도 예의바르고 사려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원불교를 소개하는 나의 이야기에 동조하지만, “좋은 것은 안다. 그러나 나는 함께할 수 없다”라는 뜻을 정리해서 전달합니다. 원불교 이미지를 전달하는 간접교화는 되었을지 몰라도, 그 끈이 깊은 공부와 교화 봉공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지요. 그러면 나는 인연이 짧음이 안타깝고, 그들을 사로잡지 못한 저의 인덕이나 흡인력없음이 아쉬울 뿐입니다.
교화라고 할 때, 우리는 사실은 함께 할 인연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각자가 있는 곳에서 처한 상황에 맞게 진리생활을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타력의 힘을 받지 않으면 진리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법회에 참석하고 동지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력을 갖춘 이후에는 공부와 사업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도사업을 위해서는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다 인연따라 되는 것이요, 억지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나는 송대리님에게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CCM을 얻어들은 것이나, “4영리설”에 대해 들으며 예수님을 영접한 모임을 가진 것이 그 자체로는 순수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마지막에 든 생각은 ‘결국 이러한 체계적인 방식을 원불교에서 배울 것은 무엇이 있을까’ 라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이제 와서 “저는 사실 원불교 독실한 신자예요”라고 말하면 글쎄, 그동안의 나의 행동을 뭐라고 생각할까요. 송대리님은 불쾌해하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송 : 궁금한 것 없나요?
박 : 음...
송 : 아무거나 괜찮아요.
박 : 사실 저는 대리님께 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예수님을 좋아하고 (사실 사랑한다고 하고 싶지만 웬지 그러면 혼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음), 예수님의 뜻에 동조하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지만 대리님이 기대하는대로 정기적인 모임에 참석할 수는 없거든요.
송 : 네... 그래요?
박 : 일단 저는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지 않고는 진리에,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진리라고 믿어요.
동시에, 저는 다른 모든 길들을 통해서도
진리와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논리적으로는 정말 안 맞는 이야기이지요.
저에게는 절대로 논리적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이런 생각이 송대리님에게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이것이 진리를 내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왜곡한 어리석은 것일까요?
그리고 제가 전에 송대리님을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송대리님에게는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것으로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어요.
송대리님은 저에게 CCM도 주시고 시간도 쓰셨어요.
전 은혜를 입었지만 동시에 그럴수록 더 미안하고 그래요.
그것은 나의 경우에 비추어 본 이야기입니다.
나는 교화를 하면서 불공을 한다고 하는데 상대방이 잘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 원망심이 납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법을 이야기하는데, 자기만의 사견을 놓지 못하면서 고집부리는 것을 보면 답답하지요. 어느 정도의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의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을 보면 또 답답하고요.
그런데 송대리님 앞에서 내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미안한 일일까요.
송대리님의 목적은 나를 전도하여 송대리님과 같은 신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인데, 나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다는 데 선을 치고 있으니 아마 송대리님 또한 답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송대리님의 말씀이 너무나 의외이고 놀라웠습니다.
송 : 아, 어리석게 보지는 절대로 않아요.
나는 사실 놀라웠습니다.
박 : 대리님이 절대적으로 보는 진리를 눈앞에서 믿지 않는데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거기에다가, 대리님이 주신 것에 대해 제가 딱 잘라서 선을 그어버렸는데도 괜찮아요?
송 : 네, 그럼요.
순명씨가 지금 당장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서운하게 생각하거나 내가 순명씨에게 쓰는 시간을 아까워하지는 않아요. 조금 더 일찍 만나면 더 좋겠지만, 사실 매 순간순간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순간이지요. 그런 기회들을 많이 만나다보면 언젠가는 예수님께도 돌아올 거에요. 다만 지금 이 순간 못믿고 있을 뿐이지요.
더욱이 순명씨가 자기만의 생각만을 가지고 있다고 어리석거나, 내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누구에게나, 마음에 어떤 문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문은 안에서만 열릴 수 있는 문이 지요. 사람은 그 방 안에서, 그 안의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언제든지 그 문을 열기만 하면 예수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안으로 들어오실 거에요.
순명씨의 마음 속에 있는 문도, 순명씨가 열기만 하면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다가 순명씨 안으로 들어오실 거에요. 그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요.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제부터는 나의 작은 사견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거에요.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그 문을 순명씨 혼자의 힘으로 열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여기에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고 순명씨의 의지만이 필요해요.
순명씨가 이 사실을 저에게 들었고, 이후에는 매 순간이 그런 기회들로 가득차 있을 테니, 전 그걸 알려드리는 것으로 충분해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기는 하겠지만 마음에 서운해 하지는 않아요.
박 : 그래요? 사실 놀라워요. 난 사실 그동안 은미씨에게 많이 미안했거든요. 지금 이렇게 저에게 시간을 쓰시는 것도 좀 부담스러워 하고...
송 :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은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나는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뜻대로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것이 정말로 행복하고요.
박 : ....
송 : 살아계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해요.
살아계신 하나님은 사랑으로 인간을 자신과 같은 완전한 모습으로 지으셨지만, 인간이 죄를 지으니 그 죄에 대해서는 벌하지 않을 수 없으셨어요.
죄에는 대가가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거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기도 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어요.
역사 이래로 모든 인간들은 다 죽는데 그 중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오직 예수님만이 살아나셨잖아요. 우리들도 죽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살 거에요.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에요.
예수님은 우리들과 함께 머무시지 못하셨으므로 대신에 우리들 마음속에 성령을 살게 하셨어요. 그리고 너희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성령과 함께한다면 너희들은 나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하셨어요. 그것은 사실이에요. 예수님은 12제자를 키우셨지만 그 12제자는 기독교를 전 세계 방방곡곡에 퍼뜨렸으니까요.
박 : 기독교의 핵심을 이렇게 명쾌하게 말해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워요. 그리고 전 사실 많이 놀랐어요. 왜냐하면, 기독교를 전도한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불신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로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저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나는 천국에 간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너희들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 하는 말로 들렸거든요.
송 : 어떤 기독교 신자들은 그렇게 전도하기도 해요.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받은 큰 은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에 집중하는 거에요. 그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여 본질을 잃어버린 거지요.
박 : 그렇군요.
송 :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잘못 해석하기도 하지만, 안 그런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unity, 하나가 되는 거에요. 저는 BBB 모임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는데, 매일 기도하면서 하나된 삶을 살고 있어요. 하나님은 부부가 하나라고 하셨잖아요. 이처럼 모든 사람이 원래 하나인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분리된 부분에 집중하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요.
박 : 아, 그래요? 그건 원불교 사상과 참 많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가 강조하는 것도 “하나의 진리”거든요. 각자가 하나이면서 동시에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에게 은혜를 주며 살아가지요.
마지막에 송대리님의 말은 사실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원불교의 진리와 그대로 일치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그 “하나”라는 지점을 송대리님이 모든 종교에까지 확대하고 그 지점에도 우리가 일치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송대리님이 성경을 인용하면서 얘기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오직 주 예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에서 “예수”의 의미를 좀더 넓게 생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었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이 오직 예수님의 구원에 바탕을 두고 있고, 진리에 어긋나지 않고, 거기에 의미가 있고, 독선과 편협함에 빠질 정도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것이 선임을 알지 못하더라도 이미 선을 당연히 행하고 있다면, 굳이 더할 것이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나는 사실 당신이 지금 받아들이지 않아도 관계없다, 라고 얘기한 송대리님의 자신감이 부러웠습니다.
나는 사실 교당 활동을 하며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부족하다는 인식에서 옵니다.
원기 100년도를 앞두고 원불교가 성장해야 하는데, 교화가 잘 안되고 있고, 인재가 부족하고, 문화가 부족하고, 경제력이 부족하다는 인식에서 옵니다.
그래서 재주있고 지혜있고 경제력있는 사람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교화를 하면서 그 사람이 부처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원불교에도 어서 큰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너무나 간절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욕속심이지요.
나는 우리 교당 청년회에서 8단 중앙을 맡고 있는데 단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원들이 신심있었으면 좋겠고, 많은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이젠 법회 출석을 잘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법회를 늦게 오거나 정성이 적어지는 모습을 보면 어느새 원망심이 나고 내가 들인 공을 계산하며 주판대를 튕기고 있는 저를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뭔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여기에 들일 수 있는 시간과 불공은 한계가 있으니 늘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송대리님처럼, 교화 자체를 행복해하고, 감사해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나는 교화를 힘들고 신경쓰이고 어렵고 피곤한, 달성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해치워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초기 교단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도 해 봅니다.
기독교는 어느 정도 기반이 갖춰졌지만 우리 원불교는 모두들 성장을 위해 용쓰고 있는 상태이니까요. 교단에서 교화목표를 매년 16%로 잡았지요.
우리들은 교화의 질이냐 양이냐 논란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습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사실 양이 질을 담보하는 것이요, 일단 나와서 졸아도 법회에 나오고 겉핧기라도 교전을 펼쳐들어야 그 다음에 그 깊이를 깊게 할 수 있는데, 사실 지금의 교단의 청년교화 상황은 뭐라고 이루 말을 할 수 없으니까요.
송 : 10분 남았네요. 좀 걸을까요?
박 : 네.
송 : 또 궁금한 것은 없어요?
박 : 음.. 대리님은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송 : 일단 매주 월요일에는 BBB 정기 모임에 가는데 무척 도움이 되지요.
그리고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우리 회사 서00, 김00 님을 제가 직장에서 양육하고 있어서 모임을 QT 갖고요. 목요일에는 회사 기독교 모임인 신우회 예배를 보고요.
금요일에는 BBB에서 제가 양육하는 제자가 있어서 1대1 멘토링 성경공부를 해요.
주일에는 남편과 교회에서 보내고요.
토요일 오전쯤에야 개인적인 시간이 좀 나는데, 그 때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만큼 나도 성경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서 주로 성경을 읽어요.
저는 제가 가진 시간을 하느님을 위한 시간으로 온전히 쓰는 것을 좋아해요.
박 : 와, 정말 대단하네요. 대리님은 BBB 모임 중에서도 좀 특이한 케이스이지요?
송 : 맞아요. BBB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저는 좀더 여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 편이지요.
박 : 여자면 누구나 예쁘게 꾸미고도 싶고, 예쁜 옷, 보석 이런 데도 끌리고, 사실 취미생활도 하고 싶을 텐데..
송 : 전 선택과 집중을 하고 싶어요, 진짜로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요. 그래서 지금처럼 살고 싶어요.
옷과 악세사리도 그렇고, 여행을 다니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보아도,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대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에 그에 비하면 작은 감흥일 뿐이에요. 영화를 보아도 그때 그 순간에는 즐거울 수 있지만, 결국 하나된 사랑이 아니라 분별에 떨어진 인간들의 사랑을 다루고 있으니까 스케일이 작게 느껴지지요.
우리가 살면서 하루에 여러 생각을 하잖아요.
제가 어느 날 돌아보았는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 보았더니, 너무나 지나치게 의식주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고 살더라고요.
사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예비해 두셨고 그냥 주어지는 대로 살면 되는데 내가 여기에 너무 먹고 자고 입는 데 공연한 걱정을 하고 있구나 생각했었어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 내게 드는 생각들을 살펴보면, 그게 온전한 내 생각인 것 같지만 사실 사탄의 생각일 때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성경은 정말 공부하면 공부할 수록 놀라운 것 같고, 내 평생을 여기에 써도 안 아깝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독교를 유럽에 다 퍼뜨린 사람이 사도 바울인데요, 그 사람은 모든 언어에도 능통하고 천재였던 사람인데, “예수님의 진리가 너무나 완벽해서 나는 그동안 내가 가졌던 지식을 쓰레기같이 여기노라”라고 하셨어요.
어떤 박사는 성경에 나온 오류를 찾아서 기독교를 격파하리라고 생각했다가 결국 오류를 하나도 찾을 수가 없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대요.
저보다 많이 공부를 한 사람들을 보면 성경에 공부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걸 느껴요.
나는 송대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평소의 나를 돌아보면서 반성이 되었습니다.
나도 일주일에 2~3번 가량 교당에 나옵니다.
나도 교당 사업에 동참하려고 노력합니다.
평소에는 중앙으로서 교우들을 챙기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고 불만이 많을까요?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나는 이렇게 하고 있는가요?
나는 교당을 다니면서도 이 시간에 내 또래의 다른 친구들이 하고 있는 것을 한편으로 부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내 친구들은 퇴근 후나 주말에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온전히 씁니다. 교당을 나오지 않는다고 그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학원도 가고, 운동도 하고, 책도 읽습니다. 더 예쁘고 세련된 모습이 되기 위해 피부관리도 받고 손톱도 다듬습니다. 스킨스쿠버를 하거나 주말을 이용해 잠깐씩 해외여행도 다녀옵니다. 자신이 세련되고 똑부러지고 유능한 사람임을 즐기기라도 하듯 맹렬한 자기개발의 연속입니다.
여기에다가 그들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데,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저에게로 말하면 솔직히 부적절한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주말에 교당에 앉아있지만 그렇다고 그들보다 평소 생활에서 특별히 나은 것도 없는 것 같거든요.
나는 솔직히 부럽고 그것을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심 비슷한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도 때로는 더 예쁘고 세련되지고 싶으니까요. 토요일 저녁에는 친구들과 영화도 보러가고 싶고, 가까운 외국 여행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어느 화창한 일요일 전체를 교당에서 사람들과 복작버리면서 보내기는 싫을 때도 있으니까요.
친구들의 화려한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중생제도의 가치와 원불교를 위해서 내가 손해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은 것 같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습니다.
매주 토요법회와 화요공부방, 중앙과 도서자료부장으로 챙겨야 할 일들.
회장단회의, 임원회의, 단장중앙회의, 그리고 크고 작은 교당행사들...
사실 크게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주말을 보내고 나면 원망심이 드는 것이 중생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송대리님은 그것들을 다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주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네 복은 네가 짓고 받는다”라고 합니다.
나는 원불교가 생활종교라는 것이 떠올랐고,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교회와 일상생활이 불일치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나서 여쭈어보았습니다.
박 : 기독교 모임에 가면 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반면에 직장에 오면 사람들이 다 생각이 다르니 편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송 : 맞아요, 확실히 그 모임에 가면 마음이 편한 것이 사실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이야 누가 사랑하지 못하겠는가.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회사에서 크고 작은 일이 생기겠지만 역시 잘 해야겠지요.
주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는 일 VS 복짓는 일
지금 우리 교당에서는 화요일 7시 30분에 시작하는 화요 교리공부방에 사람들이 점점 늦게 오고 출석률이 줄어들어서 문제입니다.
사실 토요법회와 달리, 화요 교리공부방은 평일에 하는 것이라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게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8시 30분 정도까지는 청년 강연이고, 그 강연 원고는 프린트되어서 나누어주기 때문에 제 시간에 오는 것을 소홀히 할 때가 있습니다. 즉 교무님 설법만 잘 듣고 가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가지고 교무님께서는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다 너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화요공부방은 누가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추어 행동을 변화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경우에 뭐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예배 시간에 늦게 들어오는 성도는 안 예뻐하세요.”
“예배 시간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신성한 시간이기 때문에 늦으면 안돼요”라고 하면 매우 간단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을 설정하고, 자녀가 그분이 기뻐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면 매우 쉽게 설명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법회와 수행을 “내 공부를 위한 시간”으로 설정하고 생각하니 안 나가거나 늦게 나가도 결국 내 손해니까 별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복짓는 것도,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이니 이 정도 해서 말겠다,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서원이 없으면 간절함은 기독교보다 못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로부터 개종한 어느 분이 “원불교는 모든 종교의 완결판이다”하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나는 송대리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자랑스러움 속에 숨어있던 나의 오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원불교는 그 중 우월한 종교이며 기독교는 진리이긴 하나 단순한 종교라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함! 교리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믿고 있는 원불교를 다니는 나의 신앙과 기쁨이, 내가 맘 속으로는 인정하지 않던 기독교인의 신앙과 기쁨에 비해 작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간절함, 간절함!
왜 우리 청년들은 기독교 다니는 청년들에 비해서
더 징징대고
더 취약하고
더 프로답지 않고
더 진지하지 않은지..
왜, 고작 일주일에 법회 한번 나오는 것을 가지고 낑낑대고 있는지
교당에서 보내는 시간을 굉장히 큰 봉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는 없는지?
대종사님 당대 때 총부를 뜨겁게 달구었던 20대 젊은이들
그들의 모습을 왜 여기에서 찾아볼 수는 없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에서는 점화가 쉬운데
원불교에서는 점화가 어려운가 봅니다.
나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화, 교화가 지금 심각한 상태인데 교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우리 청년들이 해야 할 일은?
첫째는 기쁨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은 사은의 은혜를 느끼고 알면 기쁨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를 잘 발견하지 못하고, 보은하라는 말을 무슨 부담스럽게만 여깁니다.
이럴 때 단순하게 마음의 기쁨을 관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는가 없는가. 휴일 하루종일 교당에서 사업단 활동을 하는 것이 나에게 스트레스로 남는가 아니면 기쁨으로 남는가 잘 관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모든 것은 누가 시켜서 봉공하는 일, 사은이 은혜를 주셨다니까 마지못해 보은하는 일이 아닌, 내가 기뻐서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보은도 보은행 자체가 기뻐야 합니다.
기쁨을 찾을 수 없다면 그게 정말 잘못된 일입니다.
가장 급한 것이 기쁨을 찾아보는 일이요, 안 그렇다면 내가 무엇 했네 하는 상과 피해의식만 남게 되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기쁨을 찾는가!
기독교인들은 내가 이 공부와 사업을 하면 하나님을 기뻐하시니 그것이 나의 기쁨과 보람이 됩니다.
원불교인들은 내가 원래 공하기 때문에, 그 공한 본성에 부합하는 일을 하였으므로 기쁩니다.
(기독교인은 어쩐지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것 같네요^^)
둘째로 교화시스템에 있어서 체계성과 단순성이 필요합니다.
체계적이라는 것은 시스템적으로 체계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단순성이란, 따라서 개별교화자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해야 할 말들과 전해야 할 것들이 단순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스템이 체계가 있을 수록, 개인의 영향에 드는 것이 줄어들므로 단순명료해집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교재와 프로그램의 마련이 필요합니다.
원불교에서는 그 동안 생활 속의 공부라 하여, 생활 속에서 내가 변하면 저 사람이 와서 물어볼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남이 원 없는 데에까지 굳이 권할 필요는 없다고 하여 마치 적극적인 교화를 아니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속있게 교화하라는 것이요,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할 기회조차 놓치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일괄적으로 “처음 교화대상자를 만날 때는 이 교재, 이 멘트로..”라고 하면 무슨 이게 획일적인 방문판매냐는 반발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해서라도 원불교의 대체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어느 교무님이 택시를 탔는데 택시를 탄 5분만에 택시기사를 교화할 수 있을 정도로 원불교에 대해서 잘 설명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교당에서 그것으로 공부했다고 들었습니다.
5분만에 원불교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생각 체계를 정립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것을 또 매 순간 다듬어서 체계화하여 머릿 속에 두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 송대리님의 작은 교재처럼 가방 속에 넣어다닐 만한 표준교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곘습니까?
그것이 누구나를 위해서도 더 좋습니다.
마치 우리 원불교 출가자가, 도를 얻지 못해도 대종사님 법을 그대로 전하므로 교화활동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재가자도 공부를 많이 못한 사람도 대종사님 법을 그대로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자기보다 하근기인 사람만 자기 자체를 높게 보아 데리고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근기를 만나도 법을 전하므로 데리고 올 수 있어야 합니다.
공부위주 교화 종의 뜻을 잘못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공부를 중시하라는 말씀이지, 도를 얻은 다음에야 제도하겠다 하는 것은 소극적 태도입니다.
가르치면서 서로 공부하는 것이요, 가르치는 것이 가장 큰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가 짧은 사람이 들고 나가도 설명할 수 있는 아주 잘 다듬어진 교재가 필요하겠지요.
셋째로 전문 인력을 공부시켜야 합니다.
기독교에 BBB(직장인 선교단체) 모임이 있는 것처럼, 우리 원불교 청년들 중에서도 정말 공부에 뜻이 있는 전문인력들이 모여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대종사님 당대에 총부 근처에 사는 젊은 선진님들이 서로 공부하면서 서로 힘이 되었던 것처럼, 원불교 청년들도 지역적으로 뭉치고 교화를 고민하여야 합니다.
단 그것은 절대적으로 아주 원론적인 신앙에 바탕한 것이어야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