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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13권
38. 정거천품[2]
[열 가지 법]
부처님께서 다시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으로서 지혜를 성취한 이는 일체 모든 법을 능히 갖추고 다시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닦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선지식을 친근히 하여 벗이 됨을 구하고,
둘째는 큰 자비를 행하여 온갖 것에게 널리 미치고,
셋째는 앞 사람을 만족시켜서 뜻이 염(念)하는 바를 따르고,
넷째는 온갖 경계를 깨끗이 하여 여러 가지 번뇌를 끊고,
다섯째는 청정한 도를 닦아 남의 중요한 소임[重任]이 되고,
여섯째는 여러 가지 고통을 짊어져도 상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며,
일곱째는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여 정요(正要)를 가르치고,
여덟째는 어리석고 미혹한 이를 가르쳐서 바른 도를 믿게 하고,
아홉째는 법과 더불어 상응하여 상대의 받음을 꾸짖지 않고,
열째는 한마음으로 법을 만들어 삿된 부류[邪部]와 함께 서로 참여치 않음이니라.
이것을 족성자여,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바른 법을 닦아 지녀서 이 정의(定意)를 얻으면, 문득 능히 일체 모든 법을 갖춘다고 하느니라.”
[열 가지 걸림 없는 법]
그때에 부처님께서 다시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스승을 공경한다면, 마땅히 이 열 가지 걸림 없는 법을 닦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 걸림 없는 법인가?
첫째는 시방에 노닐면서 여러 부처님을 뵙고 섬기는 것이니, 이것을 족성자야, 첫째의 걸림 없음이라 이른다.
둘째는 온갖 지혜에서 얽힘도 없고 해탈도 없이 단멸법(斷滅法)을 생각함이니, 이것이 둘째의 걸림 없음이요,
셋째는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해 마음이 적멸(寂滅)함이니, 셋째의 걸림 없음이요,
넷째는 비고 한가한 곳에 있으면서 선정(禪定)을 사유하여 뜻이 어지럽지 않음이니, 넷째의 걸림 없음이요,
다섯째는 보살의 법은 본래 일곱 가지의 출요(出要)의 도로서 늘거나 주는 일이 없으니, 다섯째의 걸림 없음이요,
여섯째는 온갖 색상(色相)은 본래 있는 바 없어서 온 곳을 보지 않으니, 여섯째의 걸림 없음이요,
일곱째는 본래 형상이 없고 나고 멸함이 있지 않음을 헤아려서 무상(無常)을 아는 것이니, 일곱째의 걸림 없음이요,
여덟째는 한마음으로 정에 드니 도는 본래 스스로 그러해서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한뜻[一意], 한 행[一行]이 법과 더불어 상응하여 서로 어기거나 등지지 않는 것이며,
열째는 안에도 있지 않고 또한 밖에도 있지 않아서 자연히 일어나고 멸함이니, 열째의 걸림 없음이니라.
이와 같이 족성자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열 가지 걸림 없음을 분별하고 사유한다면, 문득 일체 모든 법을 능히 갖추리라.”
[열 가지 법의 제일의변]
부처님께서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한마음으로 염(念)하는 사이에 일체 모든 법을 능히 갖출 수 있다면, 마땅히 열 가지 법의 제일의변(第一義辯)을 닦아야 하니,
어떤 것이 열 가지 법인가?
첫째는 생겨남이 없는 지혜[無生智], 다한 지혜[盡智], 나고 멸함이 없는 지혜[無生滅智]요,
둘째는 네 가지 평등이 균일하여 나[我]라는 상념이 없음이요,
셋째는 기쁘고 편안하게 스스로 지켜서 네 가지 믿음[四信]을 잃지 않음이요,
넷째는 말한 바가 뜻대로 되어 본래의 소원을 어기지 않음이요,
다섯째는 도의 마음이 굳건하여 법마다 성취되고, 행하는 바의 정견(正見)으로 본래의 모습을 어기지 않음이요,
여섯째는 여섯 가지 중한 법[六重法]을 닦고 본래 없는 모습[本無相]을 관함이요,
일곱째는 원수가 하나로 동등해서 옳고 그름이 없음이요,
여덟째는 한결같은 신심(信心)으로 본래 생겨난 바를 요달함이요,
아홉째는 온갖 법을 강의해 주면서도 법의 상념이 있지 않음이요,
열째는 금강(金剛)의 정의(定意)를 헐지 않아서 성품대로인 것이니라.
이것을 소위 족성자여,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열 가지 법을 갖추면 모든 법을 능히 갖춘다고 이르느니라.”
[열 가지 법의 보시를 닦으면서도 보시의 상념이 없음]
부처님께서 다시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나 선여인이 열 가지 법의 보시를 닦으면서도 보시의 상념이 없으면, 문득 일체 모든 법을 능히 갖추리니,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보리수의 아래에 앉아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음이요,
둘째는 항상 한가히 사는 것을 즐겨하여서 시끄럽고 어지러운 데 처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세 가지 향하는 선정[三向定]을 닦아서 열반문에 나아가는 것이며,
넷째는 선적(禪寂)의 정의(定義)로 스스로 어지러운 생각을 멸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뜻을 살피고 도를 닦아서 탐내고 집착함이 영원히 없는 것이고,
여섯째는 법으로 보시하고 재물로 보시하되 상념을 내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상호(相好)를 스스로 장엄하여 세계를 비추어 밝히고,
여덟째는 방편으로 깨달음이 없는 이로 하여금 부지런히 수행하게 하며,
아홉째는 바른 법을 나타내 밝혀서 지혜의 광명을 보이고,
열째는 남을 대신하여 괴로움을 받되 과보를 구하지 않음이니라.
이것을 소위 천자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열 가지 보시를 행하여 세상의 상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일체 모든 법을 능히 갖춘다고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선남자나 선여인이 마음이 금강과 같아서 막거나 헐 수 없기 때문이니라.
보살이 행하는 온갖 법도 이와 같으니, 또한 나한(羅漢)이나 벽지(辟支)의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
[열 가지 청정한 법]
부처님께서 다시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열 가지 청정한 법을 닦으면 다시 일체 모든 법을 능히 갖추리라.
어떤 것이 열 가지 청정한 법인가?
첫째는 도는 마땅히 청정해야 함이니, 더럽고 탁함은 도가 아니고,
둘째는 도는 마땅히 한뜻이어야 하니, 생각이 많으면 도가 아니고,
셋째는 도는 마땅히 만족함을 알아야 하니, 욕심이 많음은 도가 아니고,
넷째는 도는 마땅히 겸손하여야 하니, 교만함은 도가 아니고,
다섯째는 도는 마땅히 뜻을 살펴야 하니, 마음대로 방일함은 도가 아니고,
여섯째는 도는 마땅히 나타내고 밝혀야 하니, 스스로 숨는 것은 도가 아니고,
여섯째는 도는 마땅히 연속(連屬)하여야 하니, 행이 없음은 도가 아니고,
일곱째는 도는 마땅히 정진하고 부지런해야 하니, 게으름은 도가 아니고,
여덟째는 도는 마땅히 깨닫고 깨쳐야 하니, 어리석고 미혹함은 도가 아니고,
아홉째는 도는 마땅히 교화해야 하니, 아끼고 인색하면 도가 아니고,
열째는 도는 착한 벗을 가까이해야 하니, 악한 일을 익히면 도가 아니니라.
이것을 일러 족성자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열 가지 법을 닦으면 온갖 법을 능히 갖춘다고 하느니라.
마치 햇빛처럼 어둠을 영원히 없애고 세상 사람을 비추어 밝혀주어서 저마다 눈을 얻게 하는 것과 같으니,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이 열 가지 법을 익히면 문득 일체 모든 법을 능히 갖추느니라.
천자야, 마땅히 알아라.
마치 진짜 금은 안팎이 밝고 맑아서 그릇을 만들고자 하면 다 성취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안에 진구(塵垢)가 없으면 밖에 비추는 바가 있고,
또한 허공이 널리 일체를 덮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이 열 가지 법을 닦으면 내가 이룬 바가 있다는 상념이 없어서 중생을 교화하여 온갖 결박과 집착을 끊게 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천자여,
마치 수미산왕(須彌山王:수미산이 가장 높은 산이라는 의미에서 ‘왕’자를 붙인 것임)이 네 가지 보배로 이루어졌지만,
수미산왕도 또한 ‘나는 네 가지 보배로 이루어져서 사해 바다의 중앙에 우뚝 서 있다’라는 상념이 없는 것처럼,
보살이 네 가지 변재(辯才)를 얻음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이 변재를 상념하지 않고 응함에 따라 설하나니, 왜냐하면 본래 상념이 없는 까닭이니라.
마치 대지(大地)가 나무ㆍ꽃ㆍ과실 및 여러 가지 약초(藥草) 등의 만물을 널리 실어서 모두 다 자라게 하지만,
땅도 또한 ‘나는 능히 여러 물건을 기르고 키우는 일을 이룰 수 있다’라는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나는 중생을 교화하여 큰 자비를 행하고 한 부처님 나라로부터 한 부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제도 받지 못한 이를 옹호한다’는 생각을 짓지 않느니라.
천자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치 네 개의 큰 바닷물[四大海]이 갖가지 보배를 산출하니 온갖 중생들이 가서 보배를 얻어 뜻에 따라 돌아오지만,
바닷물도 또한 ‘내가 온갖 보배를 내어서 중생들에게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괴로운 사람을 구제하여 7각의(覺意)에 해당하는 7보(寶)를 주어 보시하지만,
보살도 또한 ‘나는 7각의의 보배를 보시하여 선근(善根)을 갖추고 보리수를 장엄하고 온갖 상호(相好)를 스스로 장식하였다’라는 상념을 짓지 않나니, 왜냐하면 본래 상념이 없기 때문이니라.
천자여, 마땅히 알아라.
마치 법계가 대자대비(大慈大悲)와 6바라밀 등 온갖 법을 내지만,
법계도 또한 ‘나는 대자대비와 6바라밀 등을 내었다’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여러 가지 법을 내서 중생을 교화하되 ‘또한 나도 제도한 바가 있다’고 생각해 말하지 않느니라.
천자여, 마땅히 알아라.
마치 정(定)에 들어간 비구가 온갖 상념을 끊어버려서 마음이 옮기어 움직이지 않지만,
정에 든 비구는 또한 ‘나는 이제 신력(神力)으로 정에 들어 자재하다’라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생각하는 바에 따라 법이 다 성취되고 말하는 바도 참되고 성실해서 본요(本要)를 어기지 않느니라.
천자여, 마땅히 알아라.
마치 금강은 부술 수가 없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법의 성품과 상응하여 본제(本際)를 잃지 않느니라.
마치 밝은 구슬이 널리 비추는 바가 있지만,
밝은 구슬은 또한 ‘나는 비추는 바가 있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그 광명을 보게 한다’란 생각을 짓지 않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이니라.
마치 신선의 도[仙道]를 얻은 사람이 뜻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어, 저 5신통(神通)을 얻고서
또한 ‘나는 지금 생각하는 바를 모두 다 이루었다’라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이니라.
마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工巧人]이 여섯 가지 재주를 잘 알아서 혹은 칼이나 혹은 창으로 대중을 파괴하지만,
저 재주꾼이 ‘나는 지금 사람들 중에서 최고라서 모든 사람을 항복시켜 나와 겨룰 자가 없다’라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한량없는 삼매[無量三昧]에 들어 정의(定意)를 바르게 받아서 삼천대천세계를 감동시키지만,
또한 ‘내게 있는 이 신력이 온갖 세계를 감동시켜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고 스스로 칭찬하지 않느니라.
마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본래 10선(善)과 5계(戒)를 닦아서 삼천대천세계를 모두 통솔하고, 천 명의 용맹한 아들과 7보(寶)를 갖추고, 온갖 좁쌀처럼 흩어져 있는 작은 왕들이 모두 와서 하례를 드리지만,
이때 전륜성왕은 또한 ‘나는 지금 온갖 덕을 갖추고 상호로 몸을 꾸며서 사방의 모든 지역을 거느리고 있다’라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처럼,
왜냐하면 복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여 서로 어긋나거나 등지지 않기 때문에,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보살의 도를 닦고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공경히 받들어서 항상 교화를 행하여 은혜를 입은 천인(天人)과 제도 받은 중생을 측량할 수 없지만,
보살도 또한 ‘나는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고 무여열반에서 반열반하겠다’는 생각이 없고 공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능히 그렇게 하지 않게끔 함이 없느니라.
마치 농부(農夫)가 때[時]에 따라 갖가지 작물을 키우되 적절한 때를 잃지 않으면, 앞의 씨는 뒤의 씨가 아니고 뒤의 씨는 앞의 씨가 아니로되 각각 자라고 크길 같은 양상으로 하지만,
저 곡식의 씨는 ‘나는 생겨났지만 저는 시들어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본성이 스스로 그러하여 사람이 없이도 그렇게 되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여러 가지 법을 두루 배우고 다시 열 가지 선의 공덕의 근본으로 중생의 근본을 깨끗이 하여 모두 무위(無爲)의 도에 나아가게 하지만,
그때 보살은 ‘나에게 지금 제도를 받은 보살마하살이 여기로부터 저기에 이른다’라는 생각을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성이 스스로 그러하여서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마치 단비[甘雨]가 때에 맞게 내려서 백곡(百穀)과 나무와 풀이때에 따라 자라건만,
그러나 구름과 비는 또한 ‘나에게는 윤택(潤澤)함이 있어서 키우고 기르는 바가 있다’라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본래 무심이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라서 법의 구름[法雲]을 한번 내려서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윤택하게 하여 중생을 다 윤택케 해서 본래의 소원을 버리지 않고 보살도를 행하지만,
보살도 또한 ‘나는 이제 능히 법우(法雨)를 내려서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윤택하게 하여 중생들을 모두 깨달아 열게 한다’라는 생각을 짓지 않나니,
왜냐하면 본래 심의(心意)가 없고 큰 서원의 마음이 성품 그대로이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의 정의(定意)에 들어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끝까지 청정에 이르게 하되 남김없이 청정하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끝까지 안온함에 이르게 하되 남김없이 안온하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저 언덕에 도달하게 하되 남김없이 도달하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바라밀을 얻게 하되 남김없이 능히 건너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마지막 환희에 이르게 하되 남김없이 환희하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번뇌를 끊게 하되 남김없이 능히 끊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양호한 복밭[良祐福田]에 편히 처하게 하되 남김없이 능히 편안하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보시하는 복[信施福]을 받아서 온갖 것을 제도하게 하되 남김없이 능히 복을 받아서 일체를 제도하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성현의 법률에 들어가게 하되 남김없이 성현의 법률에 능히 들어가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불퇴전(不退轉)에 서게 하되 남김없이 불퇴전에 능히 서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지혜를 얻어서 삼천대천찰토에 두루함을 얻게 하되 남김없이 능히 삼천대천에 두루하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사람을 위하여 훌륭히 이끄는 자[將導]가 되게 하되 남김없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이 정의(定意)의 한량없는 법의 행을 익힌 것은,
일체에 널리 두루하여 제도를 받게 함으로서 법성(法性)의 큰 서원 법문의 불가사의하고 무한 광대함을 열기 위함이지,
한 사람만의 청정한 보살도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일체의 제도받기 어려운 중생에게 널리 미쳐서 그 가운데에 건립하여 바라밀에 응하는 것이다.
혹 때로 어떤 보살은 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목숨을 끊어 고통을 대신 받고,
혹 어떤 보살은 한 사람을 위하여 겁(劫)으로부터 겁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놓아 버리지 않고 제도를 얻게 한 뒤에 스스로 곧 멸도하며,
혹 어떤 보살은 자기의 경계를 깨끗이 하고자 하여 온갖 속박과 집착을 끊고 중생의 근본을 깨끗이 해서 청정한 바른 법의 출요(出要)에 편안히 처하게 하느니라.
다시 어떤 보살은 정중하게 고행(苦行)을 닦아서 하늘 복[天福]에 집착하지 않고, 5도(道)에 늘 있으면서 두루 돌아다니며 교화하고,
혹 어떤 보살은 4무외(無畏)를 얻어서 중생을 교화하는 데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품지 않고,
혹 어떤 보살은 네 가지 변재를 얻어서 사람이 와서 힐문하면 이치의 통함이 걸림이 없고,
혹 어떤 보살은 법문을 설하여서 영화에 집착하지 않고 요행으로 이익을 구하지 않느니라.
혹 어떤 보살은 총지문(總持門)을 얻어서 법관(法觀)을 분별하여 부정행(不淨行)을 닦고,
혹 어떤 보살은 부처님의 정의(定意)를 얻어서 일체지(一切智)를 세워 망령된 상념을 버리지 않고,
혹 어떤 보살은 부처님의 출요를 얻어서 온갖 사람으로 하여금 출가하여 도를 배우게 하고,
혹 어떤 보살은 신통의 지혜[神通慧]를 얻어서 권도의 방편을 행하여 형상을 따라 들어가며,
혹 어떤 보살은 형상 없는 관의 삼매[無形觀三昧]를 얻어서 허공계에 들어가 부사의(不思議)를 행하고,
혹 어떤 보살은 멸진정(滅盡定)을 얻어서 현재에 멸도를 취할 뿐 열반에 처하지 않고,
혹 어떤 보살은 일곱 가지 관의 도[七觀道]를 얻어서 밖으로는 위의를 나타내고 안으로는 실제로 충족하며,
혹 어떤 보살은 천안통(天眼通)을 얻어서 시방의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을 두루 살펴서 듣지 못한 것을 자문을 받아 스스로 기뻐하고 즐기며,
혹 어떤 보살은 천이통(天耳通)을 얻어서 온갖 소리를 두루 듣고 선과 악을 분별하다가 문득 가서 능히 제도하여 타락하지 않게 하고,
혹 어떤 보살은 심의통(心意通)을 얻어서 신족(神足)의 힘으로 가서 제도하고,
혹 어떤 보살은 숙명통(宿命通)을 얻어서 스스로의 숙명도 알고 또한 다른 이가 온 곳도 알아서 품류를 따라 조복시켜 가장 자리[邊際]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혹 어떤 보살은 누진통(漏盡通)을 얻어서 능히 온갖 중생의 맺히고 얽힘을 끊으며,
혹 어떤 보살은 보리수의 아래에 앉아서 부처님 신덕(神德)의 위의와 법칙을 얻어서 위의를 성취하고 종성(種姓)을 성취하고 부모를 성취하고 집[居家]을 성취하며,
혹 어떤 중생은 부처님의 광명을 얻어서 부처님 머무는 바에 머물러서 달이 처음 뜬 것처럼 마음이 나아가고,
혹 어떤 중생은 부처님 지혜의 경지[佛慧地]에 머물러서 능히 지혜의 검으로 번뇌를 베어 끊는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75가지 법의 여래 심장(深藏)의 부사의행으로 성불하게 되어서 끝내 퇴전하지 않으니, 이는 또한 나한이나 벽지불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
이와 같이 천자야, 보살마하살 가운데 이 온갖 행의 정의(定意)를 얻은 이는 능히 삼천대천세계를 다 황금빛으로 만들고, 온갖 중생의 품류를 이끌어서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향하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천자여, 마땅히 이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여야 비로소 보살의 율(律)에 응하느니라.
[열두 가지 걸림 없는 청정한 도의 근본]
다시 어떤 보살은 열두 가지 법을 닦아서, 행하는 바에 걸림이 없이 나아가고 그치고 가고 오며 보살의 도를 닦으니,
어떤 것이 열두 가지인가?
첫째는 마군의 군사를 항복시켜 10력(力)의 행을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는 공덕을 함께하여 나고 멸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고,
셋째는 능히 신통의 힘으로써 온갖 소원을 채우는 것이고,
넷째는 집착 없는 힘에 의하여 부처님의 변화를 보는 것이고,
다섯째는 자기가 심은 선(善)의 근본 공덕으로 능히 일체에 보시하면서도 후회하거나 아까워함이 없는 것이고,
여섯째는 제일(第一)의 법을 닦아서 부처님의 경계[佛量]를 넘어서는 것이고,
일곱째는 태어남이 고통이 됨을 알아서 3유(有)에 물들지 않는 것이고,
여덟째는 다함이 없는 도의 근본으로 스스로 즐기는 것이고,
아홉째는 성문의 행을 알아도 물들어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열째는 연각의 법을 알아도 버리고 여의어서 따르지 않는 것이고,
열한째는 걸림 없는 도의 법으로 아홉 차제[九次第:차례로 이어서 닦는 9종의 선정]를 행하는 것이고,
열두째는 마땅히 부모와 권속을 교화함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을 천자야, 열두 가지 걸림 없는 청정한 도의 근본이라고 이르나니, 보살은 마땅히 이 법을 닦아 익혀서 그 도과(道果)를 이룰 것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상지멸의 열 가지 일]
천자야, 마땅히 알아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일심(一心)의 정의(定意)로 상지멸(想知滅:생각과 알음알이가 멸한 경지)의 열 가지 일을 익혀서 과거ㆍ미래ㆍ현재를 알아 부처님의 행하신 바와 다름이 없게 하여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상지멸의 열 가지 일인가?
첫째 색의 형상(形像)이 본래 있는 바가 없음을 관해서 형상을 일으키는 법에 물들어 집착하지 않으면,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이 행하는 바와 같아서 다름이 없느니라.
(둘째) 그때에 보살이 상호(相好)의 바라밀을 닦으면 낱낱의 상(相)이 부처님이 행한 바와 같아서 다름이 없으니라.
(셋째) 보살의 신령한 지혜가 자유자재하여서 중생에 응하여 교화하고 인연을 따라 가서 제도한다면, 부처님의 행한 바와 같아서 다름이 없느니라.
(넷째) 그때에 보살이 한량없는 몸을 색상(色像)의 제일로 변화시켜서 여덟 가지 소리로 중생을 권하여 인도한다면, 부처님이 행하신 바와 같아서 다름이 없느니라.
(다섯째) 또 저 보살이 부처님의 나라를 깨끗이 하고 중생이 심의(心意)로 생각하는 바를 관찰하면서 위의와 예절에서 금계(禁戒)를 잃지 않는다면, 부처님이 행하신 바와 같아서 다름이 없느니라.
(여섯째) 그때에 보살이 다시 정의(定意)에 들어가 삼매를 바르게 받아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음향(音響)을 분별하고 굳세게 기억하여 잊지 않게 한다면, 부처님이 행하신 것과 같아서 다름이 없느니라.
(일곱째) 또 저 보살이 열 가지 밝은 지혜[十明慧]를 행함이 한정이 없고 한량이 없어서 다할 수 없고,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이 법의 근본을 익히게 하여 적절히 때에 따라 위없는 법륜을 굴리면, 부처님이 행하신 바와 같아서 다름이 없느니라.
(여덟째) 또 저 보살이 4무외를 얻어서 대중 속에서 사자후를 발하여 성현인 여래의 바른 법을 끊지 않고, 다시 이 법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모두가 위없는 도를 성취하여 일체지(一切智)의 걸리는 바 없음에 미치면, 부처님이 행하신 바와 같아서 다름이 없느니라.
(아홉째) 또 저 보살이 입으로 가르침을 연설한 바가 일체에 두루 퍼져 3세(世)의 행에 들어가서 온갖 샘이 있음[有漏:번뇌]이 다하고 샘이 없는[無漏] 행을 이루어 신통과 지혜의 통달[智達]로 능히 일체를 교화한다면, 부처님이 행하신 바와 같아서 다름이 없느니라.
(열째) 또 저 보살이 부처님의 두려움 없음과 10력(力)을 갖추어서 부처님 국토의 중생이 본래 청정함을 본다면, 부처님이 행하신 바와 같아서 다름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천자야,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일을 행하면 성불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본래 있는 바가 없고, 또한 때[時]는 본래 오고 감이 없으며, 온갖 법은 상(相)이 없고, 상 또한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온갖 법은 소리가 없고, 소리는 본래 형상이 없어서 본래 성품이 스스로 공하니,
왜냐하면 소리는 허공으로부터 나왔다가 도로 허공으로 돌아가는데, 중생이 물들어 집착하면서 식의 상념[識想]을 일으키기 때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