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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동김씨 시조는 김숙승,중시조 김방경 .
1> 시조 : 김숙승[金叔承]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이었는데
신라시대에는 고창군으로 불리웠고, 고려 태조가 견훤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 또는 복주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시조 김숙승(金叔承)은 신라 경순왕의 손자이며 대안군 김은열의
둘째 아들이다. 누대로 안동에 세거해 오던 안동 김씨는 숙승(叔承)의 7세손 방경(方慶)이
고려때의 명장으로 그는 중서령에 추봉된 효인(孝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247년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다. 그는 원종조에 일어난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후
문하시중이 되어 원나라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 금안장,·채복,·금은촛대 등을 하사받고,
돌아올 때 개부의동삼사에 배명되었다.
그후 상락군 방경(方慶)의 아들과 손자대에서 크게 융성하여 훌륭한 명신을 많이 배출시켰다.
방경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선]은 전법판서를 지냈고, 아들 승용(대제학),·승택(평장사)를
지내고 ·승우(상서)가 현달했다.
삼중대광으로 상락군에 봉해진 흔(炘)과 판삼사사에 올라 상락공에 봉해진 순(恂)도 크게
명성을 떨쳐 가문을 빛냈으며, 순(恂)의 아들 영돈(永暾)과 영후(永煦) 형제가 조적의 난에
공을 세워 상락부원군과 상락후에 각각 봉인되었다.
중시조 방경(方慶)의 넷째 아들인 [논]은 지밀직사사와 천우위 대장군에 이르렀다.
가문의 의맥을 드높인 사렴(士廉)과 사형(士衡) 형제는 영후의 손자이자 [천]의 아들로서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속에서 서로가 반대의 길을 걸어갔다.
사렴(士廉)은 벼슬이 문하시랑을 거쳐 안렴사에 이르렀고,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했으며 문장과 덕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충청도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도산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평소에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으며 이성계가 좌사간의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불응하며 "고려 신하로서 사직을 보존치 못한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선왕과 조상을 뵈이랴"고
탄식하였으며 임종때 "내가 죽거든 심산에 묻어주고 묘도 쓰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며
후일에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옛 친구로 이성계의 조선창업을 도운 사형(士衡)은 개국정사일등공신으로 상락백부원군에
봉해지고 벼슬이 좌의정으로 치사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받은 일이 없었다.
연산군의 폭정 때 뛰어난 재치로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했던 수동(壽童)은
상락부원군 사형(士衡)의 현손이며 첨지중추부사 [적]의 아들이다 그는 예서에 능했으며
무게가 있고 지혜가 많아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를 시비하지 못했다.
수동의 아우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영안군에 봉해진 수경(壽卿)이며,
명종조의 명신충갑(忠甲)의 아들 시민(時敏)은 훈련원 판관이 되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자 그 면전에서 군모를 벗어 땅에 짓밟고 벼슬을 사임한
기백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판관으로, 죽은 목사를 대신하여
성을 구축하고 사천,고성, 진해,·금산 등지의 싸움에 크게 이겼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혈전인
진주성의 싸움에서 크게 적을 격퇴하고 소탕한 적병을 순찰하던중 시체속에 숨었있던
적의 저격으로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밖에 조선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관찰사 자행(自行)의 손자 희수(希壽)가
그림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해서에 일가를 이루었다.
중종조에 김안로의 비리를 논핵하다가 문의로 귀양갔던 노(魯)는 조광조의구제를 상소하여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명종때 별시문과에 장원했던 홍도는 정치의 폐단을 강력히 간했고,
김일손, ·박은 과 함게 <삼대문장>으로 일컬어졌다.
한편 홍도(弘度)의 아들 첨(瞻)과 수(粹)도 가문의 문맥을 이었고, 첨(瞻)의 아들 성립(誠立)은
유명한 허난설헌의 남편으로 임진왜란 때 31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한말에 와서는 병인양요때 수도방위를 담당했던 선필(善弼)이 유명했다. 자주독립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민권투쟁의 선봉장이었던 백범 구(九)는 안동 김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순영(淳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혁명을
지휘했으며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위해 일본군 중위를 때려 죽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탈옥하여 마곡사의 중이 되기도 하였다.
그후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선임되어 민족분단의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서서 남북협상을
제창했고 한독당 당수로 있다가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져 1949년 6월 74세의
생애를 마침으로 안동김씨의 전통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남한에 총 95,735가구,
398,24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