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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브라함의 딸
누가복음 13 : 10 - 17
강영우 박사는 맹인으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죽고 중학교 1학년 때 축구하다가 축구공에 맞아 실명하여 맹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맹인이 된 것에 충격을 받아 죽고 누나와 동생 두 명과 사남매만 남았습니다. 누나가 공장에 다녀 사남매의 생계를 유지하다 과로로 죽고 남은 삼형제는 살아가기가 막막했습니다. 맹인 강영우가 구걸하여 생명을 부지하였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도움으로 점자를 배우고 맹인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 숙명여대생인 석은옥이란 학생이 자원봉사자로 강영우를 만났습니다. 석은옥은 강영우에게 책을 읽어주며 안내도 해주며 봉사를 했습니다. 대학생이고 중학생이지만 나이는 한 살 많아 누나로 동생처럼 돌보아 주었습니다.
누나로 동생처럼 봉사자로 10여년을 돌보아 주다가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었습니다. 석은옥은 무남독녀로 최고의 엘리트요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강영우는 부모도 없을 뿐 아니라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 나이도 한 살 더 어립니다. 그러나 석은옥은 부모의 반대와 주변 친구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석은옥은 강영우의 현실과 외면을 본 것이 아니라 미래와 내면을 본 것입니다. 현재 보이는 것만을 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를 본 것입니다. 그 결과 강영우는 한국 사람으로 미국의 백악관 행정부 차관으로 최고의 공직자가 되었습니다. 강영우와 석은옥은 미국 인명사전에 그 이름이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은 미국의 최고의 대학을 나와 큰 아들은 의사로, 작은 아들은 현재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행정부를 돕는 공직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평가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로 물질적 가치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 잘 사는 사람,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돈 없는 사람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사회가 물질적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돈 없는 사람은 소외를 당합니다. 이렇게 소외당하는 사람이 불만을 품고 길가에 세워 둔 고급차에 예리한 못으로 흠집을 내기도 하고 타이어 빵구를 내기도 하는 것을 들어 봅니다.
두 번째로 신체적인 조건으로 평가를 합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긴 사람을 높이 평가합니다. 요즘 취직도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긴 사람이 우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을 해서 못난 얼굴을 뜯어 고칩니다.
세 번째로 정신적 가치입니다.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냐?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기술이 있느냐? 예술적 감각이 있느냐? 지식과 학벌로 가치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면 화를 낸다고 합니다. 고향이 어디냐? 나이가 얼마냐?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것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이러한 기준에 맞추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노력합니다. 빚을 내어서라도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며, 키를 크게 보이려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코를 세우고 화장을 해서 예쁘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씀 드린 강영우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석은옥은 무남독녀에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부자입니다. 그리고 일류 대학생이지요 키도 훨신하게 크고 인물도 나무랄데 없을 정도로 잘 생겼습니다. 반면 강영우는 아무것도 내 놓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하니까 제일 먼저 부모가 극구 반대를 합니다. 친구들이 ‘정신이 있느냐?’고 하며 반대합니다. 모두가 반대하는 이유는 외형적인 현재만을 보고 평가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석은옥은 강영우의 내면적인 미래를 보았습니다. 사람을 외모로만 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겉사람을 보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없습니다. 속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린 한 여자를 보셨습니다. 귀신만 들린 것이 아니라 꼬부라져 허리도 펴지 못하는 곱추였습니다. 귀신 들린 꼬부라진 이 여자를 어떻게 평가를 하겠습니까? 사람이라기보다는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부모나 형제들에게 조금도 덕이 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므로 사회가 불행해 보여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집안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숨깁니다.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뒷방에 가둡니다. 사람이면서 사람으로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온 가족들에게 행복이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성도의 가정을 처음 심방하면 가족 사항을 물어봅니다. 그런데 뭔가 숨기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알고 보니 뇌성소아마비로 태어난 딸 아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해가 되지 않도록 말씀드려 그 아이를 한번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뒷방에 숨겨둔 아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숨겨 키운지 십수년이 되었습니다. 말도 못하고 스스로 먹지도 못하고 사람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람이면서 사람으로서 가치 존재가 없는 사람이였습니다. 오히려 죽어 없는 것이 자신도 부모나 온 가족들에게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숨겨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찍 복음이 들어간 유럽이나 미국은 이러한 장애가 있는 사람을 숨기지 않고 이웃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돌보아 줍니다. 그리고 장애자들의 모입을 갖고 앞날을 위해 연구하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장애자들이 건강한 사람들 못지않게 살고 있습니다. 나아가 장애자들이 오히려 건강한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본문에 열여덟 해를 귀신 들린 꼬부라진 여자가 어떻게 해서 회당에까지 왔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부모나 누군가가 데리고 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스스로 회당에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장애자라고 해서 숨겨두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장애가 있어도 교회에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역시 장애자를 위하는 제도나 시설이 필요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마을에는 대부분이 회당이 있었습니다. 회당은 성전과는 조금 다르지만 오늘날의 교회와 같습니다.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회당에서는 제물을 바치는 제사는 지내지 않았지만 율법을 강론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안식일에 회당에 들려 율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귀신들린 여자가 회당에 왔지만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의 눈에 그슬리지 않게 한쪽 구석진 곳에 꼬부라진 채로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율법을 토론해도 듣거나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씀도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이 들렸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주 불쌍한 사람입니다.
복음서에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기록들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흉악한 귀신 들린 자기 딸을 불쌍히 여겨 고쳐달라고 애원하여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열여덟 해를 귀신들린 이 여자는 부모도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귀신 들린 이 여자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속으로는 이 여자가 회당에 있다는 것 자체도 좋아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 집니다. 왜 회당에 이런 여자를 데리고 왔느냐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귀신 들리고 꼬부라진 사람은 구제불능의 사람으로 여겼다고 생각됩니다. 이 여자를 불쌍히 여겨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이 여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딸”(16)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백성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매우 자랑하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아랍권에 무슬림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회당에 많은 사람들은 열여덟 해를 귀신들린 이 여자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귀신이 들렸기 때문에 저주 받은 자로만 생각하였지 택한 백성으로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현실을 보고 평가를 하기 때문에 귀신들린 이 여자는 저주받은 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면을 보고 평가하지 않고 내면을 보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겉사람을 보지 않고 숨겨져 있는 속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딸이 사탄에 매여 고생하는 것을 불쌍히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하시고 안수하여 꼬부라진 허리도 펴 주셨습니다. 열여덟 해를 괴롭히던 귀신이 나가고, 꼬라진 허리를 펴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서에 마리아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섯이 있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어 장사지내는 것까지도 목도하고, 향품을 예수님 시체에 발라드리기 위해 아침 일찍 예수님 무덤을 찾아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난날에 일곱 귀신 들린 여자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아주 악한 귀신에 사로 잡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 잡혀 사탄화가 된 사람 이하의 존재였습니다.
마가복음 8:2에는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악귀’가 들린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언제 어떻게 고쳐주셨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를 고쳐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고침을 받아 건강하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고쳐주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고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열여덟 해를 귀신 들려 고생하는 꼬부라진 여자를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딸’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안수하여 고쳐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귀신에 매여 고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면서 사람 답게 살지 못했던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침 받은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막달라 마리아 못지않게 예수님을 위해 남은 인생을 살았을 것으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를 합니까? 겉 사람을 보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예배드리기 위해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심리를 불편하지 않기 위해 최선으로 배려를 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꼬부라진 보기가 허술한 분이 왔을 때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귀신 들린 사람이 왔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나 관직에 다니는 분이 왔을 때와 가진 것도 없는 꼬부라진 나이 많은 분이 왔을 때 누구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고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면적이고 미래를 보십니다. 지금은 사탄에 매여 있고 병들어 고통을 당하지만 그를 위해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셨고 그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지금은 사탄에 매여 타락하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보시고 축복하셔서 거룩한 성도로 만드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겉 사람을 보고 평가하지 말고 속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보고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내면적 속사람을 보고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허술하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예수님께서 저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성도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버려진 사람들을 축복하고 구원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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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주님의 마음과 우리 주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심령이 주님 마음이 되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주안에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목사님께 늘 감사드리오며 강건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감사 드립니다--좋은말씀에
은혜의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