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示衆)
14-5 수행이란 업을 짓는 일이다
儞諸方言道호대 有修有證이라하니 莫錯하라
設有修得者라도 皆是生死業이며
儞言六度萬行齊修라하나 我見皆是造業이니라.
求佛求法은 卽是造地獄業이라 求菩薩亦是造業이요
看經看敎도 亦是造業이니 佛與祖師는 是無事人이라
所以有漏有爲와 無漏無爲가 爲淸淨業이니라.
《해석》
“그대들이 제방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고 말하는데 착각하지 말라.
설령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다.
그대들은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 업을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도 업을 짓는 것이며,
경을 보거나 가르침을 듣는 것도 또한 업을 짓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는 바로 일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조사에게는
억지가 있고 조작이 있는 유루유위(有漏有爲)와
조작 없이 저절로 그러한 무루무위(無漏無爲)가
다 청정한 업이 된다.”
《강설》
불교역사에서 임제스님 등 몇몇만 빼고는 모두 수행을 강조한다.
열심히 닦아야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별의 별 수행을 다 권한다.
참선, 염불, 간경, 주문, 육바라밀, 몸을 불사르고 절을 하는 등등이다.
그러나 임제스님은
위와 같이 수행해서 깨닫는 다는 것은 잘못 알고 있다고 한다.
수행이 전혀 필요 없는 일이다.
놀라운 말씀이다.
설사 수행을 해서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 될 뿐이다.
생사해탈을 위한 수행이 도리어 생사 속으로 빠져드는 길이란다.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 일도 다 업을 짓은 일이다.
불교는 성불이 목적이라고 하는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일이
모두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
구하는 그 사람이 곧 부처인데
그 사람을 버리고 따로 구하니 지옥 업이 될 수밖에 없다.
보살이 되기 위한 일도
경을 보거나 법문을 듣는 일도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란다.
영가스님도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덕을 베푸는 것은
부처될 기약이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본래로 닦아 깨닫는 부처란 없다[無修證佛].
닦아서 점차적으로 되는 부처도 없다[無漸次佛].
사다리 타듯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서
히말라야 산에라도 올라가자는 것인가.
위와 같은 가르침과 주장이
불교의 수많은 다른 가르침이나 주장보다 우선하기에
우리나라의 유수한 큰 스님들이
모두 임제스님의 법을 이었노라고 자랑한다.
위와 같은 임제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지 않으면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사상이 불교의 바른 사상이다.
진짜 불교다.
그렇다면 부처란 무엇인가?
일 없는 사람이다.
일 없는 사람이 부처인데 무슨 업을 그리 많이 짓는가.
일이 없는 사람인 줄 알고 나면
그때에 가서는 조작이 있는 짓이나 조작이 없는 짓이나
모두가 업이라 할 것도 없는 청정한 업이 된다.
텅 빈[청정한] 업이 된다.
양변을 떠나 있으니
유나 무나, 선이나 악이나, 생이나 멸이나
어디에 있어도 그는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다.
변견에 있어도 변견이 아니고,
편견에 있어도 편견이 아니다.
양변을 떠났으되 양변에 다 조화를 이루며 산다.
그래서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일뿐이다.
구불구법 즉시조지옥업(求佛求法 卽是造地獄業).
촌철살인의 말씀이다.
깊이깊이 사유하라.
有一般瞎禿子하야 飽喫飯了하고
便坐禪觀行호대 把捉念漏하야 不令放起하며
厭喧求靜하나니 是外道法이니라.
祖師云, 儞若住心看靜하며 擧心外照하고 攝心內澄하며
凝心入定하면 如是之流는 皆是造作이라하니라.
《해석》
“어떤 눈멀고 머리 깎은 사람들이
밥을 배불리 먹고 나서 곧 좌선하거나 관법을 하되
생각이 새어나가는 것을 꽉 붙들어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
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만을 찾는데
이것은 다 외도의 법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마음을 안주시켜 고요함을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정(定)에 든다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조작이다.’라고 하셨다.”
《강설》
좌선을 하고 관법을 수행하는 스님들을 비하해서
눈멀고 머리 깎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꾸준히 새어나가는 것을 붙잡아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또는 시끄러운 것을 매우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편견에 떨어져 있다.
그래서 좌선하는 사람들은
선방 부근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거나
일을 하는 소리가 들리면 기겁을 한다.
잡아먹을 듯이 화를 낸다.
또한 생각을 가라앉히거나 한 곳에 집중하거나
숨을 쉬는 것에 예의주시하거나
자신의 하나하나의 행위를
관찰하고 주시하는 따위의 수행을 하는 자도 있다.
이런 것은 불교가 아닌 외도(外道)의 법이라고 매도한다.
불교에서 가장 심한 욕이 불자를 외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제스님은 그와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조사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그따위 공부는 모두 조작이며 가짜라고 한다.
마음을 안주시켜 고요히 하는 것이 공부라면
일상생활에서 피치 못할 일,
즉 밥을 먹고 대소변을 보고 하는 일을 할 때는
공부가 아니지 않은가.
또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춰보거나,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는 것이 공부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또 무엇이라고 하는가.
또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선정에 드는 것이 공부라면
선정에 들지 않고 옷을 입거나 목욕을 하거나 할 때는
역시 공부가 아닌 것이다.
공부가 그렇게 간단이 있고 틈이 있으면
그것을 어찌 출세간의 공부라 할 것인가.
도가(道家)에서도
“도란 한 순간도 떠나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순간이라도 떠나 있으면 도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도교의 도도 이렇거늘 하물며 불교의 법이겠는가.
공부의 바른 길을 이렇게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밝혔다.
최상의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길을 잘 못 든 사람이 비일비재하다.
천 원짜리 물건을 하나 사면서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살피면서
인생을 걸고 도를 닦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살피고 또 살피며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할 일이다.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를 잘 가려야 한다.
그래서 정법(正法)을 찾아야 한다.
여시지류 개시조작(如是之流 皆是造作).
조작이 아닌 것이 불교다.
是儞如今與麽聽法底人을 作麽生擬修他證他莊嚴他리오
渠且不是修底物이며 不是莊嚴得底物이니라.
若敎他莊嚴하면 一切物을 卽莊嚴得이니 儞且莫錯하라.
《해석》
“그대들은 지금 이렇게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어떻게 그를 닦고,
어떻게 그를 증득하며,
어떻게 그를 장엄하려 하는가?
그것은 닦을 물건이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만약 그것을 장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잘못 알지 말라.”
《강설》
이 사람은 본래로 완전무결하여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이라 달리 어디서 가져올 일이 아니다.
너무나 잘 생겨서 더 이상 장엄하거나 꾸밀 것이 아니다.
꾸미거나 화장을 하면 오히려 더 추하게 만든다.
닦거나 꾸미거나 장엄을 하면
마치 머리위에 다시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아서
멀쩡한 사람을 요귀를 만드는 격이 된다.
그 사람은 닦고 꾸미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일이 붙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이 보고 듣고 하는 일이란
그저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은 도리이다.
만약 그 사람을 장엄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장엄할 수 있으리라.
“꽃은 화사하게 피어 있고 새는 아름답게 지저귄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각각 완연하다.”라는 표현이 있다.
사람사람이 본래로 구족하였고
개개가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달리 무슨 장엄이 필요하겠는가.
또 저 산하대지를 어떻게 장엄하려고 하는가.
제발 그르치지 말라.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4-5 修行 (수행)이란 業(업)을 짓는 일이다
儞諸方言道(이제방언도)호대 有修有證(유수유증)이라하니 莫錯(막착)하라.
設有修得者(설유수득자)라도 皆是生死業(개시생사업)이며
儞言六度萬行齊修(이언육도만행제수)라하나 我見皆是造業(아견개시조업)이니라.
求佛求法(구불구법)은 即是造地獄業(즉시조지옥업)이라
求菩薩亦是造業(구보살역시조업)이요看經看教(간경간교)도 亦是造業(역시조업)이니
佛與祖師(불여조사)는 是無事人(시무사인)이라
所以有漏有爲(소이유루유위)와 無漏無爲(무루무위)가 爲清淨業(위청정업)이니라.
有一般瞎禿子(유일반할독자)하야 飽喫飯了(포긱반요)하고
便坐禪觀行(변좌선관행)호대 把捉念漏(파착념누)하야 不令放起(불령방기)하며
厭喧求靜(염훤구정)하나니 是外道法(시외도법)이니라.
祖師云(조사운), 儞若住心看靜(이약주심간정)하며 擧心外照(거심외조)하고
攝心内澄(섭심내징)하며 凝心入定(응심입정)하면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皆是造作(개시조작)이라하니라.
是儞如今與麼聽法底人(시이여금여마청법저인)을
作麼生擬修他證他莊嚴他(자마생의수타증타장엄타)리오
渠且不是修底物(거차불시수저물)이며 不是莊嚴得底物(불시장엄득저물)이니라.
若教他莊嚴(약교타장엄)하면 一切物(일체물)을 即莊嚴得(즉장엄득)이니
儞且莫錯(이차막착)하라.
修行(수행)이란 業(업)을 짓는 일이다, 그랬습니다.
‘儞諸方言道(이제방언도)호대 有修有證(유수유증)이라하니’,
그대들 제방에서 말하기를, 닦음도 있고 증득함도 있다,
수행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
우리 일반 불교에서 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냥 앉아서 쪼고 있고 용맹정진도 하고
뭐가 나올까 싶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거요.
제방에서 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답은 못 얻으면서 끊임없이 그쪽으로만 나가고 그렇게 되는 거야.
有修有證(유수유증), 그것이 수행이다 그러는 거요.
그런 걸 자꾸 하다보면 깨닫는 게 있다,
증득하는 게 있다 그렇게 하는데,
‘莫錯(막착)하라’, 착각하지 마라.
‘設有修得者(설유수득자)라도’,
설사 너희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 용맹정진하고
30년, 40년, 50년 세월을 그렇게 참선 수행을 해서
뭔가 얻은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皆是生死業(개시생사업)이며’, 그건 전부 생사업이다.
‘儞言六度萬行齊修(이언육도만행제수)라하나’,
그대들이 말하기를 육도만행을 다 닦는다, 전부 다 닦아.
참선만 하는 게 아니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걸 전부 골고루 열심히 닦는다고 하지만,
‘我見皆是造業(아견개시조업)이니라’,
내가 보기에는 전부 다 업 짓는 짓이다 이거여.
업은 좋은 업이야 일단.
그래도 우리가 그런 업을 지어야 돼.
그런데 왜 여기서 업을 짓는 일이라고 비꼬아서 말하는가 하면
정말 내 진실한 한 마음자리, 무위진인 그 자리에 딱 안주해가지고
보시를 하든 지계를 하든 뭘 하든
그야말로 흐르는 물에 배 타고 아무 힘들이지 않고 지나가듯이
그렇게 참선을 하고 육도만행을 닦아야 옳은데
이건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목을 매다는 거요.
그러니까 그걸 업을 짓는다고 하는 거예요.
어떤 좋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아! 이건 나의 삶이야,
그냥 놀면 뭐 할거야, 아무 것도 안하면 뭐 할거야 하고
봉사도 하고 어디 가서 어려운 일도 도와주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일을 인연 따라서 자기 능력 따라서
보살행을 설렁설렁 하면 그거는 업 짓는 게 아니야.
왜냐?
주인이 주인 자리에 딱 있으니까.
주인으로서 내 자리에 딱 있는 거, 수처작주하는 것.
그걸 못하니까 이건 조업, 업을 짓는 일이다.
‘求佛求法(구불구법)도’,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即是造地獄業(즉시조지옥업)이라’,
부처되려고 하는 것은 지옥업 짓는 것이다.
진리를 구하는 것은 지옥업 짓는 것이다.
진리가 뭐고 부처가 뭐기에 자신을 두고 밖에 나가서 업을 짓느냐고요.
무슨 일을 하느냐 이거요.
하, 이건 제가 하는 소리가 아니고 임제스님이 하는 소리입니다.
하도 겁이 나서 내가…
‘求菩薩亦是造業(구보살역시조업)이요’,
보살을 구하는 것도 또 조업이다, 업을 짓는 것이다.
‘看經看教(간경간교)도’, 경을 보고 교를 보는 것도
‘亦是造業(역시조업)이니’, 역시 업 짓는 일이니
‘佛與祖師(불여조사)는’, 부처와 조사는,
‘是無事人(시무사인)이라’, 일 없는 사람이다 이거야.
그러니까 육도만행을 해도 일 없는 입장에서 하는 거지.
정말 열심히 누구보다도 더 땀을 많이 흘리고 하더라도
자기 마음에는 한다고 하는 것이 하나도 없이 그냥 하는 거야.
그러면 무사인이야.
이건 일을 해도 일이 없는 사람이고
만약에 거기에 매달리고 하면 그건 정말 유사인이 되는 거죠.
佛與祖師는 無事人이다.
‘所以有漏有爲(소이유루유위)와 無漏無爲(무루무위)가
爲清淨業(위청정업)이니라‘, 그렇게 되면 텅 빈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여기서 유루유위 무루무위는 청정업이라고 하는 것은
다 텅 빈 것이다 공한 것이다,
공의 의미를 청정이라고 많이 이야기하니까요.
그런 업은 유위업이 됐든지 무위업이 됐든지 다 텅 빈 것이다.
‘有一般瞎禿子(유일반할독자)하야’,
일반 눈 먼 머리 깎은 사람이 있어서
‘飽喫飯了(포긱반요)하고’, 배불리 밥을 먹고 나서
‘便坐禪觀行(변좌선관행)호대’, 곧 좌선관행, 좌선하면서 관행한다,
앉아서 수행하든지 비파사나를 하든지 하는 모든 전통 선법을
전부 ‘좌선관행’ 이 소리에 다 포함되는 거죠.
아니면 지관타자를 하든지.
그냥 앉아 있는 것만 하든지.
아니면 뭐 주력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일반적으로 통틀어서 말할 땐 좌선관행이야.
좌선관행하는데 이제 이런 類가 있죠.
‘把捉念漏(파착념누)하야’,
생각이 빠져나가는 것, 새어 나가는 것을 딱 잡는다 이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거,
그래서 ‘不令放起(불령방기)하며’, 놓아서 일어나지 않게 한다.
그러니까 생각이 빠져나간다는 것은
계속 생각이 흘러가고 새로운 생각이 들어와서 또 흘러가고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서 또 흘러가고… 이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거지.
그걸 不令放起여, 놓아서 일어나지 않게 한다.
대개 참선이란 그런 거 아닙니까.
잡념이 많이 일어나서… 이러잖아요.
그 다음에 ‘厭喧求靜(염훤구정)하나니’,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구한다.
대개 시끄러운 거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해.
그래서 한참 좌선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여름에 수련대회를 한다든지 하면
막 그냥 화를 머리끝까지 나가지고
공사도 못하게 하고 야단법석을 떠는 거지.
속은 더 시끄러우면서 밖에 조금 시끄러운 거 그냥 지나가면 가는 건데
하루 종일 하라고 해 봐야 하지도 않아요.
아이들 아무리 떠들어봐야 잠깐 떠들다 말지.
그 이튿날 새벽까지 못 떠들어.
그런데 그걸 못 참고 뛰어나와서 주지 어디 갔나,
교무 어디 갔나 하고 막 그냥 떠들어대는 거요.
그래서 안이나 밖이나 고요하기만을 구하는 거야.
求靜, 고요한 것만 자꾸 구하나니,
이런 것은 ‘是外道法(시외도법)이니라’,
그거 외도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이거 전통 불교의 최고의 스승인 임제스님이
이게 전부 외도법이라고 가르쳤어.
把捉念漏하여 不令放起, 외도법이라고 했어요.
厭喧求靜, 생각이 일어나게 돼 있어.
왜 멈추려고 해?
그걸 왜 잡으려고 해?
왜 안 일어나게 하려고 해?
그냥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가보다 해야지.
시끄러우면 망상이 일어나서 시끄러운가보다 하고.
‘祖師云(조사운), 儞若住心看靜(이약주심간정)하며’,
구체적으로 네 가지를 들었어요.
보통 전통 불교에서 수행하는 방법을 네 가지를 들었는데,
住心看靜(주심간정), 擧心外照(거심외조),
攝心内澄(섭심내징), 凝心入定(응심입정) 그랬습니다.
주심간정은
그대들이 만약에 住心, 마음을 머물러 가지고,
看靜, 고요한 것을 간한다 이 말이여.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자꾸 잡아서 놓고, 놓고 하는 거요.
우리가 화두를 한번 들고 앉아 있으면
화두는 금방 어디로 놓쳐버리고 또 망상이 들어오죠.
住心 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화두라 해도 좋아요.
화두를 딱 멈춰 둬, 住, 화두를 딱 멈춰 둬 가지고
항상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거죠.
그런 방법이 있고,
擧心外照(거심외조)라, 마음을 들어서 밖을 관조하는 거야.
이게 止觀.
앞에는 止고 요거는 觀이야.
비파사나가 여기에 다 해당되는 거야.
거심외조 하잖아요.
내가 숨을 쉬면 숨 쉬는 것을 예의 관찰하고
밥을 먹으면 밥 먹는 것을 예의 관찰하고
누구하고 싸워도 싸우는 것을 예의 관찰하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역시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예의 관찰하는
이런 관찰법이 있는 거야.
이건 이것대로 하나의 수행이라고 생각을 해요.
擧心外照.
남방에서 공부해가지고 비파사나 하는 게 전부 거심외조야.
마음을 들어서 밖을 비춰 보는 거지.
그래 첫째 숨 쉬는 거부터 살피잖아요.
숨은 한 순간도 안 쉬곤 못 배기니까.
살아있는 동안엔 숨을 쉬니까 살피기가 제일 좋은 거야.
또 어딜 가면 걸어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내 마음이 그 걸어가는 것을 따라 가는 거야 계속.
밥을 먹으면 밥 먹는 거 따라가고.
그러면 사람이 상당히 침착해지고 조용해져.
왜냐, 하나의 내가 있어서 밖에서 드러난 나를 살피니까.
그래서 이런 수행을 한 사람은
아주 조용하고 침착하고
그리고 함부로 덜렁대지도 않고 그런 점은 있어요.
그 중의 대표자, 석일행스님 석일행.
釋一行 하니 모르겠죠?
틱낫한.
그 분이 우리 세계에서 지금 제일 고수야.
출가한 스님들은 전부 釋자 써야 돼요.
그런데 스님들이 만약에 속가 성을 쓰면 큰 잘못입니다.
반드시 석 자 써야 돼요.
그런데 서류상에 꼭 필요하고 법적으로 필요할 때는
당연히 속명 속성 써야지.
그러나 불명 쓸 때는 무조건 석 자 써야 돼요,
석 누구누구.
그런데 석일행 스님처럼 그렇게 아주 몸에 배어 버리면
그런 사람들은 조용하고 침착하고 실수가 없지.
그렇게 되면 실수를 안 해요.
왜냐, 실수를 하기 전에
또 하나의 내가 실수하는 나를 살피고 있으니까.
그게 익숙해진 사람은
그게 나를 살피고 있으니까 살피고 있는데 실수할 리가 없죠.
그 다음에 ‘攝心内澄(섭심내징)하며’,
内澄, 밖으로 흘러가는 마음을 거둬들여 가지고
안으로 고요하게 맑게 하는 거야.
보통 진여를 관한다든지 하나의 무엇을 관해가지고
일어나는 마음을 자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전부 거둬들여 가지고 안에서 녹여.
녹이고 녹여서 나중에는 그런 망상이 깨끗해져가지고
안으로 아주 맑은 물같이 깨끗해져버려.
밖으로 일어나던 마음들을 전부 그렇게 하니까.
그 다음에 ‘凝心入定(응심입정)하면’,
간화선이 여기에 해당 될 수가 있어요.
마음을 응고시켜, 뭉쳐, 화두에 뭉쳐가지고 선정에 들어간다 이거지.
凝 자가 그 말입니다.
마음을 화두에다 엉기게 만들어, 엉길 凝 자 아닙니까.
그러니까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그 마음이
화두라고 하는 하나의 어떤 문제에다가 자꾸 집중시키는 거야.
그러면 마음이 화두에 엉기는 거죠.
이것을 火鏡(화경)을 가지고 비유를 많이 하지요.
태양빛이 아무리 뜨거워봐야 불이 안나요.
그런데 그 화경, 돋보기를 가지고 초점만 딱 맞춰서 종이에 갖다 대면
2-3분만 있어도 불이 확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게 凝心入定이야.
흩어져 있는 태양빛을 하나로 엉기게 만든 거지.
집결시킨 거지.
마음을 모아서 선정에 들어간다.
하나의 어떤 안정된, 定은 뭐죠,
정은 안정되고 고정된 그런 데 들어가는 거요.
주력이든 기도든 무슨 비파사나든 화두참선이든 아니면 묵조선이든
이 모든 선정 수행이 전부 이 네 가지에 다 해당됩니다.
住心看靜(주심간정), 擧心外照(거심외조),
攝心内澄(섭심내징), 凝心入定(응심입정) 여기 다 들어가요.
‘如是之流(여시지류)는 皆是造作(개시조작)이라하니라’,
전부 조작이야.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고.
그래서 육조스님은 그동안 출가하기 전에는 세속의 어떤 관례,
그 당시 세속의 관례가 뭡니까, 충효거든요.
나라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만 되면 무조건 충성해야 돼.
그 다음에 효도하는 거야.
忠, 孝 둘 뿐이야.
부모에게 효도하고 선조들에게 효도하고
그것이 그냥 머릿속에 콱 박혀 있는 거야.
그 울타리에서 요지부동이라.
그런데 뭐라고?
응무소주 이생기심, 머물지 말고 네 마음 내키는 대로 써버려라.
충과 효,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이생기심, 네 마음 내키는 대로 써버려라 그거야.
그게 우리 인간 마음의 본래 생긴 모습이다.
어떤 법도 설정해 놓고
그것을 하나의 고정관념화 해 가지고 거기에 목을 매고
이것이라야 된다 하고 꼭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그 말 아녀?
그 말 딱 듣고는 그만 하~ 정말 거기서 해탈해버린 거야.
충효라고 하는 거기에 해탈해버리고
바로 홀어머니도 버려버리잖아.
그리고 그냥 저 갈 데로 가는 거 아닙니까.
대단하잖아요.
우리 인간의 마음이 생기기를 그렇게 생겼고
마음이 근본이고 그 근본 따라서 우리는 살게 돼 있는 거야.
그런데 그 마음을 뭐 거둬 들인다, 붙들어 맨다,
여러분들 아무리 해 봐요.
하루 24시간 참선한다고 앉아 있어 봐.
10분도 안 돼서 微細流注(미세유주)라고 해 가지고
아주 미세한 흐름이 있는가 하면 큰 흐름이 있어 큰 망상,
이 생각이 났다가 저 생각이 났다가,
그거는 우리가 생각하면서도 의식해.
그런데 의식 못하는 미세유주가 있어요.
아주 미세한 생각의 흐름은 의식 못합니다.
내가 하고도 내가 생각 못하는 게 있어.
그게 마음의 본령이라, 마음이 본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거요.
이 죽은 물건이 아니니까.
죽은 물건은 가만히 있지만
이거는 정말 펄펄하게 살아 있는 물건이기 때문에
이게 한순간도 그냥 있지 않는 거야.
그래서 가치관도 그렇게 설정해 놓고
이거다 저거다 할 일이 아닙니다.
충성과 효도가 지상에서 제일가는 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이거야.
사람은 사람의 본래 생긴 모습 그것을 파악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정성스럽게 모시던 어머니를 버려 버리고 가잖아요.
지금 우리가 출가한 거 하고 천지차이입니다.
중국에 그 당시 사회 통념상,
홀어머니를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모시다가
그것을 버리고 간다고 하는 사실이 보통 혁명이 아닌 거요 이거는.
그러니까 천하의 육조 혜능이 됐죠.
나무 장사나 하는 총각이었는데 속에는 그런 아주 당찬 게 있었어.
‘是儞如今與麼聽法底人(시이여금여마청법저인)을’,
이것은 그대들 지금, 與麼, 이렇게 청법하고 있는 그 사람,
지금 여러분들 이렇게 청법하고 있는 이것이 與麼야, 이렇게.
이처럼 법문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그 사람,
‘作麼生擬修他證他莊嚴他(자마생의수타증타장엄타)리오’,
그 사람을 作麼生(자마생), 어떻게 그것을 닦고자 하며(修他)
어떻게 그것을 증득하고자 하며(證他)
어떻게 그것을 장엄하려고 하느냐(莊嚴他)
아 그놈이 도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그걸 닦으려고 하고 증득하려고 하고 꾸미려고 하고 장엄하려고 하고...
생겨먹은 대로 살면 될 걸 왜 그걸 그렇게 하려고 하는가.
‘渠且不是修底物(거차불시수저물)이며’,
그것은 그 사람, 청법저인,
지금 말을 하고 듣고 있는 이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비구도 비구니도 아니고,
승도 속도 아니고, 노도 소도 아니야 이건.
아무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을 다 아우를 수 있는 그 무위진인이야.
차별 없는 참사람이야.
그 사람은 不是修底物이라, 닦을 물건이 아니에요 이거는.
닦아서 되는 물건이 아니야.
그대로라 그대로.
그런데 닦는다고 그런다니까.
이 참 불교가 웃기는 일이에요.
不是修底物이다, 그것은 저 渠 자, 그것은 또한 닦는 물건이 아니다.
‘不是莊嚴得底物(불시장엄득저물)이니라’,
장엄해서 꾸미고 다듬고 수행을 하고 해서 얻어질 물건도 아니다.
‘若教他莊嚴(약교타장엄)하면’,
만약에 그것으로 하여금 장엄한다고 한다면,
‘一切物(일체물)을 即莊嚴得(즉장엄득)이니’,
일체 사물,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이 곧 일체고 일체가 곧 사람이야.
따지고 보면 주와 객이 나눠지지 않은 그런 경지거든요.
‘儞且莫錯(이차막착)하라’, 그대들은 또한 착각하지 마라 말야.
그건 그렇게 생긴 게 아냐.
그냥 본래인, 본래인 그 모습은 부처고 중생이고 그냥 한결같은 것이다,
그저 이름을 부처다 보살이다 괜히 그렇게 붙여 본 것이지
그건 결코 그렇게 이름 붙여질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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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맑고 향기로운 날입니다..길상행님
행복한 부처님되소서..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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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고운인연에 두손모읍니다 은서님
건강기도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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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서 있는 곳마다 주인되소서..광혜의하루님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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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이의 지혜의 눈으로 깨달음의 본질을 말씀주십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참으로 공부하는 방법이 막막하게 들립니다
밖으로 구하지 말고,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 바가 없어야 함을 배웁니다
본래 현현하니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말씀 새깁니다..
늘 청안하소서..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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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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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濟錄 - 無比스님 講說 64 - 示衆 - 14-5 修行이란 業을 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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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I return to Buddha, Law, and Seung Sambo.
I pray with utmost heart that the holy and holy Buddha's robe and mercy light will shine on it. Thank you.
Holy Father.
Avalokitesvara Bodhisattv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